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땅, 입빠이는 가득으로
"만땅이요!" "만땅 넣어 주세요."
행복 만땅, 사랑 만땅, 스트레스 만땅 식으로 우리 실생활에서 다양하게 쓰이는 이 '만땅'이 다시 구설에 올랐다. 2007년 말 교육부에서 대입 수험생들을 위한답시고 홈페이지에 행사 공고를 냈는데, 하필이면 문패가 '으랏차차 기운 만땅'이었던 것이다. 잘하려고 했다가 괜스레 망신만 당하고 서둘러 '으랏차차 기운내요'로 고쳤지만 호된 비판 속에 이미 32만여 명의 방문객이 다녀간 뒤였다.
'만땅'의 정체는 찰 만(滿)자에 영어의 탱크[tank]를 합성한 일본식 조어이다. 일본식으로 읽으면 '만탕쿠'인데 줄여서 그냥 만땅이라 한다. 이보다는 순우리말인 '가득'이 어감도 한결 부드럽고 의미 전달 면에서도 훨씬 경쟁력이 있어 보인다. 격조가 높아지는 언어생활이 된다.
'만땅'과 함께 비슷하게 쓰이는 것으로 '입빠이'도 있다. 일본에서 한자로 일배(一杯)라고 적고 '잇파이'라 읽는데, '가득히'라는 의미이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건너와 술을 마실 때
"입빠이 채워라"
라고 하거나 주유소에서
"입빠이 넣어 주세요."
라는 식으로 마구 쓰인다.
"앵꼬났다. 기름이 앵꼬다."
라고 할 때의 '엥꼬'도 마찬가지다. 이 말은 자동차 등의 연료통에 연료가 다 떨어졌다는 뜻인데 이 역시 일본에서 온 말이다. 일본에서도 엥꼬의 원래 의미는 어린아이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거나 축 퍼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 의미가 확장돼 자동차 등이 고장 나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던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차에 기름이 바닥 난 상태'로 굳어져 쓰인다. 우리말로
"바닥났다, 바닥이다"
라고 하면 자연스럽고 좋다. 실제로 이런 말들은 '언어의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그런 쪽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다.
마후라나 빤쓰, 난닝구, 빵꾸 같은 말도 일상적으로는 아직 쓰고 있으나 적어도 표기에서는 사라졌다. 지금은 오히려 '머플러, 팬티, 러닝셔츠, 펑크' 같은 다듬은 말이 더 익숙하다.
'마후라'는 또 자동차에서 배기가스가 나올 때 나는 폭음을 줄이는 장치를 뜻하기도 하는데 이때는 '소음기'로 순화됐다. '빤쓰' 역시 팬츠(pants)를 일본에서 적던 것이다. 그런데 팬츠는 원래 다리 부분이 아주 짧은 바지, 즉 반바지 같은 걸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빤쓰라고 하는 속옷은 '팬티(panties)'다. 그래서 '빤쓰'는 '팬티' 또는 '속잠방이'로 순화됐다. '잠방이'란 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도록 짧게 마는 홑바지를 가리키는 고유어다. '난닝구'도 일본말에서 '러닝(running)'이란 발음과 표기가 안 되니까 일본어로 '난닝구'라고 읽던 말이다. 우리는 '난닝구'는 틀린 말이고 '러닝/러닝셔츠/러닝사쓰'로 쓴다. '빵꾸'도 마찬가지다. 영어 '펑크처(puncture)'의 일본식 발음이다. 우리는 '펑크'로 순화됐다.
그나마 이런 말들을 비록 일본에서 왔지만 존재할 수 있는 근거라도 있는 데 비해 아예 정체불명, 국적 불명의 단어들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마호병이나 소라색, 곤색 같은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나이 든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이런 말들을 다행히 요즘 젊은 세대에서는 비교적 세력이 많이 약해져 우리말 속에서 밀려나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는 추세이다.
'마호병'은 뜨거운 물 따위를 넣어서 보온이 가능하게 만든 병이다. 이 말의 순화어는 '보온병'이고 지금은 대개 그렇게 쓰고 있다. 하지만 우리말 의식이 많지 않던 6,70년대까지만 해도 초등학생들의 소풍 길에는 으레 어머니가 챙겨주신 이 마호병이 등장하곤 했다. '마호병'은 일본어 '마호빈'에서 온 말이다. 오랫동안 보온이 되는 게 신기해 그네들이 '마법의 병'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 말이 우리나라로 넘어오면서 '마법(魔法)'은 일본음으로 읽고, 병(甁)은 우리 음으로 읽었으니 국적불명의 희한한 말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쓰는 곤색이나 소라색도 이와 똑같은 구조로 된 불구의 말이다. '곤'이 '소라'나 모두 일본어에서 온 말이고, 색(色)만 우리 음으로 읽은 것이다. 한자 紺은 짙은 청색이나 군청색, 짙은 남색을 가리키는 데 우리는 '감'이라 읽는다. 감색 또는 진남색으로 바꿔 쓰면 된다. '空'은 하늘이므로 소라색은 바로 하늘색이다. 이를 일본음과 우리 한자음을 마구 섞어 소라색이라 말하면 자칫 조개류의 일종인 소라 껍데기 색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다. 소라 껍데기는 검은 갈색이거나 어두운 청색을 띠므로 오히려 하늘색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이 중 '감색'은 약간 문제가 있다. 우리가 하늘색이니 오렌지색이니 하듯이 '감색'하면 가을에 나는 먹는 '감'의 색깔을 연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표준국어대사전 1999>에서는 '잘 익은 감의 빛깔과 같은 붉은색'으로서의 '감색과 검푸른 남색으로서는 감색(紺色)을 모두 표제어로 올려놓고 있다. 따라서 감색이란 말보다는 알기 쉽게 '진남색', '검남색'을 쓰는 게 좋다. 이때 남색은 사전적으로는 푸른색과 자주색의 중간색으로 풀이된다.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말들 가운데는 이처럼 일본말이거나 일본을 거쳐 들어온 말이 여전히 많다. 물론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 그리고 언어의 순혈주의를 주장하지 않을 바에야 특정 국가 말이라고 해서 굳이 배제할 필요는 없다. 다만 말의 형성 구조를 알고 보면 어정쩡한 불구의 상태로 되어 있는 말, 우리말에도 훌륭한 단어나 표현이 본래 있는데 이걸 밀어내고 엉뚱하게 자리 잡고 있는 외래어투 등은 걸러내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놔둘 경우 자칫 말에서도 외래 어종인 베스가 토종 어류의 씨를 말려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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