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지역 독립운동 단체 두문자 : 한공 보대국흥
한 : 한인합성협회(1907)
친 : 공립협회(1905)
보 : 대동보국회(1907)
대 : 대한인국민회(1910)
국 : 대조선국민군단(1914)
흥 : 흥사단
1. 한인합성협회(1907)
한인합성협회는 1907년 9월 2일 미국 하와이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미국 한인사회는 1907년 무렵까지 약 20개 이상의 항일운동단체를 결성하였고, 이를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07년 8월 말, 하와이 각 지역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가 합동결의안을 통과시키고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였다.
1903년 미국 하와이 이민을 시작으로 미국 각지로 이주하여 한인 사회를 형성한 한국인들은 1907년 무렵까지 약 20개 이상의 항일운동단체를 결성하였다. 1903년 말에는 감리교 계통의 인사와 유학생들이 하와이 한인사회에서는 최초의 정치적 단체인 신민회(新民會)[New People's Society]를 조직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保護國)'화를 하자 하와이 한인사회는 일화배척(日貨排斥)주3, 배일운동(排日運動), 무예장려(武藝獎勵), 실업장려(實業獎勵), 국권회복 등을 내세우며 항일운동을 전개해 갔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가 본격화되자, 같은 해 8월 말부터 하와이 한인사회는 여러 민족운동단체를 통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07년 8월 말, 하와이 각 지역에 분립되었던 24개 단체의 대표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여 회의한 결과, 9월 2일 4개 조의 합동결의안을 통과시키고 한인합성협회를 결성하였다. 합동결의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국의 국권광복운동(國權光復運動)을 후원하며, 재류 동포의 안정을 보장하며, 교육사업을 증진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힘을 모아 단결한다.
둘째, 하와이 각 지방에 분립된 단체들을 결합하여 통일기관을 설립하고, 그 명칭을 한인합성협회라 하며, 호놀룰루에 총회를 설립하고, 각 지방에 있던 단체들을 일체 폐지한 후에 한인합성협회를 설립한다.
셋째, 한인합성협회 총회는 시찰원을 각 지방에 파송하여 아직까지 합동에 참가하지 않은 단체나 개인들에게 합동의 의사를 설명하게 한다.
넷째, 한인합성협회 총회는 기관 신문을 발행하되 그 명칭을 「한인합성신보」라 하며, 기왕에 각 단체가 발행하던 회보들을 『한인합성신보』에 부합하여 실력을 집중하고 언론일치를 도모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하와이의 여러 한인 단체는 한인합성협회로 통합되었다. 한인합성협회의 회원 수는 800여 명에 이르렀으며, 회장에 임정수(林正洙)를, 부회장에 안원규를 임명하고, 호놀룰루 릴리하 스트리트에 중앙회관(中央會館)을 설치하였다.
한인합성협회의 목적은 조국의 국권광복, 동포의 안녕 보장, 교육장려였다. 한인 단체의 통합과 함께 각 단체에서 발행했던 기관지도 통합되었다. 1907년 10월 22일 『공진회보(共進會報)』와 「친목회보」를 합하여 『한인합성신보』를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한인합성협회 설립 초기 참여하지 않았던 자강회(自强會)와 전흥협회도 각각 1908년 봄, 1909년 1월에 한입합성협회와 합동하여 회원 수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1908년 말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는 하와이 한인 사회와 미주 한인 사회를 합일하여 완전무결한 단체를 이루고 국권회복과 민족을 보전하기를 기약하자고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에 따라 1909년 2월 1일 한인합성협회와 공립협회가 통합하여 국민회를 창립하였다. 국민회가 창립되자 기존의 한인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변경되었다.
이어 1910년 2월에는 국민회가 대동보국회와 통합되어 5월 10일 대한인국민회가 설립됨으로써 미주 및 멕시코 단체들까지 통괄하는 단체로 발전되었다.
2. 공립협회(1905)
공립협회는 190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결성한 민족 운동 단체이다. 미주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 국권 회복과 동족상애를 목적으로 설립하여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지회를 설립하고 활동하였다.
1903년 9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를 비롯한 이대위, 박영순(朴永淳), 김성무(金聖武), 장경(張景), 박선겸(朴善謙), 김병모(金炳模), 전동삼(全東三), 김찬일(金贊一), 박승지 등이 주도하여 친목회를 조직하고 현지 한인들을 계몽하고 단합하고자 하였다. 이 친목회는 1904년부터 하와이 한인 이민 노동자들이 미국 본토로 이주해 오자, 이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취업을 알선할 목적으로 로스앤젤레스 리버사이드에 공립협회를 창설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가 한국의 식민 지배를 본격화하자 1905년 4월 안창호를 비롯하여 송석준, 정재관, 임준기(林俊基), 이강, 임치정, 방화중(邦化重) 등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존의 ‘리버사이드 공립협회’와 샌프란시스코의 친목회를 통합, 발전시켜 항일운동과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한 공립협회를 설립하였다. 이 시기 공립협회는 연장적 성격을 지녔을 뿐 조직 체계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미국 본토에는 공립협회 외에 대동보국회, 공제회(共濟會), 동맹신흥회 등 4개 단체가 존립하였으나, 당시 미주 한인 사회를 선도한 단체는 공립협회였다. 공립협회는 1905년 11월 22일 기관지 「공립신보」를 창간하였고, 중앙총본부인 공립관(共立館)을 설치하고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는 지회를 설립하였다.
공립협회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국내외 독립 운동 단체들과 연합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3월 경부터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의 통합을 추진, 11월에는 합동발기문을 발표하고 1909년 2월 국민회를 창립하였다. 국민회가 설립되면서 기존의 한인합성협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로, 공립협회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 변경되었다. 이어 1910년 2월에는 국민회가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5월 10일 대한인국민회가 설립됨으로써 미주 및 멕시코 단체들까지 통괄하는 단체로 발전되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과 한일신협약 체결로 국내에서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공립협회는 ‘독립전쟁’을 지지하며 해외 한인들의 동참을 촉구하였다. 1908년 이후 의병전쟁이 쇠퇴해 가자 공립협회는 대동보국회와 함께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 W.)주1를 처단하는 의열 투쟁을 전개하고 일제의 한국 침략 폭로 및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자 하였다.
3. 대동보국회(1907)
대동보국회라 함은 19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1907년 3월 2일 장경(張景)이 중심이 되어 김우제(金愚濟) · 이병호(李秉浩) · 문양목 · 장인환 · 유홍조 · 김미리사(차미리사) · 윤응오 · 최윤백 · 변창수 · 김춘화 · 김홍균 · 송사원 · 양주은 · 백일규 · 이면식 · 방사겸 · 조성학 · 이학연 · 박도선 · 서택원 · 박창운 · 김필권 · 이성칠 · 김찬일 등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대동보국회가 설립되기 전인 1905년에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서 대동교육회가 조직되었다. 회장에 김우제, 총무에 장경이 선출되었다. 이 회는 교육진흥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본래의 의도는 안창호의 공립협회에 대항하는데 있었다.
이 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장경은 1903년 9월 안창호의 지도로 조직된 상항친목회(桑港親睦會)의 발기인이었다. 친목회가 1905년 4월 공립협회로 바뀌어진 뒤 안창호와 장경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장경이 중심이 되어 공립협회에서 분리, 대동교육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대동교육회는 교육진흥에만 목적을 둔 까닭에 공립협회의 정치적 운동에 비해 활동이 미약하였다. 이 때문에 1907년 3월, 일제의 국권침탈이 강화되고 있던 시대적 상황에 부응해 정치적 운동을 지향하면서 대동보국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설립 취지는 동지의 단결과 민지(民智)의 계발에 있었다. 조직은 중앙회와 지방회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웹스트가에 중앙총회관을 두고 스탁톤 · 푸레스노 · 칼린 · 덴버 · 솔트 레이크시티 등의 다섯 지역에 지방회를 설치하였다. 초대 중앙회장으로 이병호가, 중앙총무에는 장경이 선임되었으며, 백일규 · 문양목 등도 회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9월 24일 중앙총무인 장경은 지회의 설립을 목적으로 중국 상해(上海)로 출발, 11월 24일 상해 애이근로(愛以近路) 균익리(均益里) 5가 114호에 상해지회를 설립하였다.
1908년 3월 21일 일제에 의해 한국외부고문으로 나왔던 미국인 스티븐스(Stevens, D. W.)가 워싱턴으로 가는 도중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일제의 보호정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교민들은 공동회를 개최하고 총대위원(總大委員) 문양목 등이 스티븐스를 방문, 항의하였다. 그러나 그가 계속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이 회의 회원이던 장인환은 3월 23일 그를 저격하였다.
1910년 2월 대동보국회는 국민회와 통합되어 발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대동보국회와 국민회의 통합체로서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였다. 기관지로는 1907년 10월 3일부터 간행된 「대동공보」가 있었다. 처음에는 석판을 사용해 인쇄해오다가 같은 해 11월 21일부터는 국문활판으로 바꾸었다. 사장에는 문양목, 주필은 최영만(崔永萬)이었다.
4. 대한인국민회(1910)
1908년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에 의한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저격의거를 계기로 일어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와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통합하여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다.
그 이듬해 2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국민회에 흡수됨으로써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하였다. 이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로 구성하기 위하여 미주에는 북미지방총회를, 하와이에는 하와이지방총회를, 멕시코에도 멕시코지방회를 조직하였다. 멕시코 지방회는 1909년 5월 9일 국민회 북미총회 산하로 조직되었으며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변천하자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로 자리매김하였다.
1911년 3월경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분과와 임원을 완비한 완전한 조직구성을 완료하지는 못했다. 나아가 1911년에는 시베리아지방총회를 설치하고 치타·이르쿠츠크·수청(水靑) 등 16개 지방에 지방회를 구성하여 회원이 1,150여명에 달하였으며, 같은 해 11월 만주지방총회를 설립하고 8개처에 지방회를 구성하였다.
1912년 다시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각 지방총회의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중앙총회를 정비하고 임원을 선임하여 11월 제1회 대표원의회를 개최하였다. 이로써 재외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 최고기관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인국민회는 기관지로 『신한민보(新韓民報)』를 발간하여 국내외에 배포함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하였고, 조국 광복 때까지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5. 대조선국민군단(1914)
대조선국민군단이라 함은 1914년 6월 10일 하와이 오아후(Oahu)섬 코올아우(Koolau)지방 카할루우(Kahaluu)의 아후이마누(Ahuimanu)농장에서 독립군사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만든 군사교육단체를 말한다.
국민군단의 편성과 설치에 대한 주무(主務)는 하와이 각 지방에서 군사훈련을 추진해 온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練武部)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을 주도한 주역 인물은 박용만이었다. 국민군단은 박용만이 1909년 6월 네브라스카 헤스팅스에서 시작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군사운동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미주한인사회에 항일독립전쟁론을 구현하고자 만든 단체였다. 이에 따라 국민군단의 핵심 사업은 ‘산넘어병학교’라 불리는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설립을 통한 독립군사관 양성이었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 설립에 참여한 주요 인물은 박종수 · 구종곤 · 이호 · 안원규 · 김세은 · 이정권 · 노훈 · 임응천 · 한태경 · 한치운 · 이치영 등이었다. 국민군단의 군사교육 활동은 실제 무기가 아닌 목총으로 실시되었고 운영은 원칙적으로 둔전병제(屯田兵制)로 이루어졌다. 즉, 군단에서 기숙하면서 조를 편성해 농장에 나가 노동을 하면서 훈련과 학습을 받는 방식이었다. 조직은 박용만을 군단장으로, 태병선을 부관으로 하는 군단사령부를 위시해 군단경리부 · 제복소 · 병학교 · 별동대 · 곡호수(曲號手)와 고수(鼓手)로 편제되었다. 사관학교는 ‘병학교’로 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직은 모든 한인의 독립군을 ‘대조선국민군단’으로 편성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편성되었다. 이에 따라 군단사령부의 임원은 그대로 사관학교의 임원이며, 사관학교의 생도는 곧 국민군단의 국민군이었다. 군단과 사관학교의 병력은 120∼300여 명에 달했고 군영 낙성식은 1914년 8월 29일에 이루어졌다. 국민군단과 사관학교는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해 1917년경에는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해체의 중요 원인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간의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 · 군사적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한 점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병농일치의 둔전병제에 기반을 둔 운영이 하와이내 농장의 불경기와 흉작으로 수입이 격감하면서 군영 운영을 위한 재정 조달이 어려웠던 점, 마지막으로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을 들 수가 있다. 그러나 국민군단의 상무적(尙武的) 정신은 박용만에 의해 대조선독립단으로 계속 이어져 갔다.
6. 흥사단
흥사단이라 함은 민족 통일, 민주주의 발전, 시민사회 성장, 건전한 청소년 육성을 위한 사회교육 · 국민훈련기관을 말한다. 우리 민족이 세계 최고의 일등국민이 되고, 인류의 존경과 신뢰를 받는 모범 민족이 되기 위하여 국민 개개인의 인격혁명을 통하여 민성혁신(民性革新)과 민력증강(民力增强)을 도모함으로써 민족 앞길에 번영의 기초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경기도홍언(洪焉), 강원도염만석(廉萬石), 충청도조병옥(趙炳玉), 황해도민찬호(閔燦鎬), 경상도송종익(宋鍾翊), 평안도강영소(姜永韶), 함경도김종림(金宗林), 전라도정원도(鄭源道) 등 8도 대표에 의하여 창립되었다.
초창기에는 이민교포 및 유학생을 중심으로 학업과 인격수양, 생활개선, 경제력 증진에 주력하다가 1919년 3·1운동으로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하였다. 또한 서울에 수양동맹회(1922), 평양에 동우구락부(1923)를 결성하여 국내에서 일제치하의 합법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의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1925)로 통합되었고, 그 뒤 동우회로 개칭하였다가 이른바 동우회사건(1937)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 명의 회원이 검거, 투옥된 가운데 강제 해산 당하였다.
광복 이후 1946년에 국내위원부를 조직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본부를 국내로 이전하였다. 1969년 8월 19일에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다. 1981년 6월 민족대학을 개설하였으며, 1985년 3월 도산사상연구회, 1989년 6월 도산아카데미연구원을 창립하였다. 1991년 2월에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부정 선거 감시활동을 벌였다. 1992년 5월에 청소년연구원을 설립하였고, 1997년 3월에 민족통일운동본부를 설립하였다. 1998년 11월에 도산안창호 기념관 건립 및 개관(사단법인 도산기념사업회)하였으며, 2007년부터 독립유공자후손돕기운동본부를 창립하였다.
2007년 5월에 미주위원부 산하 시카고지부를 창립하였고, 2008년 3월에는 평택지부에 도산안창호교육관을 개소하였다. 2008년 10월부터 대학생을 대상으로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의식,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청년인재를 양성하고자 미래사회리더스쿨을 운영하여 2010년 현재 6개 지부에서 운영하고 있다. 2009년 3월 대전에 만인산 푸른학습원을 개원하였고, 광주시에 청소년문화의 집을 개관하였다. 2009년 4월 흥사단 미주위원부 산하 토론토지부를 창립하였고, 6월에는 서울시 중부교육청으로부터 평생교육시설 신고증을 교부받아 평생교육 분야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흥사단은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건전한 민주시민이 갖추어야 할 덕(德)·체(體)·지(智) 삼육(三育)을 기본덕목으로 하는 인격·단결·공민의 3대 훈련을 실시한다. 단우(團友)는 자아혁신·신성단결(神聖團結)·단무봉사·책임완수·대공복무(大公服務)를 5대 생활지표로 삼아 실천하고 있다.
흥사단은 민족화해 협력을 위한 6·15남측위원회 참여 등 민족통일운동, ‘흥사단 투명상’ 시상 등 투명사회운동, 교육운동, 독립유공자 후손돕기, 공명선거운동, 우리 땅 독도 지키기 운동 등 시민사회운동, 청소년운동을 하고 있다.
2010년 현재 국내에는 서울지부, 부산지부 등 25개 지부가 있으며, 미주위원부 산하에 LA지부, 워싱턴DC지부, 동남부지부, 서북미지부, 필라델피아지부, 뉴욕지부, 시카고지부, 토론토지부 등 총8개 지부가 있다. 2010년 현재 흥사단의 부설 조직은 3개 운동본부(민족통일본부, 투명사회운동본부, 교육운동본부), 6개 부설기관(중앙수련원, 청소년연구원, 평생교육센터, 사회봉사단, 도산아카데미, 도산청소년재단), 강서 청소년회관, 강남 주민편익시설, 부산 동구 자원봉사센터 등 총 14개 수탁시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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