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종파 9산 두문자 : 가도수엄실홍성무굴범자윤희헌동혜봉현
가 : 가지산파 도 : 도의
수 : 수미산파 엄 : 이엄
실 : 실상산파 홍 : 홍척
성 : 성주산파 무 : 무염
굴 : 사굴산파 범 : 범일
자 : 사자산파 도 : 도윤
희 : 희양산파 헌 :도헌
동 : 동리산파 혜 : 혜철
봉 : 봉림산파 현 : 현욱
9산이라 함은 중국에서 유입된 불교 종파인 선종이 신라 말에 번성하여 형성된 9개의 문파를 이른다. 삼국을 통일한 후 신라에서는 수도인 경주(慶州)를 중심으로 화엄종(華嚴宗) 등 교종(敎宗) 불교가 크게 번성하였다. 교종에서는 문자로 쓰여진 경전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자 하였는데, 이는 경전을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왔다. 이런 인식은 신분에 근거한 근원적인 차별을 정당화하면서, 중앙 진골 귀족 중심의 신라 사회 운영 원리를 더욱 고착시켜 나갔다. 그렇지만 신라 말에 이르러 중앙 진골 귀족 중심의 신라 사회에 불만을 품은 지방 호족, 6두품 세력이 성장하면서 선종 불교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선종에서는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개인의 수양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차별을 부정하는 인식으로 연결되어, 중앙 진골 귀족 중심의 신라 사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열어 갈 수 있는 사상적 바탕을 제공하였다.
선종은 깊은 산속에서 좌선(坐禪)하는 수행법을 중시하여, 지방 산속의 선종 사찰을 중심으로 여러 문파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9개 문파가 중심이 되었기에, 이를 9산 선문(九山禪門)이라 한다. 9산 선문은 각 문파를 창시한 사람이나 그 제자들이 속한 중심 사찰의 이름 또는 그 사찰이 소재한 산의 이름을 문파의 명칭으로 삼았다. 선종은 처음에는 왕실이나 중앙 귀족과 일정한 관련을 맺으면서 문파들이 성립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선종 사찰이 있는 지역의 지방 호족이나 6두품 이하 귀족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발전하였다.
첫째는 도의(道義)를 개조(開祖)로 하고 전라남도 장흥군(長興郡) 가지산의 가지사(迦智寺)를 본산으로 하는 ‘가지산문(迦智山門)’이다. 둘째는 홍척(洪陟)이 전라북도 남원시(南原市) 지리산의 실상사(實相寺)를 본산으로 개창한 ‘실상산문(實相山門)’이다. 셋째는 혜철(惠哲)이 전라남도 곡성군(谷城郡) 동리산의 태안사(泰安寺)에서 개창한 ‘동리산문(桐裏山門)’이다. 넷째는 도윤(道允)을 개조로 하고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사자산의 흥령사(興寧寺)를 중심 사찰로 하는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다섯째는 낭혜(朗慧)가 충청남도 보령시(保寧市) 성주산에 있던 성주사(聖住寺)를 중심 사찰로 개창한 ‘성주산문(聖住山門)’이다. 여섯째는 범일(梵日)이 강원도 강릉시(江陵市) 사굴산의 굴산사(掘山寺)에서 개창한 ‘사굴산문(闍掘山門)’이다. 일곱째는 지증(智證)이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 희양산의 봉암사(鳳巖寺)에서 개창한 ‘희양산문(曦陽山門)’이다. 여덟째는 현욱(玄昱)을 개조로 경상남도 창원시(昌原市) 봉림산의 봉림사(鳳林寺)에서 개창한 ‘봉림산문(鳳林山門)’이다. 마지막 아홉째는 이엄(利嚴)이 황해도 해주시(海州市) 수미산의 광조사(廣照寺)에서 개창한 ‘수미산문(須彌山門)’으로, 9산 선문 중 가장 늦게 성립하였다.
1. 가지산파 도의
가지산문의 개창조인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당에 유학하였다.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기도 하였으나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 혜능(惠能)이 선을 펼쳤던 보단사(寶檀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전남 장흥 조계산 보림사(寶林寺)의 육조영당(六祖影堂)을 참배하였다. 이후 그는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에 가서 서당 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이었으며, 백장 회해(百丈懷海)에게도 인가를 받았다. 이후 도의는 821년(헌덕왕 13)에 신라에 돌아왔으나 당시 불교계에서 그의 선 사상이 수용되지 못하자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도의의 법통은 염거에게 계승되었으며, 염거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선풍을 확산시켰다. 염거의 문하에는 홍각선사(弘覺禪師) 이관(利觀)과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804~880)이 대표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관은 봉림산문의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의 문하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데, 억성사에 머물면서 헌강왕의 초청을 받아 설법하였다. 체징은 18세에 출가하여 처음에 화엄학주5을 공부하였다. 이후 그는 억성사의 염거를 찾아가 선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또한, 체징은 837년(희강왕 2)에 당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3년간 각지의 선사들을 찾아다녔다.
840년(문성왕 2)에 신라로 돌아온 체징은 20여 년간 억성사, 고향 인근의 사찰 등에 머물다가 859년(헌안왕 3)에 무주(武州) 황학난야(黃壑蘭若)로 옮겼으며, 다시 헌안왕의 명으로 전남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로 이동하였다. 체징이 보림사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은 왕실과 진골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보림사는 본래 원표 대덕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이었지만, 체징이 입적하면서 헌강왕에게 ‘보림사’라는 사호를 받았다. 보림사는 본래 중국 선종의 개창자인 육조 혜능이 주석하던 절의 이름과 같으므로 신라 선종의 권위를 지닌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김언경이 개인 재산을 내어 철 2,500근으로 비로자나불을 주조하였고, 망수택(望水宅) · 이남택(里南宅) 등이 금 160분(分)과 조 2,000곡(斛)을 내어 절을 장식하는 비용에 충당하였다. 따라서 가지산파의 초기 형성과정에서 신라 왕실과 중앙귀족의 후원이 적지 않았다.
체징의 문도는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00여 명이 있지만, 강진 무위사에서 활동한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로 계승되었다. 형미는 891년(진성여왕 5)에 당에 유학하여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었으며, 905년(효공왕 9)에 신라로 돌아왔다. 이후 형미는 왕건의 귀의를 받았지만, 궁예에게는 박해받았다.
후삼국을 통합한 고려가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면서 화엄종을 비롯한 교종이 다시 대두하고, 선종은 점차 세력을 잃게 되었다. 특히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는 과정에서 선승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선종은 더욱 침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2세기에 이르러 선종이 서서히 부흥하였는데, 가지산문의 경우 학일(1052~1144)이 등장하여 다시 부각되었다. 학일은 1122년(예종 17)에 왕사로 책봉되었고, 이후 1129년(인종 7)에 운문사를 하산소로 삼아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다.
학일 이후 가지산문의 동향을 보여주는 기록이 거의 없으나, 13세기 후반에 일연이 등장하면서 가지산문이 선종계를 주도하였다. 일연은 말년에 운문사에 주석하였는데, 이에 따라 가지산문의 중심이 경상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가지산문은 일연 문하의 보감국사(寶鑑國師) 가 주도하였다. 고려 말에는 태고 보우가 출현하여 간화선을 절대화하면서 선종계를 풍미하였다.
2. 수미산파 이엄
수미산문(須彌山門)은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 870~936)이 932년(태조 15)에 해주의 수미산에서 고려 태조의 후원으로 광조사(廣照寺)를 창건하면서 이루어진 산문이다.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가장 늦게 개창되었다.
개창조인 이엄은 12세에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였고, 처음에는 교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896년(진성여왕 10)에 당에 들어가 석두 희천(石頭希遷)의 계열인 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법을 이었고, 이후 각지를 순례하다가 911년(효공왕 15)에 신라에 돌아왔다. 이엄은 귀국 후 호족 소율희(蘇律熙)의 후원을 받으며 김해 지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후삼국의 쟁패전이 격화되면서 김해를 떠나 북으로 상주, 영동 등으로 옮겨 다녔다. 그러다가 이엄은 태조 왕건의 부름을 받게 되어 개경으로 갔다. 그는 개경의 사나내원(舍那內院) 주지로 머물다가 932년에 왕건의 명으로 해주(海州)에 광조사를 짓고 주석하였다. 수미산문은 고려 태조뿐만 아니라 해주 지역의 대호족인 황보씨 세력, 박수문(朴守文)을 비롯한 개국공신 세력의 후원을 받았다. 또한 광조사에 딸린 토지는 관장(官莊)을 이루었고, 규모가 거대하여 세 곳에 장원을 설치하여 경영하였다.
한편, 대경 여엄(大鏡麗嚴), 선각 형미(先覺逈微), 법경 경유(法鏡慶猶)는 이엄과 함께 사무외사(四無畏士)로 불리며, 공통적으로 운거 도응의 법맥을 계승하였는데, 이들 모두 태조의 후원을 받았다. 이엄의 제자로는 처광(處光), 도인(道忍), 정비(貞朏), 경숭(慶崇), 현조(玄照) 등이 배출되었다.
이엄은 선종구산(禪宗九山) 가운데 수미산파(須彌山派)의 개조(開祖)이다. 성은 김씨, 이엄은 법명. 소태(蘇泰:지금의 서산군 태안) 출신이다. 그의 조상은 계림(鷄林) 사람으로 낙향하여 충청남도 서산지방인 부성(富城)에 정착하였다. 12세에 가야갑사(迦耶岬寺)에서 출가하여 덕량(德良)을 스승으로 득도하고, 삼장(三藏)을 두루 탐구하였으며, 886년(정강왕 1) 도견율사(道堅律師)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896년(진성여왕 10) 입절사(入浙使) 최예희(崔藝熙)를 만나 서해항로로 중국에 갔다. 조동종(曹洞宗)의 개조인 양개(良价)의 제자 도응(道膺)의 선문(禪門)에서 수도한 지 6년 만에 도응의 인가를 받았다. 그 뒤 중국 여러 곳을 널리 찾아다니면서 고승들을 만나 보고 911년(효공왕 15) 귀국하였다.
김해부지군 부사(金海府知軍府事) 소율희(蘇律熙)가 승광산(勝光山)에 당우를 짓고 청하였으므로 4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다가, 영동군 남쪽 영각산(靈覺山)으로 옮겼다. 그때 소문을 들은 승속(僧俗)들이 찾아와서 귀의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명성을 크게 떨치자 고려 태조는 시중(侍中)을 지낸 권열(權說)과 태상(太相) 박수문(朴守文)을 보내어 개경으로 초청하여 사나내원(舍那內院)에 맞아들이고 궁중으로 청하여 사자(師資)의 예로 대우하였다.
932년(태조 15) 태조는 해주(海州)의 수미산에 광조사(廣照寺)를 짓고 머무르게 하였다. 이곳에서 선풍을 일으켜 수많은 문도를 지도하여 수미산파를 형성하였다. 936년에 자신의 세상 인연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예견하고 제자들을 불러 부처의 엄계(嚴誡)를 지키며 정진할 것을 당부한 뒤 법당에서 입적하였다. 승랍(僧臘) 48세였다.
그는 중국 조동종의 개조인 양개의 두 제자 가운데 도응에게서 법을 받았다. 도응은 양개의 제자이면서도 선풍이 양개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도응은 고매하고 근엄하되 비교적 자유자재하면서도 간명한 선풍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엄은 양개의 선풍을 크게 폈을 것이다.
그는 신라 말에서 시작하여 고려 초에 형성된 선종구산 가운데 가장 늦게 성립된 수미산파의 개산조이다. 수미산파는 중국 남종선(南宗禪)의 5가(五家) 가운데에서 조동종 계통의 선종이다. 또한,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여엄(麗嚴), 사자산파(獅子山派)의 경유(慶猷), 가지산파(迦智山派)의 형미(逈微)와 더불어 고려태조의 스승이었고,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師)의 1인으로 알려졌다. 제자로는 처광(處光)·도인(道忍)·정비(貞朏)·경숭(慶崇)·현조(玄照) 등이 있어 수미산파를 유지하면서 가풍을 후세에까지 전하였다. 시호는 진철(眞澈), 탑호는 보월승공(寶月乘空)이다. 탑비는 937년 황해도 해주군에 있던 당시의 광조사에 세워졌다.
3. 실상산파 홍척
실상산문(實相山門)을 개창한 홍척(洪陟)은 자세한 생몰 연대를 알 수 없고 관련 기록도 적다. 그는 당에 유학하여 마조 도일 계통의 서당 지장(西堂智藏)의 법을 잇고, 826년(헌덕왕 18)에 신라에 돌아왔다. 홍척은 귀국한 이후에 지리산에 머물렀으며, 왕실의 부름에 따라 마조선(馬祖禪)을 설하였다. 그는 지리산에 실상사(實相寺)를 개창하였고, 흥덕왕과 선강태자(宣康太子)의 초빙을 받았다.
홍척의 문하 제자로는 수철(秀澈, 815~893)이 대표적이다. 그는 중국 유학을 하지 않고 홍척의 법을 계승하였다. 수철은 신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경문왕의 부름을 받아 왕경에 갔으며, 왕으로부터 교와 선의 차이에 대해 물음을 받았다. 또한 수철은 헌강왕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진성여왕의 청에 따라 다시 왕경을 방문하였고, 단의장공주(端儀長公主)의 청에 따라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렀다. 그는 당시 정치적 혼란에 따라 여러 곳의 사찰로 옮겨 다녔으며 말년에는 법운사(法雲寺)에 머물렀다.
한편, 홍척의 제자로는 편운(片雲), 음광(飮光) 등이 있었다. 편운의 부도가 정개(正開) 10년에 건립되었는데, 정개는 후백제에서 사용된 연호이며, 정개 10년은 910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견훤 정권이 대야성을 중심으로 신라와 군사적으로 대치하였으므로 편운 부도를 건립하면서 실상산파를 포섭하고자 한 의도가 작용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상산문의 본산 사찰인 실상사는 고려 시대에 보월(寶月)에 의해 중창되었다. 실상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1690년(숙종 16)에 침허(枕虛) 대사가 대적광전을 비롯한 36동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방화에 의해 소실되었으며, 이후 월송(月松) 대사가 재건하였다.
4. 성주산파 무염
성주산파는 문성왕 때의 고승 무염(無染)이 충청남도 보령 성주사(聖住寺)에서 선법(禪法)을 크게 떨침으로써 성립되었다. 무염은 821년(헌덕왕 13) 당나라로 가서 마조(馬祖)의 제자인 보철(寶徹)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중국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동방대보살(東方大菩薩)로 존중하였다. 845년(문성왕 7)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청으로 오합사(烏合寺 : 후에 聖住寺로 바뀜.)에 머물렀다. 경문왕과 헌강왕으로부터 국사(國師)로 받들어졌으며, 『무설토론(無舌土論)』을 지어 선법을 크게 펼쳤다.
무염의 뒤를 이은 성주산파의 고승으로는 순예(詢刈)·원장(圓藏)·승량(僧亮)·보신(普愼)·심광(深光)·영원(靈源)·현영(玄影)·대통(大通)·여엄(麗嚴)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심광은 진성여왕 때 덕유산 영각사(靈覺寺)에 있으면서 성주산파의 선풍을 선양하였는데, 그의 문하에서 현휘(玄暉)가 배출되었다. 현휘는 고려 태조에 의해 국사가 되었으며, 충주 개천산 정토사(淨土寺)에 머물면서 선법을 펼쳐 활행(闊行) 등 몇백명의 제자를 배출시켰다. 무염의 뛰어난 제자인 대통은 845년(문성왕 7) 중국으로 건너가 앙산(仰山)의 법을 얻고, 866년(경문왕 6) 귀국하여 제천월광사(月光寺)에서 선법을 폈으며, 여엄 또한 양평보리사(菩提寺)에 머물면서 선법을 선양하였다.
5. 사굴산파 범일
문성왕 때의 고승 범일(梵日)이 강릉의 굴산사((崛山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조(開祖)인 범일은 831년(흥덕왕 6) 당나라로 건너가서 제안(齊安)의 선법을 이어받아 847년(문성왕 9) 귀국하였으며, 곧바로 굴산사를 창건하여 40여 년을 살면서 선법을 전파하였다. 특히 그는 스승인 제안으로부터 ‘동방의 보살’이라는 찬탄을 받았고, 특이한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주창하였다. 진귀조사설은 선의 원류를 석가모니불에 두지 않고, 진귀조사로부터 석가모니가 선법을 전해받았다고 주장하는 설이다. 범일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는 개청(開淸)·행적(行寂) 등 10대제자가 있었다.
행적은 범일의 법맥을 이은 뒤 870년(경문왕 10) 당나라에 가서 경저(慶諸)의 선법을 다시 이어 885년(헌강왕 11) 귀국하였으며, 이 때부터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그로부터 신종(信宗)·주해(周解)·임엄(林儼)·양경(讓景) 등 500여 명의 제자가 배출되어 사굴산파의 선풍을 크게 떨쳤다. 또한 개청은 처음 『화엄경』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범일에게서 선법을 전수받아 강릉 보현산 지장선원(地藏禪院)에 머물면서 수백 명의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신경(神鏡)·총정(聰靜)·명연(明然)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사굴산파 고승으로는 예종 때의 혜소(慧炤)를 들 수 있다. 그는 사굴산파의 소속으로 송나라에 가서 정인(淨因)의 법을 받아 귀국한 뒤 광명사(廣明寺)와 순천의 정혜사(定慧寺)에서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탄연(坦然)과 지인(之印)은 이 문파를 크게 진흥시켰다. 탄연은 산청의 단속사(斷俗寺)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고, 예종의 왕자였던 지인은 선법 외에도 교관(敎觀)과 시문(詩文)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특히 고려 중기에 선을 크게 중흥시킨 지눌(知訥)도 사굴산파 출신이다.
6. 사자산파 도윤
사자산문(獅子山門)은 철감선사(澈鑒禪師) 도윤(道允, 798~868)과 징효대사(澄曉大師) 절중(折中, 826~900)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도윤은 출가하여 처음 화엄학을 공부하다가 선에 관심을 가져 28세 때인 825년(헌덕왕 17)에 당에 들어가 남전 보원(南泉普願)의 법을 이었다. 그는 당에서 일어난 회창 폐불로 인해 847년(문성왕 9)에 신라로 돌아왔다. 도윤은 금강산에 한동안 머물다가 경문왕의 귀의를 받았는데, 이때에 화순의 쌍봉사(雙峯寺)로 옮겨 주석하였다. 이후 71세로 입적하였다. 도윤의 문하에는 징효 절중과 훈종장로(訓宗長老) 등이 있으며, 훈종장로의 문하에서 법경 경유(法鏡慶猶)가 배출되었다.
절중은 15세에 부석사에서 출가해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그는 19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절중은 도윤의 명성을 듣고 금강산 장담사(長潭寺)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도담선원(道譚禪院)에서 자인(慈忍) 선사의 문하로 16년간 수행하였다. 이후 각지를 유력하다가 사자산의 운예(雲乂) 선사의 청에 따라 흥녕선원(興寧禪院)에 머물렀다. 전란이 잇따르게 되자 절중은 상주와 음죽현 원향사(元香寺) 등을 옮겨 다니다가 스승 도윤이 머물렀던 쌍봉사로 갔다. 진성여왕이 절중에게 무량사(無量寺), 영신사(靈神寺)의 주지가 되어주기를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지방 세력가인 김사윤(金思尹)의 후원으로 동림사(桐林寺)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전란으로 인해 그는 강화도 은강선원(銀江禪院)으로 옮겼다가 입적하였다. 절중의 제자들이 그의 부도를 동림사에 건립하였으나 탑비는 미처 조성하지 못하였다. 그의 비는 입적한 후 44년이 지난 944년(혜종 원년)에 흥령사에서 건립되었다. 비의 건립에는 광종을 비롯하여 충주 유씨(劉氏) 세력이 주요한 단월(檀越)로 참가하였다.
사자산문은 개산조인 도윤이 아닌 그 제자인 징효 절중에 의해 개창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한 도윤이 개창한 쌍봉산문을 별개의 산문으로 이해할 것인지, 사자산문과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 문제가 남아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절중 단계에 개창된 사자산문과 11세기에 형성된 구산문 체제로 구별하여 보는 견해가 제시되기도 하였다. 신라 말 이후의 선종 산문에 대한 이해는 자료가 부족한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중국 선종사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그 역사적 변천 과정을 감안하여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7. 희양산파 도헌
희양산파는 선종 9산문의 하나로 935년(태조 18) 정진국사(靜眞國師) 긍양(兢讓)이 선풍을 선양하여 세웠으며 희양산선문 또는 희양산선파라고도 한다. 긍양이 희양산에 들어가 봉암사를 일으켜 문풍(門風)을 선양함으로써 희양산파가 이루어졌던 것이므로 그가 희양산의 개산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종래에는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았다.
≪선문조사예참의문 禪門祖師禮懺儀文≫ 등에 의하면 ‘희양산조사 산신현청도헌국사(曦陽山祖師山神現請道憲國師)’라고 하였으므로 모든 학자들이 그대로 답습하여 도헌, 즉 지증국사(智證國師)를 희양산의 조사 및 개산조로 보아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기록한 지증대사비에 의하면 그가 긍양보다도 먼저 봉암사를 세우기는 하였으나, 희양산파의 조사로 볼 수는 없다.
도헌은 법명이 지선(智詵)이며 시호가 지증이다. 그는 일찍이 출가하여 혜은(慧隱)으로부터 선(禪)을 배워 그 법을 이었는데, 혜은은 준범(遵範)으로부터, 준범은 신행(愼行, 神行)으로부터, 신행은 법랑(法朗)으로부터 법을 이었으며, 신라의 법랑은 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道信)으로부터 법을 받았던 것이다. 신라 최초의 선법 전래자로 되어 있는 법랑의 제자인 신행은 중국으로 들어가 다시 북점선(北漸禪)의 신수(神秀) 계통인 지공(志空)으로부터 법을 받아왔다.
그러므로 도헌은 도신의 법을 받은 법랑과 북종 계통인 지공의 두 스승으로부터 선법을 받아 전한 신라 신행의 증법손이 된다. 도헌은 현계산(賢溪山)안락사(安樂寺)에서 교화를 펴다가, 나중에 어느 신도의 청으로 희양산에 새로 지은 절로 가서 봉암사라 이름하고 머물렀으나 다시 현계산 안락사로 가서 생을 마쳤다.
이와 같은 그의 비문에 의하면 그는 봉암사에 머물렀기는 하나 극히 일시적이었고, 희양산선파를 성립시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법손이 되는 긍양의 비(靜眞大師碑)에 의하면, 희양산의 개산조가 긍양이며, 그 법계는 도헌의 비문에 있는 북종선 계통을 따르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긍양이 국왕으로부터 받은 존호는 봉종(奉宗大師)과 증공(證空大師)의 둘이며, 시호가 정진이다. 그는 서혈원(西穴院)양부(楊孚)로부터 배움을 받았는데 양부가 바로 도헌의 법을 이은 제자이다. 900년(효공왕 4)에 긍양은 중국으로 가서 도연(道緣)에게 법을 얻고 924년(경애왕 1)에 귀국하여 스승 양부가 있던 백엄사(伯嚴寺)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그는 크게 이름을 떨쳤으나 더 좋은 도량을 찾아 935년에 희양산으로 가서 이미 허물어진 봉암사 터에서 새로 절을 일으켜 봉암사라 하고, 제자들을 일깨워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크게 선양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태조와 혜종·정종·광종의 존경과 믿음을 받았으며, 형초(逈超)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희양산의 선풍을 확립시켰다.
그의 비문에는 법계가 밝혀져 있는데, 중국 남종선의 혜능(慧能)의 법손인 마조(馬祖)의 제자 신감(神鑑)으로부터 법을 받은 신라의 혜소(慧昭)가 귀국하여 도헌에게 법을 전하였으며, 도헌이 양부에게 전하고 양부가 긍양에게 법을 전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본 도헌의 비문에 있는 계보와는 전혀 다르다. 만약에 도헌이 혜은의 법을 얻고 또 혜소의 법도 계승하였다면 도헌의 비에서 혜소의 제자라는 말이 한 마디도 보이지 않을 까닭이 없다. 또한, 도헌의 비에서는 분명히 법랑 및 북종선의 신행 계통으로만 되어 있는 데도 그 바로 법손인 긍양의 비문에는 그 법통에 관해서는 전혀 한 마디의 언급도 없으면서 도헌을 남종선 계통인 혜소의 제자로 느닷없이 계보를 바꾸어놓고 있다.
이는 분명히 긍양대에 와서 종전 북종선 계통인 계보는 버리고, 남종선 계통을 취하면서 마침 그때 법손이 흥성하지 못한 혜소를 도헌의 앞에다 가져다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본다면 도헌은 봉암사에 머무른 일이 있을 뿐이며, 희양산의 조사는 혜소로 보아야 할 것 이고, 개산조는 긍양이 옳다고 할 것이다. 실은 그 조사도 긍양이 희양산을 크게 일으킨 다음에 그에 의하여 혜소로 모셔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긍양의 뒤를 이은 형초의 제자에 지종(智宗)이 있었다. 지종은 희양산의 형초로부터 법을 받은 뒤에 중국으로 가서 연수(延壽)로부터 심인(心印)을 얻고, 국청사(國淸寺)정광(淨光)으로부터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귀국하였으나, 현계산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보아 끝까지 희양산인(현계산은 희양산파와 관계있음)으로서 자처하였던 것이다.
그보다 훨씬 뒤의 원진국사(圓眞國師)도 희양산 봉암사의 동순(洞純)에게 득도한 제자였다. 그는 지눌(知訥)에게도 배우고, 이자현(李資玄)의 능엄선(楞嚴禪)에도 영향을 입었으므로 희양산인으로 일관하였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8. 동리산파 혜철
동리산문(桐裡山門)은 827년(흥덕왕 2)에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 785~861)이 동리산의 태안사(泰安寺)에서 선법을 널리 전하면서 산문으로 형성되었다. 혜철은 출가한 후에 부석사에서 처음 화엄을 공부하였으나, 814년(헌덕왕 6)에 선을 배우기 위해 당에 건너갔다. 그는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의 법을 잇고, 839년(신무왕 원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무주 쌍봉사에서 활동하다가 태안사로 옮겨 머물렀다. 이러한 혜철의 행적은 당시 청해진을 중심으로 해상세력으로 존재하였던 장보고가 841년(문성왕 3)에 자객인 염장에게 죽으면서 장보고 추종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당시 어지러운 사회적 상황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혜철은 문성왕의 귀의를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에 대한 물음을 받고 봉사(封事) 몇 조항을 올렸다. 혜철은 861년(경문왕 원년)에 입적하기 전까지 왕실의 자문에 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00여 명이 넘는 문하의 제자 가운데 여선사(如禪師)가 혜철의 선풍을 계승하였고, 이어 광자 윤다(廣慈允多, 864~945)가 출현하여 신라 효공왕과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산문이 더욱 확산되었다.
『태안사지(泰安寺誌)』에는 광자대사 당시 태안사의 경제 상황을 기록한 자료가 남아 있다. 이 자료에 제시된 시기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당시 태안사는 3천 석에 가까운 곡식과 500결에 달하는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사원전이 전남의 보성, 승주, 나주, 영광과 경남의 진주, 합천에 이르기까지 8곳에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태안사의 경제 규모와 함께 동리산문이 독자적인 산문으로 자리 잡았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혜철의 문하에는 도선(道詵)을 중심으로 한 계열이 전라남도 광양의 옥룡사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도선의 문하에는 동진대사(洞眞大師) 경보(慶甫, 868~948)가 대표적인 선승으로 활약하였다. 경보는 892년(진성여왕 6)에 당에 들어가 소산 광인(疎山匡仁)의 법을 잇고, 921년(경명왕 5)에 견훤의 도움을 받아 귀국하여 전주 남복선원에 머물렀다. 이후 경보는 옥룡사로 옮겼으며, 고려 태조, 혜종, 정종의 귀의를 받았다.
9. 봉림산파 현욱
원감대사(圓鑑大師) 현욱(玄昱, 787~869)의 제자인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5~923)가 효공왕 때에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봉림산에 봉림사를 창건하여 봉림산문(鳳林山門)을 개창하였다. 현욱은 824년(헌덕왕 16)에 당에 유학하였으며, 837년(희강왕 2)에 왕자 김의종(金義宗)을 따라 신라로 돌아왔다. 그는 실상사에 머물렀으며,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의 귀의를 받았다. 이후 840년(문성왕 2) 왕명에 따라 현욱은 혜목산의 고달사(高達寺)로 옮겼다가 입적하였다. 『조당집(祖堂集)』 권17 「동국혜목산화상(東國慧目山和尙)」조에는 현욱이 마조 도일의 제자인 장경 회휘(章敬懷暉, 754~815)의 법을 이었다고 되어 있지만, 현욱이 당에 유학하였을 때에는 이미 장경이 입적하였기 때문에 실제 있었던 일로 보기 어렵다. 현욱은 13세에 불과한 제자 심희에게 심인을 전하면서 자신의 법계가 ‘조계 혜능-남악 회양-마조 도일-장경 회휘’로 이어진다고 하여 중국 남종선의 법통을 강조하였다. 대부분의 선승이 중국에 유학을 하였던 것과 달리 심희의 경우에는 유학하여 전법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남종선의 법통을 강조하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심희는 9세에 혜목산에 가서 현욱에게 출가하였으며, 19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 각지를 유력하였다. 그는 중국에 유학을 가지 않았고, 진성왕 때에는 송계와 설악에 머물렀으며, 경주로 오도록 한 왕의 요청에 따르지 않았다. 이후 그는 김해 지역의 호족인 김인광, 소율희(김율희와 동일인) 등의 후원을 받아 봉림사를 창건하였다. 이 무렵 심희는 경명왕의 귀의를 받았으며, 918년(경명왕 2)에는 왕의 초청으로 경주에 가서 설법하기도 하였다.
심희의 문하에는 경질(景質), 융제(融諦) 등 500여 인의 제자들이 있었다. 융제는 상주 삼랑사(三郎寺)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원종대사 찬유(璨幽, 869~958)는 삼랑사의 융제에게 갔다가 융제의 지시로 심희에게 출가하였다. 찬유는 당에 건너가 투자 대동(投子大同)의 선법을 계승하고 921년(경명왕 5)에 신라에 돌아와 삼랑사에 머물렀다. 이후 그는 개경으로 가서 고려의 태조 왕건을 만났고, 왕건의 명으로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머물다가 혜목산에서 선풍을 진작하였다. 찬유는 고려의 혜종과 정종의 후원을 받았으며, 광종 초에는 국사(國師)로 책봉되었다. 찬유는 90세로 입적하였는데, 그가 주로 머문 혜목산 고달원은 고려 초에 위상이 높았다. 심희의 제자인 충담(忠湛, 869~940)도 중국에 유학하였는데, 귀국한 후 김해에 한동안 머물다가 이후 개경으로 이동하였다.
봉림산문은 김해와 창원 지역의 호족 세력이 주요한 단월(檀越)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후삼국 전쟁기에 후백제가 경상도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후백제와 신라, 후백제를 견제하고자 하는 고려 모두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소율희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봉림산문이 건재하였으나, 고려와 후백제의 쟁패가 본격화되면서 산문의 안정이 흔들리게 되었다. 915년(신덕왕 4)에는 이엄을 비롯한 선승들이 신변의 안전을 기약할 수 없어서 다른 사찰로 떠나게 되었다. 923년(경명왕 7) 심희가 입적하고, 927년(경애왕 4)에 후백제가 경주를 침공하면서 김해와 창원 지역의 호족세력이 몰락하였는데, 이로써 봉림산문은 쇠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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