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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의상 두문자 : 화관부 화일

by noksan2023 2025.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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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두문자 : 화관부 화일

 

 

의상 표준 영정

 

 

 

화 : 엄종 개창

관 : 음신앙

부 : 석사

화 : 엄일승법계도

일 : 즉다 다즉일

 

 

1. 엄종

 

 

화엄종

 

 

 

화엄사상을 천명한 불교종파로,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661년(문무왕 1) 당나라에 가서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하고 돌아온 671년 이후에 화엄교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라에 ≪화엄경≫이 전래된 때는 의상의 귀국 훨씬 이전이고 화엄경교의 신행(信行)도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기록상으로 볼 때 최초의 화엄사상가는 자장(慈藏)이다. 선덕여왕 때의 고승인 자장은 636년(선덕여왕 5) 당나라에 가서 그곳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으로부터 감응을 받고 화엄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귀국(643)한 뒤에는 ≪화엄경≫을 강설(講說)하여 영응(靈應:신령스러운 감응)이 있었고, 또 화엄신앙의 하나인 오대산신앙을 비로소 이 땅에 옮겨놓은 장본인이다. 또, 의상보다 8세 위이며 입당구법(入唐求法)의 뜻을 같이하였던 원효(元曉)도 ≪화엄경종요 華嚴經宗要≫ 1권과 ≪화엄경소 華嚴經疏≫ 10권 등의 화엄관계 저술을 남긴 화엄의 대가였다.

 

의상 이전에 이미 신라에는 ≪화엄경≫이 신행, 연구되기는 하였으나, 체계적인 화엄교학의 계통이 이루어지기는 의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뒷날 사람들이 그를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 즉 신라 화엄종의 시조라 불렀다. 태백산 기슭의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널리 펼쳤던 의상의 화엄관계 주요 저서는 ≪일승법계도 一乘法界圖≫이다. 이 밖에도 ≪입법계품초기 入法界品鈔記≫ 1권, ≪화엄십문간법관 華嚴十門看法觀≫ 1권 등의 화엄관계 저술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일승법계도≫는 의상의 화엄관과 그의 사상세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저술이다. 의상 이후의 화엄학자들이 이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그의 교학을 계승해 왔던 것이다. 의상의 교학을 이은 제자로는 이른바 10대제자(湘門十德, 즉 義湘門下十大德)인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이 유명하며, 그의 강석에는 3,000여 명의 제자가 모였다고 전한다.

의상의 가르침은 많은 제자와 법손(法孫)들에 의하여 부석사는 물론 원주 비마라사(毗摩羅寺),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남악 화엄사 등의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중심으로 화엄학을 널리 펼쳤다.

 

신림(神琳)·연기(緣起)·결언(決言)·법융(法融)·진수(眞秀) 등의 대가가 이어나서 의상의 화엄교학을 계승하여 신라 말에까지 이르렀으나, 관혜(觀惠)와 희랑(希朗)의 두 법사에 의하여 화엄교학은 남악(南岳, 智異山)과 북악(北岳, 伽倻山)의 두 파로 대립이 되었다. 관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존경을 받은 고승이었고, 희랑은 고려 태조인 왕건(王建)의 숭앙을 받은 고승이었다.

 

남악파와 북악파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던 화엄교학은 고려 태조의 후백제 토멸 이후, 탄문(坦文)과 균여(均如)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어 다시 일가를 이루었다. 탄문은 고려 제4대 광종 때 왕사와 국사를 지냈고 ≪화엄경≫을 강의하여 영험스러운 감응이 있었다는 고승이며, 균여 역시 광종의 존경을 받은 당대 고승으로 ≪수현방궤기 搜玄方軌記≫ 10권 등 화엄관계의 많은 저술을 남겨 화엄교학을 크게 진작시켰다.

 

균여 바로 뒤의 대표적인 화엄 고승으로 결응(決凝)을 들 수 있다. 정종 때에 왕사가 되고 문종 때에 국사가 된 그는 항상 화엄삼매(華嚴三昧)를 이루어 영응이 많았으며, 뒤에 화엄본산인 부석사를 중흥하고 거기에서 90세에 입적하였으나 저술은 전하는 것이 없다. 그의 제자가 1,438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당시 화엄교문의 성함을 짐작할 수가 있다.

 

화엄의 교학은 원만무애(圓滿無碍)한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원돈교(圓頓敎)라고도 하고, 법계원융(法界圓融)의 진리라고 하여 원융종(圓融宗)이라고도 한다. 이는 그 교학의 특징이나 종취(宗趣)를 밝힌 것으로 종파의 이름은 아니다. 신라의 화엄종은 국가에서 인정을 받은 종파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신라시대의 불교는 각종 각파의 대립분열이 없는 소위 통불교(通佛敎)의 시대였으므로 화엄종도 하나의 교학으로서는 의상으로부터 계승되어 왔으나 종파로서는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현존자료를 통하여 볼 때 화엄종이 하나의 종파로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로 들어와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화엄교학의 연원이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신라의 의상이 당나라의 지엄으로부터 그 교학을 받아왔으나 그곳의 종파를 받아들여온 것은 아니다.

 

중국의 화엄종은 의상의 동문후배인 법장(法藏)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훨씬 뒤의 일이 된다. 그러나 그 교학 계통부터 따져야 하기 때문에 당나라의 화엄종은 지엄을 제2조로 하고 그 스승 두순(杜順)을 초조로 삼는다. 그러므로 실제 화엄종을 성립시킨 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된 것이다. 의상이 해동의 화엄초조이기는 하나 그가 종파를 형성시킨 것은 아니고, 고려에 와서 비로소 종파로서 행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정확한 때와 내막을 알기가 어렵지만 앞에서 본 탄문과 균여의 당시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제4대 광종 때 비롯된 과거제도의 일환으로 행해졌던 승려의 국가고시인 승과제도 실시를 전후하여 종파의 이름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 등으로 미루어, 아마도 그때쯤에 국가적인 필요와 허용에 의하여 종파들이 형성되고, 아울러 화엄종도 그 무렵에 국가의 인정을 받은 종파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비록, 고려 초에 이르러 하나의 종파로 등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교학의 계통은 물론 신라 의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초조 의상 이후 제2·3조 등의 대대상승(代代相承)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교학의 계통만은 끊임없이 계승되어 왔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다가 고려 문종의 제4왕자였던 의천(義天) 때에 이르러서는 의상보다도 오히려 당나라 법장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이 크게 떨쳐지게 되었다.

 

의천은 고려에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장본인이지만 어디까지나 화엄종의 승려였다. 그의 뒤를 이어 두각을 나타낸 화엄종의 고승으로는 낙진(樂眞)·징엄(澄儼)·종린(宗璘)·천희(千熙)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화엄관계의 저술이나 연구흔적을 남겨놓은 것이 없으므로 교학상이나 종파상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왕조로 바뀌면서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시대가 되었으며, 따라서 불교의 종파에도 큰 변화가 있게 되었다. 11개 종파이던 교단이 1407년(태종 7)경에는 7종으로 축소되었는데, 화엄종은 그 7종의 하나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1424년(세종 6)에 7종을 다시 폐합하여 선종과 교종의 둘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화엄종은 교종 속에 합쳐져서 그 이름을 잃고 말았다.

 

모든 종파가 없어지고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만으로 된 다음에, 3년마다 치르는 승과의 시험과목이 선종은 ≪전등록 傳燈錄≫과 ≪염송 拈頌≫이며, 교종은 ≪화엄경≫과 ≪십지론 十地論≫이었다. 교종은 화엄종·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의 4종이 합쳐져서 하나로 된 종파이다. 그러한 교종인 데도 그 시험과목은 오직 화엄종의 소의경론(所依經論)인 ≪화엄경≫과 ≪십지론≫뿐이었다. 이로 미루어 비록 여러 종파와 합쳐져 그 이름은 없어졌지만, 교종의 중심은 화엄종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중에 명종 때 선종과 교종의 판사를 함께 겸해서 지낸 바가 있는 휴정(休靜)을 판교종사 겸 판선종사(判敎宗事兼判禪宗事)라고 하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판화엄종사 겸 판조계종사(判華嚴宗事兼判曹溪宗事)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를 통해서도 교종을 화엄종이라고도 부를 만큼 화엄종이 교종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연산군과 중종 때에는 그나마 선·교 두 종파마저도 국가에서 없애버림으로써 당시의 불교는 그 종파의 이름조차 갖지 못하게 되었다. 명종 때 잠시 선·교의 양종이 부활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폐지되었다. 그로부터 전혀 종파가 없는 교단이었으나 휴정 및 그 이후의 산승(山僧)들은 모두가 선승의 계통이었지만, 학식이 있고 경교에 밝은 승려들은 거의 대부분이 화엄을 공부하고 또 강의한 화엄의 대가들이었다. 휴정 이후의 많은 화엄가들은 모두가 선종법맥에 속한 선사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화엄대가를 꼽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도안(道安)은 그의 스승 의심(義諶)이 이루지 못한 ≪화엄경≫의 번역을 완수하였고, 화엄회를 마련하여 화엄의 진수를 강설하였으므로 그를 일러 화엄종주라고 하였다. 지안(志安)은 당시 화엄의 제1인자라 소문난 진언(震言)의 강석을 물려받았으며, 1725년(영조 1) 봄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에는 1,400여 명의 청중을 감동시켰다. 상언(尙彦)은 화엄관계 저술로서 ≪청량소초적결은과 淸凉疏鈔摘抉隱科≫ 1권, ≪구현기 龜玄記≫ 1권 등을 남겼고, 유일(有一)은 ≪화엄유망기 華嚴遺忘記≫ 40권을 썼으며, 최눌(最訥)은 ≪화엄과도 華嚴科圖≫ 1권을, 의첨(義沾)은 ≪화엄사기 華嚴私記≫ 등을 저술함으로써 화엄교학을 다시금 떨치게 하였다.

 

그 밖에도 화엄의 대가들이 계속 배출되었으니, 수연(秀演)·긍선(亘璇)·한성(翰醒)·예가(例珂)·해주(海珠)·태선(太先) 등은 모두 화엄종주라는 칭호를 들었던 대표적인 화엄강사였다. 오늘날까지도 산사의 전통적인 강원에는 종래의 관례에 따라 최고의 교과과정인 대교과(大敎科)의 이수학과목에 ≪화엄경≫이 들어 있다.

종단도 없고 종파의 이름도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지만 화엄교학의 흐름은 끊임없이 이 땅의 불교사상을 지탱하게 하는 밑뿌리 구실을 해 왔던 것이다.

 

 

2. 음신앙

 

 

관음신앙

 

 

 

관음신앙은 관세음보살을 신앙 대상으로 삼는 불교신앙이다. 보살신앙이라고도 한다. 대자대비를 서원으로 하는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불하여 현세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험을 얻고자 하는 신앙형태이다. 거의 모든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의 공통점은 세상을 구하고 생명 있는 자들에게 이익을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현세이익 신앙으로서 대중들에게 크게 호응받아 삼국시대부터 민중 속에 뿌리를 내려 당시에 제작된 관음보살상이 유물로 전해지고 있다.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기도 도량이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데 강화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가 대표적인 기도처이다.

 

신라의 경우에는 「삼국사기」에서 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소판 김무림은 관음상 천 부를 조성하고 아들 얻기를 기원하여 자장을 낳았다. 신라불국토설의 확립에 지대한 구실을 한 자장의 탄생설화에 관음신앙이 얽혀 있다는 점은 관음신앙이 불국토사상의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에 크게 관음신앙을 확산시킨 고승은 의상이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직후,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자 동해의 관음굴로 가서 「백화도량발원문」을 짓고 관음기도를 했다. 발원문은 “세세생생 관음을 친견하기 위해서 귀명(歸命)하되,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을 이마 위에 이고 계심과 같이 관음대성을 이마 위에 모시고 영원한 본사(本師)로 삼겠다.”는 신앙고백과, 일체중생이 관음의 이름을 생각하여 함께 원통삼매(圓通三昧)에 들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요지로 삼고 있다.

 

기도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새벽 물 속에 띄웠더니 천룡(天龍) 등 8부신(八部神)이 관음굴 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굴 속에서 공중을 향해 예배하자 수정 염주 하나가 손에 쥐어졌고, 동해용으로부터 여의주 한 알을 받았지만 관음의 진신은 친견할 수 없었다. 다시 7일 동안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 정진한 뒤 관음진신을 친견하게 되었다. “쌍죽(雙竹)이 나는 곳에 불전을 지으라.”는 관음의 지시에 따라 의상은 낙산사를 창건하고, 친견한 진신의 모습과 같은 관음상과 수정 염주, 여의주를 불전에 모신 뒤 떠나갔다.

 

뒤에 원효도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해서 낙산사를 찾았는데, 도중에 원효는 벼를 베고 있는 흰 옷 입은 여자를 보았다. 희롱 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였더니, 여인은 벼가 열매 맺지 않았다고 희롱 섞인 대답을 했다.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는데, 속옷을 빨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원효가 먹을 물을 청하자 여인은 핏빛 어린 물을 떠서 주었다. 그 물을 더럽게 여긴 원효는 냇물을 다시 떠서 마셨는데, 소나무에 앉았던 파랑새가 “제호를 싫다고 하는 화상, 제호를 싫다고 하는 화상”이라 하면서 조롱섞인 노래를 불렀다. 잠시 뒤 여자와 새는 사라지고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낙산사에 도착한 원효는 관음상 밑의 냇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짚신 한 짝이 있음을 발견한 뒤, 전에 만났던 여자가 관음의 진신임을 깨달았다. 후회와 함께 관음굴로 들어가서 진신을 친견하려 하였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 뒤 원효는 남해를 면(面)한 현재의 금산(錦山)이 관세음보살의 수월도량(水月道場)인 동시에 『화엄경』 보광전회(普光殿會)의 관음회상(觀音會上)임을 확신하고 이곳에서 기도를 올려 관음진신을 친견한 뒤, 683년에 절을 짓고 보광사라 하였다. 이 절은 현재 보리암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우리 나라 3대 관음성지의 하나이다.

 

신라 관음신앙의 대표적인 영험담은 조신의 설화이다. 조신은 서라벌 세규사(世逵寺)에 속하여 있는 명주(溟州 : 강릉) 장사(莊舍)의 관리인이 되었다. 이곳에서 고을 태수의 딸을 보고 애정을 느낀 조신은 애타는 마음으로 영험 있는 낙산사 관음보살에게 낭자와 부부연을 맺게 하여줄 것을 지성껏 빌었으나, 그녀는 얼마 뒤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조신은 소원을 이루어주지 않은 관음보살을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관음상 밑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문득 낭자가 기쁜 얼굴빛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일찍이 조신을 사모하였으나 부모의 명으로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으나, 이제 그와 부부가 되고자 함을 고백하였다. 그 뒤 40년을 함께 살아 다섯 자녀를 두었지만, 가난 때문에 굶주림에 시달렸다. 10년 동안 거지생활을 하다가 명주 해현령을 지나는데, 굶주림에 지친 열다섯 살의 큰아이가 죽었다. 길가에 묻은 뒤, 우곡현에 이르러 초가를 짓고 살았지만, 그들 부부는 이미 늙고 병들고 굶주려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열살 된 딸아이가 얻어오는 음식으로 연명하였지만, 그 딸도 마을의 개에게 물려 자리에 눕게 되었다. 가족이 모두 울면서 옛 추억과 50년의 인연, 현실의 고통 등을 이야기하고, 부부는 각기 아이 둘씩을 데리고 헤어져 살자고 다짐하였다. 막 헤어져서 길을 떠나려 할 때 꿈을 깨었다. 아침이 되니 조신의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흰색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한평생 신고를 겪은 것처럼 세상사에 뜻이 없어졌고 탐욕의 마음도 없어졌다.

이 설화에는 조신의 갈애(渴愛)를 꿈으로 풀어서, 인생이 긴 꿈임을 깨우친 것으로 신라 불교신앙의 특징을 뚜렷이 담고 있다. 현실에 대한 단순한 소원의 성취가 아니라, 정법에 근거를 둔 관세음보살의 참된 자비를 신라적으로 수용한 대표적인 예이다.

 

 

3. 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676년(문무왕 16)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절의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商船)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 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절에서 장경(藏經)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또, 고려 정종 때의 결응(決凝)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僧堂)·만월당(滿月堂)·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전과 부석사 조사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梵鐘樓)·원각전(圓覺殿)·안양루(安養樓)·선묘각(善妙閣)·응진전(應眞殿)·자인당(慈忍堂)·좌우요사(左右寮舍)·취현암(醉玄庵)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범종루와 안양루는 대표적인 누각이고, 원각전·응진전·자인당은 법당이며,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누각 안에는 부석사의 현판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안에는 사명당이 쓴 「안양루중창기」가 있다. 또, 취현암은 원래 조사당 옆에 있었던 부석사의 선원(禪院)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전되어 현재는 주지실과 종무소(宗務所)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과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1982년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원융국사비는 절의 동쪽 500m 지점에 위치하며 1054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 외에 삼층석탑 두기와 동쪽 언덕에는 1기의 고려 말 부도를 포함한 10여 기의 부도가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룡(石龍)을 비롯하여 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석조(石槽)·맷돌 등이 있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묘정은 절의 동쪽에 있는데, 가뭄이 있을 때는 기우제를 드렸다고 한다. 대석단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절의 입구에 있다. 거대한 축석(築石)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면석(面石)을 섞어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 석단은 3단으로서 극락세계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를 오르는 석단이 2단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대석단과 합하여 상·중·하의 셋으로 보는 가람 경영방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녹유전은 가로와 세로가 14㎝의 정방형 기와로서 두께는 7㎝이며, 벽돌 표면에 0.3㎜ 정도의 녹유를 발라 광택을 내게 한 신라시대의 유품이다. 이것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땅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한 것에 입각하여 무량수전의 바닥에 깔았던 것이다. 선비화는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하는데,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4. 엄일승법계도

 

 

화엄일승법계도

 

 

 

『화엄일승법계도』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승려 의상이 화엄사상의 요지를 간결한 시로 축약한 불교문서이다. 210자로 된 시이며 내용은 ‘갖가지 꽃으로 장엄된 일승의 진리로운 세계의 모습’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심의 ‘법(法)’자에서 시작하여 역시 같은 중심의 ‘불(佛)’자에 이르기까지 54개의 각을 이루면서 210자의 시가 한 줄로 연결되어 있다. 스승 지엄 문하에서 정진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의상 자신이 깨달은 자내증의 경지를 기술한 것이다. 그 자내증은 완전히 부처의 뜻에 계합하는 것이기에 『화엄일승법계도』라는 불후의 명저를 낳게 된 것이다.

 

 

5. 즉다 다즉일

 

 

일즉다 다즉일

 

 

 

신라 의상(義湘, 625~702) 스님의 법성게(法性偈)에 “일즉일체(一卽一切) 다즉일(多卽一)”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과 같은 뜻이고 천태불교에서 말하는 원족(圓足), 즉 “어떤 사물일지라도 모든 현상과 본체를 갖추었으므로 구족(具足)하여 모든 덕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전체 속에 부분이 있지만 부분 속에도 전체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수학적으로 고찰하면 유한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어떠한 집합도 부분이 전체를 담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생명체의 경우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공간적으로 유한하고 그 속에 담긴 입자의 수나 종류가 유한할지라도 생명체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부분과 전체가 일대일의 대응관계를 가질 수 있다. 부분이 전체를 포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수정란(受精卵, zygote)은 단세포이다. 이 수정란이 다세포 생물이 되기 위하여서는 수많은 세포분열을 거쳐야 한다. 수정직후부터 몸을 구성하는 주요기관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본격적인 조직분화가 일어나는 장배형성(腸胚形成, gastrulation)시기까지는 그냥 세포만 분열한다. 이때 일어나는 세포분열을 난할(卵割, cleavage)이라 하고. 분열초기에 생겨난 분리된 세포들을 할구(割球, blastomere)라 한다. 난할이 일어나는 동안 세포는 크기의 성장이 없이 세포분열만 일어나므로 세포들의 크기는 난할이 일어날수록 점점 작아지게 된다. 따라서 세포전체에 들어있는 물질의 양은 난할이 일어나기 전 수정란 하나에 들어 있는 물질의 양과 꼭 같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물질의 양은 유한하다.

 

독일의 생물학자이며 철학자인 드리슈(Hans A. E. Driesch, 1867~1941)는 성게의 발생을 연구하는 중 성게의 수정란이 난할(卵割, cleavage)을 일으켰을 때 분열된 각각의 세포들로부터 완전한 성체가 형성된다는 것을 알았다. 세포 하나하나가 그대로 하나의 완전한 생명체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의 세포를 만능줄기 세포(totipotent stem cell)라고 하는 것이다. 드리슈는 반대로 두 개의 알을 합치면 하나의 성체가 생겨나는 것도 관찰하였다.

 

드리슈의 연구는 이후 다른 종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남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부분과 전체에 의미에 대해 철학적 고찰이 필요함을 말한다. 드리슈를 포함하여 여러 가지 철학적 고찰이 있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수정란이 난할을 일으켰을 때 생겨난 할구 하나하나의 역할과 가치는 생명체 전체와 동등하다는 것이다.

 

할구를 분리시키면 완전한 성체가 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모든 할구가 처음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동등한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할구의 운명은 발생 도중의 할구의 상대적인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할구 하나하나가 잠재적 생명체인데 이 줄기세포들은 자신이 처한 상대적 위치에 따라 여러 가지 성체의 세포들로 분화(分化)해나가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 수십조 개의 세포가 합쳐 인간이라는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다.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이 합쳐 하나가 되니 글자 그대로 일즉일체(一卽一切) 다즉일(多卽一)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한 순간의 마음속에 일체가 있고 하나의 먼지 속에도 일체가 있다고 말한다.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은 만유의 상(相)에 대하여 일즉다(一卽多)·다즉일(多卽一)의 관계를 밝힌 것이다. 상용(相容)은 일이 능히 다를 용납하고 다가 능히 일을 용납하여 융통무애함을 말한다. 이 융통하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미세상용이라 하며, 일과 다는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관계가 있으므로 현상을 깨뜨리지 않고 그대로 일체(一體)의 관계를 가진 것이므로 안립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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