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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별무반_여진 토벌 고려 특수부대, 동북9성을 쌓다

by noksan2023 2025.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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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무반_여진 토벌 고려 특수부대, 동북9성을 쌓다 

 

 

 

척경입비도

 

 

 

"죽음을 감수한 병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서 싸워 19명의 목을 베니, 적이 패전하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척준경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돌아오니 윤관 등이 누각 아래로 나아가 맞이하여 손을 잡고 서로 절하였다. "

 - 「고려사」권96, 열전9 「윤관」

 

이자겸의 난과 관련해 척준경이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하급 무관 출신으로 여진 정벌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다. 홀로 성벽 위를 올라가 적 추장 여럿을 베고 돌아오거나, 수만 명의 적을 맞이하여 소수의 결사대로 적진을 헤집어 놓는 척준경의 활약은 여진 정벌에 큰 힘이 되었다. 하급 무관이었던 그가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며 무공을 세울 수 있던 이유는 윤관에게 발탁된 덕분이다.

 

윤관은 고려 중기의 인물이다. 이 시기 고려는 세 번에 걸쳐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고 안정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고려 조정은 천리장성을 쌓아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지만, 동북방에 자리 잡은 여진은 또 하나의 불안 요소였다. 여진은 고구려, 발해에 속해 있던 말갈의 후예로서 유목 민족 특유의 강인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후 우야소(오아속)가 여진의 추장으로 등장하면서 고려와 충돌하였고, 1104년  윤관은 여진을 공격했지만 대패하였다. 보병 중심의 고려군으로는 기병으로 이루어진 여진을 당해낼 수 없었다. 

 

윤관은 여진에게 맞설 수 있는 특수 부대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기병대인 신기군, 보병대인 신보군, 승병대인 항마군 등 여러 부대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별무반을 조직하였다. 1107년 윤관은 마침내 17만의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원정에 나서 1000여 개의 촌락을 평정하는 등 동북 국경을 크게 넓혔다.

 

여진을 몰아낸 윤관은 그 자리에 백성을 이주시키고 새롭게 9개의 성을 쌓았다. 이른바 동북 9성(영주, 옹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 평융진)이다. 윤관은 선춘령에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이 비석은 현재 존재를 알 수 없고, 동북 9성의 범위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이다.

 

하지만 고려는 어렵게 개척한 동북 9성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에 반환하였다. 당시 본거지를 빼앗겼음에도 전력이 만만치 않던 여진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죽기 살기로 응전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9성 간의 거리가 멀어 경계 유지나 방어가 쉽지 않아 많은 국력이 소모되었다. 결국 고려는 여진에게 고려를 부모 나라라고 생각하며, 다시는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9성을 돌려주었다. 9성을 되찾은 후 여진은 빠르게 성장하였고, 완옌부의 아구다(아골타)를 중심으로 부족을 통일해 금을 건국하였다. 이후 부모의 나라 고려는 강성해진 금에 사대하는 신세가 되었다. 

 

 

구성 (九城)

 

 

 

동북 9성 추측

 

 

 

구성(九城)은 1107년(예종 2) 12월에서 1109년(예종 4) 7월 사이에 윤관이 별무반을 동원하여 고려 동북쪽의 변경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축성한 성곽이다. 1108년(예종 3) 3월 경진일 무렵에 구축된 9성은 영주, 웅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 평융진이다. 1109년 7월 신유일부터 순차적으로 철수한 9성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의주, 공험진, 평융진이 빠져 있고 숭녕진, 진양진, 선화진이 추가되어 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북방 지역을 개척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변경 지역의 요충지에 주(州)와 진(鎭)을 설치하고 방어를 위한 성곽을 축조하였다. 성곽 주변 지역에는 감시 초소 역할을 하는 수(戍)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성곽을 지키는 군사를 파견하고 백성들을 이주시켜 개척 지역을 확보하였다. 아울러 고려는 변경 지역으로 투항해 온 발해 · 여진 · 거란의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서북 변경 지역에 비해 동북 변경 지역으로의 진출은 상대적으로 더디었다. 서북 변경 지역에서는 고려와 거란이 남북으로 여진인들을 몰아내는 형세였다. 반면, 동북 변경 지역에서는 토착 여진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토착 여진인들은 사냥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면서 정주 생활을 하였다.

1033년(덕종 2)에서 1044년(정종 10)까지 진행된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성을 전후로, 고려는 변경 지역 여진인들에게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고려는 천리장성 주변 지역의 번호(蕃戶)들을 고려의 호적에 편입하였다.

1038년(정종 4) 5월 무렵에는 위계주(威鷄州)와 같은 기미주(羈縻州)가 등장하였다. 1073년(문종 27)에 이르면 다수의 여진 부락들이 고려의 기미주로 재편되었다. 고려는 기미주를 운영하면서 번호(蕃戶)의 편적(編籍), 주(州)의 이름 제정, 주기(朱記)의 사여, 번병(蕃兵)의 활용 등과 같은 행정적, 의례적 절차를 시행하였다. 여진 추장들은 기미주 단계에서 진일보하여 고려의 군현으로 편성되기를 원하기도 하였다.

1073년(문종 27) 6월 무렵에 고려는 기미주 운영을 재확인하였다. 고려의 천리장성에서 700리나 떨어진 지역과 오늘날 마천령으로 비정되는 여파한령(餘波漢嶺) 바깥 지역의 여진 부락들이 스스로 와서 고려에 복종하였다. 고려는 관방(關防)을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는 방식 대신 기미주를 이용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선택하였다. 기미주를 중심으로 한 간접 지배 방식은 여진 부락의 동향에 따라 바뀌었다. 또한 개별 기미주는 여진 번장(蕃長)의 정치적 태도에 따라 존폐가 좌우되었다.

1080년(문종 34) 12월에 동번(東蕃)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는 3만의 군사를 함흥 지역으로 출격시켰다. 정주(定州)에서 불과 반나절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함흥 일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는 영역 지배를 고르게 관철하지 않고 개별 부락을 단위로 기미 지배가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려가 장성 이북 지역에 적극적으로 무력을 동원한 것은 기미 지배 지역을 고려의 변경 지역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여진 사회가 변화하면서 고려의 기미주 지역에도 외부적 충격이 가해졌다. 완안부의 영가(盈歌)는 두만강 일대 지역까지 세력 범위를 확대하였다. 1102년(숙종 7)에는 영가가 고려에 사절을 보내왔고, 1103년(숙종 8)에는 고려도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다.

영가 집권 말년인 1103년에는 갈라전(曷懶甸) 지역을 두고 고려와 완안부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영가가 죽은 후 오아속(烏雅束)이 새로운 수장이 되자 완안부는 무력 공세를 강화하였다. 오아속은 석적환(石適歡)을 보내 갈라전 지방의 7성(城)을 포섭하였다. 이에 고려도 실력을 행사하여 오수(五水) 사람들을 복종하게 만들고 단련사(團練使) 14인을 포섭하였다.

완안부의 사갈(斜葛)은 석적환과 함께 기병을 이끌고 고려의 정주관(定州關) 외각 지역까지 들어왔다. 고려는 임간(林幹)을 보내 대비하도록 하였지만, 임간은 1104년(숙종 9) 2월에 정주성 밖에서 완안부 여진과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곧바로 고려는 윤관(尹瓘)을 파견하였다. 윤관은 3월에 벽등수(闢登水) 지역에서 석적환이 이끄는 여진군과 전투를 치루었으나 과반이 넘는 군사를 잃고 패전하였다. 연속된 전투에서 패배한 고려는 완안부 여진과 화친을 맺어야 했다. 6월에 완안부의 사갈과 화친 논의가 진행되었다.

두 번의 전투에서 연패한 고려는 포섭한 단련사 14명을 완안부에 돌려보내 주었다. 6월에 진행된 화친 논의 끝에 고려와 완안부 사이의 경계는 천리장성을 중심으로 획정되었다. 장성 축조와 더불어 설치된 고려의 기미주는 1073년(문종 27)경에는 마천령 이북 지역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완안부와 치룬 전쟁의 패배로 고려는 모든 기미주를 상실하였다.

 

절치부심하던 고려는 여진 기병에 대비하고자 별무반(別武班)을 편성하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집하였다. 1107년(예종 2) 윤 10월 20일(임인일)에 여진을 토벌하기로 결정되자 윤관, 오연총(吳延寵)이 원수, 부원수로 임명되었다.

서경(西京)으로 행차한 예종은 12월 1일(임오일)에 윤관, 오연총에게 부월주8을 하사하였다. 고려 출정군은 서경을 떠나 정주로 향하였다. 전격적인 군사 작전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하여 고려는 4일(을유일)에 갈라전 지역에 있는 토착 여진 추장들을 유인하여 상당수를 죽였다. 이때 완안부에서 보낸 사신 두 명도 함께 살해당하였다.

서경을 떠난 고려군은 13일(갑오일) 무렵에 정주 경계 지역으로 왔고, 14일(을미일) 새벽에 윤관 직속군, 좌군, 중군, 우군, 선병(船兵)이 출전하였다. 석성(石城) 지역에서 여진군의 저항을 받았지만 고려군의 출정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출전한 다음날인 15일(병신일)에 윤관은 곧바로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에 성을 쌓게 하고 승전 소식을 보고하였다. 고려의 전격적인 공격으로 초기에는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고려가 영주, 웅주, 복주, 길주 4성을 축성하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부터 곧바로 여진군의 저항을 받았다. 1108년(예종 3) 음력 1월 14일(을축일)에 윤관과 오연총은 여진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영주성으로 회군하여야 했다.

26일(정축일)에는 여진군 2만 명이 영주성을 공략하였다. 영주성을 공략한 여진군은 척준경(拓俊京)의 분전으로 일단 물러났지만 고려는 군사를 재정비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윤관, 오연총은 여러 장수를 이끌고 중성대도독부(中城大都督府)에서 회합하였다.

고려는 추가로 성곽을 구축하고 관원을 임명하였다. 2월 13일(갑오일)에 함주대도독부사(咸州大都督府使)와 영주, 복주, 웅주, 길주, 공험진(公嶮鎭)의 방어사(防禦使)가 임명되었다.

27일(무신일)에 함주(咸州), 공험진 축성이 완료되자 윤관은 여진을 평정하여 6성(城)을 새로 쌓은 일을 표문주12으로 올려 칭하(稱賀)주13하고 기문(記文)을 지어 영주의 남청(南廳)에 걸어두게 하였다. 그리고 공험진에 비(碑)를 세워 경계로 삼았다. 이는 공식적으로 갈라전 지역 축성이 성공적으로 일단락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한 행위였다.

임언(林彦)이 작성한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기록된 신개척 지역은 동쪽으로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북쪽으로는 개마산(盖馬山)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장주(長州), 정주에 접한 사방 300리 지역이었다.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인들의 군사적 대응은 만만치 않았다. 1108년(예종 3) 음력 1월 26일(정축일)에 여진은 병사 2만을 동원하여 영주성 남쪽에 주둔하고 영주성을 공략하였다. 2월 11일(임진일)에는 웅주를 포위하였다.

고려 출정군은 추가 축성을 단행하였다. 3월 30일(경진일)에 고려는 의주(宜州), 통태진(通泰鎭), 평융진(平戎鎭)의 3성을 추가로 축성하였다. 6성 외에 추가로 3성을 구축하여 지역 지배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로서 고려 출정군은 9성을 축성하고 남쪽 지역의 백성을 사민하였다.

9성을 구축한 이틀 후인 4월 2일(임오일)에 윤관, 오연총은 공신호와 관직을 사여받았다. 그리고 9일(기축일)에 윤관, 오연총은 개경으로 개선하여 돌아왔다. 공식적인 공신호와 관직의 사여, 개경으로의 개선 등은 성공적인 영토 개척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하는 행위였다.

6성 외에 추가로 3성을 축성하자, 박경작(朴景綽)은 오랑캐의 국경으로 깊이 들어가 성지(城池)를 배치하면 나중에 지키기 어렵다고 우려감을 표하였다. 박경작의 우려대로 갈라전 지방에서의 공방전은 지속되었다. 전쟁의 상황에 따라 윤관, 오연총은 출정과 귀환을 반복하여야 했다.

윤관은 1108년(예종 3) 7월 7일(을묘일)에 2차로 출정하여야 했고, 1109년(예종 4) 6월 12일(을유일)에는 3차로 출정하여야 했다. 오연총도 1108년(예종 3) 4월 23일(계묘일)에 2차로 출정하였고. 1109년(예종 4) 4월 4일(무인일)에 3차로 출정하였으며, 6월 12일(을유일)에는 4차로 출정하였다. 이처럼 윤관, 오연총이 출정과 귀환을 반복할 정도로 갈라전 지방에서의 공방은 치열하고 급박하였다.

고려 출정군은 변화된 전황에 맞추어 9성 이외의 또다른 방어 성곽을 구축하여야 했다. 관련 사료를 살펴보면, 1109년(예종 4) 3월 7일(신해일) 기록에서 숭녕진(崇寧鎭)의 존재를, 7월 21일(갑자일) 기록에서 진양진(眞陽鎭) 철수 사실을, 22일(을축일) 기록에서 선화진(宣化鎭) 철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숭녕진, 진양진, 선화진 3성이 또다시 축성된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려가 갈라전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구축한 축성지는 9성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12성에 이르렀다.

고려의 성곽 가운데 일부는 치열한 공방전 끝에 여진군에 함락되었다. 『금사(金史)』기록에 의하면 혼탄(渾坦)과 석적환이 이끄는 완안부 여진군이 도문수(徒門水)에서 병사를 집결한 뒤에,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선봉이 되어 고려의 2성을 공격하여 차지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완안부의 여진군이 무력으로 타길성(駝吉城)을 공격하여 함락한 기록이 있는데 타길성은 길주로 여겨진다.

「장의왕완안루실비(壯義王完顔婁室碑)」 기록에 의하면 완안부 군대가 5개의 성을 항복시켰다고 전해진다. 고려의 기록인 「이탄지묘지명(李坦之墓誌銘)」에서는 1108년(예종 3)부터 여진군의 포위 공격을 받은 웅주성이 1109년(예종 4)에 결국 무력으로 함락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는 여진의 강화 요청에 응하여 철수를 논의하였다. 1109년(예종 4) 2월 23일(무술일)부터 진행된 강화 논의는 7월 2일(을사일)에 9성을 돌려주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3일(병오일)에 9성 환부를 여진에게 알렸다.

이에 18일(신유일)에 길주에서, 19일(임술일)에 숭녕진과 통태진에서, 21일(갑자일)에 영주, 복주, 진양진에서, 22일(을축일)에 함주, 웅주, 선화진에서 차례로 철수하였다.

1108년(예종 3) 3월 30일(경진일) 무렵에 고려가 구축한 9성은 영주, 웅주, 복주, 길주, 함주, 공험진, 의주, 통태진, 평융진으로 1109년(예종 4) 7월 18일(신유일)부터 철수한 9성과 차이가 있다. 의주, 공험진, 평융진이 빠지고 숭녕진, 진양진, 선화진이 들어간 셈이다.

급변하는 전황에 따라 숭녕진, 진양진, 선화진이 추가로 축성되었고, 일부 성곽들은 여진에게 함락되었거나 고려가 철거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9성의 범위에 대해서는 함흥평야설, 길주설, 두만강 이북설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지금까지도 여러 학설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는 관련 사료가 명확하지 않고 남북 분단으로 현지 성곽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기록에는 축성 지역에 대한 다양한 이설들이 기재되어 있다.

공험진은 9성 가운데 경계가 되는 비가 세워진 곳이어서 일찍부터 위치에 관심이 많았다. 조선 초에 세종(世宗)은 김종서(金宗瑞)에게 공험진의 위치를 조사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경원도호부에서 북쪽으로 700리 지점에 공험진이 있고 동북쪽으로 700여 리 지점에 선춘현(先春峴)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공험진과 선춘현까지의 구체적인 노정이 기록되어 있다.

『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세주에서는 공험진이 공주(孔州), 광주(匡州), 선춘령(先春嶺) 동남쪽 지역, 백두산(白頭山) 동북 지역, 소하강(蘇下江) 강변 등의 지역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편찬자는 『고려사』 지리지 세주를 다시 인용하면서 공험진의 위치를 조사할 수는 없지만 선춘령 동남, 백두산 동북, 소하강변 지역을 공험진 지역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역사지리 고증으로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비판하였다. 한백겸은 홍원(洪原)과 이성(利城) 지역을, 유형원, 정약용, 윤정기는 길주 이남 지역을, 신경준은 길주에도 미치지 못한 지역을, 한진서는 마천령 지역을, 김정호는 귀문령(鬼門關) 지역을 최북단 축성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학자들은 만선사학의 일환으로 9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대개 이들은 윤관이 주도한 고려 출정군이 이틀만에 축성한 사실을 주목하면서 고려 축성지를 함흥, 홍원, 북청 등지로 한정하였다.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고고학적 발굴 조사가 아닌 초보적인 지표 조사를 통해 함흥평야 일대에서 9성의 성지를 비정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남북한 학계 모두 갈라전 지역과 윤관 축성지를 두만강 이북 지역으로 다시 확장시켜 비정하였다. 이는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조선 전기에 제기된 두만강 이북 700리설을 학문적으로 고증하고자 한 노력이었다. 두만강 이북설을 일부 인정하거나 두만강 일대를 축성지의 북단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반면 중국 학계는 함흥평야 일대나 길주 이남 지역을 주요 무대로 주목하였다.

근래에는 고려시대 당시의 기록을 주목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에 길주가 오랑캐의 변경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고 기록된 점,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 에 고려가 새로 개척한 지역이 장주, 정주로부터 사방 300리 지역이었다고 기록된 점, 『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세주에 9성 지역이 7일정(七日程) 거리였다고 기록된 점 등을 고려해 보면 길주설이 유력하다.

 

 

별무반 (別武班)

 

 

별무반

 

 

 

별무반은 고려 전기 여진정벌을 위해 설치된 임시 군사 조직이다. 1104년(숙종 9)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서 여진정벌에 나섰다가 패하고 돌아온 윤관(尹瓘)의 건의에 따라 설치되었다.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강력한 기병대의 편제를 갖춘 부대이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려들로 이루어진 항마군(降魔軍) 등으로 구성되었다.

 

1104년(숙종 9)에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서 여진정벌(女眞征伐)에 나섰다가 패하고 돌아온 윤관(尹瓘)은 기병의 수적 열세를 크게 느끼고 기병을 강화할 것을 건의하였다. 고려는 이 건의에 따라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해 강력한 기병대의 편제를 갖춘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설치 동기는 당시 이군 육위(二軍六衛)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군사 체제가 붕괴되어 대규모의 군사 동원이 불가능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조처였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려들로 이루어진 항마군(降魔軍) 등으로 구성되었다.

 

조직은 기병과 보병으로 나뉘며, 문무(文武) 산관(散官)과 이서(吏胥)에서부터 장사꾼과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징발 대상으로 하였다. 이들 가운데 말을 가진 자는 기병인 신기군(神騎軍)에 속했고, 말이 없는 자는 보병으로서 신보(神步) · 도탕(跳蕩) · 경궁(梗弓) · 정노(精弩) · 발화(發火) 등의 군에 편입시켰는데, 나이 스물 이상이면서도 과거 응시자가 아니면 모두 신보군에 속하게 하였다. 윤관의 건의에 따라 기병을 강화하기 위하여 별무반을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전마를 낼 수 있는 계층이 문무 산관 정도였으며, 마상 무예를 익히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기병은 생각만큼 강화되지 못하였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별무반 내에는 활(弓)과 노(弩)가 중심이 되는 특수 부대를 집중적으로 편성하였다. 별무반의 다수를 차지했던 신보군, 그 가운데서도 주 · 부 · 군 · 현 출신의 백성들은 주현군(州縣軍)으로서 일부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여진 지역을 점령한 뒤에 성을 쌓는 일 등 공역을 담당하였다. 그 밖에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이 있었다.

이와 같이 여러 계층에서 동원된 별무반을 서반과 모든 진(鎭) · 부(府)의 군인과 함께 4계절 훈련시켜 대규모의 여진정벌을 계획하였다.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기 전에 숙종(肅宗)이 승하했으나 그 뒤를 이은 예종(睿宗)이 적극적으로 여진정벌을 추진하였다. 특히,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곧 동계(東界)를 순시하게 하고 동계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 · 동계행영병마사(東界行營兵馬使) 등을 두어 동계 방면에 대한 군사 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1106년(예종 1) 7월 조정에서 동여진 정벌에 대한 의론주11이 있었다. 이때 도병마사(都兵馬使)는 앞서 동여진과의 싸움에서 패한 원인을 군령이 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지적하면서, 일찍이 현종(顯宗) 때 거란 침입 시에 시행했던 군율을 따를 것을 청해 시행하게 하였다. 그해 윤관과 오연총(吳延寵)이 숭인문 밖에서 신기군과 신보군을 사열한 것으로 보아 별무반의 편성이 신속하게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여진 정벌의 주력 부대가 별무반이었음을 볼 때, 도병마사가 제청한 군령은 바로 별무반을 중심으로 한 군율이라 하겠다.

1107년(예종 2)에 윤관은 엄격한 군율 아래, 병기와 병술을 개량한 대병력의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그리고 고려 동북쪽의 변경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구성(九城)을 쌓는 공적을 세웠다.

 

별무반은 여진정벌이 끝남으로써 해체된 것으로 보인다. 직업 군인이 아니라 임시적인 군사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규모로 농민 중심 군사 부대가 조직되었다는 점은 고려의 군사 제도에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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