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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박용만 집터_독립운동가를 찾아서6

by noksan2023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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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집터_독립운동가를 찾아서6

 

 

박용만 집터

 

 

박용만 집터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박용만의 집이 있던 곳이다. 박용만朴容萬은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활동하였고, 1904년 보안회 간부로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7월 덴버시에서 애국동지대표회를 열었고, 1910년 6월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한인소년병학교를 열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1911년 「신한민보」 주필, 1912년 「신한국보」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북미지방총회대표로 참가하여 외교원에 선임되었다. 1914년 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시관학교를 운영하였고,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바 있다. 또 1919년 3월 하와이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 「태평양시사」를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 총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중국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 개최를 주도하고 1922년 텐진에서 대일무력투쟁을 호소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창조파로서 활동하면서 1924년 창조파 중심의 인사들이 설립한 한국독립당의 비서장에 선임되는 등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 박용만의 초기 생애

 

 

박용만은 1881년 강원도 철원군 서변면 중리 109번지에서 태어났다. 1893년 경 상경하여 관립 일어학교인 한성일어학교 漢城日語學校에 다니다가 1895년 숙부 박희병朴犧秉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미국으로 도항하였다가 정부의 소환으로 1897년 귀국하였다. 박용만은 박영효, 이승만, 전덕기, 정순만 등과 어울리다가 박영효 역모사건과 연루되어 수감생활을 한다. 1903년 상동청년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기 위한 보안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그는 정순만, 이승만 등과 함께 수감되어 옥살이를 하면서 의형제를 맺고 이른바 3만으로 불리게 되었다.

 

옥살이가 끝난 후 상동청년회의 도움으로 박용만은 이승만의 아들 이태산李泰山, 정순만의 아들 정양필鄭良弼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그는 옥중에서 만났던 신흥우申興雨와 고학방법을 의논한 뒤, 문양목文讓穆 .백일규白-圭 등과 의기투합하여 캘리포니아를 돌아다녔다. 숙부 박희병이 미국으로 건너오자 이들은 네브라스카주 커니Keaney시에 정착하였다. 커니 시에서 그는 한인들의 정착을 도와 젊은이들은 학교에 입학시키고, 장년층은 철도공사장에 취직시켜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1906년 콜로라도주 덴버시로 이주한 그는 하와이에서 건너온 한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한편 한인유학생회를 조직하였다. 숙부 박희병이 1907년 사망하자 콜로라도예비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인 1908년 덴버지역에서 애국동지대표회를 개최하였다. 애국동지대표회에는 박용만과 이승만, 이상철 등 국내외의 대표자 36명이 참석하였고, 국내외에 통일기관을 조직하고 통신국을 설치하여 서로 연락하며,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애국동지대표회가 끝난 후 그는 네브라스카 주립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는 한편, 한인소년병학교의 설립을 위해 준비하였다. 박처후朴處厚, 임동식林東植 등과 힘께 한인군사학교 설치를 결의하고, 군사학교 설립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먼저 박처후가 있는 커니 지방의 한 농장에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미군이 예전에 사용하던 총기를 사들였으며, 군사 훈련은 한국군 출신인 김장호에게 맡겼다. 또한 박용만은 네브라스카주정부, 정한경은 커니지 방청과 교섭하여 1909년 6월 초순 네브라스카주의 정식허가를 받은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고 학생 13명이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1909년 겨울 박용만은 한인소년병학교를 링컨으로 기고, 직접 군사훈련을 감독하였다. 1910년 4월 한인소년병학교를 헤이스팅스대학 내로 옮겼다. 약 30여명의 학생들은 학기 중에는 각자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여름방학에 한인소년병학교에 입소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

 

한편 박용만은 학교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각지를 순회하며 의연금을 모집하여 캘리포니아에서 600달러를 모금하였다. 또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의 사장 최정익崔正盆을 만나고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던 멕시코 한인들을 하와이로 입국시킬 수 있도록 해달라는 대한인국민회의 요청을 받아 교섭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2. 하와이에서의 활동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1차대표원회의에서 북미지방총회 선출대표원으로 참석, 안창호安昌浩, 박상하와 함께 헌장수정위원 및 중앙총회 외교원에 선임되었다. 회의가 끝난 후 박상하는 박용만을 하와이로 초청하였고 하와이지방총회 기관지인 「신한국보」의 주필직을 권유했다. 1912년 12월 호놀룰루에 도착한 박용만은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하와이지방총회의 자치권과 특별경찰권을 인정받았으며, 「신한국보」를 「국민보」로 개명하였다. 1914년에는 하와이군사령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오하우 카할루우에 대조선국민군단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창설하였다.

 

1915년 2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박용만을 부총회장으로 선출하는 등 박용만에 대한 한인들의 명성과 신뢰가 매우 높았으며, 1917년 10월 뉴욕 맥알핀호텔에서 개최된 소약속국동맹회의에 한인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 박용만은 일제의 억압을 알리고, 조선이 독립할 자격이 있음을 연설하였다. 연설을 마치고 하와이로 돌아오던 박용만은 샌프 란시스코를 거치며 동포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918년 하와이 국민회에서 내분이 발생했고, 이승만은 일본 군함을 공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박용만을 공격했으며 박용만은 이로 인해 미 육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결국 이후 박용만과 이승만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1918년 7월 박용만은 하와이국민회임시중앙연합회를 조직하고 11월에는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였다.

 

1919년 2월 하순 3 .1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알게된 그는 3월 3일 호놀룰루의 한인자유교회에서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지부를 조직하고 하와이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지에 「대한독립선언서」를 번역하여 게재하였다. 이후 3월 30일 대조선독립단 하와이지부 선포식을 정식으로 거행하였으며, 4월 13일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피선되었으나 취임을 하지 않았다.

 

 

대조선 국민군단 사관학교

 

 

3. 중국에서의 활동

1919년 5월 박용만은 호놀룰루를 떠나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그는 이름을 한상량韓相良으로 바꾸고, 이종익李鍾翼의 소개로 조성환曺成煥 . 이민복李敏復 백준白準 박상환朴祥煥 이승복李昇馥 김병희金炳僖 등을 만나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창설하였다. 이후 군자금모금활동과 국내 국민군 조직활동을 벌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20년 봄 박용만은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동단大同團의 무정부장武政府長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때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외무부장으로 박용만을 선출하였음에도 그가 상하이로 오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하였고, 박용만은 1920년 3월 29일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에게 자신은 군사업무를 주력으로 할 것이므로 외교업무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4월 19일 국무원회의에서 박용만을 의원면직시켰고, 그는 다시 베이징으로 갔다가 5월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가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다시 베이징으로 복귀한다. 베이징에서 박용만은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을 가지고 있던 극동공화국 전권 의원 유린을 만나 면담하고, 러시아 정부와 비밀협약을 맺게 되는데, 이 협약의 내용은 대한 민국임시정부가 공산주의 확산을 돕고 대신 소련정부는 독립군 근거지 마련을 위한 자금을 지원해주어 대일항전에 나서자는 내용이었다. 소련은 중러연합선전부를 조직하고 박용만을 부장으로 임명하여 베이징 지역 한인들에게 공산주의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이후 박용만은 문창범의 대한국민의회, 이동휘의 한인공산당을 포섭하여 베이징에 독립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어려워지자 그는 1921년 4월 17일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를 열고 국내 및 하와이, 서간도와 북간도, 소련 등지의 단체들을 규합하여 대한 민국임시정부를 비판하고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히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발족하지는 못하였다.

 

동시에 박용만은 대조선국민군을 조직하기 위해 국내, 베이징 .하와이의 한인, 소련정부 등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제대로 되지는 못했다. 이에 외부지원에만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박용만은 군대가 농지를 경작하는 둔전병제를 운영하고자 했다. 1922년 봄 만주의 훈허渾河 유역에서 땅을 빌려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이후 1923년에는 북만주 및 서북간도에 농장개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군자금모금이 여의치 않게 되어 둔전병제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1924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국민위원회에 참석하여 비서장에 임명되었으나 이견으로 인해 회의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소련이 한인독립운동가를 국외로 추방하자 소련에 지원을 기대하는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박용만은 베이징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베이징 인근 스징산石景山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계속 모금활동을 벌였고, 1925년 7월 호놀룰루에서 열리는 범태평양청년회대회에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히와이를 방문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1년 가까이 군자금을 모금한 그는 1925년 6월 하와이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땅을 구매하여 대륙농간공사를 설립하고 수전을 경영하였다. 또한 정미소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그러던 중 1928년 10월 17일 의열단원 이해명李海鳴이 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박용만을 총으로 쏘아 살해하였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를 돌며 독립군 창설을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박용만 서거 보도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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