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 송광사_승려가 보물인 사찰

불교에는 세 가지 보물을 뜻하는 삼보가 있다. 세 가지 보물이란 부처(불보), 부처의 말씀을 적은 경전(법보), 부처의 말씀을 공부하는 승려(승보)를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이 세 가지 보물을 각각 상징하는 3개의 절이 있는데 이를 삼보 사찰이라고 한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양산의 통도사, 부처님의 말씀을 종합하여 정리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합천의 해인사, 그리고 고승(덕이 높은 승려)을 많이 배출한 사찰인 순천의 송광사이다.
석가모니의 사리나 팔만대장경은 그렇다 치더라도, 승려가 없는 사찰은 없는 법인데 왜 유독 송광사의 승려는 높이 평가받았을까? 고려 왕조는 승려들에게 지금의 공무원처럼 일정한 직급을 부여하고 관리하였다. 특히 학문이나 수행이 뛰어난 고승에게는 국가 혹은 왕의 스승이란 뜻의 국사, 왕사라는 칭호를 주었다. 고려는 불교 국가였던 만큼 승려의 숫자도 많았기 때문에 국사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도 순천 송광사는 고려 5백여 년 동안 무려 16명의 국사를 배출하였다. 고려 후기 국사는 모두 송광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송광사는 불교의 삼보 가운데 승려를 대표하는 승보 사찰이 되었다.
그런데 수도인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전라도 순천 지방의 사찰 송광사에서 어떻게 다수의 국사가 배출되었을까? 이는 고려 후기 불교계를 이끌었던 세력이 순천 송광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려 중기 문벌 사회가 번성하면서 문벌과 결탁하여 경제적 이득에만 관심을 가진 승려들이 증가하였다. 이들은 수행보다는 세속의 활동에 더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탈락을 비판하며 종교의 본질에 충실할 것을 주장하는 불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결사운동이라고 한다. 결사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만든 단체를 뜻하며, 지눌의 정혜결사가 대표적이었다. 정혜결사는 세속을 떠나 지금의 순천 송광사에 자리 잡았다.
세속화된 불교계에 지쳐 있던 수많은 민중은 불교 개혁 운동에 크게 호응하였다. 이에 따라 정혜결사의 교세는 날로 커졌다. 그러자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씨 무신 정권도 관심을 보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민중들의 정신세계를 이끄는 불교 세력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권자였던 최우는 국왕에게 정혜결사에 수선사 결사라는 명칭을 지어 내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두 아들도 수선사 결사에 출가시켰다. 세속과 멀어지고자 만들어진 수선사 결사가 시간이 지나 다시 집권층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무신 정권이 몰락한 이후에도 수선사 결사는 한동안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송광사는 꾸준히 명망 있는 승려들을 배출하며 조선 시대까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보조 지눌,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며 정혜쌍수의 기치를 내걸다

고려 후기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결성한 불교 결사로, 당시의 타락한 불교계의 현실을 비판, 반성하고 수행자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 선정(禪定)과 지혜(智惠)를 닦을 것을 주장한 불교계 내부의 혁신운동이다. 이후 규모가 확대되어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근거지를 옮겨 정혜사(定慧寺)라 하였다가, 다시 수선사(修禪社)로 사액 받았다.
결사의 의미와 기원
동아시아 불교의 결사(結社)는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등장하였다. 중국 동진(東晉)의 승려 혜원(慧遠)이 중국 강서성(江西省)의 여산(廬山)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염불삼매(念佛三昧)를 수행한 것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 이후 당과 송의 시기를 거치면서 불교 결사는 민간까지 그 저변이 확장되며 발전을 거듭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8세기 이후 왕실과 귀족의 지원에 의한 화엄 계통의 결사 조직이 결성되기도 하고, 미타신앙이나 미륵신앙에 바탕한 정토결사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후기 무신정권 성립 이후 불교계의 사상적 변화와 더불어 개혁적 신앙결사운동의 흐름이 두드러졌는데, 그 가운데 양대 결사로 일컬어지는 것이 지눌의 수선결사(修禪結社)와 요세(了世)의 백련결사(白蓮結社)이다.
12세기 고려 사회의 혼란상과 선종의 부상
12세기에 접어든 고려 사회는 이미 변화의 조짐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정치적으로 소수 문벌의 권력 독점이 극도로 심화되고, 사회경제적으로 권세가들의 토지 집적으로 인해 이전의 전시과 체제가 무너지고 농장이 형성되고 있었다. 사상적으로 특정 사원을 원찰(願刹)로 삼은 왕실과 귀족들이 경제적으로 사원을 장악하고 불교와 더욱 밀착되었을 뿐 아니라 특정 교단으로 그 자제들을 대대로 출가 시켜 문벌들이 불교의 종파 자체를 장악하는 양상까지 보이던 형편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불교계는 외형의 번영과 성대함을 누리는 이면에, 청정과욕(淸淨寡慾)의 본질을 잃고 극심한 부패와 타락상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결국 1170년(의종 24) 지눌의 나이 13세 때 무신의 난이 일어나 고려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정치적 혼란상으로 치닫게 된다. 무신들 사이에 죽고 죽이는 정변이 지속되는 가운데, 왕실이나 귀족의 지원을 받아 번성하던 불교 교단과 귀족 못지않게 화려한 생활에 젖어 있던 불교계도 무인세력과 대립하면서 큰 혼란기를 맞게 되었다.
한편, 그 와중에 불교계 내부에서는 사상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라 하대 이래 수용된 신사조로서의 선종은 소수 문벌에 의해 장악된 기존 불교교단이 보수적 경향을 띠면서 중심교단으로 부각되지 못하다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천태종 개창으로 인해 더욱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천 사후 가지산문의 학일(學一), 사굴산문의 탄연(坦然)과 지인(之印) 등의 걸출한 선승들이 출현하여 선종의 기반을 재정비하기에 이르고, 이자현(李資玄)•윤언이(尹彦頤) 등과 같은 재가의 거사들이 지극한 선(禪) 수행을 지향하면서 선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무신의 난 이후, 특히 최씨 무신정권 이후 선종의 수선사가 부각될 수 있는 사상사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눌의 출가와 구도행
지눌은 1158년(의종 12)부터 1210년(희종 6)까지 무신의 난 전후의 혼란한 시절을 살다 갔다. 그는 경서(京西)의 동주(洞州), 즉 오늘날의 황해도 서흥 출신이며, 속성은 정씨(鄭氏)이고 아버지는 국학(國學) 학정(學正)을 지낸 정광우(鄭光遇)이다.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지눌은 그의 휘이다.
「송광사보조국사비(松廣寺普照國師碑)」 에 의하면 지눌은 어려서부터 병약하여 백약이 무효일 정도였는데, 그 아버지가 부처님전에 기도하여 병을 낫게 하여 주면 출가시켜 부처님을 섬기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자마자 병이 완쾌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신의 난이 발생하기 불과 몇 년 전인 1165년(의종 19), 지눌은 8세의 나이로 사굴산문의 종휘선사(宗暉禪師)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았다. 그는 출가 이래 25세까지 특정한 스승에게 매이지 않고 여러 선원을 찾아다니고 선적과 경론을 섭렵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구도행의 시기를 지냈다. 이 과정을 통해 지눌은 불교 수행의 핵심이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수선사 결사의 시작, 정혜 결사
1182년(명종 12) 1월, 25세의 지눌은 개경에서 보제사(普濟寺)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당시 타락한 불교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오랫동안 구상했던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결사의 필요성을 주변인들에게 주장하였다. 이에 뜻이 맞는 10여 인과 함께 훗날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만들기로 하였는데 1190년(명종 20)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서 결사를 시작할 때 지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보면 그 정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아침저녁 소행의 자취를 돌이켜 보면 어떠한가? 불법(佛法)에 핑계하여 우리들을 장식하고 이익의 길로 치달리고 풍진의 세상에 빠져들어가 도덕은 닦지 않고 의식만 허비하니, 비록 출가하였다 하나 무슨 덕이 있겠는가? 아! 삼계(三界)를 떠나고자 하면서도 속세를 벗어난 수행이 없고, 한갓 사내의 몸이 되었을 뿐이요, 장부의 뜻이 없어 위로는 도를 닦는데 어긋나고 아래로는 중생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중간으로는 네 가지 은혜를 저버렸으니 진실로 부끄럽도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일을 한심스럽게 여겼었다.
마침 임인년(1182) 정월에 서울 보제사 담선법회에 참석하였다가, 하루는 동학 10여 인과 약속하기를, “이 회를 파하거든 우리는 명예와 이익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동사(同社)를 만들어 항상 선정을 익히고 아울러 지혜를 닦기에 힘쓰며, 예불하고 경 읽기와 나아가서는 노동으로 운력하는 데까지 각자 제가 맡은 일을 성실히 해나가서 인연을 따라 심성을 수양하여 한 평생을 구속없이 지내어 달사(達士)와 진인(眞人)의 높은 수행을 따르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 여러 사람이 내 말을 듣고 모두 그렇다고 하며, “훗날 이 언약을 이루어 숲 속에 숨어 살아 동사를 맺게 되면 그 이름을 정혜(定慧)라고 합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맹세하는 글을 지어 뜻을 표시하였다.
위 글에서 20대의 젊은 청년 구도자 지눌에게 비친, 세속의 정치에 휩쓸려 출가자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고 있던 타락한 승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에 찬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출가 정신으로 돌아가 청정과욕의 마음으로 수행에 정진해야 함을 통감하고, 신앙공동체로서의 결사를 조직하여 함께 수행하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지눌의 제안에 쉽게 찬동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권수정혜결사문』에는 정혜 닦기를 주장하는 지눌에게 염불수행, 신통(神通), 자성(自性), 말세중생(末世衆生), 성적등지(惺寂等持)와 돈교이문(頓敎二門), 이타행(利他行), 정토수행(淨土修行) 등의 7가지에 달하는 문제점을 제기하여 논쟁을 벌였던 정황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지눌은 정토와 같은 타력신앙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반론을 일일이 반박하여 논파하고 여러 사람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정혜결사의 약속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결사는 바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사에 참여하기로 했던 도반들이 그해 승과(僧科)에서 합격 혹은 불합격하여 사정에 따라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 것이다. 지눌 역시 이 해 승과에 합격하였으나 출세를 위한 승계나 승직에 관심을 두지 않고 홀로 구도행을 떠났다. 이후 전라도 창평 청원사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하가산 보문사에서 이통현(李通玄)의 『화엄론(華嚴論)』을 보고 두 번에 걸친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마침내 1188년(명종 20)에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이루고 2년 뒤인 1190년 『권수정혜결사문』을 써서 종파나 믿음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결사를 개방하였다. 이후 정혜결사는 큰 호응을 얻게 되고 거조사의 터가 좁아지자 1200년(신종 3)에 폐사였던 조계산 길상사를 수리해 들어가 정혜사라 하였다. 이곳은 후에 수선사로 사액을 받았으며, 오늘날 조계산 송광사(松廣寺)가 바로 이곳이다. 길상사로 가기 전, 지눌은 지리산 상무주암에 은거하였는데, 이 시기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통해 세 번째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간화선(看話禪)이 수행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된다.
지눌은 정혜쌍수의 이론적 기틀을 다지고 그 토대 위에서 정혜결사를 추진하였으며, 이것은 종파 사이의 대립이나 명리에 집착하는 당시 불교계에 대한 혁신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 스스로 승과에 합격하였으나 승계나 승직을 일체 받지 않았고 수선사 이외의 사찰에서 주지를 지낸 적도 없으며, 출가 이래 구도 과정에서도 특정 문파와 직접적인 관련을 찾아보기 어렵다. 곧, 정혜결사는 중앙의 귀족적 불교를 배격하고 새로운 선 사상에 의한 수행 및 이타행의 실천성을 바탕으로 지방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수선사 창립기, 지방사회의 호장(戶長)을 중심으로 한 향리층과 일반인이 수선사의 큰 후원세력이 되었으며, 중앙 왕실이나 최씨 무신정권과는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보듯 지눌이 결사를 개창할 당시의 이름은 ‘정혜결사’였다. 그러나 지눌 이후로는 대개 수선사로 불려왔으므로 다음에서는 서술의 편의상 정혜결사와 수선사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기로 한다.
최씨무신정권의 후원과 결사 정신의 변화
흔히 결사불교와 관련하여 종래 문벌귀족에서 무신으로 정권이 바뀌는 것에 짝하여 불교도 교종에서 선종으로 교체되는 흐름으로 이해한다. 더하여 1219년(고종 6) 최충헌(崔忠獻)의 뒤를 이은 무신집정자 최우(崔瑀) 시기에 수선사를 중심으로 한 교단의 재편을 시도하게 된다. 즉, 최우 때 강화도 천도로 불교계의 중심이 개경에서 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결사불교인 수선사와 백련사가 불교계의 중심이 되어 지방사회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 무신정권의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지눌의 뒤를 이은 수선사 2세 혜심(慧諶)에 이르면 정권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여러 정황이 확인된다. 혜심은 과거에 합격한 후 출가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수선사를 포섭하고자 관심을 보내던 중앙에서는 혜심에게 선사(禪師)에 이어 대선사(大禪師)를 제수하였다. 대선사는 승과에 합격하여 일정한 승진 과정을 거쳐야 받을 수 있는 당시 최고 승계였음에도 혜심은 승과를 보지 않고 최우의 천거로 받은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지눌이 승과에 합격하고도 승직에 나아가지 않고 정혜결사를 이룬 것과 대조된다. 이 시기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직을 지내다 출가하여 결사불교에 참여한 이들이 많은데, 이는 당시 결사가 젊은 지식인들에게 강하게 피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2세 혹은 4세 사주가 되면서, 조정에 그들의 좌주(座主), 동년(同年)이 관료로 자리잡고 있었고 이들이 중앙과 교류하는 매개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최우는 자신의 아들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혜심 문하에 출가시키고 수선사에 대한 재정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는 수선사 교단의 확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4세 혼원(混元)은 주로 지방 향리나 독서층이었던 역대 주법(主法)들과 달리 전형적인 문벌 가문 출신으로 수선사 사주 가운데 처음으로 생전에 왕사(王師)로 책봉되었으며, 이 시기 혼원 가문의 위상에 영향을 받아 수선사는 더욱 성장하였다. 이제 수선사는 국가의 승정체제에 편입되었으며 최우를 비롯한 중앙의 후원에 힘입어 수선사는 당대 제일의 사원으로 부상하여 교단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대몽항쟁기 불교계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후 최씨정권의 종식과 원간섭기의 시작으로 불교 교단에서 압도적 위상을 가지던 수선사 대신 가지산문의 등장과 개경 중심 교단으로의 회귀 양상이 나타난다. 이에 결사의 정신은 잊혀지고 수선사는 송광사(松廣寺)라는 이름으로 사료에 더 많이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사굴산문의 중심 사찰로서 위상은 건재하였으며 지눌의 유풍 역시 계승되고 있었다.
수선결사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
애초에 정혜결사를 이룬 지눌은 지방의 토성(土姓)으로 향리 혹은 독서층 출신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국학학정(國學學正)이라는 정9품의 미관말직이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의 소수 문벌 중심 지배체제 하에서는 관리로서의 진출에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지방 출신이었고, 이러한 출신 배경이 그의 불교관이나 역사의식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지눌 이후 수선결사를 주도한 대부분의 역대 주법들 역시 지방 사회의 향리층이나 독서층 출신들로, 이는 동시기 천태종 계통의 백련사 결사를 주도한 주법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고려후기 결사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의 출신성분이 그 이전 중심 불교교단을 이끌던 문벌 세력과 그 성격을 가장 달리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지눌 당대의 수선사 결사는 중앙 교단의 권력과 밀착한 타락상을 강하게 질타하는 비판적 시대정신을 가지고 국가권력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지방을 중심으로 종파에 관계없는 개방성을 지니고 정혜쌍수에 매진하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여 대중의 큰 지지를 받은 불교혁신운동이었다. 이는 고려 후기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날 한국 조계종의 시원으로 추숭되고 있다.
수선사

수선사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이 시작한 선종 신앙결사의 이름이면서 결사가 운영된 사찰의 이름이기도 하다. 지눌은 1158년(의종 12) 황해도 서흥군에서 출생하여 출가한 뒤, 1182년(명종 12) 승과를 보기 위해 개경으로 올라왔다. 보제사(普濟寺)에서 열린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하며 개경 불교를 경험하였으나 불교계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그리하여 10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명리(名利)를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정(定)과 혜(慧)를 닦는 결사를 만들기로 맹세했으나 승과가 끝난 뒤 뿔뿔이 흩어졌다. 지눌은 승과에 합격한 뒤 창평(전남 담양군 창평면) 청원사(淸源寺)에 주석하며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다가 첫 번째 깨달음을 경험하고는 주지직을 그만두고 남쪽을 유력하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1185년에는 예천(경북 예천군) 하가산 보문사(普門寺)에서 수행하며 대장경을 열람하다 이통현(李通玄)이 지은 『화엄경론(華嚴經論)』을 읽던 중 두 번째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이 무렵 승려 득재의 초청으로 팔공산 거조암(居祖庵)에서 정혜결사를 개창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결사를 개창한 뜻을 밝혔다. 1198년(신종 1)에는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읽던 중 세 번째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한편, 결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거조암보다 넓은 곳을 찾게 되었고, 1205년(희종 1) 전남 순천 송광산의 새 절로 결사의 근거지를 옮기고, 결사의 이름을 정혜사에서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다.
수선사는 지눌의 깨달음과 수행의 경험이 바탕이 되어 독자적인 수행 전통을 확립하였다. 지눌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이론과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수행을 강조하였고, 삼문(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간화경절문)을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제시하였다. 수선사의 수행과 사상의 토대를 마련한 지눌의 선 사상과 실천 체계는 선의 입장에서 화엄을 수용하였고, 간화선 수행을 받아들이며 고려 선종의 새로운 흐름을 이루었다. 지눌의 사상은 2세 혜심에게 계승되었다.
한편, 지눌이 수선사를 개창하고 송광사로 결사의 근거를 옮겨 정착하는 과정에는 지방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수선사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당시 최씨 무인정권은 수선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2세 사주인 혜심이 수선사를 주도할 무렵 수선사는 최우의 후원을 받으며 왕실·무신 세력·유학자 관료 등이 입사하고 중앙 정치세력과 연결되어 영향력이 커졌고, 경제적인 기반도 마련하였다. 그러나 혜심 역시 지눌과 마찬가지로 중앙 정치세력과는 거리를 두고자 하였다.
수선사는 3세 청진국사(淸眞國師) 몽여(夢如) 이후 최씨 정권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 대몽항쟁기 불교 교단을 이끌었다. 특히 강도(강화도)에 세운 최우의 원찰인 선원사의 사주를 거친 승려가 잇달아 수선사의 사주가 되었던 것은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 준다. 원(元) 간섭기 수선사는 다소 위축되기도 했고, 지눌의 결사정신이 쇠퇴하기도 했지만, 수선사에서 이루어낸 새로운 불교운동은 이후 한국불교사에 큰 흐름을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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