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銀行)_로마 광장의 벤치
'금융권'과 '은행'이라는 말이 비리란 말과 함께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다. 그런데 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 금융(金融)은 금(金)인데 은행(銀行)은 은(銀)이냐 하는 것이다. 금융이라는 말과 짝을 맞추자면 은행이 아니라 금행(金行)이라고 해야 옳지 않았겠는가?
금융 기구가 아닌 사사로운 집에서도 돈을 넣어두는 곳은 은고가 아니라 금고이다. 금 본위제든 은 본위제든 돈을 상징하는 것은 금이었기 때문이다. 제도와 문화가 달라도 금 은 동의 그 서열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올림픽의 메달도 그런 순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은행인가? 서구 문명과 함께 처음 금융 기구가 등장했을 때 일본인들은 그것을 어떻게 번역할지 몰라 그냥 외래어로 '방쿠'라고 썼다. 물론 은좌(銀座)라는 번역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말은 지금 일본 만 원권 지폐에 그려져 있는 탈아입구론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기발한 번역어였지만, 지금 들으면 동경 번화가의 그 은좌로 알 것이다. 결국 뱅크(Bank)가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은행이란 말로 굳어지게 된 것은 20세기 초(일본의 명치 10년경)에 들어서라고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논리가 적어도 은행이란 말에는 통하지 않았던 셈이다. 왜냐하면 은행의 제도는 서양 것이었지만 그 말은 중국에서도 그것도 거의 5백 년 전에 붙여진 '태창은고(太倉銀庫 : 1442년 북경에 처음 세워진 은행)'에서 다온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낡은 말이라는 것이 아니라 뱅크에 금도 아닌 은 자가 따라 다니게 된 그 역사의 뒤안길을 보면 더욱 한심하다. 중국인들이 은을 좋아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18세기 때 서구의 무역상들이 남긴 기록으 보더라도
"중국 상인들은 금이나 교역품에는 일체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은화에만 눈독을 들인다"
고 되어 있다. 실제로 스페인에서는 금값과 은값의 대비가 1대 14였는데 중국에서는 그것이 1대 7로 터무니없이 은값이 높았다.
이렇게 중국에서 은 수요가 서구의 여러 나라들보다 폭등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송 원 때에 대량의 견화들이 해외로 새나가자 스톡(stock)이 바닥나고 그 신용 조직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래서 명나라에 들어와 불환 지폐가 발행되고 그 화폐를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금 은 광산을 모두 폐쇄시키고 말았다. 무역을 금지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액면 일 관이 동전 1천 문(文)이었던 지폐가 60년 뒤에는 2~3문으로 폭락하고 만다. 그러니 화폐는 휴지가 되고 밀무역이 성행하면서 지하 경제는 모두 은 덩어리로 거래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의지할 것은 은밖에 없게 되었고 그 결과로 돈 하면 은이 먼저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말이 '은고'요, '은행'이었다.
은행이란 말과 가장 대조를 이루는 것은 영어의 뱅크이다. 뱅크란 말은 원래 이탈리아어로 장의자를 뜻하는 방코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어원적으로 보면 영어의 뱅크는 공원에 있는 벤치와 똑같은 말이다. 실제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로마의 광장에는 벤치(방코)들이 놓여 있었고 환전상들은 그 의자에 둘러 앉아서 고객들과 돈 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돈이 돈을 낳는' 이자 놀이의 비윤리성에 대한 비난은 서구 사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현대 문명 속에서도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는 대석학 아리스토텔레스도 생물이 아닌 금속 돈이 새끼를 치는 것(금리)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서 '화폐 불임설'의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바다를 끼고 일찍부터 교역을 하며 살아온 희랍 로마 때의 사람들은 자급적인 폐쇄 농경 사회 속에서 살아왔던 우리네 중국 문화권처럼 돈에 대한 수치와 이식에 대한 거부감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으슥한 뒷골목에 전당포를 차려놓은 것과는 달리 그들은 광장의 벤치에 앉아서 내놓고 돈놀이를 했던 것이다. 이식에 대한 부정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금융업이 발달하지 않아 오히려 금리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중세 때만 해도 이자율이 대폭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베니스의 상인>에서 악역을 맡은 고리 대금업자 샤일록이 판칠 때라 해도 17세기의 영국과 네델란드의 이자율은 5퍼센트에서 2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같은 무렵 중국에서는 이자율이 무려 36퍼센트나 되었으며 그나마도 생산적 목적이 아니라 개인의 약값이나 노름빚처럼 급한 비상금으로 충당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의 은행은 동과 서를 가릴 것 없이 으리으리한 대리석 빌딩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초석은 광장에 놓인 벤치 하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뜨내기들처럼 의자에 앉아서도 돈 거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신용 덕분이었을 거이다.
"뱅크는 돈을 꾸어오고 꾸어주는 점포가 아니다. 그곳은 신용(credit)을 만들어내는 제조소다."
라는 그 금융의 원리가 바로 근대 은행의 출발점이다. 17세기 때 런던의 금공(金工)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하여 금공 원리(goldmith's principle)라고도 불리어지는 그 법칙 때문에 오늘날 은행은 수신량의 몇 배가 넘는 여 신을 창출해 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알렉상드르 뒤마가 무명이 극작가였던 시절, 은행에 융자를 받으러 갔던 유명한 일화에서도 우리는 서양의 은행이 은 덩어리를 싸놓은 은고가 아니라 신용을 쌓아둔 집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은행장이 무엇을 담보로 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뒤마는 자신이 쓴 미발표 극작 원고를 보여주었고 은행장은 그것을 읽어보고 거지나 다름없었던 무명 작가 뒤마에게 거금을 융자해 주었다. 이만한 작품이면 틀림없이 작가로서 대성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고객은 은행을 신용하여 돈을 맡기고 은행은 고객을 신용하여 대부를 한다. 뱅크는 은 덩어리가 아니라 신용 덩어리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어원적으로 볼 때 은행이란 말과 뱅크라는 말은 이렇게도 다르다. 한쪽은 신용의 붕괴에서 생겨나게 된 말이고 한쪽의 말은 여신이라는 믿음의 창출에서 비롯된 말이다. 은행이 금융 부정이나 비리에 관한 뉴스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은행이란 말 자체 속에 숨어 있는 불신의 그림자이다.
햇빛이 쏟아져 흐르는 로마의 광장, 전후 사방이 탁 트인 개방 공간에서 떳떳하게 돈 거래를 하던 그 신용의 벤치 - 그것이 은이나 금의 이미지를 대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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