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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겻불_곡식의 겨를 태우는 불

by noksan2023 2025.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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겻불_곡식의 겨를 태우는 불

 

 

겻불(겨+ㅅ+불)

 

 

 

참   뜻 : 쌀겨나 보릿겨처럼 곡식의 겨룰 태우는 불을 가리키는 말인데, 겨를 태우는 불은 불기운이 약해 신통치가 않다.

 

바뀐뜻 : '겻불'을 불 쬐는 사람 곁에서 쬐는 '곁불'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 뜻은 겨를 태우는 뭉근하고 힘없는 불을 가리키는 말로서, 신통치 않거나 시원치 않은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예를 들어,

 

-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

- 추울 땐 겻불이라도 어딘데 그걸 마다해? 그깟 체면이 뭔데 거기에 목숨을 거냐?

 

 

 

겻불과 곁불

 

 

겻불

 

 

 

따뜻한 햇볕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우리말 속담 가운데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궁하거나 다급해도 체면 깎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는 속담과 한뜻이다. 그까짓 체면이 뭐길래, 양반은 체면에 목숨까지 거는 걸까?

 

겻불’은 곁에서 얻어 쬐는 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겨를 태우는 불’이다. ‘겨’는 벼, 보리, 조 따위의 곡식을 찧어 벗겨 낸 껍질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겨를 태운 불은 뭉근하게 타오르기 때문에 불기운이 약하다. 해서 ‘겻불’에 ‘불기운이 미미하다’란 의미도 있다. 속담 중의 ‘겻불’을 ‘짚불’로 쓰기도 한다. ‘짚불’은 짚을 태운 불을 말한다. ‘겨’나 ‘짚’은 태우면 연기만 많이 날 뿐 불기운은 신통치 않다. ‘겻불’과 ‘짚불’은 불기운이 시원찮기로는 도긴개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한데 ‘겻불’을 ‘곁불’로 잘못 쓰는 경우가 흔하다. ‘곁불’은 얻어 쬐는 불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까이하여 보는 덕을 말한다. 운 나쁘게 목표물 근처에 있다가 맞는 총알을 일컫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다가 받는 재앙을 가리킨다. 따라서 신통치 않거나 시원치 않음을 뜻하는 ‘겻불’과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겻불과 곁불

 

어린 시절의 기억 중에서 하나가 왕겨를 때던 일이다. 건넌방에 약한 불을 지피고 왕겨를 한 말 정도 들이 부어 놓고 풍로(風爐풍구)를 돌린다. 살살 돌려야 하는데 성질 급한 필자는 지나치게 빨리 돌려서 짙은 연기가 나다가 결국은 그 연기가 ‘펑’하고 터져 버렸고, 그 소리에 놀라 정말로 뒤로 자빠졌다. 물론 얼굴에 옅은 화상도 입었으나 다행히 흉이 지지는 않았다. 그럴 때면 어른들이 나와서 왕겨를 태우는 법을 알려주고 은은한 그 불길을 즐기는 것을 보았다. 그때가 영동고속도로 공사를 하던 시절이니 참으로 오랜 기억 속에서 건져낸 이야기다.

흔히 어른들은 “이눔아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쬐는 것이여.”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남의 곁에서 불을 쬐면 안 되는가 보다.’라고만 생각했었다. 가끔 어른들의 말씀 중에 “오뉴월 겻불도 쬐다 나면 서운한겨.”라고 하는 말이 뭔 소린지 몰라서 듣고 잊었던 적도 있다. ‘겻불’은 ‘겨를 태우는 불’이다. 주로 왕겨를 태운다. 불기운이 미미하여 더운 맛이 없다. 그런데 왜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고 했을까? 처음에는 남의 곁에서 불을 쬐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왕겨를 태우는 불은 쬐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속담사전에 보면 “'아무리 궁하거나 다급한 경우라도 체면을 깎는 짓은 하지 아니한다.”고 나타나 있다. 양반의 체면을 중시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양반의 숨은 미의식이 들어 있다. 겨를 태우는 불은 뜨겁지는 않지만 은은하게 오래 타는 성질이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에 반상의 구별이 확실하던 시절 상민들이 주로 겻불을 쬐고 있었는데, 양반이 가면 자리를 비켜주고 그들은 멀리서 떨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양반은 그들을 위한 배려로 겻불을 쬐지 않았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양반들의 체면만 중시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내면에는 백성들을 생각했던 멋스런 모습이 들어 있는 문장이다.

그렇다면 겻불과 곁불은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위의 글을 죽 읽어 보면 틀림없이 겨를 태운 불이므로 겻불이 맞다. ‘겨 + ㅅ + 불 = 겻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남이 불을 쬐는데 옆에서 불을 쬐는 것이기에 곁불이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곁불은 전혀 다른 의미가 있다. ‘곁불’의 사전적 의미는 ‘직접 관계없이 가까이 있다가 받는 영향’<오픈사전>이라고 나타나 있다. 혹은 ‘얻어 쬐는 불’, ‘ 가까이 보는 덕’, ‘ 남이 켰거나 들고 있는 불’과 같이 나타나 있지만 이는 모두 원래의 의미와 조금 거리가 있다. 원래 곁불이라는 뜻은 ‘목표 근처 있다가 맞는 총알’, ‘어떤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가까이 있다가 받는 재앙’이라고 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주로 “유탄 맞았다.”는 표현을 쓴다. 예전에는 총을 쏠 때 화약에 불을 붙여서 사용했다. 그래서 옆에 있다가 총알을 맞기도 했다. 거기서 유래한 말이 ‘곁불 맞는다.’고 한다. 그리고 “무사는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이때의 곁불은 “얻어 쬐는 불”이라는 의미다. 곁불에는 “이익을 추구하려고 권력 주변에서 머물다가 예상치 못한 재앙을 당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겻불이나 곁불은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단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하나는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의 관념과 백성을 추위를 배려하는 미덕이 함께 들어 있는 단어이고, 곁불은 이익을 추구하다 뜻밖에 재앙을 당한다는 의미가 강하니 서로 적확(的確)하게 구별해서 활용해야 한다.

 

 

'겻불'은 살아있다

 

 

검찰라인

 

 

 

"진정한 무사는 추운 겨울날 얼어 죽을지언정 곁불은 쬐지 않는다."

김대중 정권 말기인 2002년 초 취임한 박명재 검찰총장이 한 말이다. 당시는 각종 권력형 비리사건 속에서 검찰 수사가 권력실세들에게 휘둘린다는 비판이 일던 시기였다. 이를 의식한 검찰총장이 취임 일성으로 검찰에 자기반성과 개혁을 속담에 빗대 주문한 것이다.

신문들은 다음날 아침 그의 말을 일제히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특히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겠다"란 대목을 제목으로 알리면서. 대부분의 사람은 물론 이 말을 별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 말이 안고 있는 작은,그러나 중요한 결함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봐 자네,검찰총장이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겠다'고 했다는데 그 '곁불'이 틀리게 쓰인 것 아닌가?"

 

"누군가가 불을 쬐고 있는데 그 옆에 빌붙어서 얻어 쬐는 궁상맞은 짓은 안하겠다는 뜻이니 신문에 나온 대로 '곁불'이 맞잖아."

 

"내가 알기로는 보통의 경우 양반 체면에 쬐지 않겠다는 불은 왕겨 같은 것을 태우는 '겻불'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말도 있지만 이 경우는 비굴하게 남의 곁에서 얻어 쬐는 불이라는 뜻이니까 '곁불'이 맞는 표기라고 봐야지."

2005년 별세한 원로 언론인 박용규 선생의 일화다. 그는 돌아가시기 이태 전 한 어문연구지를 통해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고 나서야 친구가 지적한 '겻불'이 바른 표기이고 자신이 해석한 '곁불'은 엉터리 창작이었음을 알았다"며 "이런 게 바로 식자우환일 것"이라고 고백했다.

'겻불'은 말 그대로 '겨를 태우는 미미한 불'이다. 이 말이 우리 속담에선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란 말로 쓰여 '아무리 궁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자기의 체면은 지키려고 애쓴다'는 뜻을 나타낸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는 속담도 같은 뜻이다. 모두 사전에 올라 있는 말이다. 그러니 검찰총장이 한 말도 바로 이 '겻불'이었던 셈이다. 이에 비해 '곁불'은 본래 '목표로 되지 않았던 짐승이 목표로 겨누어진 짐승의 가까이에 있다가 맞는 총알'이란 뜻이다. 예전에는 총탄을 발사할 때 화약에 불을 댕겨 했기 때문에 총 쏘는 것을 '불질'이라 했다. 곁불은 여기서 생겨난 말이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우리말 큰사전'(1991년)이나 금성판 '국어대사전'(1995년) 등은 모두 겻불과 곁불의 차이를 이렇게 풀고 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 1999년 펴낸 '표준 국어대사전'이 문제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겻불'의 풀이는 같지만 그 쓰임새는 순수하게 '겨를 태우는 불' 그 자체로 국한시켰다. 대신 '곁불'의 풀이는 완전히 달라져 전통적인 쓰임새는 사라지고 '얻어 쬐는 불'이란 의미로 대체됐다. 용례 역시 '선비는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는…'이란 소설 속 표현을 인용했다.

전통적으로 써오던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란 속담이 '표준 국어대사전'에 와서 뚜렷한 근거 없이 '곁불'로 바뀐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다. 하지만 그다지 신뢰할 수 없는 자의적 올림말보다는 전통적 속담 말인 '겻불'을 익히고 쓰는 것이 옳은 방향일 것이다. '겻불'은 엄연히 살아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란 말은 우리말 '딸깍발이'를 연상시킨다. '딸깍발이'는 신이 없어서 마른 날에도 나막신을 신는다는 뜻에서,'가난한 선비'를 일컫던 말이다. 작고한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은 수필 '딸깍발이'에서 옛날 남산골 샌님들을 '사실로 졌지마는 마음으로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꼬장꼬장한 고지식,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지조,이 몇 가지들이 그들의 생활 신조였다'고 묘사했다.

'겻불'의 속담과 '딸깍발이'의 가치는 연말 대선을 앞두고 일찌감치 정치의 계절로 들어선 요즘,눈앞의 이익만을 좇기에 급급한 지식인의 약삭빠른 삶을 돌아보게 한다. 조금은 고지식하면서도 기개만은 꼿꼿한 딸깍발이 같은 사람도 있어야 세상은 살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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