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_고려 현종 9년 수도를 호위하는 지역(경현+기현)
참 뜻 : 고려 조선시대에 왕도(王都)와 왕실을 보위하기 위해 설치된 왕도(王都_왕궁이 있는 도시)의 외곽 지역을 '경기' 라 하는데, 경(京)은 '천자(天子)가 도읍한 경사(京師)' 를 뜻하고 기(畿)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을 심으로 사방 5백 리 이내의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경기(京畿) 라는 말은 당나라 시대에 왕도의 외곽지역을 경현(京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누어 통치했던 데서 기원한다. 왕도 외곽지역을 '경기'라 한 것은고려 현종9년(1018년)의 일이다.
바뀐뜻 : 오늘날은 서울의 외곽 지역인 수도권과 그 인근 지역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으로서 남한8도 중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모여 살고 있는 지역이다.
예를 들어,
- 경기도의 절반 이상이 수도권에 해당하는데, 본래 경기(京畿)라는 말 자체가 수도를 호위하는 지역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말이라는구먼.
경기(경현 + 기현)
경기는 고려·조선시대 왕도와 왕실을 보위하기 위해 설치된 왕도의 외곽 지역이다. 천자가 도읍한 ‘경사(京師)’와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00리를 일컫는 ‘기’에서 유래하였다. 통일신라 때에도 왕도의 외곽지역을 특별구역으로 설정하였으나 경기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1018(고려 현종 9년)년에 고려의 왕도 개성부의 외곽을 공식적으로 경기라고 지칭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한양을 중심으로 재편하여 왕도 보위지역으로 삼았다. 궁궐과 성곽을 축조하는 요역에 우선적으로 징발되고 조세의 부과도 과중에게 책정되는 등 타도민에 비해 과중한 부담이 지워졌다.
‘경기’라는 말은 당나라시대에 왕도의 주변지역을 경현(京縣, 赤縣)과 기현(畿縣)으로 나누어 통치했던 데서 기원한다.
통일신라시대
우리나라에서 왕도의 외곽지역을 특별구역으로 설정해 왕도의 보위를 도모했던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의 일이다. 그 영역은 대체로 고려 초의 경주대도독부 관내와 일치하였다. 이곳에는 육정(六停)의 군사집단과 각종의 성(城) · 별궁(別宮) · 문역(門驛) 등이 설치되었으며, 일부 향(鄕) · 성(成)도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왕도의 외곽지역을 ‘경기’라 부르지 않았으며, 외곽지역 자체가 왕도의 일부였다는 이설도 있다.
고려시대
왕도 개성부의 외곽 지역을 공식적으로 경기라고 칭한 것은 1018년(현종 9)의 일이다. 현종은 995년(성종 14년)에 설치된 왕경 개성부를 없애고, 대신 개성현을 두어 정주, 덕수, 강음 3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으며, 장단현의 현령이 송림 · 임진 · 토산 · 임강 · 적성 · 파평 · 마전 7개 현을 관할하게 하여 ‘경기(京畿)’라고 하였다. 성종 때의 적현 · 기현, 특히 역대 여러 왕 · 왕후의 능이 소재한 적현은 왕도와 왕실을 보위하려는 의도에서 설치된 것이었다.
반면 현종 때의 경기는 왕실 경비의 일부를 지용(支用)하는 궁원전(宮院田)과 중앙관청의 공해전(公廨田) 등을 개성 주위에 집중시키고, 공신전(功臣田) · 양반전(兩班田) 등의 사전(私田)을 외방 주현(州縣)에 둠으로써 왕실과 관청의 경비를 용이하게 조달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된 것이다. 그러나 권귀(權貴)는 외방에 지급된 사전에서 전조(田租)를 과다하게 수취하였고, 농민을 인격적으로 지배하는 등 폐단이 야기되었다. 이에 사전의 경기 내 지급과 이를 위한 경기의 확대가 요청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경기는 1069년(문종 23)에 양광(楊廣) · 교주(交州) · 서해도(西海道)로부터 39현을 이입해 원경기(原京畿) 13현과 합해 총 52현을 관할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사전의 경기 내 지급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의 영역도 현종대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그 뒤 무신집권기와 대몽항쟁기를 거치면서 권귀의 사전 확대는 경기와 외방을 막론하고 일반화되었다.
사전을 경기 내로 한정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원종대에 녹과전제(祿科田制)의 실시로 나타났다. 부족한 관원의 녹봉을 보충해주기 위해 지급된 녹과전은 경기 8현의 토지로 국한되었다. 또, 이러한 전통은 고려 말에 단행된 사전개혁에도 계승되어 과전법(科田法)에 반영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경기는 문종 때 확대되었던 영역과 비슷한 규모로 재편되어 총 44현을 통할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도(道) 단위의 지방조직으로 변모했고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가 설치되었다. 당시의 경기는 좌도와 우도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영역은 개성을 중심으로 남으로는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 · 당성(唐城 : 지금의 경기도 화성군 남양) · 금주(衿州 : 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시흥) · 과주(果州 : 지금의 경기도 과천), 서로는 안주(安州 : 지금의 황해도 재령) · 연안(延安), 동으로는 철원과 포주(抱州 : 지금의 경기도 포천), 북으로는 곡주(谷州 : 지금의 황해도 곡산) · 수안에 이르는 범위로, 통할하는 현(縣)의 수는 문종 때보다 적으나 실제 영역은 그보다 확대된 규모였다.
이러한 경기의 재확대는 1391년의 과전법 실시를 위한 선결조처의 하나로서, 과전을 비롯한 각종의 사전 지급을 경기 토지로 한정시키기 위해서 였다. 이와 같은 사전 지급지로서의 경기의 의미는 과전법이 직전법(職田法)으로 바뀌고, 다시 직전법이 폐지되면서 상실되었으나, 이에 대신해 왕실의 궁방전(宮房田)과 양반관료의 거대한 사유지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
한편, 왕도 보위지역으로서의 경기의 의의는 고려 이래 조선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조선 초에 단행된 경기의 재편과 인조 이후 설치된 사유수부제(四留守府制)가 대표적인 예이다. 고려 말의 경기 좌 · 우도는 태조 · 태종 · 세종대를 거치면서 다시 ‘경기’로 합칭되었고, 수안 · 곡주 · 연안 등 이전 경기의 서북지역이 풍해도(豐海道 : 지금의 황해도)로 환속되고, 광주(廣州) · 수원 · 여주 · 안성을 비롯한 동남지역이 경기로 이속되는 등, 한양을 중심으로 한 재편이 이루어져 말기까지 지속되었다. 이것은 신 왕도인 한양을 보위하기 위한 목적에서 단행된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 병자호란과 이괄(李适)의 난 등을 겪은 인조대 이후, 경기의 네 요충지인 개성 · 광주 · 수원 · 강화에는 유수부와 함께 관리영(管理營) · 수어청(守禦廳) · 총리영(摠理營) · 진무영(鎭撫營) 등의 군영이 설치되어 왕도와 왕실의 보위를 담당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의 경기는 고려시대와 같이 역대 여러 왕과 왕비의 능이 위치하는 등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곳이었다.
이와 같이 고려 · 조선의 양시대에 걸쳐 왕도와 왕실의 보위기능을 지닌 경기였지만, 타지역보다 우대받지는 못하였다. 고려의 경우,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경기 관내에도 수령이 파견되지 못한 속현(屬縣)이 있었으며, 경기의 주현(主縣)에 파견된 수령의 관품도 타도 수령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요역(徭役) · 과렴(科斂) · 조세의 부과라는 면에서 경기민(京畿民)에게는 타도민에 비해 과중한 부담이 지워졌다. 궁궐과 성곽의 축조 등 각종의 역사에 경기민은 우선적으로 징발되었으며, 상공(上貢)에 필요한 물품 및 재원을 마련할 때에도 경기민에 대한 과렴은 1차적으로, 그리고 과중하게 책정되었다. 또 경기에는 각종의 사전이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경작하는 경기민은 사전주(私田主)에 의해 과다한 조세를 수취당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중한 부담은 곧 경기의 피폐를 가져왔으므로, 중앙정부는 때때로 경기민에 대해 면세 · 면역 및 각종 진휼의 혜택을 베풀기도 하였다. → 경기도(京畿道)
경기의 역사
고대부터 현대까지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한국의 핵심 중의 핵심을 지킨 지역으로 중국의 '중원'과 같은 위상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역이다. 미수복 경기도를 포함하면 이곳에 중심을 둔 정치체는 백제, 태봉, 고려, 조선, 대한제국, 현대 대한민국이고 특히 고려시대 이래 1100여년간 한국의 중심 지위를 잃은 적이 없는 지역이다.
초기 백제가 터를 잡았던 지역이며, 475년(장수왕 63년),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가 553년(진흥왕 13년), 신라가 차지했다. 삼국이 돌아가며 한강 유역을 차지한 것이 각자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질 정도로 그 위상이 공고했다. 이 때 신라가 이 지역을 장악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북한산 순수비다.
통일신라 때는 9주 5소경 중 한주(한산주)였는데, 지금의 도청(행정)에 해당하는 주치는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이성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한주의 중심 도시가 지금의 광주시라고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당시 한주가 고려시대 광주가 됐고 광주에서 나중에 하남시가 독립한 것이므로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이 당시에는 행정구역의 숫자가 적어 신라의 변방으로 인구 밀도는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군사적으로는 중요해서 지방군인 10정을 다른 주에는 1정씩 배치했으나 한주에는 특별히 2정 배치하기도 했다.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다시금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했다. 고려시대의 경기는 당시의 수도였던 개경(송도) 및 그 주변 지역에 해당되었는데, 이 당시의 경기는 현재 북한에 남은 경기도 범위와 비슷하다. 중기 이후 남경(南京, 현 서울특별시 사대문안 일대)이 중요시되면서 경기의 영역이 남경 일대까지 확대되었다. 고려 시기 경기가 본격 확장된 것은 문종 23년(1069년)인데, 이 시기에 양광도에서 경기로 편입된 지역은 지금의 서울(강남, 송파, 강동 제외), 인천, 부천, 김포, 광명, 시흥, 안산, 화성 서부, 안양, 과천, 군포, 고양, 파주, 의정부, 양주, 동두천, 포천, 구리, 남양주 일대에 속한다. 다만 이 시대의 경기는 개성 중심의 주변 지역이었으므로 지금의 황해도 동부까지 경기에 속했고, 도(행정구역) 중 하나가 아니라 그냥 '경기'라는 특수한 행정구역이었다.
조선 건국 후 수도가 남경(한성부, 한양)으로 천도되면서 현재의 경기도 영역이 확정되고 사실상 다른 도와 같은 행정구역이 되었다. 그러나 명칭에는 특수성이 남아있어서 정식 명칭은 여전히 경기였고, 잠깐 쓰이다 1413년(태종 13) 최종적으로 폐지된 세부 구역인 경기좌·우도를 가리킬 때만 도라고 불렀다. 이 지역을 총괄하던 지방관인 종2품 관찰사 역시 '경기도관찰사'가 아니라 '경기관찰사'였다. 실록에서 검색되는 '경기도관찰사'는 원문을 찾아보면 '京畿道觀察使'가 아니고 '京畿都觀察使'인데, 도관찰사(都觀察使)는 세조 때 관찰사(觀察使)로 개칭되기 이전의 명칭으로 道와는 상관이 없다. 즉 '경기도 관찰사'가 아니라 '경기 도관찰사'라는 것. 연산군 때 평택, 진위를 편입했다가 중종 때 충청도로 환원되었다. 1896년 진위를 편입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서울), 평택군을 편입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에는 북위 삼팔선 이남의 황해도 영역[50]을 경기도에 임시 편입시켰다. 황해도를 실질 지방자치단체로 살리기에는 면적과 인구가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그 뒤 6.25 전쟁을 거치면서 황해도 영역은 서해 5도만 남기고 모두 군사분계선 이북으로 넘어갔다. 서해 5도는 현재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 옹진군으로 재편입된 상태다. 1946년 9월 28일, 경기도 서울시에서 서울특별자유시로 분리되었다.
1937년 경기도에서 최초 읍으로 승격된 지역이 수원, 안성, 개성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인 1967년, 서울특별시에 있었던 경기도청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경기도의 양대 대도시였던 수원과 인천이 치열하게 유치 전쟁에 나섰다. 결국 유치전에서 수원이 승리했다.
1981년 경기도 인천시가 인천직할시로 분리승격되어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변경됐다.
2024년 5월 경기도 북부 행정구역을 기존 경기도와 분리하여 경기북부특별자치도로 신설하는 안을 논의했다. 다만 주민투표 등의 통과 절차가 남아 있어, 실제 분리까지 실현되지 않고 분리 시도로 기록될 가능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경기편
도관찰 출척사(都觀察黜陟使) 1인, 수령관(首領官) 1인, 의학 교유(醫學敎諭)·검률(檢律) 각각 1인. 【다른 도(道)도 이와 같다. 】
본래 고구려의 땅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곧 송(宋)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元年). 】 개주(開州)를 개성부(開城府)로 승격시켜 적현(赤縣) 6, 기현(畿縣) 7을 관할하게 하다가, 【고사(古史)에 다만 현(縣)의 수만 기록하고 이름을 적지 아니해서 자세히 상고할 수 없다. 】 현종(顯宗) 9년 무오에 【곧 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11년. 】 개성부를 파하고 개성 현령(開城縣令)으로써 정주(貞州)·덕수(德水)·강음(江陰)의 3현을 관할하게 하고, 장단 현령(長湍縣令)으로써 송림(松林)·임진(臨津)·토산(兎山)·임강(臨江)·적성(積城)·파평(坡平)·마전(麻田)의 7현을 관할하게 하고,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켜 경기(京畿)라 일렀다. 문종(文宗) 16년 임인에 【곧 송나라 인종(仁宗) 가우(嘉祐) 7년. 】 다시 개성부로 승격시켜 도성(都省)에서 관장하던 11현을 모두 붙이고, 또 서해도(西海道)의 평주(平州)022) 임내(任內)인 우봉군(牛峯郡)을 떼어 이에 붙였으며, 그 후 다시 개성 현령을 두어 개성부에 붙이었다. 【연대는 알 수 없다. 】 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에 【곧 명나라 태조 고황제 홍무(洪武) 23년. 】 경기(京畿)를 갈라 좌·우도(左右道)로 하여, 장단·임강·토산·임진·송림·마전·적성·파평현을 좌도(左道)로, 개성·강음·해풍·덕수·우봉을 우도(右道)로 하고, 또 경기(京畿)를 더 넓혀서 양광도(楊廣道)의 한양(漢陽)·남양부(南陽府)·인주(仁州)·안산군(安山郡)·교하(交河)·양천(陽川)·금천(衿川)·과주(果州)·포주(抱州)·서원(瑞原)·고봉현(高峯縣)과 교주도(交州道)의 철원부(鐵原府)·영평(永平)·이천(伊川)·안협(安峽)·연주(漣州)·삭녕(朔寧)으로써 좌도(左道)에 붙이고, 양광도의 부평(富平)·강화부(江華府)·교동(喬桐)·김포(金浦)·통진현(通津縣)과 서해도(西海道)의 연안부(延安府)·평주(平州)·배주(白州)·곡주(谷州)·수안군(遂安郡)·재령(載寧)·서흥(瑞興)·신은(新恩)·협계현(俠溪縣)으로써 우도(右道)에 붙이고, 각기 도관찰 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두고 수령관(首領官)으로써 돕게 하다가, 【4품 이상은 경력(經歷)을 삼고, 5품 이하는 도사(都事)를 삼았다. 】 우리 태조(太祖) 3년 갑술에 【곧 홍무 27년. 】 도읍을 한양부에 정하게 되매, 그 이듬해 을해에 평주·수안·곡주·재령·서흥·신은·협계는 새 서울[新都]에 가는 길이 멀므로 도로 서해도에 붙이고, 양광도의 광주(廣州)·수원부(水原府)·양근군(楊根郡)·쌍부(雙阜)·용구(龍駒)·처인(處仁)·이천(利川)·천녕(川寧)·지평현(砥平縣)을 갖다 이에 붙이고, 광주·수원의 관할인 군(郡)·현(縣)을 갈라서 좌도(左道)로 하고, 양주·부평·철원·연안의 관할인 군·현을 우도(右道)로 하고, 7년[戊寅]에 또 충청도(忠淸道)의 진위현(振威縣)을 떼어서 좌도에 붙이었다가, 태종(太宗) 2년 임오에 【곧 홍무 35년. 】 두 도(道)를 합하여 경기 좌·우도라 하고, 성관찰사(省觀察使)·수령관(首領官) 각각 1인씩을 두었다. 13년 계사에 【곧 명나라 태종 문황제(太宗文皇帝) 영락(永樂) 11년. 】 사방길의 멀고 가까움을 참작하여 연안(延安)·배주(白州)·우봉·강음·토산을 도로 풍해도(豐海道)에, 이천(伊川)을 도로 강원도에 붙이고, 충청도의 여흥부(驪興府)·안성군(安城郡)·양지(陽知)·양성(陽城)·음죽현(陰竹縣)과 강원도의 가평현(加平縣)을 떼어다가 이에 붙이고, 좌·우도(左右道)로 나누지 않고 다만 경기 도관찰사(京畿都觀察使)라 일컫고 사(司)를 수원(水原)에 두었다. 동쪽은 강원도 춘천(春川)과 원주(原州)에 이르고, 서쪽은 황해도 강음(江陰)과 배천(白川)에 이르며, 남쪽은 충청도 죽산(竹山)과 직산(稷山)에 이르고, 북쪽은 황해도의 토산(兎山)과 강원도 이천(伊川)에 이르러서, 동서가 2백 64리요, 남북이 3백 64리가 된다.
목(牧)이 1이요, 도호부(都護府)가 8이요, 군(郡)이 6이요, 현(縣)이 26이다.
명산(名山)으로 말하면, 삼각산(三角山)은 도성(都城)의 진산(鎭山)이 되며, 백악(白岳) 북쪽에 있고, 성거산(聖居山)은 옛 서울의 송악(松岳) 동북쪽에 있으며, 화악(花岳)은 가평현(加平縣) 북쪽에 있고, 겸악(鉗岳)은 적성현(積城縣) 동쪽에 있으며, 용호산(龍虎山)은 임강현(臨江縣) 남쪽에 있고, 오관산(五冠山)은 임강현의 임내(任內)인 송림(松林) 북쪽에 있으며, 마리산(摩利山)은 강화부(江華府) 남쪽에 있다.
대천(大川)으로 말하면, 한강(漢江)은 그 근원이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으로부터 나와 영월군(寧越郡) 서쪽에 이르러 여러 내를 합하여 가근동진(加斤同津)이 되고, 충청도 충주(忠州)의 연천(淵遷)을 지나서 한결같이 서쪽으로 흘러 여흥(驪興)을 지나 여강(驪江)이 되고, 천녕(川寧)에서 이포(梨浦)가 되며, 양근(楊根)에서 대탄(大灘)이 되고, 또 사포(蛇浦)와 용진(龍津)이 되었으며, 〈한 줄기는〉 인제현(麟蹄縣)이 이포소(伊布所)로부터 나와 춘천(春川)에 이르러 소양강(昭陽江)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가평현(加平縣) 동쪽에서 안판탄(按板灘)023) 이 되고, 양근(楊根) 북쪽에서 입석진(立石津)024) 이 되며, 또 〈양근〉 남쪽에서 용진도(龍津渡)가 되고, 사포(蛇浦)로 들어가서 두 물이 합하여 흘러 광주(廣州) 경계에 이르러서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다음에〉 광나루[廣津]가 되었으며, 서울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되고, 서쪽에서 노도진(露渡津)025) 이 되며, 서쪽에서 용산강(龍山江)이 되었는데, 경상·충청·강원도 및 경기 상류(上流)에서 배로 실어 온 곡식이 모두 이곳을 거치어 서울에 다다른다. 강물이 도성 남쪽을 지나 금천(衿川) 북쪽에 이르러 양화도(楊花渡)가 되고, 양천(陽川) 북쪽에서 공암진(孔岩津)이 되며, 교하(交河) 서쪽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임진강(臨津江)과 합하고, 통진(通津) 북쪽에 이르러 조강(祖江)이 되며, 포구곶이[浦口串]에 이르러서 나뉘어 둘이 되었으니, 하나는 곧장 서쪽으로 흘러 강화부 북쪽을 지나 하원도(河源渡)가 되고, 교동현(喬桐縣) 북쪽 인석진(寅石津)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니, 황해도에서 배로 실어 온 곡식이 〈모두〉 이곳을 거치어 서울에 다다른다. 하나는 남쪽으로 흘러 강화부 동쪽 갑곶이나루[甲串津]를 지나서 바다로 들어가니, 전라·충청도에서 배로 실어 온 곡식이 모두 이곳을 거치어 서울에 다다른다. 임진강(臨津江)은 그 근원이 함길도(咸吉道) 안변(安邊)의 임내(任內)인 영풍현(永豐縣) 방장동(防墻洞)으로부터 와서 이천(伊川)·안협(安峽)·삭녕(朔寧) 경계를 지나 연천(漣川)에 이르러, 물이 비로소 커져서 징파도(澄波渡)가 되고, 마전(麻田)을 지나 적성(積城)에 이르러 이포진(梨浦津)026) 이 되며, 장단(長湍)에서 두지진(豆只津)이 되고, 임진현 동쪽에 이르러 임진도(臨津渡)가 되며, 서쪽으로 흘러 〈임진현〉 동남쪽에 이르러서 덕진(德津)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교하현 서쪽에 이르러서 낙하도(洛河渡)가 되며, 봉황바위[鳳凰岩]를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 한강과 합하여 함께 바다로 들어간다.
호수가 2만 8백 82호, 인구가 5만 3백 52명 【본조(本朝)는 인구(人口)의 법이 밝지 못하여, 문적에 적힌 것이 겨우 열의 한둘이 되므로, 나라에서 매양 바로잡으려 하나, 너무 인심(人心)을 잃게 되어, 그럭저럭 이제까지 이르렀으므로, 각도 각 고을의 인구수가 이렇게 되었고, 다른 도들도 모두 이렇다. 】 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천 7백 13명, 선군(船軍)이 3천 8백 92명이다.
간전(墾田)은 20만 3백 47결(結)이다. 【밭[旱田]이 12만 4천 1백 73결 남짓하고, 논[水田]이 7만 6천 1백 73결 남짓하다. 】 그 부세(賦稅)는 쌀[稻米]【멥쌀[粳米]·흰쌀[白米]· 세경미(細粳米)027) ·점경미(粘粳米)·조미(糙米)028) 가 있다. 】 ·직미(稷米)·콩[豆] 【콩·팥·녹두가 있다. 】 ·보리 【보리·밀·메밀이 있다. 】 ·지마(芝麻) 【속명 참깨. 】 ·꿀[蜂蜜]·밀[黃蠟]·지마유(芝麻油) 【속명 참기름. 】 ·소자유(蘇子油) 【속명 법유(法油). 】 ·가루장[末醬]·겨자[芥子]·모시[白苧布]·다섯새베[正五升布] 【대개 군읍(郡邑)의 구실[田賦]이 머나 가까우나 모두 같으므로, 다시 고을 밑에 적지 아니한다. 】 등이다.
토공(土貢)은 모과[木瓜]·개암씨[榛實]·상수리[橡實]·밤[栗]·감[柿]·대추[棗]·느타리[眞茸]·싸리 버섯[鳥足茸]·황각(黃角)·산삼(山蔘)·도라지[桔梗]·마른 멧돼지고기[乾猪]·토끼젓[兎醢]·물고기젓[魚醢]·숭어[水魚]·민어(民魚)·젓[醢]·질그릇[陶器]·사기 그릇[磁器]·목기(木器)·버들 고리[柳器]·갈소쿠리[蘆簞]·참빗[省帚]·왕골속[莞心]·노화지(蘆花紙)·잡깃[雜羽]·갓[常笠]·새[草]·마의(馬衣)·짚[藁草]·꼴[芻藁]·새끼[藁索]·삼노[麻索]·소나무 그을음[松煙]·송진[松脂]·주토(朱土)·갈탄(葛炭)·향나무[香木] 【백단향(白檀香)·자단향(紫檀響)·역목(櫟木)이 있다. 】 ·굴가루[蠣灰]·명아주재[藜灰]·황회(黃灰)·지초(芝草)·단풍나무잎[楓葉]·영선 잡목(營繕雜木)·자작나무[自作木]·은행나무[杏木]·피나무[椵木]·뽕나무[黃桑木]·앵도나무[櫻木]·장작[燒木]이다.
약재(藥材)는 쇠쓸개[牛贍]·범의 정강이뼈[黃虎脛骨]·곰의 쓸개[熊膽]·돼지쓸개[猪膽]·수달피쓸개[獺膽]·고슴도치쓸개[猬膽]·섣달토끼머리[臘兎頭]·고슴도치가죽[猬皮]·아교(阿膠)·말벌집[露蜂房]·지네[蜈蚣]·누에나비[元蠶蛾]·누에허물[馬鳴退]·가뢰[斑猫]·매미허물[蟬退皮]·뱀허물[蛇退皮]·두꺼비[蟾酥]·청개구리[蝦蟆]·자라껍데기[鼈甲]·뽕나무벌레[桑螵蛸]·마른 잉어[乾鯉魚]·잉어쓸개[鯉魚膽]·굴조개껍질[牡蠣]·누에똥[蠶沙]·오가피(五加皮)·황경나무껍질[黃蘗皮]·뽕나무뿌리껍질[桑白皮]·느릅나무속껍질[楡白皮]·산이스랏씨[郁李仁]·복숭아씨[桃仁]·살구씨[杏仁]·탱자[枳殼]·회화나무열매[槐實]·회화나무꽃[槐花]·송진[松脂]·연밥[蓮子]·조피나무열매[川椒]·오배자(五倍子)·복령(茯苓) 【붉은 것과 흰 것 두 종류가 있다. 】 ·복신(茯神)·안식향(安息香)·산골[自然銅]·돌고드름[禹餘糧]·하늘타리[天圓子]·새삼씨[兎絲子]·고무딸기열매[覆盆子]·오미자(五味子)·나팔꽃씨[牽牛子] 【흰 것과 검은 것의 두 가지가 있다. 】 ·질경이씨[車前子]·찔레씨[蒺梨子]·백부자(白附子)·백출(白朮)·창출(蒼朮)·창포말(菖蒲末)·석창포(石菖蒲)·쥐방울[馬兜苓]·쇠비름[馬齒莧]·붓꽃[馬藺]·부들꽃[蒲黃]·택사(澤瀉)·도라지[桔梗]·탱알[紫莞]·삽주[薊草] 【큰 것과 작은 것 두 종류가 있다. 】 ·수자해좆뿌리[天麻]·수자해좆싹[赤箭]·가희톱[白歛]·삿갓풀뿌리[蚤休]·검산풀뿌리[續斷]·절국대뿌리[漏蘆]·박새[藜蘆]·족도리풀뿌리[細辛]·칡뿌리[葛根]·석죽화[瞿麥]·외나물뿌리[地楡]·승검초뿌리[當歸]·마뿌리[山藥]·하눌타리뿌리[括樓根]·버들옷[大戟]·자리공뿌리[商陸]·검화뿌리껍질[白蘇皮]·매자기뿌리[京三稜]·여우오줌풀뿌리[鶴蝨]·나리뿌리[百合]·감대뿌리[虎杖根]·두룹뿌리[獨活]·두여머조자기[天南星]·쇠무릎[牛膝]·사자발쑥[獅子足艾]·도꼬마리[蒼耳]·시호(柴胡)·끼절가리뿌리[升麻]·함박꽃뿌리[芍藥] 【붉은 것과 흰 것 두 가지가 있다. 】 ·호본(蒿本)·구리때뿌리[白芷]·끼무릇뿌리[半夏]·현삼(玄蔘)·쓴너삼뿌리[苦蔘]·더위지기[茵陳]·진봉[秦]·현호색(玄胡索)·부처손[卷栢]·참외뿌리[土瓜根]·속서근풀[黃芩]·단너삼뿌리[黃耆]·으름덩굴[木通]·으름[林下夫人]·낙석(絡石)·지모(知母)·회초미뿌리[貫衆]·수뤼나물뿌리[葳靈仙]·바곳[草烏頭]·방장초(放杖草)·살남람(殺男藍)·들쑥[漆]·며래뿌리[萆]·이리어금니[狼牙]·하국[旋覆花]·겨우살이꽃[金銀花]·금등화[金燈花]이다. 【이상의 잡공(雜貢) 및 약재(藥材)를, 이제 토산(土産)의 희귀(稀貴)한 것은 각기 그 고을 밑에 기록하고, 그 각 고을마다 나는 것으로서, 다만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은 다시 기록하지 아니한다. 】
재배하는 약재(藥材)는 백변두(白扁豆)·양귀비[粟]·차조기[紫蘇]·영생이[薄荷]·소야기[香薷]·악실(惡實)·겨자[芥子]·삼씨[麻子]·회향(回香)·생지황(生地黃)·장군풀[大黃]·청목향(靑木香)·정가[荊芥]·해바라기씨[葵子]·무우씨[蘿葍子]·순무우씨[蔓菁子]·참외꼭지[眞苽帶]·맨드라미꽃[鷄冠花] 【붉은 것과 흰 것 두 종류가 있다. 】 ·감국(甘菊)·잇[紅花]·율무[薏苡]이다. 【이상의 약재는 각 고을의 풍토에 맞는 것을 따라 의원(醫院)으로 하여금 심어 기르게 한다. 〈이것은〉 본래 산이나 들에서 나는 것이 아니므로, 모두 각 고을 밑에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무릇 한 물건이 밭구실[田賦]·토공(土貢)·약재(藥材) 따위에 거듭 나온 것이 많이 있으나, 이제 그 거듭된 것을 좇고, 오직 꿀[蜂蜜]·밀[黃蠟] 따위는 다만 토공에 기록하고, 인삼·오미자(五味子) 따위는 다만 약재난에 기록하여, 다시 거듭 나오지 않게 하였다. 】
좌도 수군 첨절제사영(左道水軍僉節制使營)은 남양부(南陽府) 서쪽 화지량(花之梁)에 있고, 【항상 중대선(中大船) 3척과 쾌선(快船) 10척, 무군선(無軍船) 13척을 거느리고 강화(江華)를 수어(守禦)하는데, 장번 수군(長番水軍)이 69명이요, 각관(各官)의 좌·우령(左右領) 선군(船軍)이 총 1천 5백 97명이다. 대개 배 1척에 각기 땔나무와 물을 실어 나르는 삼판소선(三板小船)이 있으며, 그 무군선은 만일 경급(警急)한 일이 있으면 영선군(領船軍)을 모두 징발하여 태우는 것이니, 뒤의 것도 모두 이와 같다. 】 영종포 만호(永宗浦萬戶)는 남양부(南陽府)의 서쪽에 있고, 【중대선(中大船) 3척, 맹선(孟船) 1척, 무군선(無軍船) 3척이요, 각관의 좌·우령(左右領) 선군(船軍)이 총 5백 10명이다. 】 초지량 만호(草芝梁萬戶)는 안산(安山) 서남쪽 모래곶이[沙串]에 있고, 【중대선 5척, 무군선 4척이요, 장번 수군(長番水軍)이 8명이며, 각관의 좌·우령 선군이 총 6백 15명이다. 】 제물량 만호(濟物梁萬戶)는 인천군(仁川郡) 서쪽 성창포(城倉浦)에 있다. 【병선(兵船) 4척, 무군선 4척이며, 각관의 좌·우령 선군이 총 5백 10명이다. 】
우도 수군 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은 교동현(喬桐縣) 서쪽 응암량(鷹岩梁)에 있고, 【항상 쾌선(快船) 9척과 맹선(孟船) 3척과 왜별선(倭別船) 1척을 거느리고 교동(喬桐)을 수어하는데, 장번 수군이 2백 95명이요, 각관의 좌·우령 선군이 1천 18명이다. 】 정포 만호(井浦萬戶)는 강화부(江華府) 서쪽에 있다. 【쾌선 11척, 무군선 10척이요, 강화(江華) 장번 수군(長番水軍)이 2백 46명이며, 각관 좌·우령 선군이 9백 24명이다. 】
좌도(左道) 충청도(忠淸道) 정역 찰방(程驛察訪)의 관할 역(驛)이 7이요, 【양재(良才)·낙생(樂生)·구흥(駒興)·김녕(金寧)·좌찬(佐贊)·분행(分行)·무극(無極). 】 우도(右道) 정역 찰방(程驛察訪)의 관할 역(驛)이 8이며, 【영서(迎曙)·벽제(碧蹄)·마산(馬山)·동파(東坡)·초현(招賢)·청교(靑郊)·교예(狡猊)·중련(中連). 】 경기(京畿)·강원도(江原道) 정역 찰방(程驛察訪)의 관할 역이 22이다. 【녹양(綠楊)·안기(安奇)·양문(梁文)·풍전(豐田), 그 나머지 18역은 모두 강원도 지경에 있다. 】
좌도 수참 전운 판관(左道水站轉運判官) 【광진 승(廣津丞)을 겸하다. 】 , 우도 수참 전운 판관(右道水站轉運判官) 【벽란도 승(碧瀾渡丞)을 겸하다. 】 , 감목관(監牧官) 1인, 의학 교유(醫學敎諭) 1인, 검률(檢律) 1인, 역승(驛丞) 5인이다.
중림도(重林道)의 관할 역이 6이요, 【경신(慶申)·석곡(石谷)·반유(盤乳)·남산(南山)·금수(金輸)·종생(種生). 】 동화도(同化道)의 관할 역이 5이며, 【장족(長足)·해문(海門)·청호(菁好)·가천(加川)·강복(康福). 】 평구도(平丘道)의 관할 역이 8이요, 【구곡(仇谷)·쌍수(雙樹)·봉안(奉安)·오빈(娛賓)·전곡(田谷)·동백(冬白)·감천(甘泉)·연동(連洞). 】 경안도(慶安道)의 관할 역이 7이며, 【덕풍(德豐)·아천(阿川)·오천(吾川)·유춘(留春)·양화(楊花)·신진(新津)·안평(安平). 】 도원도(桃源道)의 관할 역이 6이다. 【구화(仇和)·백령(白嶺)·옥계(玉溪)·용담(龍潭)·단금(丹金)·상수(相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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