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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고구려 두문자 : 고 데 동 맥 부 국

by noksan2023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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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람의 준거

 

고구려 : 고 데 동 맥 부 국

 

고 : 구려

데 : 릴사위제

동 : 

맥 : 

부 : 

국 : 동대혈

 

 

1. 구려

고구려는 서기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초기 성읍국가로 출발하여 주변의 예·맥족은 물론 옥저·동예·부여·조선 등 여러 종족들을 융합하여 보다 확대된 고구려인을 형성하면서 강대한 국가로 발전했다. 중국 한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의 군현이 설치되는 등 위축된 시기도 있었으나 이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국력이 더욱 강해졌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의 침략도 물리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후기에 성립한 귀족연립정권의 내부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어,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국호 ‘고구려’의 어원은 ‘구려(句麗)’에서 비롯하였다. 몽골고원 오르혼 강기슭에 서있는 돌궐(突闕) 제2제국의 빌게가한과 그의 동생 퀼테킨을 기린 2개의 고돌궐비(古突闕碑)에서 고구려를 배크리(Bokli)라 기술하였다. 돌궐어에서 B음과 M음이 상호전환 될 수 있으므로 배크리는 매크리(Mokli)이며, 그 밖에 범어잡명(梵語雜名)과 돈황문서 P.1283 등에서 고려를 ‘무구리(畝久理)’ ‘Mug-lig’라 하였다. 이는 모두 맥구려(貊句麗) 즉 ‘맥족(貊族)의 구려’를 기술한 것이다. 이는 곧 고구려에서 ‘구려’가 어간이고, ‘고’는 관형사임을 말해준다. 고구려어에서 성(城)을 ‘구루(溝漊)’, ‘홀(忽: khol)’이라 하였다. 이는 읍(邑), 동(洞), 곡(谷) 등을 나타내는 ‘고을’과 통하는 말이다. ‘고구려’는 ‘구려’에다가 ‘크다’, ‘높다’는 뜻의 ‘高’=‘大’를 덭붙인 말로써, ‘큰 고을’ ‘높은 성’의 뜻을 지닌 말이다.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상에 등장한 것은 현토군 설치 때(B.C. 107) 그 속현(屬縣)의 하나로 고구려현(高句麗縣)이 두어지면서였다. 즉 토착민들이 ‘큰 고을’이라고 부르던 읍락에 현을 설치하고, 이를 고구려현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뒤 서기전 75년 현토군이 퇴축된 이후 이 읍락을 중심으로 고구려 연맹체가 형성되었고, 이후 국호로 사용되었다. 5세기 중엽 이후로는 ‘높고 빼어나다’는 한자의 뜻을 살려 고구려를 줄인 말인 ‘고려(高麗)’를 공식 국호로 삼았다. <삼국사기>에서는 왕 씨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전승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를 모두 고구려라 기술하였다.

 

고구려 : 서옥
고구려 : 서옥

 

2. 릴사위제

한자어로는 ‘췌서(贅壻)’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아들이 없이 딸만 가진 부모가 데릴사위를 들이는 것이 보통이나, 아들이 있는 집에서도 데릴사위를 들이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흔히, 데릴사위는 솔서(率壻)·예서(豫壻)와 혼동되기도 하는데, 그 성격이 명백히 다르다. 솔서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에 뿌리 깊었던 남귀여가(男歸女家)의 습속과 관련된 것이다. 남귀여가란 혼례를 치른 사위가 자식을 볼 때까지 또는 그 이후까지도 처가에 계속 머물러 살다가 본가로 돌아오는 습속을 말한다. 따라서, 솔서란 본가로 돌아오기 이전까지만 한정적으로 처가살이를 하는 사위이다. 남귀여가의 습속은 조선 중기에 들어와서 삼일신행(三日新行)이 정착함에 따라 점차 없어져갔다.

 

서옥(壻屋)이란 사위가 사는 집이란 의미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고구려의 서옥과 혼인 풍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혼인을 할 때 말로써 먼저 정한다. 여자의 집 본채 뒤에 서옥이라는 작은 별채를 짓는다. 사위가 저녁에 여자 집 문 밖에 도착해서, 스스로 이름을 말하고 무릎을 꿇어 절을 하며 여자와 같이 살게 해 달라고 두 번 세 번 청한다. 여자의 부모가 이것을 듣고 서옥에서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면, 남자가 가져온 돈과 비단을 서옥 곁에 쌓아 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부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서옥제(壻屋制)를 데릴사위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데릴사위는 사위가 끝까지 처가에서 사는 것도 의미하므로 아들을 낳아 장성한 뒤 남자 집으로 돌아가는 서옥제와 동일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서옥제는 사위가 처가에 일정 기간 머무르는 방식이므로,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서옥제와 같이 여자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남자가 일정 기간 그곳에 머무르는 혼인 풍속이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또 남자가 서옥 옆에 돈과 비단을 쌓아 두는 것을 처가에 지불하는 혼납금(婚納金)으로 본다면, 서옥제는 구매혼(購買婚) 내지는 매매혼(賣買婚)의 성격을 지닌다. 이를 구매혼으로 본다면 처가에 머무르는 이유도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남자가 처가에서 일정 기간 머무르는 서옥제는, 며느리가 어린 나이에 시집에 가서 생활하는 옥저의 민며느리제와 반대되는 혼인 풍속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서옥제가 최종적으로 남자 집에 여자를 데리고 간다는 점과, 남자 측에서 여자 집에 일정한 혼납금을 지불한다는 측면에서는 민며느리제와 유사성을 가지기도 한다. 한편 고구려의 또 다른 혼인 풍속으로,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동생과 부인이 결혼하는 취수혼(娶嫂婚)이 있었다고 전한다. 서옥제에 구매혼적인 요소가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남편이 죽은 후 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간다면 남자 집에서는 경제적인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취수혼의 목적 중 하나가 이러한 손실을 피하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3. 

동맹에 관한 기록은 『삼국지(三國志)』 · 『후한서(後漢書)』 등에 처음 나타난다. 『후한서』에서는 “10월로써 하늘에 제사하고 대회주1하니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 그 나라 동쪽에 대혈이 있는데 수신이라 부르고, 역시 10월로써 맞아서 제사한다(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其國東有大穴 號隧神 亦以十月迎而祭之).”라고 기록하였다.

 

「위지」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전도 대략 같은 내용의 기록이나 다만 “수신을 맞아서 나라 동쪽 높은 곳에 모시고 제사할 때 목수를 신좌에 모셨다(迎隧神 還於國東上祭之 置木隧於神坐).”라고 약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수(隧)는 굴 · 구멍 · 대혈신(大穴神) 등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목수(木隧)는 목각(木刻)의 굴신상(窟神像)이라는 뜻이 된다.

 

동맹은 고려의 팔관회로 계승되었음을 『송사(宋史)』(1345)의 “나라 동쪽에 굴이 있고 세신이라 부른다. 늘 시월 보름에 맞아서 제사하는데 이것을 팔관재라 한다. 그 의례가 매우 성대하여 왕과 비빈이 다락에 오르고 크게 풍악과 연음을 베풀었다(國東有穴 號歲神 常以十月望日迎祭 謂之八關齋 禮儀甚盛 王與妃嬪登樓大張樂宴飮).”라는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주2도 그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1124)에서 10월 동맹을 팔관재라 부르고, 처음 왕위를 계승한 해와 3년에 한 번은 대제를 지내고, 그 조묘(祖廟)가 동문 밖에 있다는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동맹이 팔관회로 계승되었음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결국 동맹은 고려 말기까지 팔관회로 이름이 바뀌면서 1,500년을 유구히 계승되었고, 고대 부족사회 공동체의 제의에서 비롯하여 국왕 즉위식과도 관련을 가지는 등 왕궁 제의에까지 승화, 발전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폐지되었다.

 

 

고구려 벽화 속의 맥궁
고구려 벽화 속의 맥궁

 

4. 

맥궁(貊弓)은 3세기 무렵 소수맥의 거주지에서 생산되던 명궁의 하나이다. 소수맥은 소수에 거주하였는데, 지금의 압록강 하류 일대로 파악된다. 3세기 초반 위나라 조조의 세력이 부상하자 예와 맥이 좋은 활을 공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때 소수맥의 맥궁이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맥궁은 3세기 무렵 소수맥의 거주지에서 생산되던 활의 일종으로 명궁(名弓)이었다. 『삼국지』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 측의 사서를 보면 고구려는 나라를 세우고 대수(大水)에 의지하여 거주하였고, 고구려의 별종(別種)이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는데, 그를 소수맥이라 부른다고 하였고 소수맥에서 맥궁이 생산된다고 하였다. 대수는 지금의 압록강 중류를 가리키며, 소수는 지금의 애하(靉河)와 포석하(浦石河)에서 압록강 하류 일대로 파악된다. 맥궁은 좋은 활이었으며, 소수맥 지역의 특산품으로 유명하였다. 3세기 초반 위나라 조조(曹操)의 세력이 부상하자 예(濊)와 맥(貊)이 좋은 활을 공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중국 측에 소수맥의 맥궁이 소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 부경(약탈창고)
고구려 : 부경(약탈창고)

 

5. 경 

3세기 후반에 저술된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나라에 큰 창고가 없으며, 집집마다 각기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이름하여 부경이라 한다.”고 되어 있다. 본디 ‘경(京)’은 한자의 창고를 나타내는 말로 짐작된다. 이것이 백제에 영향을 끼쳐서 창고사무를 맡은 내관(內官) 소속의 관청 이름을 경부(广+京 部)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비록 『북사(北史)』권94 백제전에는 이를 내략부(內掠部)·외략부(外掠部)라 했으나, 『한원(翰苑)』권30 백제조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는 각기 내경부(內椋部)·외경부(外椋部)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권40 직관지(職官志)에도 이 경(椋)이 경(广+京)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에서의 경은 일본어 경(椋, クラ)이 그대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 수도였던 집안(集安) 일대에는 당시 어느 가옥이나 본채 옆에 2층으로 된 작은 창고가 있었다. 이는 얇은 목재를 가로 또는 세로로 엮어서 다락식 창고 형태로 지은 것인데, 현지에서는 옥미창(玉米倉) 혹은 포미창(包米倉)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옥미창은 특히 만보정묘구(萬寶汀墓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옛 강서군(江西郡) 덕흥리 벽화고분에 보이는 2층 다락집도 이와 모양이 비슷하다.

 

국동대혈
국동대혈

 

6. 동대혈

국동대혈 유적 고구려의 제사 유적이다. 고구려의 중요한 신인 부여신(夫餘神) 유화(柳花) 부인을 모시고 매년 10월 동맹(東盟)에 왕과 관민이 모두 나아가 제사를 지낸 곳이다. 국동 대혈 유적 고구려의 제천 행사인 동맹을 거행했던 곳이라고 추정된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올리며 국가 태평을 기원했던 동맹은 산 위의 통천동과 국동 대혈에서 왕과 귀족들의 제례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어 산 아래의 마을과 강변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모여 춤과 노래를 즐겼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전 국민의 제전이 이룩된 것이며 국민적 융합과 일체감을 기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맹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토속신제(土俗神祭)로 이어졌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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