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어원 자료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번듯하다는 말은 ‘귀, 눈, 입, 코'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귀, 눈, 입, 코가 제 구실을 못했을 때, 즉 귀로 듣지 못할 때, 눈으로 보지 못할 때, 입으로 말하지 못할 때, 코로 숨 쉬지 못할 때, 우리는 ‘귀가 먹었다, 눈이 멀었다, 말을 먹었다 ‘(말을 더듬다란 뜻의 북한 지역 방언), 코가 먹었다(또는 ‘코가 막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각각 ‘귀머거리(또는 일부 방언에서는 ‘귀먹쟁이, 귀먹장이')', ‘장님(또는 ‘소경, 맹인, 봉사)', ‘벙어리(또는 ‘버버리')', ‘코머거리'라고 한다. 흥미롭게도 이 네 가지 단어 중에서 ‘장님'을 뺀 나머지 세 가지 어휘가 ‘-어리'로 끝난다는 점이다.
‘귀머거리'와 ‘코머거'는 각각 ‘귀 먹다, 코 먹다'에서 온 말로 보인다. 이때의 ‘먹다'는 ‘음식을 먹다'의 ‘먹다[食]'가 아니라 ‘막다[塞]'의 의미를 가진 ‘먹다'이다. 그런데도 ‘귀먹다'를 높여서 말한답시고 ‘귀 잡수셨다'고 하는 말을 간혹 듣는데, 이것은 ‘귀먹다'의 ‘먹다'를 ‘밥을 먹다'의 ‘먹다'로 잘못 인식한 데에 기인한다. 원래 ‘귀먹다, 코먹다'는 ‘귀가 막히다, 코가 막히다'란 뜻이다. ‘귀머거라와 ‘코머거리'는 ‘귀 + 먹- + -어리', ‘코 + 먹- + -어리'로 분석된다. 이때의 ‘-어리'는 접미사이다.
이러한 점에 유추되어 ‘벙어리'도 ‘벙- + -어리'로 분석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머거리'는 ‘먹다'란 동사가 있어서 그 분석이 용이하지만, ‘벙어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벙다'란 동사가 없고 또 방언형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서, ‘벙- + -어리'로 분석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벙어리'는 어디에서 온 말일까?
‘벙어리'를 뜻하는 15세기의 어형은 ‘버워리'였다.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의 문헌에 나타난다.
이 사라믜 功德이 後生애 陶羅尼菩薩와 한 고대 나리니 根源이 날카바 智慧하야 百千萬世예 버워리 아니 다외며 입내 업스며 혓 病 업스며 입 病 업스며 니 검디 아니하며 누르며 성긔디 아니하며<1447석보상절, 19, 6b>
이러호마로 먹뎡이 갇하며 버워리 갇하야 답다비 모랄씌 더욱 두리여 것마라 주거 싸해 디다하흐니라<1459월인석보, 13, 18b>
根이 날카바 智慧하야 百千萬世예 乃終 내 버워리 아니 다외며 입내 더럽디 아니하며 혜 샹녜 病 업스며 이비 또 病 업스며 니쁴 무더 검디 아니 하며 누르디 아니 하며<1459월인석보, 17, 52a>
버워리 음(瘖), 버워리 아(瘂) <1527훈몽자회, 중, 16b>
이 ‘버워리'는 동사 ‘버우다'의 어간 ‘버우-'에 접미사 '-어리'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이다. 접미사 '-어리'는 ‘주둥아리, 병아리(비육 + -아리), 죵아리(踵 + 아리), 주저리 / 죽어리(죽 + -어리, 쭉정이)' 등에서도 보이는데, 사물명사를 파생시키기도 하고 동식물명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주둥아리'처럼 낮춤이나 작은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버우다'의 ‘버우'에 낮춤을 나타내는 접미사 '-어리'를 붙여서 만든 단어가 ‘버워리'라고 할 수 있다.
16세기 초까지 문헌에 등장했던 ‘버우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로 보이지만, 더 정밀한 고찰이 필요하다. 간혹 ‘버우다'를 ‘말을 더듬다'란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잘못 안 것이다. 왜냐하면 중세국어에서는 ‘말을 더듬다'란 뜻을 가진 다른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혀더트다(또는 ‘더투어리다), 말구디하다'와 같은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모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다.
謇 말구들 건(又謇誇直言貌) 吃 혀더틀 걸(口不便言) 말구들 인 訒 말구들 신 訥 말구디할 눌(言難) <1527훈몽자회, 하, 12b>
拮吧子 더투어리난 놈<1690역어유해, 상, 29a>
‘버워리'가 주로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쓰인 것과 마찬가지로 ‘버우다'란 동사도 같은 시기에 흔히 쓰였다.
兄弟 夫妻달할 니라니라 三寶 허러 비우스릴 맛나단 눈 멀며 귀머그며 입버옳 報랄 니라고 法 므더니 너기며 가라춈 업시 우릴 맛나단 惡道애 오래 이숧 報랄 니라고<1459월인석보, 21, 66b>
南閻浮提예 諸國王 宰輔大臣 大長者 大刹利 大婆羅門 等이 맛낫가반 貧窮한 사라미 어나 癰殘하며 입 버우며 귀머그며 눈멀며 가티 種種 갓디 몯한 사라말 맛나 이 大國王等이 布施코져 핧 제<1459월인석보, 21, 139b>
十方如來 이 呪心을 브트샤사 能히 十方애 한 受苦랄 빠혀 濟度하시나니 닐온 地獄과 餓鬼와 畜生과 눈머니와 귀머그니와 입버우니와 寃鎌뫼우니 돋는 苦와 사랑하오니 여희난 苦와 求를 得디 몯하난 苦와 五陰이 熾盛홈과 크며 져근 여러 橫알 흔쁴 解脫케 하며<1461능엄경언해, 7, 43a>
귀로 드루미 귀 머근 듯흐고 이브로 닐오미 입 버운 닷하도다<1482금강경언해, 5, 4a>
일로브터 귀 머근 닷 입 버운 닷하야 답쪄 아디 몯할 씌 닐오듸 더욱 다시 두려 답쪄 주거 따해 디다 하니
라<1463법화경언해, 2, 202a>
하다가 사라미 다외면 귀 먹고 눈 멀오 입 버우며 艱難한 여러 가짓 衰로 제 莊嚴하며 水腫乾瘡와 이러탓한 病으로 오살 사마며<1500개간법화경언해, 2, 60a>
귀로 드루미 귀 머근 닷하고 이브로 닐오미 입 버운 닷하도다<1482금강경인해, 5, 4a>
샹녜 어려운 고대 나 미치고 귀 먹고 마사미 어즈러워 기리 法 듣디 몯히애 無數劫이 恒河沙 갇한 듸 나면 곧 귀 먹고 입 버워 諸根이 갓디 몯하리며 샹녜 地獄애 이쇼듸 園觀애 노니<1500개간법화경언해, 2, 59b>
위의 예문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듯이, ‘버우다'는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반드시 앞에 ‘입'과 통합되어 ‘입 버우다'식으로만 쓰였다. 엄밀히 말하면 ‘입 버우다'가 ‘말을 하지 못하다'는 뜻이어서, ‘버우다'란 동사 자체가 ‘말을 하지 못하다'란 뜻을 가진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앞뒤의 문맥이나 ‘귀먹다, 코먹다'란 말로 유추해 보면 ‘버우다' 그 자체는 ‘말하지 못하다'란 뜻이라기보다는 ‘(입을) 막다'나 ‘(입이) 막히다'란 뜻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입 버운 사람'을 ‘입버워리'라고 하지 않고 ‘입'을 떼어 버리고 ‘버워리'로만 씀으로써 ‘말을 못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입머거리'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입이 막힌 사람을 ‘버워리'라고 한 이유도 설명하기 어렵다.
‘버우다'와 ‘버워리'가 16세기 초까지 쓰이디가 사라지면서, 16세기 말에 ‘벙어리'가 등장한다. ‘버워리'에 대신하여 ‘벙어리'가 나타났다면, ‘버우다'가 사라지면서 어떤 어휘가 ‘버우다'를 대신하게 되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버우다'에 대체되어 쓰인 단일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버우다'는 ‘벙어리(가) 되다'란 말로 대치되었다. 그 결과로 ‘귀먹고 벙어리된 사람 가라치난 원<1875이언언해, 2, 45b>'과 같은 문장이 등장하게 된다. ‘귀먹고 벙어리 된 사람'은 15세기에는 ‘귀먹고 입버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귀먹고 입버운 사람'은 ‘(귀)먹다'란 동사와 ‘(입)버우다'란 동사가 연결된 문장이지만, ‘귀먹고 벙어리된 사람'은 ‘귀먹다'란 동사와 ‘벙어리되다'란 관용구가 연결된 문장이다. 이렇게 ‘버우다'에 대체된 동사가 없기 때문에, ‘벙어리며 귀머그며 눈멀며 이가티 가디 가디로 갓디 못한 사름을 만나면<1752지장경언해, 하, 1b>'처럼 그 구성이 반듯하지 못한 문장이 등장하
게 된다. ‘벙어리''와 ‘귀먹다'는 ‘-며'나 ‘-와'로 연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벙어리와 귀먹으니와 다리저난 이까지 니르히 아니 흔흔히 서로 즐겨하리 업서 <1784왕세자윤음, 2a>'와 같은 문장에서는 ‘벙어리'와 ‘귀먹은
니'의 연결이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귀 먹다'는 ‘벙어리 되다'와 연결되는 것이다.
‘벙어리 되다'와 유사한 의미로 쓰인 것이 ‘말 못 하다'이다. 그러나 ‘말 못 하다'는 다음의 예문들에서 볼 수 있듯이, ‘벙어리 되다'란 뜻으로도 쓰이지만, 말을 할 수 있어도 여건상 말을 할 수 없는 경우에도 흔히 쓰이는 것이어서 ‘벙어리 되다'와 동의어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가히 어엿브다 뎌 말 못하난 즘승들흘 먹이기랄 이긋 못하니<1677박통사언해, 상, 21a>
能히 말 못하면 錦繡를 안 믠들며 蘭草를 우믈에 심으기예셔 다름이 업사니라<1790첩해몽어, 1, 15b>
듕풍으로 말 못하며 어즐코 답답하며 담쳔으로 열한 증이며 샹한의 열이 나며 <16xx언해납약증치방, 1a>
人豕난 前漢 皇后呂氏 戚夫人을 새와 손발 베히고 눈알 빠히고 귀를 지지고 말 못할 藥을 머기고 뒷간의 드
리텨 두고 일홈을 사람 돋티라 하리라<1737어제내훈, 2, 59b>
결국 ‘버우다'란 동사는 사라지고 ‘벙어리되다'란 말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벙어리'란 단어는 ‘버워리'에 대체되어 16세기부터 등장한다. 물론 ‘벙얼이,벙얼'과 같은 형태도 보인다.
또 몸을 옫칠하야 라질을 믱글며 숫글 먹움어 벙어리 되여 져제 단니며 비니 그 겨집은 아디 몯하거늘 그 벋이 아라 위하야 울고 갈오듸<1586소학언해, 4, 31b>
벙어리(啞子)<1690역어유해, 상, 29a>
벙어리(啞吧)<1690역어유해, 상, 29a>
입때예 독이 셩하야 열이 극하고 긔운이 약하야 소릐가 벙어리 가탄 쟈난 맛당히 희독방풍탕 두어 텹을 뻐 독을 헤티미 가하니라<1663두창경험방, 54a>
姐夫 ㅣ 먹으면 마암을 動하고 姐姐 ㅣ 먹으면 눈을 뜨고 벙어리 져기 잔쥬랄 먹으면 곳 소릐랄 여러 昞喊할 줄을 아나니라<1721오륜전비언해, 4, 2a>
오쥬 예수ㅣ셰샹에 계실 제 손으로 한 귀 막히고 벙어리 된 자의 귀와 혀랄 만지시매 그 병이 나아 능히 말하고 능히 드라니<1864셩교절요, 15b>
嘴偃子 반벙얼이<1715역어유해보, 20a>
이븩셰 후 사람 되나 벙얼 언쳥 되거구나<1796전설인과곡, 9a>
귀신알 쫏츠믜 벙얼이 말하니 뭇사람이 긔긔히 네겨 갈오되<1887예수셩교전서, 마, 33>
유리병의 잇난 슐은 말 못하난 벙얼이에 말을 한난 셜화쥬요<1916박흥보, 19a>
이 ‘벙어리'는 어디에서 온 단어일까? ‘버워리'에서 ‘벙어리'가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버우 + -어리'가 ‘버워리'가 되고 ‘버워리'의 ‘워'가 단모음화되어 ‘버어리'가 되고, ‘버'에 ‘ㅇ'이 붙어야 한다. ‘버워리'가 ‘버어리'나 ‘버우리'가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음운 변화이기도 하다. 방언을 반영한 문헌이나 일부 방언에서는 ‘버어리'나 ‘버우리'가 ‘벙어리'의 뜻으로 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啞 버어리 아<1910역대천자문, 9a>
삼년을 그래 그저 아무 소릴 해도 대답도 아이허고 버어리처럼 그래곤 이제 그렇게 참으이까네루,<한국
구비문학대계2-7, 252>
동생은 없다고 [고개를 흔들며] 고만 내젖는기라. 자 이게 버우린(벙어리) 버우린데, 이거 말을 못하니 이거 참 얼굴은 보니 뭐뭐 이주 참 그 뭐 아주 미인이라 <한국구비문학대계3-4, 24>
그렇다면 ‘벙어리'에 보이는 ‘o'은 무엇일까? 어떤 학자는 ‘버어리'에서 모음충돌 기피 현상(hiatus 기피현상)으로 [∩]음이 개재되었다고 설명하지만 설득력이 약하다. 왜냐하면 이처럼 모음충들이 일어나는 모든 음절경계에 [∩]이 다 게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벙어리'의 ‘ㅇ'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다른 단어를 개입시키기도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버우다'가 ‘말을 못하다'란 뜻보다는 ‘막다, 막히다'란 뜻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중세국어에서는 ‘막다, 막히다'란 뜻을 가진 단어로 ‘버우다'와 매우 유사한 음상을 가진 ‘벙을다'와 ‘벙으리왇다'란 동사가 쓰이고 있었다. ‘벙을다'는 간혹 ‘버을다'로도 표기되었다. 그리고 ‘벙으리왇다는 ‘벙을다'의 강세형이다.
예셔 잣 벙으로미 오릿 길히 잇다(這裏離喊有的五里路) <1517번역노걸대, 상, 66a>
이 眞言 다삿 字난 다 이블 벙으려 소리 나가게 하나니 世間냇 사라미 아비 갇하니라<1569칠대만법, 12a>
입벙으렛난 닷고 巴江ㅅ 븨랄 볘며 씌 찻도다(吩然間城南枕帶巴江腹)<1613두시언해(중간본), 13, 15b>
하다가 가장 샹하야 긔우니 그처 말 몯하난 주랄 믄득 아라 약곳 몯미처 할 양이어든 빨리 입을 벙으리왇고 더운 오좀을 브스라<1489구급간이방, 1, 78b>
위의 예문에서 ‘입벙을다'는 ‘입을 벌리다, 거리가 있다, 사이가 벌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입을 벙으리왇다'는 한자 ‘벽개구(擘開口)' 즉 ‘입을 찢어 벌리다'란 뜻이다. 그러나 ‘벙을다'는 ‘막히다'란 뜻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벙으리왇다'도 ‘막다, 거절하다' 등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내 외로왼 무더믈 가 울오져 사랑컨마란 南 녀긔셔 도라갈 舟楫ㅣ벙으레리(吾思哭孤豕 南紀阻歸楫) <1481두시언해, 24, 17a>
幽明의 逼迫호말 벙으리와도미 어렵도다(難拒幽明迫)<1613두시언해(중간본), 7, 26a>
낭션슈난 마랄 벙으리와드며(笑手拒馬)<1612연병지남, 25a>
한 번 紫臺랄 벙으리왇고 朔漠애 니어 가니(一去紫臺連朔漠)<1613두시언해(중간본), 3, 68b>
기젹인이 지게랄 열거든 마참내 버서난 톳기 가티 하면 도적이 미처 벙으리왓디 몯한다 하니 그 그러티 아니하냐<1787병학지남, 19b>
예도적의 핍박한 배 되여 힘서 벙으리왓고 주그니 금 샹됴의 졍문하시니리(爲倭賊所迫力拒而死)<1617동국신속삼강행실도, 열녀도, 4, 34b>
어떻게 해서 한 단어가 ‘벌리다, 벌다'란 뜻과 그 반대의 의미인 ‘막히다'란 뜻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벙을다, 벙으로왇다‘를 ‘벙어리'와 연관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벙을다'에서 ‘벙어리'가 되기 위해서는 ‘벙을- + -어리'를 통해 ‘벙어리'가 아닌 ‘벙으러리'가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형태는 문헌상에 한 예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벙어리'를 ‘벙을- + -이'로 분석하기도 한다. ‘벙을다'가 ‘막다, 막히다'란 뜻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병을- + -이(접미사)'로 분석하여 ‘막힌 사람'이란 의미로부터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전이가 일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주장, 즉 ‘버워리'에서 ‘벙어리'가 되었다는 주장과 ‘벙을다'의 어간 ‘벙을-'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붙어서 ‘벙을이'가 되고 이것이 모음변이를 거쳐 ‘벙어리'가 되었다는 주장, 그리고 ‘벙을다'의 어간 ‘벙을-'에 접미사 '-어리'가 통합되어 ‘벙어리'가 되었다는 주장 중에서 어느 설명이 가장 타당성이 있을까? ‘벙어리'와 ‘버워리'는 그 어원을 달리하는 듯이 보인다. ‘벙어리'는 ‘벙을다'의 어간 ‘벙을-'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통합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 같다. ‘벙을이'가 ‘벙어리(또는 ‘벙얼이')'가 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모음변이다. ‘벙으리왇다'가 ‘벙어리왇다'로 표기된 다음 예문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母ㅣ지게랄 벙어리아다 그 은혜 업삼을 責하고(母ㅣ拒戶而責其無恩하고)<1736여사서언해, 4, 13a>
妻 崔氏ㅣ河北이 크게 어즈러오매 夫婦ㅣ兵을 避하엿더니 崔 잡피이믈 닙어 그 夫를 免케 하고 칼할 잡
아 써 賊을 벙어리아드니 賊이 怒하야 어즈러온 살로 쏘아 죽이다 元末의 醮中이 크게 줄이니 兵이 사람을<1736여사서언해, 4, 27a>
그렇다면 ‘버워리'는 ‘버우다'에서 파생되었다고 했는데, ‘버우다'는 그 어원이 무엇일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현대국어의 방언형에 ‘벙어리'를 ‘버버리'라고도 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軍들, 祈禱할 때에, 하나님 아바지시어! 나의 罪를 赦하소서, 아-맹, 하지안소? 그러나 아-맹이란 무엇이오. 孟子가튼 萬古의 雄辯家다리 버버리라고 啞孟이라 하니 그런 無識한 말이, 아 어대잇단 말이요?<1921표본실의 청개구리, 144>
난 네놈의 새끼가 도무디 비위에 맞디 않아요. 첫때 데 새낀 버버리디 사람을 보구두 인삿말 한마디 없쉐다레 <1954카인의 후예, 214>
전에 한 사람이 봉산데, 버버리하고 봉사하고 부부간을 맺어갖고 살거든요. 그래서 평소에 인자 여자는 버버
리고, 남자는 봉사닝께.<한국구비문학대계6-1, 603>
‘버버리'를 ‘버워리'로부터 변화한 어형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버버리'의 변화형이 ‘버워리'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버버리 > 버븨리 > 버워리'와 같은 변화형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버버리'는 ‘버브다'와 같은 동사로부터 파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버브다'의 어간 ‘버브'에 명사형 어미 ‘-어리'가 통합된 것이 ‘버버리'로 보인다. 그리고 이 ‘버브다'가 ‘버브다> 버부다> 버우다'와 같은 변화를 거쳐 15세기에 ‘버우다'가 흔히 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버우다'의 어간 ‘버우-'에 명사형 접미사 ‘-어리'가 붙어 ‘버워리'가 된 것이다. 16세기에 ‘버우다'와 ‘버워리'가 사라지고 ‘벙어리'가 등징하였는데, 이 ‘벙어리'는 ‘막다, 막히다'의 뜻을 지닌 ‘벙을다'의 어간 '병을-'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붙어 파생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어휘가 규칙적인 변화를 거쳐 새로운 어형이 생성되어 쓰이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에는 이와 유사한 음상과 의미를 가진 어형에 유추되어 또 다른 어형을 만들어 쓰는 것은 어휘 변화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음운이나 문법과는 달리 어휘는 개별성이 있기 때문이다.
'벙어리'라는 우리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벙+어리'의 짜임입니다. '어리'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니, '벙'의 뜻만 알면 됩니다.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쓰이던 말 중에 '벙을다'라는 움직씨가 있습니다. '버울다', '버우다'와 같이 꼴이 바뀌어 쓰이는데, 막혔다(塞)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뜻이 또렷해지죠. 벙어리란, 입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게 막힌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하, 입으로 나와야 할 것이 나오지 않는 사람의 딱한 상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표현한 말이구나!'라고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이토록 알맞게 드러내고 그릴 수 있는 우리말의 표현력에 크게 감동합니다.
저는 지금 이 글을 '아래아 글 ' 워드프로세서로 쓰는 중입니다. ' 글'에는 맞춤법 자동 알림 기능이 있습니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리면 자동으로 그 글씨 밑에 붉은 줄이 쳐집니다. 그런데 '벙어리'라는 말에도 붉은 밑줄이 그어졌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여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옵니다.
벙어리 : '언어 장애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
앞서 혼자서 우리말의 풍부하고 적확한 표현력에 울컥했던 감동이 와장창 깨집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물을 것도 없이 한글학자들이겠지요. 국립국어원에서 근무하는 대단한 학자분들의 결론이겠지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소설가 나도향은 소설 제목을 왜 「벙어리 삼룡이」라고 붙였을까요? 당시 나도향은 겁대가리 없이 어찌 전국의 모든 벙어리들을 얕잡아 이르렀을까요? 이렇게 얕잡아 이름을 당한 분들에게 혼날 것을 뻔히 알면서 그랬을까요? 이상하지 않은가요? 저만 이상한가요?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당시에 '벙어리'는 '얕잡아 이르는 말'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벙어리가 얕잡아 이르는 말이라면 우리 국어 생활은 정말 큰일납니다. 왜냐? 써서는 안 될 말이 엄청 많거든요. '벙어리장갑, 벙어리저금통, 벙어리뻐꾸기, 글벙어리, 반벙어리' 같은 우리말은 써서는 안 될 말이 될 것이고, 다음과 같은 속담도 써서는 안 될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꿀먹은 벙어리.
벙어리 속은 그 어미도 모른다.
벙어리 소를 몰고 가듯이.
벙어리 냉가슴 앓듯.
이런 속담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속담에는 우리 겨레의 많은 슬기가 녹아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할까요?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는 1925년에 발표된 소설입니다. 소설의 제목에 얕잡아 이르는 말을 썼을 리는 없습니다. 이때만 해도 '벙어리'는 얕잡아 이르는 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겨레라면 누구나 쓰는 흔하디흔한, 그리고 높낮이가 없는 평범한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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