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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제천행사 두문자 : 부영(이와) 고동(이는) 동무(다)

by noksan2023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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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행사
제천행사

 

제천행사 : 부영(이와) 고동(이는) 동무(다)

 

 : 

 : 고(12월 : 수렵)

 : 구려

 : 맹(10월)

 : 

 : 천(10월)

 : 

 : 5월 10월 절제

 

1.  : 

부여(扶餘, 기원전 4세기 ~ 494년)는고려국의 동명왕이 건국한 예맥족 국가이며, 영토는 지금의 장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북쪽으로는 헤이룽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494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기원전 4세기부터 여러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다. 동명왕이 세운 부여,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와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그리고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그 영향을 받은 백제가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궁궐 · 성책 · 창고 · 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猪加) · 구가(狗加) 등 4가(四加)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읍인으로 구성된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2.  : 고(12월 : 수렵사회 특징)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 부여조(魏書 東夷傳 夫餘條)의 기록을 보면, “은력(殷曆) 정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나라 사람들이 크게 모여서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迎鼓)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옥사를 판결하고 죄수들을 풀어준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 斷刑獄解囚徒)”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다만, 첫머리에, “12월에 하늘에 제사하고 크게 모인다.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 하여 영고라 한다(以臘月祭天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라 하여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은력의 정월은 하력(夏曆)이나 오늘날의 음력으로 치면 12월이므로 같은 내용이다. 고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농경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연의 질서를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그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동체적인 질서 속에서 집단적인 행동이 가능해져 그것은 종교적 제의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추수감사제였다.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삼한의 시월제(十月祭), 부여의 영고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추수가 끝나는 10월에 행해졌으나, 영고만은 은력 정월, 곧 12월에 행해졌다.

 

이것은 아마도 원시시대 수렵사회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인 듯하다. 흉노족(匈奴族)의 경우 각 분지(分地) 내의 각각의 집단들을 누층적으로 편제하는 형태로 국가체제를 확립했기 때문에 부족적 차원의 제천행사를 국가적 차원의 행사로 승격시켜 흉노 전체의 결속력을 높이는 한편 각 집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으며, 제천행사시 제장회의(諸長會議)를 개최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의결하였다. 부여 역시 사출도(四出道)로 지방을 일정 단위로 나누어 통제하던 체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국중대회(國中大會)의 모습이 흉노와 비슷했을 것이다. 부여족 전체적인 행사이므로 ‘국중대회’라 하였다.

 

3.   : 구려

고구려는 서기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초기 성읍국가로 출발하여 주변의 예·맥족은 물론 옥저·동예·부여·조선 등 여러 종족들을 융합하여 보다 확대된 고구려인을 형성하면서 강대한 국가로 발전했다. 중국 한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의 군현이 설치되는 등 위축된 시기도 있었으나 이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국력이 더욱 강해졌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의 침략도 물리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후기에 성립한 귀족연립정권의 내부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어,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서기전 108년 이후 예 · 맥 · 한족의 여러 집단들은 한편으로 한군현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한군현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자기사회의 발전을 도모하여, 중국 사회와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선두에서 이런 움직임을 이끌어나간 것이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문화는 신라 · 백제 · 가야 등에 전해져 그들의 발전을 견인하였다. 삼국시대의 후반에 들어서, “문자와 무기가 중국과 같다”라는 상징적 표현이 함축하고 있듯이, 한국 고대사회는 중국 고대사회와 별다른 큰 격차 없이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70여 년에 걸친 수 · 당제국과의 항쟁, 이은 나당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바이다.

 

서기 전후 무렵부터 668년에 이르는 고구려의 존립기간은 삼국시대의 대부분을 점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고구려국은 작은 성읍국가에서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아우르는 큰 영역국가로 성장하였고, 그 영역 내의 예(濊) · 맥(貊) · 한(韓)계의 여러 집단들과 일부 한인(漢人)과 말갈인들을 융합하여 고구려인이라는 보다 큰 단위의 족속을 형성하였다. 그와 함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여러 갈래 문화를 수렴하고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건설하였다. 고구려 문화는 신라 · 백제 · 가야와 바다 건너 왜국에 영향을 주었으며, 말갈족은 고구려 문화의 훈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곧 고구려는 고대 중국사회와 고대 한국사회 간의 발전의 격차를 극복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독자성과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건설하였으며, 고구려인은 한국인의 형성에 한 축이 되었다.

 

4.  : 맹(10월)

‘동명(東明)’이라고도 한다. 동맹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 『후한서(後漢書)』 등에 처음 나타난다. 『후한서』에서는 “10월로써 하늘에 제사하고 대회주1하니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대혈이 있는데 수신이라 부르고, 역시 10월로써 맞아서 제사한다(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隧神 亦以十月迎而祭之).”라고 기록하였다. 「위지」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전도 대략 같은 내용의 기록이나 다만 “수신을 맞아서 나라 동쪽 높은 곳에 모시고 제사할 때 목수를 신좌에 모셨다(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於神坐).”라고 약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수(隧)는 굴 · 구멍 · 대혈신(大穴神)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목수(木隧)는 목각(木刻)의 굴신상(窟神像)이라는 뜻이 된다.

 

한편, 동맹은 고려의 팔관회로 계승되었음을 『송사(宋史)』(1345)의 “나라 동쪽에 굴이 있고 세신이라 부른다. 늘 시월 보름에 맞아서 제사하는데 이것을 팔관재라 한다. 그 의례가 매우 성대하여 왕과 비빈이 다락에 오르고 크게 풍악과 연음을 베풀었다(國東有穴 號歲神 常以十月望日迎祭 謂之八關齋 禮儀甚盛 王與妃嬪登樓大張樂宴飮).”라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주2도 그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1124)에서 10월 동맹을 팔관재라 부르고, 처음 왕위를 계승한 해와 3년에 한번은 대제를 지내고, 그 조묘(祖廟)가 동문 밖에 있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동맹이 팔관회로 계승되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결국 동맹은 고려 말기까지 팔관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1,500년을 유구히 계승되었고, 고대 부족사회 공동체의 제의에서 비롯하여 국왕 즉위식과도 관련을 가지는 등 왕궁 제의에까지 승화, 발전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동굴을 성소로 여기고, 여신을 모시며, 촌락공동체가 농경의례를 지내는 형태는 지금도 고형(古型)을 다분히 지니는 제주도 동제[部落祭]에서 잘 드러나고 있으며, 본토의 몇몇 지역에서도 그러한 형태들을 찾아볼 수 있다. 제주도의 동제당(洞祭堂)도 신목(神木)만을 모시는 형태가 제일 많고, 여기에 작은 당집이 곁들여지는 경우도 있으나, 동굴이 있으면 그것이 당으로 모셔지는 비율은 매우 많다. 그리고 이제는 목신상을 모시는 예를 찾아보기가 어려우나, 이러한 당에 찾아가는 것을 흔히 할망당에 간다고 한다. 본토에서는 굴을 당으로 모신 사례의 보고는 2, 3건뿐인 듯하나, 거기에는 여서낭신 관념도 있다.

아직도 동제신은 여신 관념이 강하여 동제당 서면조사의 통계를 보면, 여신이 남신의 2배를 넘는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제사 시일도 정초와 정월대보름이 많으나 10월의 사례들도 결코 적지는 않다. 이상으로써 고금을 통한 농경민족의 유구한 공동 농경의례와 풍요다산의 여신숭배 관념의 전통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5. 

동예지역은 처음 위만조선(衛滿朝鮮)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서기전 108년 한(漢)나라의 침략으로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한나라가 원산·안변 일대를 중심으로 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자 동예의 북부지역이 그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서기전 82년 임둔군이 폐해졌고, 서기전 75년에는 현도군(玄免郡)이 고구려족의 저항에 의해 요동으로 물러나게 됨에 따라, 옥저와 동예지역 7개현은 새롭게 설치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동부도위는 동예의 불내성(不耐城)에 치소(治所)를 두었다. 이어 30년 동부도위가 폐해짐에 따라 낙랑군에 귀속되었다. 낙랑군은 동예 각 읍락의 족장들을 현후(縣侯)로 삼았다. 곧 재래 읍락의 족장들에게 읍락 내의 일을 자치적으로 처리하게 하고, 낙랑군에서 통괄해 간접지배를 행하였다. 현후인 각 족장은 낙랑군 지배시기의 관리 명칭을 사용해 휘하의 사람들을 공조(功曹)·주부(注簿) 등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읍락의 거수(渠帥)들은 스스로 ‘삼로(三老)’라 칭하였다. 삼로는 한 대(漢代)에 향촌에서 풍속을 관장하던 장로(長老)에게 주어졌던 존칭이다. 그 뒤 읍락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고, 낙랑군의 세력이 후퇴함에 따라 한군현 시대의 유산으로 남아 있던 칭호들이 모두 소멸되었으나, 불내예(不耐濊)의 경우는 3세기 전반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다. 대체로 2세기 후반 경에 동예의 읍락들은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고구려의 동예지역 읍락에 대한 지배는 옥저의 그것과 동일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읍락 내의 일은 족장으로 하여금 자치적으로 영위하게 하고, 족장을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간접적인 지배방식을 취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예는 2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는데, 245년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 등이 동예를 공략하였다. 이때 동예의 주요 읍락들이 위군(魏軍)에 투항하였다. 고구려가 위군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는 피해를 당하고 세력이 위축되자, 동예는 낙랑군의 영향 아래 귀속되었다.

 

그 뒤 진(晉)나라의 쇠퇴와 함께 고구려가 낙랑군을 병합함에 따라 동예지역은 다시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그러나 강원도 지역의 동예는 여전히 고구려의 지배 밖에 있었는데, 광개토왕(廣開土王, 392∼412)대에 정벌전이 감행되어 많은 촌락이 고구려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는 당시 고구려가 정복했던 일부 동예지역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강원도 남부 이남 동해안의 동예 촌락은 신라에 병합되었다.

 

6.  : 천(10월)

동예의 무천은 해마다 음력 10월에 공동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과 노래로 즐기던 명절행사이다. 예의 무천에 관한 기록은 ≪위지 魏志≫(3세기)와 ≪후한서 後漢書≫에 보인다. ≪위지≫ 동이전 예전(濊傳)에 “늘 10월절 하늘에 제사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천이라고 한다. 또, 범을 제사 지냄으로써 신으로 삼는다(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又祭虎以爲神).”라는 기록이 있다. ≪후한서≫의 기록도 이와 똑같다.

 

따라서, 무천의 기록은 극히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자료이다. 그래서 무천은 같은 북쪽인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을 비롯해서 남쪽 한의 제천의식들과 종합적으로 살피는 것이 바람직할 수 밖에 없다. 그중 영고는 경축하는 축제의 성격을 강하게 풍기며, 한의 제천의식은 농경의례였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따라서, 고구려의 동맹과 예의 무천의 10월 제사는 그것이 추수감사의 축제였을 것이 분명해진다. 예로부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표방해 왔던 한국의 강한 농경문화성을 이 기록들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상을 종합할 때 이 3세기 무렵의 무천을 비롯한 제천의식의 기록들은 신석기시대이래 5,000년의 우리 농경문화사의 종교적인 뿌리에 관한 핵심적인 기록이라 할 것이다. 무천의 끝에는 범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까지 동제신(洞祭神)에 범 관념을 따르는 지역이 적지 않지만, 특히 영동지방과 산악지대에 강한 느낌이 있고, 강릉 단오굿의 대관령 서낭신에 얽힌 범 관념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다른 기록과 달리 무천에서만 범 신이 보이는 것도 영동의 북쪽에 있었던 예(濊)의 것이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고금을 통한 일말의 마음이 괴롭고 아픔을 느끼게 하는 바가 있다고 하겠다.

 

7. 

한강 이남 지역에는 일찍부터 진(辰)이 성장하고 있었다. 진은 B.C. 2세기경 고조선의 방해로 중국과의 교통이 저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에는, 고조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대거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토착 문화와 융합되면서 사회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마한, 진한, 변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마한은 대전, 익산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는데, 그중에서 큰 것은 만여 호, 작은 것은 수천 호로 총 10여만 호였다. 진한은 대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변한은 김해,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는데, 큰 것은 4천~5천 호, 작은 것은 6백~7백 호로 모두 4만~5만 호였다. 삼한 중에서 마한의 세력이 가장 컸으며, 마한을 이루고 있는 소국의 하나인 목지국(目支國)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의 영도 세력이 되었다. 삼한의 지배자 중 세력이 큰 것은 신지, 견지 등으로 불렸고, 작은 것은 부례, 읍차 등으로 불렸다.

 

8. 5월 10월 절제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그리고 신성 지역으로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곳에서 천군은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천군이 주관하는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죄인이라도 도망을 하여 이 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제사장의 존재에서 원시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엿볼 수 있다. 소국의 일반민들은 읍락에 살면서 농업과 수공업의 생산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초가 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다. 또, 공동체적인 전통을 보여 주는 두레 조직을 통하여 여러 가지 공동 작업을 하였다.

 

삼한에서는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의 수릿날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천 행사 때에는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연일 음식과 술을 마련하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겼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농경이 발달하였고, 벼농사가 널리 행하여졌다. 특히, 농경을 위한 저수지가 많이 만들어졌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 등은 삼한 시대 이래의 저수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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