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청동상_벌거벗은 임금님

우리 역사에서 전근대 시기에 왕을 그린 초상화인 어진은 여럿 남아 있지만, 왕의 모습을 조각한 동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태조 왕건 청동상은 1992년 10월 왕건릉(개성 현릉) 확장 공사 과정에서 굴착기(포클레인) 삽날에 걸려 나왔다. 이때 동상 다리와 몸통 일부가 훼손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수리 복원하였다. 북한 학계에서는 이것을 왕건릉에 함께 묻힌 불상으로 보고 청동 불상이란 이름으로 전시하였다. 그러나 이후 정밀한 연구를 한 결과 왕건상으로 실체가 밝혀졌다.
태조 왕건 청동상은 왜 옷을 벗고 있는 걸까? 왕건상은 애초에 옷을 입혀 경배를 드리는 나신상으로 만들어졌다. 1992년 출토 당시 표면에 붙어 있던 비단 조각들이나 금박 조각, 옥띠 장식 등은 청동상이 매장될 당시에도 옷을 입고 금도금한 관을 썼으며, 옥띠를 허리에 두른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고려사」의 기록에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을 제사 지내고 의복과 제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졌던 고려 역시 태조 왕건을 나신상으로 만들고 옷을 입혀 경배한 것이다.
태조 왕건 청동상이 쓰고 있는 모자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태조 왕건 청동상의 모자는 황제가 쓰는 통천관이다. 고려는 태조 왕건 당시인 10세기 전반부터 원 간섭기 전인 13세기 중반까지 군주를 황제, 천자라고 일컬었다. 또한 독자적인 연호를 썼고, 군주의 명령을 담은 문서도 황제의 것임을 뜻하는 조서나 칙서로 불렀다. 그래서 천자만이 쓸 수 있는 통천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왕건상은 왜 땅속에 있었던 것일까? 조선은 명에 대한 사대를 기본 외교 정책으로 하였다. 또한 유교적 제사 의례에 있어서 영정이나 조각상을 이단으로 여겨 배격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에 유교적 제례법과 사대 이념에도 어긋나는 통천관을 쓴 태조 왕건 청동상을 매장해 폐기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세종 10년 8월 1일의 기록에 따르면, 여러 곳에 있는 태조 왕건과 2대 혜종의 초상화와 조각상을 공신들의 영정과 함께 수거해 각 능의 옆에 매장하도록 했다. 북한 측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왕건릉 봉분 뒤에서 공사 중 나온 것은 태조의 동상뿐이었다. 혜종의 조각상과 초상화는 혜종릉 옆에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고려 왕실이 신성시한 태조 왕건 청동상은 고려가 망하면서 조선 초에 폐기되었다. 그러나 아주 우연한 발굴로 역사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세상에 나온 태조 왕건 청동상을 통해 우리는 고려가 황제국을 내세웠다는 것과 고구려의 전통적인 제사 의식을 이어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왕건 동상 (王建 銅像)

왕건 동상은 951년에 제작된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 조각상이다. 고려 왕실 최고의 상징물로서 개경의 봉은사 진전(眞殿)에 안치되어 연등회의 첫날이나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 제사를 올렸다. 고려 망국 이후 1429년에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 옆에 매장되었는데, 1992년 현릉 확장 공사 중에 출토되었다. 황제의 복식을 착용한 나체상으로 왕건의 실제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동명왕 숭배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의 조각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나체상에 옷을 입히는 고구려계통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고려의 황제제도를 실증하는 유물로 중요하다.
951년(광종 2)경에 제작되었다. 도읍인 개경(開京: 지금의 북한 개성시)의 봉은사(奉恩寺) 진전(眞殿)의 어좌(御座)에 안치되어, 고려가 망할 때까지 왕실 최고의 신성한 상징물로 경배되었다.
태조 왕건의 동상은 고려 왕실 최고의 상징물로서 국가의 정기적 제전(祭典)인 연등회(燃燈會)의 첫날이나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 제사를 올리는 대상이었다. 고려 당시에 제작된 왕건의 초상화들도 여러 점 있었지만, 왕건동상이 가장 신성시되는 대표 상징물이었다.
국가적 최고의 상징물이었던 만큼 그 제사를 둘러싸고 정치적 중요 국면들에서 정파 간에 중요하고 예민한 움직임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왕건동상에 대한 제사 변천의 시기구분은 고려 정치사의 시기구분과 연결된다.
고려 왕조가 망하자, 왕건동상은 조선 건국세력에 의해 고려의 태묘(太廟)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중요한 고려왕실 상징물 제거의 일차적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명분상 폐기가 어려워, 1392년 7월 지방으로 옮겨지고, 제례법 개정을 명분으로 1429년(세종 11)에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 옆에 매장되었다.
1992년 10월 북한에서 현릉 확장 공사 중에 출토되었다. 발견된 후 북한에서 여러 해 동안 부장품 중의 하나로 보고 청동불상이라고 오인되어 전시되기도 하였으나, 제작부터 매장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와 조선 초의 기록들을 통해 고려 왕조의 최고의 신성한 상징물이었던 왕건동상임이 밝혀졌다.
황제의 복식
왕건동상은 황제의 복식을 착용한 나체상 양식이다. 왕건동상은 황제의 관인 통천관(通天冠)주2을 쓰고 있으며, 금제 허리띠 장식의 옥대(玉帶)주3를 띠고 있었다. 옥대는 유물로 함께 나왔으며, 착용한 옷은 부식된 조각이 동상표면에 붙어 있었다. 통천관은 나신의 신체상과 함께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왕건동상의 황제복식은 『고려사』나 고문서 등에 보이는 고려 초부터 13세기까지의 시기 대부분에 시행된 여러 부문의 제도에서도 나타나는 고려의 황제제도를 조각상과 실물의 복식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고려의 군주는 대륙의 거란(契丹), 송(宋) 등 강대국 세력에 대해서는 외교적 마찰을 피해 왕을 칭하면서, 자체의 세력권 내에서는 황제를 칭하였다.
실제모습에 더해진 신성함의 상징
왕건동상은 왕건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과 함께 기본적으로 왕건의 실제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당대에도 큰 권위를 가졌지만, 사후에도 고려왕국의 시조로서 높임을 받고 숭배되었다. 그의 동상은 실제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최고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형상이 가미되었다.
그 하나는 당시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불교의 최고의 신성한 존재인 부처나 전륜성왕(轉輪聖王)주4의 신체적 특징이라고 하는 32대인상(大人相)을 왕건상에 일부 적용한 것이다. 그 대부분은 왕건상에 착용한 옷으로 가려진 신체부위에 표현되었다. 왕건상이 언뜻 보기에 불상이나 보살상에서 보는 느낌을 일부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고려가 건국된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서 고구려계승의식과도 결합되어 내려오는 뿌리 깊은 동명왕(東明王) 숭배의 신성한 상징물인 동명왕상(東明王像)의 양식, 즉 옷을 입히는 나체상 양식을 적용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불보살상이나 유교의 조각상, 군주의 조각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착의형 나체상양식인 왕건상은 이러한 고구려계통의 문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왕건동상은 고려시대의 지배층의 문화 속에서도 유교문화나 불교문화 이외에도, 고대부터 내려오는 토속문화의 전통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왕건동상의 양식이 고구려계통의 신상양식인 것은 고려의 고구려계승의식을 문화적 바탕에서도 드러내준다. 또한 고려의 황제제도를 유물로서 실증해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고려 태조 왕건, 아기 고추의 비밀

#1. 1992년 10월 개성,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릉을 개축하려 봉분 북쪽을 파던 굴삭기 삽에 청동상이 걸려 나왔다. 13일 뒤 평양에서 온 학자들은 당황했다. 동상은 오른쪽 다리가 부러지고 군데군데 찌그러져 있었다. 원래 청동박편과 금도금 파편도 붙어 있었지만 학자들이 오기 전 씻어내는 바람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등신대 청동상이 나체였던 점이었다. 좁은 어깨에 초콜렛 복근은커녕 아랫배가 볼록 튀어나온 몸매. 고추를 드러낸 나신에 어울리지 않게 양손을 얌전히 마주잡은 모습으로 근사한 관을 쓰고 의자에 걸터앉은 자세다. 박물관으로 옮겨진 동상의 정체는 불상으로 여겨지다 몇 년 뒤 왕건의 동상으로 여겨져 북한 국보로 지정됐다.
#2. 1983년 초여름 서울, 젊은 국사학자는 고려말~조선초 나주의 일지인 <금성일기>의 조선 세종 시기 기록에서 고려 2대왕 혜종의 소상이 나주에서 개성으로 옮겨졌다는 내용을 읽었다. 실마리를 좇아 <세종실록>을 보니 혜종의 소상과 함께 왕건의 조각상도 현릉 어딘가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14년 뒤인 1997년 한 신문에 실린 북한의 ‘청동불상’ 사진을 보고 왕건 동상임을 확신한 그는 2004년 ‘고려태조 왕건 동상의 유전과 문화적 배경’이란 논문을 썼다. 그리고 2005년, 남북학술토론회 일원으로 개성에 가서 실물을 확인한 그는 이듬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평양에서 온 국보들’ 전시회에 온 동상을 비로소 실측하게 됐다.
<고려 태조 왕건의 동상>은 서울대 국사학과 노명호 교수가 왕건 동상과 30년 넘게 이어온 인연의 매듭이자, 남북 역사학자들이 합심하여 이룬 연구의 열매다. 지은이는 나체의 등신대 동상이 현대인의 눈에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 속에는 조선시대 학자들이 사대명분론적 시각으로 걸러내면서 사라지거나 잊혀진 고려의 황제제도와 늠름한 고구려 문화전통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 동상에 담긴 숨겨진 의미를 밝히고 수백년 동안 땅속에 묻힌 사연을 추적해, 추리소설처럼 읽힌다.
■ 근엄한 왕은 어째서 벌거벗고 있을까 본래는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게 정답. 지은이는 <고려사>의 신종 6년 9월 부분 “최충헌이 봉은사에 가서 태조진전에 (모셔진 태조의 주상에) 제사하고 겉옷과 내의를 바쳤다”는 기록과 출토 당시 표면에 비단조각이 붙어 있었고 옥대가 함께 출토된 점에서 태조 동상이 나신이 아니라 옷을 입고 옥띠를 두른 상태였음을 논증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과 <고려사>의 기록을 통해 개경의 숭산신이나 동명왕, 동명왕의 성모인 유화의 신상도 옷을 입히는 양식이었음을 환기하며, 태조 동상의 조성과 숭배는 고려의 옛 고구려 지역에서 보이는 고구려 토속신앙과 맥을 같이한다고 밝힌다. 귀바퀴와 손가락 틈에 남은 연한 핑크색 안료 역시 전신 또는 노출부위를 살색으로 도색했다는 증거다.
■ 머리의 관에 담긴 의미 눈길이 가는 것은 머리의 관. 지은이는 그것이 진시황이 썼던 ‘통천관’과 같은 것임을 밝혀 고려가 황제의 나라를 자처한 것과 연결시킨다. 정면의 오각형은 신성한 산을 상징하는 ‘금박산’이며 그 중앙에는 금박으로 장식한 매미문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좌우의 뿔은 내관과 외관을 연결해 고정하는 무소뿔 비녀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내관 위쪽 8개의 동그란 모양은 해와 달처럼 팔방을 비추는 황제국 고려 초대군주의 권위를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동상 조성 시기도 맞아떨어진다. 광종은 951년에 태조의 원찰인 봉은사를 창건한다. 지은이는 이때 태조의 진전(영정 또는 동상을 모신 전각)을 건축하면서 동상을 조성했다고 본다. 노비안검법, 과거제 등으로 군주권을 굳힌 광종이 태조 존숭사업을 펼친 것은 일맥상통하며 제작기법이 고려초의 불상과 흡사한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 길이 ‘아기 고추’에 감춰진 비밀 지은이는 마음장상(馬陰藏相), 즉 전생에 몸을 삼가 색욕을 멀리함으로써 성기가 말의 그것처럼 오므라들어 몸 안에 숨어 있는 모양을 드러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삼국시대만 해도 군왕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성기를 강조했지만 고려에 들어 내면적 신성한 힘을 갖춘 존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볼록한 배 역시 오랜 단전호흡과 연결시키며, 발바닥이 평평하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길고 가늘며, 복숭아뼈가 밋밋한 것 등은 부처 또는 전륜성왕의 서른 두 가지 길상과 통한다고 본다.
■ 왜 동상은 버려지듯 묻혔을까 고려 당시 황제 동상은 태평기에는 연등회 행렬의 종착지였고, 전란시에는 강화도행 어가행렬과 함께 했던 보물이었다. 이 동상이 능 귀퉁이에 버려지다시피 묻혔던 이유는? 지은이는 조선 초기의 고려왕조 말살정책을 지목한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부터 봉은사 왕건의 동상을 마전군(경기도 연천군 마산면 아미리)으로 옮기도록 명한다. 태종대까지 고려 왕실의 일족을 모조리 찾아내 죽였다. 세종대에는 고려왕의 제사 대상이 황제국처럼 8위이던 것을 바꾸어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네 왕만을 제향토록 했다. 제후국을 자처하는 조선의 5묘제보다 격을 낮춘 것이다. 세종은 태조의 동상을 다른 왕들처럼 위판으로 교체하면서 동상을 충청도 문의현으로 옮겼다가 11년 정월에 다시 끌어올려 개성의 왕릉 구석에 파묻게 했다.
천안 목천읍 청동상은 ‘왕건(王建)’

충남 천안시 목천읍에서 발견된 청동상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나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이 청동상은 지난 1992년 북한의 개성 왕건릉(현릉)에서 출토된 왕건 동상과 많은 유사점을 가져 ‘왕건상’으로 추정됐지만, 일각에서는 ‘불상’이라는 주장도 나와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가운데 청동상이 왕건임을 논증한 첫 논문이 발표됨에 따라, 청동상의 가치와 천안지역의 역사·문화적 중요성이 재조명될 전망이다. 이 논문은 8일 오후 1시 30분 천안박물관에서 개최되는 ‘왕건, 신도시 천안을 건설하다’ 학술대회에서 발표된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에서 이 청동상을 일반에 최초 공개했다.
이 청동상은 지난해 6월 천안 목천읍의 한 전원주택 텃밭에서 석탑의 일부, 기와 등과 함께 출토됐다. 출토 당시, 청동상은 관(冠)을 쓴 머리부분(頭部)만 남아 있었으며, 크기는 높이 9.11cm, 두부 8.41cm, 측면 5.82cm, 폭 6.82cm이다.
정은우 동아대학교 교수는 ‘천안출토 청동왕건상의 특징과 상징성’이라는 논문에서 “이 청동상은 왕건이 천안에서 활동했던 내력, 천안 소재의 왕건 관련 유적 및 지명 등과 함께 왕건의 초상조각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정 교수는 개성 왕건상과의 흡사성, 고려 초기 제작 가능성 등을 주안점으로, 천안 청동상의 주인공이 왕건인 이유를 3가지로 요약했다.
우선 천안 청동상은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천안 출토 청동상은 볼에 살이 있어 통통한 느낌이 강하며 턱으로 올수록 갸름해진다. 고려시대 초기의 불상은 뺨에 살이 있는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이는 고려 후기 불상과 차별화된 특징이다.
또한 청동상 전체가 통주조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고려초기 불상에 나타나는 조각 기법이다. 개성의 왕건상도 태조 왕건 사후 10~20년 사이인 광종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천안 청동상은 개성 왕건상의 모습과 많은 유사점이 있다.
두 동상 모두 관 중앙에 있는 금박산과 서잠대, 도금한 흔적 등이 있다. 얼굴은 모두 젊은 인물상이다. 아울러, 두 동상 모두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있다. 통천관은 황제가 강사포(絳紗袍, 신하들로부터 하례를 받을 때 입던 예복)를 입을 때 쓰던 관이다.
셋째는 천안 청동상의 통천관 중앙 오각형의 산(금박산)에 새겨진 ‘王’자다. 이는 처음 나온 사례로, 당시에는 왕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태조 사당 영정의 존재를 비롯한 왕건과 천안의 친연성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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