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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불교 종파 5교 두문자 : 계자통 열보경 성원분 화의부 상표금

by noksan2023 2025.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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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종파 5교 : 계자통 열보경 성원분 화의부 상표금

 

 

5교 9산

 

 

 

계 : 율종 자 : 장 통 : 도사 

열 : 반종 보 : 덕 경 : 복사

성 : 법종 원 : 효 분 : 황사

화 : 엄종 의 : 상 부 : 석사

상 : 법종 표 : 진표 금 : 산사

 

 

1. 율종 도사

 

 

계율종 자장 통도사

 

 

 

계율종이라 함은 불교의 한 종파로 근대의 승려 포광(包光)은 신라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이 개종(開宗)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 뒤 국사교과서 등에서는 이 설을 그대로 채택하여 현재까지 신라 오교구산(五敎九山)의 하나로서 계율종을 꼽고 있다. 이는 자장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선덕여왕으로부터 승려에 관한 일체의 규율관리를 위임받고 계율을 확립하였기 때문이다.

 

자장은 보름마다 열리는 포살(布薩)을 엄격히 행하고 겨울과 봄 두 차례의 시험을 치러 잘못을 범함이 없도록 하였으며, 통도사를 창건하여 계단(戒壇)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자장이 계율종을 창종했다는 기록이나 불교 종파 중 계율종이 있었다는 사료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흥왕사대각국사묘지(興王寺大覺國師墓誌)」에 6종의 하나로서 계율종을 들고 있으나, 이는 대각국사가 전공한 여섯 가지 학문 중의 하나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사료상으로 볼 때 계율을 전문으로 한 종파는 남산종(南山宗)이 있다.

 

자장은 삼국시대 신라의 대국통, 황룡사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590년(진평왕 12)에 태어나 658년(태종무열왕 5)에 사망했다. 진골 출신으로, 왕이 재상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목숨을 걸고 응하지 않았다. 당에 유학하여 명성을 떨쳤고 당 태종의 두터운 예우를 받았다. 선덕여왕이 자장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귀국한 후 분황사에 머무르며 대국통이 되었다. 645년 황룡사에 9층탑을 세웠고 불교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 교화에 힘썼다.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했고, 신라가 불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는 불국토사상을 뿌리내리게 했다.

 

통도사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영축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주 자장율사가 643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와 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함으로써 초창 당시부터 아주 중요한 사찰로 부각되었다.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로서는 최초이다. 대웅전 남쪽의 금강계단에 봉안한 불사리탑이 통도사의 중심이 되기 때문에 대웅전 내부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다. 삼보사찰 가운데 불사리를 모신 불보 사찰이며, 이외에도 수많은 중요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어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2. 반종 보덕 복사

 

 

열반종 중심도량 완주 경복사지

 

 

 

열반종이라 함은 고려시대 불교 학종(學宗)의 하나로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묘지(墓誌)에 보이는 육학종(六學宗) 가운데 하나이다. 개성흥왕사(興王寺) 대각국사 묘지에는, 당시의 불교 전공분야로서 육학종의 이름이 보이고 있는데, 그 중 열반종이 있다. 일찍이 중국의 남북조 때에 열반종이 불교 전공분야인 학종(學宗)으로 있었기는 하였지만 하나의 종파로 성립되지는 못하였다. 『열반경』이 우리의 삼국시대부터 전하여진 흔적은 있지만 종파에로까지 발전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파가 성립되어 있었으나 종파로서의 열반종은 보이지 않는다. 김영수(金映遂) 등은 열반종이 신라 무열왕 때의 고승 보덕(普德)이 개종(開宗)한 종파라고 하였으나 신라 때 뿐만 아니라 고려 때에도 열반종이 성립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그 근거가 미약하다. 따라서 대각국사 묘지에 보이는 열반종은 당시 불교를 공부하는 이들의 전공분야로서, 종파 이름이 아닌 학종(學宗)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보덕은 삼국시대 고구려 대보산에서 선관을 닦고 영탑사를 세운 승려를 말한다. 열반종의 개조. 자는 지법(智法). 평안도 용강현(龍岡縣) 출생. 항상 평양성에서 살았는데 산방(山方)의 노승이 강경(講經)하기를 간절히 청하므로 사양하다가 『열반경(涅槃經)』 40여권을 강하였다. 그 뒤 대보산(大寶山) 암혈 밑에서 선관(禪觀)을 닦았는데, 신인(神人)이 와서 그곳에 거주하기를 청하고 땅 속에 팔면칠급(八面七級)의 석탑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이에 그곳에 정사(精舍)를 세워 영탑사(靈塔寺)라 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 뒤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에 있을 때 보장왕이 도교를 존중하고 불교를 숭상하지 않으니 국운이 위태롭게 될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하였다. 왕이 이를 듣지 않자 650년(보장왕 9) 방장(方丈)을 날려 하룻밤 사이에 백제의 완산주(完山州 : 지금의 전주)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가 경복사(景福寺)를 짓고 살았다.

 

그의 제자 무상(無上)은 금동사(金洞寺)를,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 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浮)은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계육(契育)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창건하였다.

 

경복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고달산(高達山)에 있었던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보덕이 창건한 사찰을 말한다. 고구려의 고승 보덕(普德)이 650년(보장왕 9년)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에서 사찰 전체를 옮겨와 창건하였으며, 그 때 공중으로 날아서 절이 옮겨왔다고 하여 비래방장(飛來方丈)이라고도 하였다.

 

창건 이후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이 곳에서 『열반경(涅槃經)』과 『유마경(維摩經)』을 배웠으며, 보덕의 진영(眞影)이 고려 때까지 봉안되어 있었다. 의천(義天)·박춘령(朴椿齡)·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 등이 이 절에 들러서 보덕의 진영에 예배하고 찬한 시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1424년(세종 6) 나라에서 사원에 대한 승려의 수 및 토지의 결수를 정할 때 이 절은 교종(敎宗)의 소속이 되었으며, 승려수는 70인이고 원래 100결이었던 전지를 50결로 제한하였다. 폐사연대는 알 수 없다.

 

3. 법황사

 

 

법성종 원효 분황사지

 

 

 

법성종이라 함은 고려 초에 성립된 불교 교종의 한 종파를 말한다. 고려 대각국사(大覺國師) 당시의 불교학 분야 여섯 가지(六學宗) 가운데의 하나였다. 개성의 흥왕사 「대각국사묘지(大覺國師墓誌)」에 의하면, 당시의 불교공부 분야로 여섯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법성종이 들어 있다.

 

일찍이 법성종을 삼론종(三論宗)이라고 단정한 바 있는 김영수(金映遂)는 그의 논문 「오교양종에 대하여」에서

 

“뒤에 다시 고찰하여 보니 법성종이 삼론종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곧 해동종(海東宗)인 것을 찰득(察得)하였다.”

 

라고 하여, 법성종이 곧 해동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법성종이 해동종이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오늘날 그 전거(典據)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 불교의 역사자료에서는 법성종이라는 종파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으며, 법성종이라는 명칭도 다만 「대각국사묘지」에서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라시대는 물론 고려시대에도 법성종이라는 종파는 성립되지 않았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법성종은 성종(性宗)이라고도 하는데 상종(相宗), 즉 법상종과 상대되는 불교교의(佛敎敎義)의 전문분야이다. 중국에서의 삼론학(三論學)과 화엄학·천태교학 등이 거기에 속한다.

 

그래서 공성종(空性宗)·천태성종(天台性宗) 또는 화엄성종(華嚴性宗)이라고 하는 사례를 볼 수가 있다. 그런 점 등으로 미루어 대각국사 당시의 6종 중에 들어 있는 법성종은 법상종(法相宗)과 상대되는 불교의 교리로서, 당시 불교학의 전공분야에 속하였던 학종의 하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종파의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전과 후를 통하여 전혀 법성종이라는 종파명(宗派名)을 볼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원효는 『대혜도경종요』, 『금강반야경소』, 『화엄경소』 등을 저술한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이다. 617년(진평왕 39)에 태어나 686년(신문왕 6)에 사망했다. 타고난 총명함으로 폭넓게 독학하여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는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포기했다.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았고 이후 거침없는 삶을 살았다. 많은 저술을 남긴 학승으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한 민중교화승으로도 중요하며, 종파주의적 풍조를 혁파하는 화쟁사상을 주장했다.

 

분황사 경상북도 경주시 분황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선덕여왕 당시 창건한 사찰이다. 634년(선덕여왕 3) 경주에 세운 절이다. 이 절의 석탑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솔거가 그린 분황사의 관음보살이 유명하다. 자장 원효가 이 절에 머물렀다.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원효의 화쟁국사비가 세워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임진왜란 때 화를 당하고 광해군  약사여래를 조성하였다.

 

 

4. 엄종 석사

 

 

화엄종 의상 부석사

 

 

 

화엄종이라 함은 화엄사상을 천명한 불교종파로,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661년(문무왕 1) 당나라에 가서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하고 돌아온 671년 이후에 화엄교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신라에 ≪화엄경≫이 전래된 때는 의상의 귀국 훨씬 이전이고 화엄경교의 신행(信行)도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기록상으로 볼 때 최초의 화엄사상가는 자장(慈藏)이다. 선덕여왕 때의 고승인 자장은 636년(선덕여왕 5) 당나라에 가서 그곳 오대산(五臺山)의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으로부터 감응을 받고 화엄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귀국(643)한 뒤에는 ≪화엄경≫을 강설(講說)하여 영응(靈應:신령스러운 감응)이 있었고, 또 화엄신앙의 하나인 오대산신앙을 비로소 이 땅에 옮겨놓은 장본인이다. 또, 의상보다 8세 위이며 입당구법(入唐求法)의 뜻을 같이하였던 원효(元曉)도 ≪화엄경종요 華嚴經宗要≫ 1권과 ≪화엄경소 華嚴經疏≫ 10권 등의 화엄관계 저술을 남긴 화엄의 대가였다.

 

의상 이전에 이미 신라에는 ≪화엄경≫이 신행, 연구되기는 하였으나, 체계적인 화엄교학의 계통이 이루어지기는 의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뒷날 사람들이 그를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 즉 신라 화엄종의 시조라 불렀다. 태백산 기슭의 부석사(浮石寺)를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널리 펼쳤던 의상의 화엄관계 주요 저서는 ≪일승법계도 一乘法界圖≫이다. 이 밖에도 ≪입법계품초기 入法界品鈔記≫ 1권, ≪화엄십문간법관 華嚴十門看法觀≫ 1권 등의 화엄관계 저술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일승법계도≫는 의상의 화엄관과 그의 사상세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저술이다. 의상 이후의 화엄학자들이 이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그의 교학을 계승해 왔던 것이다. 의상의 교학을 이은 제자로는 이른바 10대제자(湘門十德, 즉 義湘門下十大德)인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이 유명하며, 그의 강석에는 3,000여 명의 제자가 모였다고 전한다.

 

의상의 가르침은 많은 제자와 법손(法孫)들에 의하여 부석사는 물론 원주 비마라사(毗摩羅寺),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남악 화엄사 등의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중심으로 화엄학을 널리 펼쳤다.

 

신림(神琳)·연기(緣起)·결언(決言)·법융(法融)·진수(眞秀) 등의 대가가 이어나서 의상의 화엄교학을 계승하여 신라 말에까지 이르렀으나, 관혜(觀惠)와 희랑(希朗)의 두 법사에 의하여 화엄교학은 남악(南岳, 智異山)과 북악(北岳, 伽倻山)의 두 파로 대립이 되었다. 관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존경을 받은 고승이었고, 희랑은 고려 태조인 왕건(王建)의 숭앙을 받은 고승이었다.

 

남악파와 북악파의 두 갈래로 나누어졌던 화엄교학은 고려 태조의 후백제 토멸 이후, 탄문(坦文)과 균여(均如) 등의 고승들이 배출되어 다시 일가를 이루었다. 탄문은 고려 제4대 광종 때 왕사와 국사를 지냈고 ≪화엄경≫을 강의하여 영험스러운 감응이 있었다는 고승이며, 균여 역시 광종의 존경을 받은 당대 고승으로 ≪수현방궤기 搜玄方軌記≫ 10권 등 화엄관계의 많은 저술을 남겨 화엄교학을 크게 진작시켰다.

 

균여 바로 뒤의 대표적인 화엄 고승으로 결응(決凝)을 들 수 있다. 정종 때에 왕사가 되고 문종 때에 국사가 된 그는 항상 화엄삼매(華嚴三昧)를 이루어 영응이 많았으며, 뒤에 화엄본산인 부석사를 중흥하고 거기에서 90세에 입적하였으나 저술은 전하는 것이 없다. 그의 제자가 1,438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당시 화엄교문의 성함을 짐작할 수가 있다.

 

화엄의 교학은 원만무애(圓滿無碍)한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원돈교(圓頓敎)라고도 하고, 법계원융(法界圓融)의 진리라고 하여 원융종(圓融宗)이라고도 한다. 이는 그 교학의 특징이나 종취(宗趣)를 밝힌 것으로 종파의 이름은 아니다. 신라의 화엄종은 국가에서 인정을 받은 종파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신라시대의 불교는 각종 각파의 대립분열이 없는 소위 통불교(通佛敎)의 시대였으므로 화엄종도 하나의 교학으로서는 의상으로부터 계승되어 왔으나 종파로서는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현존자료를 통하여 볼 때 화엄종이 하나의 종파로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로 들어와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화엄교학의 연원이 중국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신라의 의상이 당나라의 지엄으로부터 그 교학을 받아왔으나 그곳의 종파를 받아들여온 것은 아니다.

 

중국의 화엄종은 의상의 동문후배인 법장(法藏)에 의하여 성립되었으므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훨씬 뒤의 일이 된다. 그러나 그 교학 계통부터 따져야 하기 때문에 당나라의 화엄종은 지엄을 제2조로 하고 그 스승 두순(杜順)을 초조로 삼는다.

 

그러므로 실제 화엄종을 성립시킨 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된 것이다. 의상이 해동의 화엄초조이기는 하나 그가 종파를 형성시킨 것은 아니고, 고려에 와서 비로소 종파로서 행세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정확한 때와 내막을 알기가 어렵지만 앞에서 본 탄문과 균여의 당시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제4대 광종 때 비롯된 과거제도의 일환으로 행해졌던 승려의 국가고시인 승과제도 실시를 전후하여 종파의 이름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 등으로 미루어, 아마도 그때쯤에 국가적인 필요와 허용에 의하여 종파들이 형성되고, 아울러 화엄종도 그 무렵에 국가의 인정을 받은 종파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비록, 고려 초에 이르러 하나의 종파로 등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교학의 계통은 물론 신라 의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초조 의상 이후 제2·3조 등의 대대상승(代代相承)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그 교학의 계통만은 끊임없이 계승되어 왔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다가 고려 문종의 제4왕자였던 의천(義天) 때에 이르러서는 의상보다도 오히려 당나라 법장을 중심으로 하는 화엄종이 크게 떨쳐지게 되었다.

 

의천은 고려에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장본인이지만 어디까지나 화엄종의 승려였다. 그의 뒤를 이어 두각을 나타낸 화엄종의 고승으로는 낙진(樂眞)·징엄(澄儼)·종린(宗璘)·천희(千熙)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화엄관계의 저술이나 연구흔적을 남겨놓은 것이 없으므로 교학상이나 종파상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왕조로 바뀌면서 숭유배불(崇儒排佛)의 시대가 되었으며, 따라서 불교의 종파에도 큰 변화가 있게 되었다.

11개 종파이던 교단이 1407년(태종 7)경에는 7종으로 축소되었는데, 화엄종은 그 7종의 하나에 들어 있었다. 그러나 1424년(세종 6)에 7종을 다시 폐합하여 선종과 교종의 둘로 만들어 버렸으므로, 화엄종은 교종 속에 합쳐져서 그 이름을 잃고 말았다. 모든 종파가 없어지고 선종과 교종의 두 종파만으로 된 다음에, 3년마다 치르는 승과의 시험과목이 선종은 ≪전등록 傳燈錄≫과 ≪염송 拈頌≫이며, 교종은 ≪화엄경≫과 ≪십지론 十地論≫이었다. 교종은 화엄종·자은종(慈恩宗)·중신종(中神宗)·시흥종(始興宗)의 4종이 합쳐져서 하나로 된 종파이다.

 

그러한 교종인 데도 그 시험과목은 오직 화엄종의 소의경론(所依經論)인 ≪화엄경≫과 ≪십지론≫뿐이었다. 이로 미루어 비록 여러 종파와 합쳐져 그 이름은 없어졌지만, 교종의 중심은 화엄종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나중에 명종 때 선종과 교종의 판사를 함께 겸해서 지낸 바가 있는 휴정(休靜)을 판교종사 겸 판선종사(判敎宗事兼判禪宗事)라고 하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판화엄종사 겸 판조계종사(判華嚴宗事兼判曹溪宗事)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를 통해서도 교종을 화엄종이라고도 부를 만큼 화엄종이 교종을 대표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연산군과 중종 때에는 그나마 선·교 두 종파마저도 국가에서 없애버림으로써 당시의 불교는 그 종파의 이름조차 갖지 못하게 되었다. 명종 때 잠시 선·교의 양종이 부활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폐지되었다. 그로부터 전혀 종파가 없는 교단이었으나 휴정 및 그 이후의 산승(山僧)들은 모두가 선승의 계통이었지만, 학식이 있고 경교에 밝은 승려들은 거의 대부분이 화엄을 공부하고 또 강의한 화엄의 대가들이었다. 휴정 이후의 많은 화엄가들은 모두가 선종법맥에 속한 선사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화엄대가를 꼽아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도안(道安)은 그의 스승 의심(義諶)이 이루지 못한 ≪화엄경≫의 번역을 완수하였고, 화엄회를 마련하여 화엄의 진수를 강설하였으므로 그를 일러 화엄종주라고 하였다. 지안(志安)은 당시 화엄의 제1인자라 소문난 진언(震言)의 강석을 물려받았으며, 1725년(영조 1) 봄 금산사에서 화엄대법회를 열었을 때에는 1,400여 명의 청중을 감동시켰다. 상언(尙彦)은 화엄관계 저술로서 ≪청량소초적결은과 淸凉疏鈔摘抉隱科≫ 1권, ≪구현기 龜玄記≫ 1권 등을 남겼고, 유일(有一)은 ≪화엄유망기 華嚴遺忘記≫ 40권을 썼으며, 최눌(最訥)은 ≪화엄과도 華嚴科圖≫ 1권을, 의첨(義沾)은 ≪화엄사기 華嚴私記≫ 등을 저술함으로써 화엄교학을 다시금 떨치게 하였다.

 

그 밖에도 화엄의 대가들이 계속 배출되었으니, 수연(秀演)·긍선(亘璇)·한성(翰醒)·예가(例珂)·해주(海珠)·태선(太先) 등은 모두 화엄종주라는 칭호를 들었던 대표적인 화엄강사였다. 오늘날까지도 산사의 전통적인 강원에는 종래의 관례에 따라 최고의 교과과정인 대교과(大敎科)의 이수학과목에 ≪화엄경≫이 들어 있다.

종단도 없고 종파의 이름도 없어진 지가 오래되었지만 화엄교학의 흐름은 끊임없이 이 땅의 불교사상을 지탱하게 하는 밑뿌리 구실을 해 왔던 것이다.

 

의상(義湘, 625~702)은 7세기에 활동한 신라 승려이다.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우리나라에 화엄 사상을 본격적으로 전하고 크게 융성시키고, 나아가 우리나라 불교 최초의 종파로 화엄종(華嚴宗)을 자리 잡게 하였기 때문에,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로 추앙받는다. 그는 많은 제자를 키워 불교가 크게 발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또 관음신앙을 확산시켜 불교 대중화에도 기여하였다.

 

의상은 46살이 된 670년(문무왕 10)에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가 화엄 교학에 상당한 성취를 보고 그것을 신라에 전수하기 위해 귀국한 것으로 보이지만, 『삼국유사』에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고국에 전하기 위해 돌아왔다는 전승이 있는 것을 보아, 신라와 당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의 귀국을 재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의상은 귀국한 후 한동안 왕경에 머물며 활동하다가, 당과의 전쟁이 끝나가던 676년(문무왕 16) 2월 왕명을 받아 지금의 경북 영주시에 있는 부석사(浮石寺) 창건을 계기로, 부석사가 있던 영주와 그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그가 부석사에서 40일간 법회를 열어 화엄 사상을 전파함으로써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의 중심 사찰로 성장하였고, 의상은 고승으로서의 명성과 존경을 얻게 된다.

 

의상은 당시로서는 새롭고 보다 발전한 불교 교학인 화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켜 우리나라에 전하였다. 그는 심오한 불교의 교학을 깊이 공부한 학승이며 청정한 수도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불교를 학문으로서 연구하고 혼자 수행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제자를 양성하여 자신의 불교 철학을 전하였다. 의상 문하에서 3,000명이 넘는 제자가 배출되었다고 전하는데, 제자 중에는 뛰어난 고승으로 이름을 남긴 이들도 많았다. 특히 10대 제자로 칭해지는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이 유명하다. 또한 전국에 화엄 10찰을 필두로 많은 절을 창건하여 불교의 융성을 가져왔다. 그는 비록 많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지만, 교육을 통해 자신의 불교 철학을 확산하고 후대에 전하였다.

 

의상이 해동화엄초조의 호칭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자신이 체계화한 화엄 사상에 대한 교육을 통해 제자들을 배출하여, 그들과 함께 그리고 이후 그 후속 세대들이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우리나라 불교 최초의 종파라 할 수 있는 화엄종이 성립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676년(문무왕 16)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절의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商船)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 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절에서 장경(藏經)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또, 고려 정종 때의 결응(決凝)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僧堂)·만월당(滿月堂)·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전과 부석사 조사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梵鐘樓)·원각전(圓覺殿)·안양루(安養樓)·선묘각(善妙閣)·응진전(應眞殿)·자인당(慈忍堂)·좌우요사(左右寮舍)·취현암(醉玄庵)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범종루와 안양루는 대표적인 누각이고, 원각전·응진전·자인당은 법당이며,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누각 안에는 부석사의 현판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안에는 사명당이 쓴 「안양루중창기」가 있다. 또, 취현암은 원래 조사당 옆에 있었던 부석사의 선원(禪院)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전되어 현재는 주지실과 종무소(宗務所)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과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과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1982년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원융국사비는 절의 동쪽 500m 지점에 위치하며 1054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 외에 삼층석탑 두기와 동쪽 언덕에는 1기의 고려 말 부도를 포함한 10여 기의 부도가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룡(石龍)을 비롯하여 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석조(石槽)·맷돌 등이 있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묘정은 절의 동쪽에 있는데, 가뭄이 있을 때는 기우제를 드렸다고 한다. 대석단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절의 입구에 있다. 거대한 축석(築石)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면석(面石)을 섞어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 석단은 3단으로서 극락세계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를 오르는 석단이 2단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대석단과 합하여 상·중·하의 셋으로 보는 가람 경영방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녹유전은 가로와 세로가 14㎝의 정방형 기와로서 두께는 7㎝이며, 벽돌 표면에 0.3㎜ 정도의 녹유를 발라 광택을 내게 한 신라시대의 유품이다. 이것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땅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한 것에 입각하여 무량수전의 바닥에 깔았던 것이다. 선비화는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하는데,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5. 법종 진 산사

 

 

법상종 진표 금산사

 

 

 

법상종(法相宗)은 유식 사상을 기반으로 성립된 종파이다. 유식 사상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는데, 당(唐)의 현장(玄奘)이 중국에 소개하고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하나의 종파로 성립시켰다. 규기가 자은사(慈恩寺)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자은종(慈恩宗)이라고 하고, 인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 사상에 대하여 고찰하고 해명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는다고 하여 법상종이라고도 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신라 때로, 현장의 제자였던 원측(圓測)과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었고, 그 이후 종파로 성립되어 신라의 5교로 꼽히는 교종(敎宗)의 주요 종파가 되었다.

 

고려 시기 법상종은 화엄종(華嚴宗)과 함께 교종의 양대 종파였으며, 「대각국사묘지(大覺國師墓誌)」에는 불교 6학파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대의 법상종은 개경(開京)의 현화사(玄化寺)를 중심으로 보수적인 귀족 세력과 연결되었는데, 그러면서 불교 교리가 관념화되고 의례의 형식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11~12세기에는 인주(仁州) 이씨(李氏)의 후원을 받아 왕실과 다른 귀족들의 후원을 받은 화엄종과 대립하였지만,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법상종은 이후에도 여러 명칭으로 불리다 자은종으로 통칭되어 조선 초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선교(禪敎) 양종으로 통합될 당시 교종으로 분류되어 통폐합되었다. 법상종은 신라 5교 중 하나였으며, 고려 시기 귀족적인 교종 불교의 대표 종파 중 하나였다.

 

진표(眞表)는 완산주(完山州) 만경현(萬頃縣) 사람이다. 부친은 진내말(眞乃末)이며 모친은 길보랑(吉寶娘)이다. 그는 금산사(金山寺)를 중창하였으며 발연사(鉢淵寺) 등을 창건하였다. 또한 신라 하대 미륵신앙의 확산에 기여하였으며, 여러 사찰에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정착시켜 불교의 대중화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진표는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11세 때 사냥을 나갔다가 밭둑에서 활로 개구리를 쏘아 잡았다. 그는 버드나무 가지에 개구리를 꿰어 물속에 넣어두었다. 다음 해 봄 개구리 30여 마리가 꿰미에 꿰인 채 그때까지 살아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참회하여 출가를 결심하였다. 결국, 12세의 나이에 출가하였는데, 금산사의 숭제(崇濟, 順濟)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숭제법사가 그에게 사미계법(沙彌戒法)을 준 뒤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건네주며 말하였다.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과 지장 두 보살 앞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참회하여 직접 계를 받아 세상에 전하거라.” 진표는 법사의 가르침을 받들고 물러 나와 명산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는 온몸을 바위에 부딪쳐 참회하는 망신참법(亡身懺法)을 지속하였는데, 마침내 지장보살이 나타나 정계(淨戒)를 주었다. 그러나 진표는 그 뜻이 미륵보살에게 있었으므로 수행정진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였다. 돌로 온몸을 치며 참회하기를 수년 동안 지속하여 결국 미륵보살의 수기(授記)를 받았다. 이때 진표의 나이 27세였다.

 

진표는 760년(경덕왕 19)에 쌀 20말을 쪄 말려 식량을 만들어가지고 부안의 선계산(仙溪山) 불사의암(不思議庵)에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삼업(三業)을 수련하기로 하고 망신참법의 참회법으로 수행하여 계를 얻었다. 이어서 진표는 변산의 영산사(靈山寺)로 옮겨 수행하였는데, 미륵보살이 나타나 『점찰경』과 불과(佛果)를 증명하는 증과(證果)인 간자 189개를 주었다.

 

이후 진표는 금산사를 창건하였고, 미륵장육상을 조성하였다. 또한, 미륵보살이 내려와 계법을 주는 모습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렸다. 진표는 불법의 교화가 두루 미치자,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아슬라주(阿瑟羅州)에 이르렀다. 섬과 섬 사이의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물속으로 인도하였으므로 물고기와 자라에게 불법을 강의하고 계를 주었다. 경덕왕이 이 말을 듣고 궁중으로 진표를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곡식 7만 7천 섬을 보시하였다. 황후와 궁녀들도 모두 계품을 받았고 비단 5백 단과 황금 50냥을 보시하였다. 진표는 이를 모두 받아서 여러 산에 나누어 주어서 불사를 널리 일으켰다. 진표가 물고기에게 계를 주던 곳인 금강산 발연사에는 지금도 골석(骨石, 사리)이 남아 있다. 그는 말년에 아버지를 봉양하며 발연사에서 수도하였고 이후에 절의 동쪽 큰 바위 위에 앉아 입적하였다고 한다.

 

진표에게 법은 받은 제자로는 영심(永深)·보종(寶宗)·신방(信芳)·체진(體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의 조사가 되었다. 특히 진표의 법맥은 속리산 길상사(吉祥寺)의 영심에게 계승되었으며, 영심은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의 심지에게 법을 전하였다.

 

모악산에 자리한 금산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지은 절로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가 다시 지었다.
미륵전은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조선 인조 13년(1635)에 다시 지은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존불을 모신 법당으로 용화전·산호전·장륙전이라고도 한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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