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멸망 : 우 입 거 섭 비 동 살 1차 참 살 성 항 멸 108
우거왕의 고조선 입조 거부 : 109년
섭하 조선 비왕 살해
섭하 요동 동부도위에 임명
우거왕의 섭하 살해
한의 무제 1차 침입 : 육군 5만과 수군 7천 패함
주화파 니계상 참이 우거왕 살해
주전파 대신 성기 끝까지 항전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 함락
고조선 멸망 : 108년
1. 우거왕
위만(衛滿)의 손자이다. 위만이 즉위한 뒤, 고조선은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지역을 정복하면서 세력이 더욱 강대해졌다. 우거왕은 이것을 배경으로 중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는 진국(辰國) 등 여러 나라가 한(漢)나라와 직접 교통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당시 몽고에서 만주로 뻗어오던 흉노가 고조선과 연결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한나라 정부를 더욱 자극시켜 고조선과 한나라는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대립관계를 해소하려는 정치적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무제(漢武帝)는 서기전 109년 마침내 무력으로 침략해왔다. 고조선은 이에 대항해 1년을 잘 싸웠으나 마침내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이 적군에게 포위되면서 고조선 내부는 화전 양파로 분열되었다. 주화파(主和派)는 항복을 건의했지만 우거왕이 이를 거부하자 주화파의 일부는 적군에게 투항하였다. 주화파의 한 사람인 니계상(尼谿相) 삼(參)은 서기전 108년 6월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하였다. 그 뒤, 대신 성기(成己)가 최후까지 저항을 꾀했으나 마침내 왕검성은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거왕은 고조선 또는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우거(右渠)'는 본래 '지배자'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거수(渠帥)'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이것이 고조선 마지막 왕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다. 우거왕이 끈기있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씨조선이 한나라와 대항할 만한 금속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경하기만 했던 대외정책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2. 고조선 멸망 과정
고조선의 멸망 과정은 이 사료(『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가 가장 상세하게 전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는 '술이부작'(沭以不作)'의 원칙에 충실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최근 출토 자료를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조선열전」 역시 한(漢)나라의 공식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에 그 사료적 가치 역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열전」은 어디까지나 한나라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므로 이해하는 데에 주의가 필요하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제 관계는 외신제(外臣制)에 바탕을 두었다. 이에 따라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할 때 외신제에서 그 명분을 찾았다. 즉 위만이 한나라와 외신 관계를 맺고 성장하였지만, 우거왕(右渠王, ?~기원전 108)이 이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고조선을 공격하였다고 한 것이다. 외신은 내신(內臣)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한나라는 주변 종족의 지배자에게 외신이라는 지위를 주어 황제의 신하로 삼고 황제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처럼 외신은 형식상 한나라 황제의 신하지만 실제로는 정치⋅문화 전반에 걸쳐 독자성을 보장받았다. 또 한나라 초기부터 외신의 권리와 의무가 엄밀히 정해져 있지 않았고, 시대 상황에 따라 그 내용은 얼마든지 변화하였다. 그런데 무제(武帝, 재위 기원전 141~87) 대에 이르러 황제권이 강화되고 국력이 신장하면서 외신의 권리가 축소되고 의무는 강화되었다. 이처럼 한나라가 고조선에 대한 의무를 강화한 배경은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조선은 주변의 여러 나라와 한나라의 교섭을 가로 막았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조선이 중계무역을 통해 교역을 독점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조선은 이를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한나라는 이러한 고조선의 정치⋅경제적 성장을 억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사신 섭하(涉何)의 조선비왕(朝鮮裨王) 장(長) 살해와 그에 대한 고조선의 보복 공격이었다. 섭하는 고조선과의 외교 협상이 결렬되자 장을 살해하고 귀국해 그 공로로 요동 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가 되었다. 한나라의 부도위(部都尉)란 직함은 내속(內屬)한 이종족(異種族)을 관리하는 관직이었다. 따라서 섭하를 요동 동부도위로 삼았다는 것은 한나라가 고조선에 대한 압박의 수위를 한층 높이고, 고조선 주변의 여러 세력으로 하여금 이탈을 조장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음을 의미한다. 고조선은 여기에 대응해 요동 동부도위 섭하를 공격해 살해하였고, 한나라는 이를 구실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고 추정된다.
한나라의 공격 방향은 크게 두 갈래였다. 누선장군 양복은 황해를 건너서 왕험성(王險城 : 지금의 평양 지역)을 바로 공격하였고, 좌장군 순체(荀彘)는 요동반도에서부터 패수를 건너서 왕험성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그 병력의 규모는 5만으로 나오지만 그 소속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다. 대부분은 좌장군 순체의 병력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누선장군 양복이 거느린 군사가 제병 7000명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 문장이 어색하다. 이에 5만을 누선장군 양복의 병력으로 보기도 한다. 한나라의 고조선 공격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누선장군 양복의 군사가 대패하고 좌장군 순체의 군사 역시 고전하며 화의를 모색하던 시기, 둘째 화의가 결렬되고 두 장군의 군사가 왕험성을 포위한 이후 공성⋅수성전이 지속되던 시기, 셋째 고조선 내부의 분열이 발생한 이후 왕험성이 함락되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시기는 고조선의 군사력이 한나라의 대군에 맞설 만큼 그 수가 적지 않았고 또한 강하였다. 우거왕은 누선장군 양복의 제병 7000명이 적다고 판단하였다. 또한 한나라와 화의하기 위하여 파견한 태자의 호위 병력만 1만이었고, 그에 딸려 보낸 말도 5000필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좌장군 순체의 병력은 연군(燕郡)⋅대군(代郡) 지역 출신으로 용맹하고 굳세다고 평가받고 있었지만, 고조선의 패수 서군(浿水西軍)을 공파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이로 보아 고조선의 군사력은 규모만 아니라 전투력도 상당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 또한 비록 왕검성이 포위되었지만, 고조선의 대응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 준다. 한나라의 좌장군과 누선장군은 수개월 이상 왕검성을 포위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뿐 아니라 중략된 사료 속에는 고조선이 좌장군과 누선장군을 두고 각기 항복 협상을 진행한 사실이 나오는데, 고조선의 항복 협상은 한나라 내부의 정치⋅군사적 상황을 충분히 파악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전공이 높은 좌장군보다 이미 여러 차례 실패를 경험한 누선장군 쪽으로 항복 의사를 타진하며 가급적 유리한 조건을 채택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누선장군이 체포되고 좌장군이 군사권을 장악하며 상황은 다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세 번째 시기에 고조선의 내분이 발생하였다. 내분의 직접적인 동기는 투항 주모자들의 모의 내용에 담겨 있다. 누선장군과 비교해 강경파라고 할 수 있는 좌장군이 군사권을 장악하며 화의가 불투명해졌고 전세는 더욱 불리해졌지만, 우거왕은 항복할 의사가 없었다. 그런데 투항을 모의한 자들은 최소한의 기득권이나마 보장받고자 하였고, 왕검성을 이탈하는 한편 우거왕을 살해함으로써 전쟁을 매듭짓고자 하였다. 우거왕이 죽은 후 대신 성기(成己)가 계속 저항하였지만 오래 가지 못했고, 마침내 고조선은 멸망하고 말았다.
3. 멸망
위만조선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이에 한나라의 무제는 고조선이 흉노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원전 109년에 육군 5만과 수군 7천 명을 보내 고조선을 공격합니다. 한나라 수군은 왕검성을 포위하고, 육군은 패수 서쪽에서 공격해 왔으나 패하고 맙니다. 1년여 동안 항전합니다. 이에 한나라가 추가로 군대를 보내 수도를 포위합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고조선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뉩니다. 주화파는 한나라에 투항했고 그 일원인 니계상 참이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살해합니다. 주전파의 대신 성기는 끝까지 항전하나 그 역시도 살해당해 마침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기원전 108년)하게 됩니다.
『사기』 조선열전은 서기전 109년부터 1년여 이어진 위만조선의 멸망 과정을 자세히 전한다. 우거왕 대에 이르러 조선으로 한나라의 망명인들이 많이 유입되었고, 조선은 한나라에 입조하지 않으면서,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입조를 막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한나라는 섭하(涉何)를 조선에 파견하였지만, 조선은 끝내 한나라의 조(명령 문서)를 받지 않았다. 돌아가던 섭하는 전송 나온 조선의 비왕을 죽였고, 그 공으로 요동 동부도위에 임명되었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공격하고 그를 죽였다. 이에 다시 한이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시켜 조선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좌장군과 누선장군의 선공은 모두 실패하였고, 초기 전황은 한나라에게 크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이에 한은 위산(衛山)을 조선에 파견하여 군사적 권위를 근거로 우거를 설득하고자 하였다. 협박을 받은 우거는 항복 의사를 표현하였고, 사죄를 전하러 태자를 한나라에 보냈다. 그런데 이 항복 진행 과정에서 다시 문제가 발생하였다. 만여 명이 무기를 들고 경계를 넘자, 한나라가 조선 태자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고, 태자는 이들이 자신을 속인다고 판단하여 귀환한 것이다. 타협은 실패하였고, 우거는 항전을 결정하였다. 이에 조선 내부에서는 대신들이 사적으로 누선장군에게 항복 의사를 표하는 등 내부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이 와중에 한나라의 누선장군과 좌장군 간에 알력 다툼이 있었고, 몇 달이 되어도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한나라는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에게 편의종사권을 주고 전장에 파견하였고, 누선장군은 체포되었다. 좌장군이 이끄는 한군이 공격을 다시 시작하자, 조선상 노인 등이 우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우거가 죽은 뒤에도 대신 성사(成巳)는 끝까지 한나라에 항거하며 왕험성을 지켰으나, 좌장군이 우거의 아들 장(長)과 조선상 노인의 아들 최(崔)를 시켜 성사를 죽였다. 이로써 위만조선은 멸망하였고, 한나라는 조선에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다.
남월주, 동월, 서남이 등과는 달리, 위만조선은 한나라의 침공을 장기간 막아 냈다. 조선 공격을 이끌었던 누선장군 양복은 서인(庶人)에 처하였고, 왕험성을 함락시킨 좌장군 순체는 기시(棄市)에 처하였다는 점을 통해 당시 한나라가 조선과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짐작하게 한다.
'한국사 두문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대국가 성립기 특징 두문자 : 일 이 태 고 천 한 (0) | 2023.08.09 |
---|---|
고대국가의 특징 두문자 : 왕 율 불 정 관 (0) | 2023.08.09 |
위만조선 두문자 : 위 창 우 임 진 흉 창 중 (0) | 2023.08.09 |
단군조선 두문자 : 단 4 왕 칭 대 박 부 준 왕 세 연 8 한 (0) | 2023.08.09 |
삼한 두문자 : 삼 저 분 소 계 두 독 (1) | 2023.08.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