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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위만조선 두문자 : 위 창 우 임 진 흉 창 중

by noksan2023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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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조선
위만조선

 

위만조선 : 위 창 우 임 진 흉 창 중

 

위 : 만조선

창 : 왕(아들)

우 : 거왕(손자)

임 : 

진 : 

흉 : 노와 연결

창 : 해군 설치

중 : 계무역

한 : 나라 제 침입

 

 

위만 조선
위만 조선

 

1. 만조선

위만조선은 초기 국가시대에 위만이 집권한 서기전 2세기 초부터 한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한 서기전 108년까지의 조선이다. 위만 집권 이전을 고조선으로, 이후를 위만조선으로 부른다. 14세기에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합쳐서 고조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위만조선의 영역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문헌 사료는 없지만, 위만조선이 멸망한 뒤,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대체로 사군의 범위와 위만조선의 영역을 연결시킨다. 한편, 위만조선의 영역에 관한 중요 쟁점은 『사기』 등에서 위만조선과 한나라의 경계로 전하는 패수의 위치 비정이다. 위만조선 시기의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청천강설, 압록강설, 혼하설, 어니하설, 요하설, 대릉하설, 난하설 등 다양한 이견이 있다.

 

2. 왕(아들)

 

3. 거왕(손자)

위만(衛滿)의 손자이다. 위만이 즉위한 뒤, 고조선은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지역을 정복하면서 세력이 더욱 강대해졌다. 우거왕은 이것을 배경으로 중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는 진국(辰國) 등 여러 나라가 한(漢) 나라와 직접 교통 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당시 몽고에서 만주로 뻗어오던 흉노가 고조선과 연결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한나라 정부를 더욱 자극시켜 고조선과 한나라는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대립관계를 해소하려는 정치적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무제(漢武帝)는 서기전 109년 마침내 무력으로 침략해왔다. 고조선은 이에 대항해 1년을 잘 싸웠으나 마침내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이 적군에게 포위되면서 고조선 내부는 화전 양파로 분열되었다. 주화파(主和派)는 항복을 건의했지만 우거왕이 이를 거부하자 주화파의 일부는 적군에게 투항하였다. 주화파의 한 사람인 니계상(尼谿相) 삼(參)은 서기전 108년 6월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하였다. 그 뒤, 대신 성기(成己)가 최후까지 저항을 꾀했으나 마침내 왕검성은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거왕은 고조선 또는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우거(右渠)'는 본래 '지배자'를 뜻하는 순우리말로, '거수(渠帥)'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이것이 고조선 마지막 왕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다.

 

우거왕이 끈기있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씨조선이 한나라와 대항할 만한 금속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경하기만 했던 대외정책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4. 둔 : 위만왕이 복속시킴

임둔군은 한사군이 설치된 지 25년 만인 서기전 82년에 실시된 4군 전체에 걸친 통폐합으로 서북쪽의 현도군(玄菟郡)에 통합되었다. 그 뒤, 서기전 75년에 현도군의 치소(治所)가 토착세력의 침공을 받아 혼하(渾河) 상류인 신고구려현(新高句麗縣)으로 옮겨지자, 앞서 현도군에 합쳐졌던 옛 임둔군의 부조(夫租, 沃沮) 이하의 이른바 영동 7현(嶺東七縣)은 낙랑군(樂浪郡)에 환속되었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보이는 낙랑군의 속현이 25현에 달하는 것은 옛 진번군(眞番郡)의 남은 현과 임둔군의 남은 현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임둔군의 속현에 대해서는 『한서』 무제기(武帝紀) 원봉(元封) 3년조에 대하여 신질(臣瓆)이 인용한 『무릉서(武陵書)』에 보면,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으로 장안(長安)으로부터 거리가 6,138리(里)이고 현은 15개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임둔군의 속현은 15현이고 치소는 동이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현 중 뒷날 낙랑군에 병합, 편입되어 동부도위(東部都尉) 7현을 형성한 부분 외에 방기된 다른 현은 그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려진 7현은 『한서』 지리지에 나타난 확대된 낙랑군 속현 중에서 추출할 수 있다. 동이·불이(不而)·잠대(蠶台)·화려(華麗)·야두미(邪頭味)·전막(前莫)·부조 등이다.

 

5. 번 : 위만왕이 복속시킴

진번군은 한 무제의 군현 설치 이후 25년 만인 서기전 82년 낙랑군에 통합되었다. 서기전 75년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낙랑군에 통합되었던 진번군의 옛 땅 일부에 새로 낙랑군 남부도위(樂浪郡南部都尉)를 설치하고 소명(昭明)·대방(帶方)·함자(含資)·열구(列口)·장잠(長岑)·제혜(提혜)·해명(海冥)의 7현을 관할하게 하는 동시에 소명현을 남부도위의 치소로 삼았다. 진번군 15현 중에서 낙랑군 남부도위로 귀속된 7현 이외, 나머지 8현에 관한 기사는 문헌에 보이지 않아 그 귀속을 알 수가 없다.

 

6. 노와 연결

전국시대 중기인 기원전 318년, 한·위·조·연·제의 다섯 나라가 연합하여 진을 공격했는데, 이때 흉노는 5개국 측에 호응하여 진과 싸웠다. 이 전쟁은 5개국 측의 참패로 끝났는데 흉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민족이 처음 기록상에 나타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흉노는 비록 패주하여 북으로 옮겨갔다고 전해지나 그 무렵부터 흉노의 이름이 중국 사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흉노의 이름은 중국 최고의 지리서로 알려진 <산해경>(山海經) 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7. 해군 설치

창해군(蒼海郡)이라고도 표기되어 있다. 한나라 무제(武帝)는 위씨조선(衛氏朝鮮)에 대한 견제와 압박을 꾀하여오던 중, 서기전 128년에 예맥(穢貊)의 군장 남려(南閭) 등이 28만 인의 호적을 가지고 요동군(遼東郡)에 투항하여 오자, 이에 창해군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위씨조선에 대한 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 위치에 대하여서는 함경남도 영흥으로 보는 설이 있으나, 뒷날 현도군(玄菟郡)이 설치된 압록강 중류의 통구(通溝) 지방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무제는 창해군 지배를 실질화하기 위하여 팽오(彭吳)로 하여금 요동군에서 이곳에 이르는 교통로를 개척하게 하였는데, 공사가 예상 밖으로 곤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2년 뒤인 서기전 126년에 공손홍(公孫弘)의 중지건의를 받아들여 군을 폐지하였다.

 

8. 계무역

한반도 남부 여러 소국 및 부족들과 한의 교역을 통제하면서 중계무역의 이득을 취하였다. 이렇게 해 강화된 힘을 바탕으로 인근의 임둔·진번 등의 집단을 복속시켰고, 압록강 이북에까지 세력을 뻗치는 등 신흥국가로서의 활기찬 모습을 나타냈다.

 

9. 나라 제 침입

위씨왕조가 한창 성장해 나갈 무렵 서쪽으로부터 한 세력이 동진해 왔다. 한은 위만조선과 흉노와의 연결을 차단하고, 동북아 지역을 석권하고자 하였다. 그에 따라 양국 간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양국 간의 외교적 절충이 실패하자, 서기전 109년 한의 무제가 5만의 육군과 7,000의 수군을 동원해 수륙 양면에 걸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해 왔다.

한의 침공에 맞서 고조선인은 1년여에 걸쳐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마침내 서기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4개의 군을 설치(한4군)하였다. 이때 많은 수의 고조선인들이 남으로 내려갔고, 그들은 삼한사회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4군(낙랑 진번 임둔 현도)
한4군(낙랑 진번 임둔 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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