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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아름답다 어원 자료

by noksan2023 2025.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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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어원 자료

 

 

그녀의 당당함이 아름답다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사람들은 많은 일을 합니다. 날마다 운동을 하고, 겉을 꾸미고, 늙어 보이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늙지 않는 게 아름답다는 생각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 우리는 달라집니다. 겉을 가꾸어서는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없음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아름다움은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서 이미 느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에도, 세상에도 아름답다는 표현을 쓰지만 아름다움을 정의 내리기는 참 어렵습니다. 실제로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죠. 그런데도 자꾸만 아름다움의 기준을 정하려고 하고, 구별을 지으려고 합니다. 정의도 수없이 많습니다. 아름다움이 무기라고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참다운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름다운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보기에 좋은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싶은 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가치가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말 ‘아름답다’는 참으로 특별한 세상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아름답다’라는 말의 ‘아름’이 옛말에서는 ‘나(私)’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私)는 개인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나라는 뜻도 있습니다. 일본어에서도 사(私)를 ‘나’라고 해석합니다. 우리말에서 아름답다는 말은 ‘나답다’는 말입니다. 나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빛나게 하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름답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하고 다짐을 하지만 금방 나를 다른 이와 비교하고 맙니다. 내가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끼는 것은 남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내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 어찌 나쁜 일이겠습니까? 자꾸 비교하고, 자꾸 남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하니 초라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닌데, 불필요한 경쟁을 합니다. ‘선(善)’을 위한 경쟁이 아닙니다. 욕심이 커집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잘난 척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삶이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는 말은 자존감과는 거리가 먼 말입니다. 자신감, 자존감과 자만심은 종류가 다른 말입니다. 겸손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겸손한 척하는 것은 잘난 척과 마찬가지로 문제입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것은 나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이지 부족한 척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말에서 아름답다는 말은 우리에게 나로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아름답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겁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아름다워져야 할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릴 때는 다른 사람처럼 되려고 애쓰며 살고, 더 화려해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나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젊음은 겉모습으로 빛이 나는 때이기에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기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나로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아름다움은 외모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겉모습으로 아름다움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내게 이미 주어진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면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남과의 비교는 나를 남이 되게 만듭니다. 타인의 모습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다 보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남도 귀하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나도 이렇게 귀한 데 남이라고 귀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바로 그 순간 내가 변합니다. 아름다워집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보게 됩니다. 아름다움이란 그런 겁니다.

 

아름답다는 고유어에서 '아름'의 정확한 의미를 안다면 아름다움을 보는 우리 민족의 미의식을 밝힐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름-'의 본뜻을 파악하기가 어려워 한국인이 무엇을 아름답게 보고 좋게 여기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와 유사한 말 '예쁘다'나 '곱다'란 말의 어원을 통해 '아름'의 의미를 유추해보는 방법도 있다. 예쁘다는 중세어가 '어엿브다'로 본시 '가련하다, 불쌍하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훗날 아름답다는 의미로 변질되었다. 

 

'예쁘다'는 외국어로 옮기기 어려운, 매우 특이한 우리말이다. 예쁘다는 그냥 아름답다고 하기엔 무언가 정실이 빠진 것 같고, 그저 곱다고 하기엔 응석이 빠진 것 같은,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예쁘다는 일종의 가련미(可憐美)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가엾은 배려를 받은 수동적인 미요, 인정 베풀기를 지그시 기다리는 연약한 아름다움이다. 가엾다는 말이 아름답다는 말로 전이되는 그 과정이 적이나 한국적이며, 그것은 약자를 자처하며 약자 편에 들어 약자에 공감하는 의식 구조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곱다 역시 원래 직선이 아닌 곡선, 즉 '굽(곱)은 것'[曲]을 지칭하던 것이 지금은 아름다움의 의미로 전이된 말이다. 이를 감안하면 아름다움의 '아름-'도 작은 것, 약한 것을 나타내는 말로 추정할 수 있겠다. '아름답다'의 동의어 아리땁다의 '아리-'도 병아리의 '-아리'나 송아지, 망아지의 '-아지'처럼 작은 것, 어린 것을 나타낸다. 작고 어리고 약하다 보니 불쌍하고 가련하여 사람들로부터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불러일으켰나보다. 

 

최근 유행하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라는 명언도 바로 그런 상황의 소산이다. 중국인들은 '큰 것'(美는 '羊'에 '大'의 결합)을 좋게 보고, 서구인은 유별난 것, 개성적인 것을 아름답게 보았다면 한국인들은 인간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작고 연약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꼈음직도 하다.

 

말의 어원을 더듬다보면 이처럼 그 말을 만든 주체의 사고나 정서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된다. 말밑 속에 숨어 있는 화석이 바로 그 말을 만든 민족의 정신이요, 얼임을 개닫기 때문일 것이다. '사피어(E. Sapir. Language 1921)에서도 이와 같은 주장을 듣게 된다.

 

"언어의 배후에는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란 문화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문화라는 것은 바로 그 사회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관습과 신화의 총화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에 의해 우리들의 생활 조직이 결정된다."

 

언어학에서 쓰는 전문용어를 빌린다면 계통은 '밝히고' 어원은 '캔다'고 말한다. '캐다'는 

 

"금을 캐다, 나물을 캐다"

 

에서와 같이 어디 땅 속이나 은밀한 곳에 묻힌 보물을 찾아낼 때 쓰는 말이다. 어원 탐구는 말 그대로 말 뿌리에서 조상의 사상이나 감정, 정서, 사고방식이나 의식 구조 등 제반 문화 요소를 캐내는 일이다. 이렇게 캐낸 무형의 문화재는 그 고귀함에 있어 땅 속에서 파낸 어떤 귀금속과도 비교될 수가 없다.

 

말밑을 말찰 혹은 말 뿌리라 하고 한자어로는 어원(語源, 또는 어근(語根))이라 한다. 어원론(Etymology)이라 하면, 한 낱말이 처음 어떻게 생겨나 형태나 의미면에서 어떤 변천을 겪었는가를 밝히는, 어휘론의 한 분야이다. 언어의 갈래를 밝히는 계통론(Genealogy)에서와 같이 어원론 역시 말의 뿌리를 캐는 연구라 역사언어학이나 비교언어학과도 밀접히 관련된다. 일상으로 쓰이는 낱말들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를 가려낼 수 있다면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어떤 사고방식 도는 생활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를 알아낼 수가 있다는 언어 이론이 있다. 

 

보통 언어학이라면 딱딱한 분야로 알고 있으나 어원론만은 여기서 예외로 치는 듯하다. 말 뿌리를 캐는 일이라면 누구나 관심과 흥미를 보이기 때문이다. 어원에 대한 이런 관심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에 의한 흥미만은 아니다. 족보라고 하는, 한 개인의 뿌리도 그렇지만 언어도 그 자체의 뿌리에 대해서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이를 찾고자 하는 욕망도 어쩌면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원초적 본능일 수도 있다. 

 

 

 

아름답다

 

 

어엿비_불쌍하게

 

 

'아름답다'는 '알음'과 '답다'가 결합된 합성어로 이해할 수 있다. '알다'라는 동사 어간에 '-음' 접미사가 붙은 것이 '알음'이다. 접미사 '답다'는 '충분히 성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아름답다(알음답다)는 알음이 충분히 성숙하여, 탁월하게 슬기로운 자를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어원에 따르면 '아는 것'은 아름다움의 전제가 된다. 혹은 '아름답다'를 '아름'과 '답다'의 합성어로 보기도 한다. '아름'의 '아람'을 '사유(私有)'의 뜻으로 여겨 중세 국어에서는 '개인적인 것'이나 '사라로운 것'을 '아람'으로 표기하였다. 따라서 '아람답다'는 너와 나, 인간과 자연의 사사로운 구분을 모두 없애고 하나 되어 상생의 본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중국 서주시대의 점(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주역>에서는 천지 자연의 본래 모습을 '생(生)'이라 했고, 유교경전 <사서>에서는 인간의 본래 모습을 너와 내가 구분 없이 서로 하나 되어 사는 것으로 보았다.

 

지금의 '예쁘다'는 15세기의 '어엿브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단어는 '어엿-'과 '-브-'와 '-다'로 분석할 수 있다. '-브'는 형용살르 만드는 접미사이고, '-다'는 어말에 붙는 어미다. 그런데 여기서 '어엿-'의 정확한 역할은 알 수 없다. 15세기의 '어엿브다'는 '딱하다' 또는 '불쌍하다'의 의미로 쓰였다. '어엿브다'는 어여쁘다'로, 그리고 '예쁘다'로 축약되어 쓰이고 있다. 이것은 지금의 '아름답다'나 '귀엽다'의 의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숙종 24년 과학기술서인 <신전자초방언해>(1698)의 "그 비치 빛나고 조하 가히 어엿브니(그 빛이 빛나고 깨끗하여 가히 아름다우니)"에서 '어엿브다'의 의미 변화를 엿볼 수 있다. 가엽고 가련한 상태는 많은 사람의 동정과 애정을 끌어낼 수 있는 조건이기에 그것을 기본으로 하는 애처로운 상태 사랑스럽고 귀여운 존재로 바꿔 생각할 수 있다. 

 

 

‘아름답다’의 어원은 ‘성교(쎅스)를 잘할 것 같다’?

 

 

아름답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말들은, 말이 시작될 무렵에는 어떤뜻으로 쓰여졌다가 지금과 같이 진화 되었을까? 오늘은 ‘아름답다' 라는 말에대해 역시 ㄱ ㄴ ㄷ...ㅎ의 뜻을 밝히는책 [천부인 ㅇ ㅁ ㅿ] 에서 알아본다.

국내의 언어학자들은 이 ‘아름답다’의 ‘아름’을 ‘아롬(私.나)’, ‘안음(抱)’ ‘알음 (知)’ 로 의견이 분분한데 우선 나(私)를 주장하는 서 모 전 교수는 ‘답다’는 명사 뒤에 붙는 접미사로 명사를 형용사로 전이시키는 구실을 하고 있음으로 아름은 명사이어야 하는데 알다(知)나 안다(抱)는 동사이며 알(知), 또는 안(抱)에서 ‘음’ 이라는 접미사가 붙어 ‘알음’이 되는 전성명사에 ‘답다’ 라는 접미사가 다시 붙어 형용사가 된 예는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답다’는 ‘학생답다’, ‘소녀답다’, ‘여자답다’ 와같이 명사 뒤에 붙어야지 ‘졸음답다’, ‘웃음답다’, ‘울음답다’ 하는 식으로 전성명사 뒤에 ‘답다’가 붙는 조어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은 나(私)이며 그래서 ‘아름답다’는 결국 ‘나답다’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세상사람 중 다 제 잘 란 맛에 살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이 추한 모습과 고약한 성격을 가졌어도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나 답다’ 라는 의견은 글쓴이는 부정한다.

고대 사회에서, 특히 우리 고대 선조는 ‘나’ 라는 의미가 없었거나 있었어도 아주 약하게 또는 ‘나’와 ‘너’가 혼용되거나 또는 ‘나’의 의미는 부정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지금도 동물이나 어린 아기 또는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자연생명대로 살아가는 소위 오지의 미개인들한테는 ‘나’가 없다 그저 본능대로 자기 입에 먹을 것을 집어넣을 뿐이며 그들에게 있는 것은 ‘나’ 대신 ‘우리’ 뿐이다.

즉 나의 본질은 ‘우리’이고 ‘나’란 벌이나 개미처럼 ‘우리’라는 생명체의 세포 하나하나가 공간적으로 확산 된데 불과한 것이며 이 ‘우리’에서 ‘나’ 가 생긴 것은 인류의 지혜가 발달하면서부터 인데 이 ‘나’가 생김으로 필요 없고 한없는 욕심과 질투와 전쟁이 생겨났음으로 이 ‘나’는 ‘나뿐’ 이라는 지혜가 곧 창세기에서 말하는 선악과 열매로도 본다.

우리말에서는 ‘나’가 매우 부정적이다. 이는 예를 들면 우리말에는 ‘악(惡)’ 이 라는 단어가 없는 대신에 ‘나뿐’ 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대신 한다. 즉 ‘나뿐 만을 아는 자’ 를 ‘나뿐 넘’ 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본 것이고 나 뿐만을 아는 이기적인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세계인이 배워야할, 진정으로 전쟁을 없애고 세계 평화를 이를 수 있는 우리말의 철학이고 교훈이다.

그러므로 소위 문명인이라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현대인의 의식 같으면 ‘아름답다’를 ‘나 같다’ 는 해석이 그럴듯할지 몰라도 고대 우리 선조들은 절대로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 다른 학자는 ‘안음’(抱)를 주장한다. 그 이유는 안음이라는 안음(抱) 동사의 명사형에 ‘답다’가 붙어 형용사가 되는 것은 안음은 본시 ‘안다(抱)’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이는 명사형이 아니고 파생어이기 때문에 ‘안’과 ‘으’와 ‘ㅁ’이 붙어 완전 자립명사로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아름답다는 끌어안음과 같다고 말 할 수 있는데 어린아이를 끌어안건 남녀가 끌어안건 안는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학자의 견해에는 큰 이의는 없다. 그러나 이 안음은 서로가 한 몸이 되는 자타일체(自他一切)의 켜 안음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최소한 말이 생성하려면 강력한 자극이 있는 행위이어야만 한다. 즉 적당히 한 아름 끌어안는 행위로는 말이 성립 할 수 없다는 것이 글쓴이의 의견이다.

그러므로 ‘아름’은 ‘아우름, ’어우름‘ 인 교(交)에서 나온 말이어야 하고 이 교 도 보통 교가 아니라 성교(性交) 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아름답다’는 ‘성교답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먼저 학자의 말대로 조어 법상 문제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반만년 전 고대 사회에서 지금같이 조어법대로 우리말이 형성될 리도 없겠거니와 동사가 어떤 경우에 파생어가 되어 명사로도 될 수가 있다고 본다. 즉 ‘답다’는 ‘학생답다’, ‘소녀답다’ 와 같이 명사 뒤에 붙어야지 ‘졸음답다’, ‘웃음답다’ 하는 식으로 전성명사 뒤에 ‘답다’가 붙는 조어법은 그 예가 없다고 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이야기이다. 예를 들면 냉정한 인간을 ‘얼음답다’ 라고 해도 조어법상 말은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얼음’은 실은 물의 ‘어우름’ 으로 엄연한 동사이지만 어느새 어우름 > 어름이라는 명사가 되어 ‘답다’를 붙여도 이상 할 게 없다는 말이다. 또 ‘어른답다’ 가 있는데 이 ‘어른’ 이란 무엇인가? 이는 ‘얼루다’, ‘얼룬다’의 동사 ‘얼룬’이 명사 ‘어른’으로 변한 말이다.

이상으로 볼 때 동사였던 ‘어울어짐’ > ‘어울음’ 이 ‘얼음’ 이라는 명사가 되듯 ‘아울어짐’ > ‘아우름’이라는 동사가 어느새 ‘아우름’ > ‘아름’ 이라는 명사가 되어 그 뒤에 ‘답다’를 붙여도 전혀 이상 할게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어름’과 ‘아름’은 그 말이 다르다고 이의를 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먼저 말했듯이 고대에서 우리 모음은 감둥이, 검둥이 등에서 보듯 아래아점만 썼음으로 ㅏ ㅓ ㅗ ㅜ 가 혼용된 결과라고 본다. 그 증거가 바로 화석처럼 남아있는 정선의 ‘아우라지’ 이고 이 아우라지는 두 개의 물줄기가 하나로 아우러져(어울어져) 붙은 이름, 즉 두 줄기의 물이 성교를 하듯 아울어져 있다는 말에서 나온 지명이다.

이를 5 천년 전으로 돌아가 우리 조상이 말을 만들때 그림글씨를 중국인들이 美자를 만든 글자를 보자.

 

[圖釋古漢字 能國榮著 濟魯書社刊]

 

여기서 금문은 모두 두 사람이지만 결국 팔 다리 아래 다리는 하나로 엉킨 그림이 美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물이 엉킨것을 ‘어름’(氷)이라 해도 좋고 ‘아름’ (美)이라 해도 그 뿌리가 같은 말이며 따라서 아름답다를 ‘아우름 답다’. 즉 성교하는 것 같다고 해석하는데 이것을 좀더 쉽게 요즘말로 한다면 아름다운다운 여자는 쎅시하게 생긴 여자이고 쎅시한 여자는 쎅스를 잘할 것임으로 아름답다는 결국 ‘쎅스를 잘할것 같다’고 한다면 여성들 한테 매 맞을 소리 인가?

그러나 이 땅덩이가 만들어진 목적은 생명들이 번식 하라고 만들어진것, 이 생명이 태어나는것은 성장하여 다시 생명을 낳으려고 짝짓기를 하려는것, 짝짓기가 끝나 더이상 새끼를 낳지 못하게 되면 늙고 병들어 땅으로 돌아가는것이 모든 생명의 순환이고 사람도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짝짓기인 어울림= 아룰림 즉 아름다움은 이 땅 위의 생명들의 최대의 목표라고 볼때 '아름답다'를 '성교하는것 같다' 한들 잘못된 표현은 아니다.

약간 빗나간 이야기지만 요즘 ‘사생활(私生活)을 타인이 침해 할 수 없다’는 말은 정사 하는데 는 개(犬)등 짐승들은 치열한 암컷 싸움을 하다가도 일단 한 놈이 교접에 성공하면 그 교접에 성공한 수놈은 몸을 자유로 움직일 수가 없어 다른 개의 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일 것인데 만약 인간 같으면 연적이었던 놈이 움직일 수 없다면 엄청난 해를 가할 수 있을 터인데 개들은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이 그저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이점 인간이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고 따라서 타인의 정사, 즉 타인의 사생활을 관여 할 수 없다는 말은 옳은 말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아름’에서도 하늘의 상징인 ‘ㅇ’을 쓰는 것은 ‘아우름’, 아롬은 결국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알’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며 ‘얼’이 되는 어우름 역시 다음에서 설명하는 생명의 시원 ‘얼’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고 알과 얼이 유사한다는 것 때문이다.

다음 밤송이가 익어서 벌어지는 것이 ‘아람 벌어진다. 인데 이 역시 네 쪽으로 어우러진(아울 어진) 어름이(아름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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