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 고려 왕실의 사랑과 전쟁

노국 대장 공주는 원 황실의 공주였다. 고려 왕이 왜 원의 공주와 결혼했을까? 원 공주와 고려 왕이 결혼하는 전통이 생긴 것은 몽골과의 강화 당시 고려의 요청 때문이었다. 무신 정권이 성립된 후부터 무신들에 억눌려 왔던 고려 왕실은 원과 강화하면서 원과 부마 관계를 맺었고, 원의 힘을 빌려 무신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후 고려 왕이 왕에 오르기 전 원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충숙왕의 둘째 아들인 왕전과 노국 대장 공주도 국가 간의 정략적 목적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왕전은 12살이던 1341년부터 원에 머물렀다. 당시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던 시기로 고려의 왕족들은 일정 기간 원에서 지내며 인질 역할을 해야만 했다.
10여 년간 원에서 생활하던 왕전은 선대 왕들이 원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자 왕위에 오를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이에 원의 공주인 노국 대장 공주와 결혼하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공민왕이었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둘의 관계는 화목하였다. 노국 대장 공주는 공민왕이 왕위에 즉위한 후 반원 개혁 정치를 펼쳤음에도 남편을 지지하였다.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불만을 품은 친원파 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공민왕을 죽이려 할 때는 원 공주 신분을 이용하여 왕의 목숨을 지키기도 하였다. 공민왕 역시 노국 대장 공주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노국 대장 공주가 아이를 가지자 그녀의 순산을 위해 기도하며 전국에 사면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안타깝게도 노국 대장 공주는 아이를 낳다가 일찍 사망하였다. 공민왕은 매우 상심하여 공주가 죽은 이후 음식도 먹지 않고 울기만 했으며, 공주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살아 있을 때처럼 대화하며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원 공주와 고려 왕의 결혼이 공민왕 부부 사례처럼 늘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다. 콧대 높았던 원 황실의 공주가 남편이지만 속국의 왕이었던 고려 왕을 업신여기는 일도 많았다. 충렬왕과 결혼했던 제국 대장 공주는 왕보다 자신이 높은 대우를 받기를 원하며 사사건건 왕과 말다툼을 하였다. 충선왕과 결혼했던 계국 대장 공주는 왕이 자신보다 다른 왕비인 조비를 더 사랑하자 원의 힘을 빌려 조비와 그녀의 집안을 처벌하였다. 충선왕도 원의 압력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충숙왕과 결혼했던 복국 대장 공주도 충숙왕과 잦은 갈등을 빚었다. 그녀가 화가 난 충숙왕에게 얻어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 만큼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은 원 황실 공주와 결혼한 덕분에 원 제국 내부에서도 비교적 꽤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없는 정략결혼이었기에 대부분 행복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였다.
노국대장공주 (魯國大長公主)
노국대장공주는 고려후기 제31대 공민왕의 왕비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1365년(공민왕 14)에 사망했다. 원나라 공주로 이름은 보탑실리이다. 12세의 나이에 원에서 숙위생활을 하던 공민왕과 혼인하여 승의공주로 책봉되었다. 노국대장공주라는 이름은 사후에 원에서 내린 시호의 약칭이다. 성품이 조용하고 단아했으며 15년 동안 고려 왕비로 있으면서 공민왕의 후비로서 책무를 다했다. 국내 기반이 미약한 공민왕의 정치운영을 지지하고 조일신의 난이나 흥왕사의 난 때 온몸으로 맞서 공민왕의 목숨을 지켜냈다. 1365년 2월 난산으로 사망하였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원나라 공주로, 이름은 보탑실리(寶塔失里)이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신원사(新元史)』에는 충숙왕의 계비인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의 아버지인 위왕(魏王) 아목가(阿木哥)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원사』에 아목가는 1324년(충숙왕 11)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노국대장공주는 아목가의 아들인 패라첩목아(孛羅帖木兒)의 딸로 보는 것이 옳다. 조국장공주와 노국대장공주는 고모와 조카 사이다.
공민왕은 1341년(충혜왕 복위 2) 12세의 나이로 원에서 숙위생활을 하였다. 공주는 1349년(충정왕 1)에 공민왕과 혼인하여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로 돌아왔으며, 부를 설치하여 숙옹부(肅雍府)라 하였다. 1365년(공민왕 14) 2월에 난산(難産)으로 사망하였다.
노국대장공주는 성품이 조용하고 단아하였으며, 15년 동안 고려왕비로 있으면서 공민왕의 후비로서의 책무를 다하였다. 1353년(공민왕 2) 8월에 원에서 기황후의 어머니인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을 위해 보르차[孛兒札]연을 베풀 때 공주는 원에서 온 만만태자(巒巒太子)와 함께 남쪽을 향해 앉고, 왕은 서쪽에, 이씨는 동쪽에 앉았다. 이는 당시 노국대장공주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국내기반이 미약한 공민왕의 정치운영을 지지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지켜준 존재였다.
1352년(공민왕 1) 9월 연저(燕邸) 수종공신(隨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켰다. 이 때 공민왕을 시해한 자들이 모두 조일신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부원세력인 조일신에 맞서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노국대장공주의 이러한 정황은 흥왕사의 난 때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1363년(공민왕 12) 연저 수종공신인 김용 등은 행궁인 흥왕사로 침입하여 원 황제의 명령을 받고 들어왔다고 하여 침전에 들어가 공민왕을 시해하고자 하였다. 이때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을 온 몸으로 맞서 지켜냈다. 이색(李穡)은 이 상황에 대해 ‘노국공주가 문 앞에서 공민왕을 지키려고 앉아 있었다. 적들이 그 앞에서 칼을 빼들고 덤벼드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감히 공주에게는 독기를 부리지 못했으므로 장상(將相)이 그 틈을 이용하여 김용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한편 노국대장공주는 후사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353년(공민왕 2) 4월과 9월에는 복령사(福靈寺)에 행차하여 후사를 빌었으며, 7월에는 왕과 공주가 함께 내정(內庭)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에 제사를 지냈다. 또 같은 해에 태조의 증조비인 정화왕후(貞和王后)가 출생한 곳인 흥성사(興聖寺)에 가서 공주가 직접 공덕주가 되어 불사에 힘쓰는 한편 후사를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국대장공주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대신들은 왕을 위한 후궁을 둘 것을 공주에게 건의하였다. 공주는 이를 허락하였고, 이 때 후궁으로 들어온 이가 이제현의 딸 혜비(惠妃)이다. 그러나 공주는 곧 후회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투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공주는 임신을 하게 되고 1365년(공민왕 14) 2월에 출산에 들어갔다. 공민왕은 공주의 출산일이 다가오자 2죄(참형과 교형) 이하를 사면하였다. 그러나 난산으로 공주의 병이 심해지자 사찰과 신사에 빌게 하였고 1죄(참형)까지 사면하였으며, 왕은 스스로 분향하고 잠시도 공주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주는 난산 끝에 아이와 함께 사망하였다.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공민왕은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의 예에 의거하여 장례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4도감 13색(色)을 설치하여 초상 치르는 일을 맡게 하였으며, 7일마다 추천도량을 개설, 49일째 되는 날 정릉(正陵)에 장사지냈다. 1366년(공민왕 15)에 영전(影殿)인 인덕전(仁熙殿)을 조성하고, 1370년(공민왕 19)에 수릉호(守陵戶)를 두고 원찰로 광암사(光岩寺)를 지정하였다.
공주의 시호는 처음에는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仁德恭明慈睿宣安王太后)’이었으나 1367년(공민왕 16)에 원나라에서 ‘휘의노국대장공주(徽懿魯國大長公主)’를 내렸다, 결국 이를 합성해 ‘인덕공명자예선안휘의노국대장공주(仁德恭明慈睿宣安徽懿魯國大長公主)’로 했다. 우왕 때는 ‘인덕태후(仁德太后)’라 했다. 올바른 호칭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노국공주는 인덕왕후(仁德王后)로도 알려져 있다.
제국대장공주 (齊國大長公主)
제국대장공주는 고려후기 제25대 충렬왕의 제1 왕비이다. 1259년(고종 46)에 태어나 1297년(충렬왕 23)에 사망했다.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이다. 고려 원종이 세조에게 요청하여, 16세의 나이에 39세의 충렬왕과 혼인하였다. 조정에서 중앙에 배석하는 등 충렬왕보다 위상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정화궁주 무고사건을 일으켜 자신의 위상을 과시하고 아들 충선왕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국정에도 개입하였다. 원 무종이 '황고 제국대장공주 고려국 왕비'로 추봉하였다.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는 1259년에 원 세조 쿠빌라이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은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이다. 1274년(원종 15) 5월에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있을 때 혼인하였다. 그리고 이 해에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함께 고려에 들어왔다.
1275년 원성공주(元成公主)로 봉하고, 그의 궁(宮)을 경성(敬成), 전(殿)을 원성(元成), 부(府)를 응선(膺善)이라고 이름 짓고 관속을 두었으며 안동(安東) 경산부(京山府)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정하였다. 1276년(충렬왕 2) 9월에 충선왕을, 1277년에 공주를, 그리고 1278년에 왕자를 출산하였다.
1294년(충렬왕 20)에 원나라 성종(成宗)이 안평공주(安平公主)로 봉하였다. 1297년(충렬왕 22) 5월에 원에서 귀국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현성사(賢聖寺)에서 사망하였는데 향년 39세였다.
1270년 원에 들어간 원종은 세조에게 고려 태자와 원공주의 혼인을 요청하지만 세조는 자신에게는 혼인할 딸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1271년에 다시 원종은 청혼표(請婚表)를 올리고, 이에 세조의 허락을 받아 양국은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다. 1274년 혼인 당시 제국대장공주는 16세, 충렬왕은 39세였다.
공주는 충렬왕과 혼인한 다음 달에 고려에 들어왔는데, 몽골식 풍속으로 몽골식 천막인 궁려(穹廬)를 가설하고 흰 양의 기름으로 액막이 제사를 지냈다. 공주의 몽골식 생활은 고려에 있는 동안 계속 되었다. 충선왕이 태어났을 때에는 공주를 시중들던 사람들이 문안하러 온 왕족과 관료들에게 문 입구에서 옷을 벗기는 이른바 '설비아(設比兒)'라는 몽골식 풍습을 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주는 자신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면서도 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충렬왕 초기 공주의 위상은 충렬왕보다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충렬왕 즉위식에 참여한 다루가치가 공주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을 이유로 왕에게 절을 하지 않은 데서도 보인다. 공주는 남편인 충렬왕과 부부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보다 먼저 혼인한 왕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와 아들 강양공(江陽公) 왕자(王滋)가 있었다. 제국공주가 충선왕을 낳자 정화궁주가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를 개최하였는데, 공주는 정화궁주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였다. 또 이 해에 정화궁주 무고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내용은 정화궁주가 제국대장공주를 질투하여 무당을 시켜 공주를 저주하였다는 것인데, 이후로 정화궁주는 별궁에 거처하여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할 때까지 충렬왕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공주가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일으킨 것으로 보이며, 이는 공주가 국정에 개입하면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즉 공주는 충렬왕에게 소인(小人)들과 함께 다니는 것을 중지할 것을 청하고, 노비 신분인 김자정(金子廷)을 동경부사(東京副使)에 임명한 것에 대한 반감을 직접 표출하여 충렬왕의 측근세력에 대한 비판을 이어갔다. 특히 공주의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아들인 충선왕의 입지 강화와도 관련되었다. 제국대장공주의 위상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1291년(충렬왕 17) 합단(哈丹)을 평정한 원나라 장수 설도간(薛闍干)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공주가 중앙에 앉고, 왕은 그 좌측에 앉았다는 것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제국대장공주는 또한 응선부를 통해 식리(殖利) 활동을 하였다. 즉 공주가 잣과 인삼, 그리고 국내 도자기 제조에 관여하고 이를 중국 강남에 수출하여 많은 이익을 얻었다. 또한 공주는 모시무역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어떤 여승이 흰 모시를 바쳤는데, 가늘기가 매미의 날개 같으며 꽃무늬도 놓여 있었다. 이에 공주는 여승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를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제국대장공주의 정치적 성향과 경제적 식리활동은 그녀가 데리고 온 겁령구 등을 비롯한 자신의 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자연히 이들의 권력남용은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1297년 9월에 고릉(高陵)에 매장하였고 시호는 장목인명왕후(莊穆仁明王后)라고 하였다. 1298년(충렬왕 24)에 진왕(晉王)이 사람을 보내 제사하였으며 고당왕(高唐王)도 사람을 시켜 부의를 보내 왔다. 이 해에 충선왕이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자 인명태후(仁明太后)로 추존하고, 묘련사(妙蓮寺)를 원찰로 삼아 충선왕이 참배하였다. 1310년(충선왕 복위 2) 원 무종이 '황고 제국대장공주 고려국 왕비(皇姑齊國大長公主高麗國王妃)'로 추봉하였다.
계국대장 공주
계국대장공주는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왕비이다. 본명은 보탑실련(寶塔實憐)으로, 원(元) 진왕(晉王) 감말라[甘麻剌]의 딸이다. 충선왕과 불화하여 충선왕 폐위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충렬왕과 충선왕의 갈등 상황 속에서 그 개가(改嫁)가 추진되기도 하였다. 1315년에 사망하였다.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의 이름은 보탑실련(寶塔實憐)이다. 할아버지는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장자 짐김[眞金]이며, 아버지는 진왕(晉王) 감말라[甘麻剌]이다. 동생은 원 진종(晋宗)이다. 1296년(충렬왕 22) 충선왕이 세자로 원에 있을 때 혼인하였고, 1298년(충선왕 즉위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궁을 '중화궁(中和宮)'이라 하고 부를 '숭경부(崇敬府)'라 하였는데, 특히 숭경부는 좌우사윤(左右司尹)을 두어 장관 체제의 특혜를 누렸다. 1309년(충선왕 복위 2)에 원으로부터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로 봉해졌다. 1315년(충숙왕 2) 원에서 사망하였다.
1297년(충렬왕 23) 충렬왕이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줄 것을 원 세조에게 요청하였고, 이에 1298년 정월 세자와 공주가 연이어 귀국한 후 충선왕이 즉위하였다.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하기 이전에 이미 정비(靜妃) 왕씨, 순화원비(順和院妃) 홍씨, 조비(趙妃) 등의 부인들을 맞이하였고, 공주와 충선왕은 혼인 초부터 부부 관계가 좋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공주와 충선왕의 불화가 조비와 그 모친이 둘의 사이를 저주한 데 따른 것이라는 익명서가 게시되었다. 이른바 ‘ 조비무고사건’이다. 조비의 아버지인 조인규(趙仁規)는 역관(譯官)으로 출세한 인물로, 세조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았으며 충선왕의 중요 세력이었다. 당시 고려는 충렬왕 세력과 충선왕 세력이 갈등하고 있었으므로, 이 사건은 충렬왕 세력이 충선왕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원 사신들이 고려와 원을 오가는 가운데, 충선왕이 즉위 후 단행한 관제 개편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고, 결국 즉위 한 해 8월, 충선왕은 폐위되어 원 황실의 케식으로 소환되었다. 공주도 이때 원으로 갔다.
복위한 충렬왕은 충선왕의 황실 부마 지위를 박탈하기 위하여 공주를 고려의 방계 종실인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과 다시 혼인시키려 하였고, 공주도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첫 번째 시도는 1301년(충렬왕 27) 5월에 원에 가는 민훤(閔萱)에게 공주의 개가(改嫁), 즉 재혼을 청하는 표문을 올리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충선왕을 총애한 황후 코코진[闊闊眞]이 사망한 것도 충렬왕과 그 지지 세력이 공주의 개가를 추진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민훤은 이 표문을 제출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두 번째 시도는 1303년(충렬왕 29)에 있었다. 당시 충렬왕은 직접 원으로 가서 전왕(前王) 즉 충선왕의 귀국을 저지하는 한편,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를 요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원 성종(成宗) 테무르가 충렬왕의 입조(入朝)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돌아왔다. 마지막 세 번째 시도는 1305년(충렬왕 31)에 충렬왕이 원의 입조 허락을 받고 원으로 가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충렬왕은 공주의 개가를 추진하기 위해 송린(宋璘) · 송방영(宋邦英) · 왕유소(王惟紹) 등을 대동하였다. 이들이 수행한다는 소식에, 충선왕 측에서도 원 승상(丞相) 탑랄한[塔剌罕]을 통해 황제에게 고하여 홍자번(洪子蕃) · 최유엄(崔有渰) 등이 충렬왕을 따라 원으로 가서 원 조정에서 공주의 개가 문제를 두고 정쟁을 벌이게 하였다. 특히 세 번째 시도는 공주가 자신의 거처인 지후사(祗候司)에서 충렬왕과 함께 공모하였다. 충렬왕의 측근 세력인 왕유소(王維紹) 등이 원 조정에서 서흥후 왕전에게 공주를 개가시키도록 청원하였으나 성사되지 않고, 오히려 충선왕 측에서 왕유소 등이 왕 부자 사이를 이간하였다는 죄목을 고하여 왕유소 등이 체포, 수감되기에 이르자, 공주는 고발장을 올린 신료들이 왕의 처소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개가 시도는 충선왕이 지지한 원나라 무종(武宗)이 황제위에 등극하면서 무산되었다.
1313년(충선왕 5)에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과 함께 고려로 귀국하였다. 이때 그녀는 고려뿐만 아니라 원에서도 보지 못 할 정도로 융성한 대접을 받았다. 충선왕은 공주와 불화하였으니 몽골 황실 부마라는 지위의 정치적 중요성을 인지하여 그와 혼인을 유지하고 후대하였다. 충선왕이 이때 귀국한 것은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한 후 아들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한 것으로, 충선왕은 이듬해인 1314년 다시 원으로 갔다. 공주는 1315년 원으로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1316년에 공주의 시신이 고려에 이르니, 영안궁(永安宮)에 빈소를 차려 두었다가 매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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