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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단군신화 수록 역사서 두문자 : 유 제 세 응 동

by noksan2023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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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
단군신화

 

단군신화 수록 역사서 : 유 제 세 응 동

 

 : 국유사

 : 왕운기

 : 종실록지리지

 : 제시주

 : 국여지승람

 

1. 일연의 국유사

 

삼국유사 권 5
삼국유사 권 5

 

 

고려말의 승려 일연(一然)이 1281년(고려 충렬왕 7)에 지은 삼국시대의 역사서이다. 체재는 5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왕력(王歷)」, 「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왕력」은 삼국과 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고, 「기이」는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첫 머리에 이 편을 설정하게 된 이유를 밝힌 서문이 있다. 또 「흥법」에는 삼국 불교의 수용 과정과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하여 신라 고승들의 전기, 「신주」에는 신라 밀교(密敎) 승려들의 신비한 행적, 「감통」에는 불교 신앙의 신비한 감응(感應)에 관한 내용, 「피은」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효선」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불교 설화에 관한 서적이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 등 현재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고, 향가를 비롯한 고대 언어 관련 자료들과 고대 불교미술 관련 내용들이 많이 실려 있으며, 또 화랑도와 관련된 기사들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대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역사서이다.

규장각 소장본 『삼국유사』는 1512년(중종 7) 경주부윤(慶州府尹) 이계복(李繼福)이 중간(重刊)한 목판본으로,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고 부른다. 현전하는 완질본 중에서는 간행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동일한 완질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규장각 소장본은 결장(落張)이 없는 유일(唯一)한 책인 동시에 같은 판본 중에서도 인출시기(印出時期)가 가장 빠른 판본으로 평가된다.

 

 

2.  : 이승휴의 왕운기

 

보물 제418호 제왕운기
보물 제418호 제왕운기

 

제왕운기(帝王韻紀)는 고려 충렬왕 13년(1287)에 이승휴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역사시로 쓴 것으로, 상하 1권으로 출간되었다. 그 후 공민왕 9년(1360)과 태종 13년(1413)에 각각 다시 간행되었다. 규격은 가로 18㎝, 세로 29㎝이며, 8행 16자씩 판각되었고, 끝에 정소의 발문이 있으나 후기와 간기가 떨어져 나가 그동안 정확한 간행연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동국대학교에서 입수한 책과 인쇄상태가 동일한 것으로 보아, 공민왕 9년(1360)에 경주에서 중간된 목판에서 인쇄한 후쇄본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제왕운기』의 구성은 중국사·한국사를 각 권으로 분리했고, 강역도 요동(遼東)에 따로 천지세계가 있어 중국과 엄연히 구별되는 생활영역임을 밝혔다. 또, 우리 민족은 중국인과 다른 천(天)과 연결되는 단군을 시조로 하는 단일민족임을 나타냈고, 당시까지 민간신앙이나 고기류 등을 통해 전승되어온 단군신화를 한국사체계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우리 역사의 유구성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해 고려 태조에 귀순해온 사실을 서술함으로써 발해를 최초로 우리 역사 속에 편입시켰다. 그것은 만주일대까지도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역사적으로 고증한 것이며, 영토회복의 의사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제왕운기』는 중국과 우리 민족과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우리는 중국과 구별되는 독자성·자주성·주체성을 가진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국민 각자에게 자각하게 하여 몽고의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동명왕편」과 함께 고려 중기의 대민족 서사시라고 불리기도 한다. 몽고의 강대한 외압 때문에 가지게 된 문화적 위기의식과 저항정신은 같은 시기에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던 동기와 같다. 그러므로 양자는 단군을 한국사체계 속에 편입시키는 선구자적인 역사서술을 남기게 된 것이다.

 

『제왕운기』에서 시작된 단군기원의 역사의식은 고려 말 개혁파 신진사류에게 전승되어 그들이 조선을 개국하였을 때 단군을 국조로서 치제화(致祭化)했고, 『동국통감』을 비롯한 정사에서도 그가 국조임을 밝혀 우리 역사의 첫머리에 기록하게 되었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시작을 단군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몽고간섭 하에서 성장된 민족의식에 짝하여 삼국 이전의 상고사를 한국사에 편입시킨 『제왕운기』의 사학사상의 위치는 매우 크다.

 

 

3.  : 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수도였던 경도 한성부(漢城府)와 준수도의 지위를 갖고 있던 구도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를 독립적으로 다루었다. 이어 경기도(41)·충청도(55)·경상도(66)·전라도(56)·황해도(24)·강원도(24)·평안도(47)·함길도(21) 등의 334개 고을로 이루어져 있다. 각 고을에는 일부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지방관의 등급과 인원, 연혁, 고을의 별호, 속현과 그 연혁, 진산과 명산대천, 고을 사방 경계까지의 거리, 호구(속현도 따로 기재)와 군정의 수, 성씨(속현도 따로 기재), 토질과 전결(田結), 토의(土宜), 토공(土貢), 약재, 토산, 누대, 역, 봉수, 산성, 제언(堤堰), 사찰 등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1481년(성종 12)에 1차로 완성되고 여러 차례 증보하여 1530년(중종 25)에 최종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비교하여 두드러진 특징은 공물·조세·군역 등 국가가 징발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총 정리해 놓았다는 점이다. 또한『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 항목이 중앙에 보관되어 있던 공안(貢案)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이용한 반면에『세종실록지리지』의 통계 대부분이 전국의 모든 고을에 일정한 규식을 내려 조사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어 당시의 인문지리적 내용과 실제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고을별로 일정한 항목에 따라 편찬된 전국 지리지라는 점에서 고려보다 훨씬 강한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조선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고을의 세세한 내용까지 수록된 전국 지리지의 궁극적인 편찬 목적은 전국 모든 고을의 조세 수취, 군역 징발 등의 제반 사항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해 나가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고을의 통치는 해당 고을의 지배세력에 맡기면서 중앙에 바치는 조세와 군역 등의 총량만 파악하는 형태라면 고을의 세세한 내용까지 중앙에서 갖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신찬팔도지리지』에 기초하면서 일부 지역의 변화 상황을 교정·첨가하여 수록한『세종실록지리지』의 존재는 지방관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모든 고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려 했던 조선 초기의 지방행정의 방향성과 전국적인 규모의 인문지리 정보를 잘 보여주는 자료 중의 하나로서 큰 가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다.

 

4.  : 권근의 제시주

 

권근 응제시주
권근 응제시주

 

『응제시주』는 조선 태조 때의 문신 권근(權近: 1352~1409)의 응제시에 손자 권람(權擥: 1416~1465)이 자세히 주석을 붙여 엮은 책으로, 1462년(세조 8)에 간행되었다. 조선 개국 초인 1396년(태조 5)에 권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홍무제의 어제시(御製詩) 3수를 받고, 응제시(應製詩) 24수를 지어 바쳤던 것으로, 권람이 그 시에 주석을 붙인 것이다. 응제시 자체와 권람의 주석 사이에는 역사 의식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조선 전기의 단군 인식에 일정한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응제시주』에 수록된 주석의 기사는 사료가 인멸되기 이전 시대의 모든 전적을 충실히 참고한 것이어서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단군 신화가 실린 ‘시고개벽동이주(始古開闢東夷主)’라는 시에는 자주(自註)와 증주(增註)가 있는데 자주는 원작자인 권근이, 증주는 권람이 붙인 것이다. 자주와 증주 사이에도 내용상의 차이가 있다. 권근의 주에는 “신인(神人)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오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삼고 단군이라고 불렀다.”라고 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을 단군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기존의 단군 신화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즉 환인과 환웅의 존재가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형의 신화 역시 조선 시대 역사 자료에서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권근의 아들 권제(權踶)가 편찬한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 권근의 외손인 서거정(徐居正)이 편찬에 참여한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 대거 수록되어 있다. 단군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으로 그려지는 단군 신화가 조선 초기에는 널리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권람이 지은 증주에는 이와는 다른 단군 신화의 내용을 전하고 있다. 권람이 증주에서 인용한 자료는 「고기」이다. 「고기」라는 이름의 전거는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단군 신화를 기술하면서 인용한 자료와 그 이름이 같다. 이 『응제시주』에서 「고기」를 인용하여 서술한 내용이 전체적으로는 『삼국유사』 단군 신화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 “널리 사람을 구하고자 하였다[弘益人間].”라는 표현이 없고, 대신 “인간 세계를 교화할 뜻을 가지고(意慾下化人間)”로 되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의 표현도 『응제시주』의 것과 같다. ㉡ 신단수, 단군의 표현이 『제왕운기』와 마찬가지로 ‘단(檀)’으로 되어 있다. ㉢ 비서갑 하백의 딸을 맞아 부루를 낳았다는 내용은 『삼국유사』의 단군 신화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유사한 내용이 『제왕운기』에서 인용한 「단군고기」에서 보인다. ㉣ 단군의 즉위 시기 및 수명, 기자의 등장에 대한 서술에서 『삼국유사』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우(禹)가 도산(途山)에서 제후를 모아 맹세를 할 때, 단군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였다는 내용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혀 새로운 내용이다.

이렇게 볼 때 권람이 인용한 「고기(古記)」의 내용에는 일연이 인용한 「고기」, 이승휴가 인용한 「본기」 및 「단군고기」의 내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권람이 인용한 「고기」는 어느 특정한 책이 아니라 옛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여러 기록을 합하여 일컬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응제시주』의 내용상 중요한 점은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루가 우에게 조회하였다.”라는 내용이다. 유사한 내용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이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려 말 안향(安珦)이 지은 시 '충선왕을 시종하여 연경에 가는 감회'에서는 부루가 도산에서 우에게 옥 폐백을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응제시주』의 내용과 서로 통하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 역시 고려 시대부터 전승되어 오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5.  : 국여지승람

 

동국여지승람 권 1
동국여지승람 권 1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전기 문신 이행·윤은보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수하여 1530년에 편찬한 관찬 지리서이다. 총 55권 2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전기 지리지를 집대성한 책으로, 속에 실린 지도와 함께 조선 말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경도와 한성부, 8도의 지리와 풍속뿐 아니라 정치·경제·역사·행정·군사·사회·민속·예술·인물 등 조선의 서울과 지방 사회의 모든 방면의 정보를 백과전서식으로 망라해 놓았다. 지도를 참고자료로 첨부함으로써 지리지에 수록된 내용의 공간적 파악과 정확한 인식을 제공하려 한 점에서 한 단계 진보한 지리지이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주도했던 인물은 조선 초기 세종ㆍ문종ㆍ단종ㆍ세조ㆍ예종ㆍ성종의 6대 왕조를 거치면서, 군주의 신임을 두터이 받은 양성지였다. 그는 조선 초기 훈구파들 중에서도 변계량과 함께 가장 강력한 자주주의자였다. 따라서 그는 민족주의적 역사인식과 지리인식을 바탕으로 천제(天祭)에 대한 거행을 주장하는 등 자주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양성지는 단군을 신화 상의 인물로 파악하지 않고, 실제 인물로 파악하면서 중국과 대등한 역사의 시작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우리도 중국처럼 제천 행사를 단독적으로 치르자고 함으로써 중국에 예속되지 않은 자주 독립 국가임을 강조하였다. 지리에서는 요동에 이루는 광활한 영토가 우리의 땅임을 강조하면서 언젠가는 수복할 지역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양성지의 역사ㆍ지리ㆍ문화의 자주적 의식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 『동국여지승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수찬과 한 차례에 걸친 신증으로 인하여 양성지의 자주의식을 부분적으로밖에는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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