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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통신사_한류의 첫 시작

by noksan2023 2025.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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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_한류의 첫 시작

 

 

 

 

 

 

믿음으로 통한다라는 뜻을 지닌 통신사通信司는 조선이 일본에 보낸 외교 사절단 명칭이다. 세종 때 시작한 일본으로의 외교 사절단 파견은 임진왜란 전까지 통신사와 그 외의 이름으로 10여 차례 진행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중단되었다.

 

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에도 막부 시대를 열었다(1603). 에도 막부는 통치자인 쇼군(장군)의 즉위식에 조선의 공식적 국가 사절단인 통신사를 참석시켜 막부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에 막부는 조선에 교류 재개를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았기에 통신사 파견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며 국경을 침범하는 등 중국의 정세가 불안해지고, 조선과 일본의 교류를 중개했던 쓰시마 번주(번은 에도 막부 시기 지방 세력가가 다스리던 지역)를 통한 막부의 외교 재개 요청이 계속되자 조선 정부는 사명대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사명대사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면담 후 일본에 끌려간 포로 1,400여 명과 함께 귀국하였다.

 

조선 정부는 쓰시마 번주를 통해 쇼군이 직접 침략 전쟁을 사과하고 외교 사절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오면 교류에 응할 것이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조건에 응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쓰시마 번주는 일본의 옥새까지 위조하여 사과의 내용을 담은 국서를 조선에 보냈다. 조선 정부가 답장을 보내자 쓰시마 번주는 다시 이 국서의 일부를 위조하여 조선이 먼저 화친을 요구한다는 내용으로 바꿔치기 하였고, 이렇게 조선과 일본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두 나라 간의 교류가 재개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던 절박한 상황에 몰린 쓰시마 번주의 과감한 국서 위조 사건은 전쟁 이후 통신사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재개된 교류로 임진왜란 이후 통신사는 총 12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통신사는 대략 400~500여 명의 규모로 파견되었는데 재주 있는 사람이 많아 일본에서는 새로운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로 이용되었다. 이 당시 통신사로 참가한 사람들이 일본인들에게 써 준 글씨나 그림들이 크게 유행하였다. 

 

에도 막부는 대규모의 통신사를 접대하는 비용과 역할을 각 지역의 영주(번주)들에게 맡겼는데, 이를 통해 각 지역 영주들의 경제력을 약화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통신사 접대 비용은 막부의 1년 예산을 넘는 큰 액수였다고 한다. 하지만 19세기 이후 일본 내부의 문제와 국풍 운동의 영향으로 통신사 파견은 중단되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과 새로운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기존의 외교 관례에서 벗어난 요구를 하였기 때문에 외교 관계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통신사 (通信使)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이다.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 한다. 명·조선·일본 간의 사대교린 관계에서 조선과 일본은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으로서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했다. 사절의 명칭은 조선측은 통신사, 일본측은 일본국왕사라 했다. 태종 때부터 통신사의 파견이 정례화되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가 이루어졌다. 조·일 양국 간 우호교린의 상징이었지만 임진왜란 등 정세에 따라 변동을 겪었다. 외교만이 아니라 학술·사상·기술·예술 등 문화교류의 통로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조선통신사라고도 한다. 조선이 1403년(태종 3)에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그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足利義滿) 장군도 책봉을 받자, 중국 · 조선 · 일본 간에는 사대 · 교린의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자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대등한 처지의 교린국이 되고,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권력자로서 상호간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 국왕이 막부장군(일본국왕으로 칭함)에게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 국왕에게 보내는 사절을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통신사란 용어는 적례(敵禮)적인 입장의 대등(對等)한 국가간에 신의(信義)를 통(通)하는 사절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과의 사절 왕래가 많아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이 18회에 달하였고, 일본국왕사의 조선 파견이 71회에 달한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파견한 사절이 모두 통신사의 호칭을 갖지는 않았으며, 이 중 장군에게 간 것은 8회 뿐이다. 예를 들면 명칭도 회례사(回禮使) · 회례관(回禮官) · 보빙사(報聘使) · 경차관(敬差官) · 통신사 · 통신관(通信官) 등 일정치 않았고, 목적과 편성도 다양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이 파견한 통신사는 다음과 같은 조건과 목적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조선 국왕으로부터 일본 장군(국왕)에게 파견된다.

둘째, 일본 국왕의 길흉(吉凶) 또는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목적을 갖는다.

셋째, 조선 국왕이 일본 국왕(막부장군)에게 보내는 국서(國書)와 예단(禮單)을 지참한다.

넷째, 사절단은 중앙의 고위관리인 삼사(三使) 이하로 편성한다.

다섯째, 국왕사의 칭호도 갖는다.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파견한 사절단에 통신사의 호칭을 처음 쓴 것은 고려시대인 1375년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장군에게 왜구 금지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한 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명칭만 통신사였을 뿐, 그 조건과 목적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나타난 것은 1413년(태종 13)이었으나, 이 사행도 정사 박분(朴賁)이 중도에서 병이 났기 때문에 중지되었다. 그 뒤 통신사의 명칭을 가지고 일본에 파견된 사행은 1428년(세종 10) 정사 박서생(朴瑞生) 이하의 사절단으로, 이들의 파견 목적은 장군습직의 축하와 전장군에 대한 치제(致祭)였다.

이후 통신사의 파견은 정례화되어 조 · 일 양국간에 우호교린의 상징으로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는 〈표 1〉과 같다.

 

 

연대                                                                        정사                                부사                               인원

1413(태종 13) 朴賁   미상
1429(세종 11) 朴瑞生 李藝 미상
1439(세종 21) 高得宗 尹仁甫 미상
1443(세종 25) 卞孝文 尹仁甫 약 50
1460(세조 6) 宋處儉 李從實 약 100
1479(성종 10) 李亨元 李李同 미상
1590(선조 23) 黃允吉 金誠一 미상
1596(선조 29) 黃愼 朴弘長 309
1607(선조 40) 呂祐吉 慶暹 504
1617(광해군 9) 吳允謙 朴榟 428
1624(인조 2) 鄭岦 姜弘重 460
1636(인조 14) 任絖 金世濂 478
1643(인조 21) 尹順之 趙絧 477
1655(효종 6) 趙珩 兪瑒 485
1682(숙종 8) 尹趾完 李彦綱 473
1711(숙종 37) 趙泰億 任守幹 500
1719(숙종 45) 洪致中 黃璿 475
1748(영조 24) 洪啓禧 南泰耆 477
1764(영조 40) 趙曮 李仁培 477
1811(순조 11) 金履喬 李勉求 328

 

 

통신사의 파견 이유나 목적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다소 차이가 있다. 조선 전기의 경우 일본관계에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왜구문제였고, 조선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막부장군에게 통신사를 파견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의 표면적 이유는 왜구 금압의 요청과 우호관계 유지를 위한 장군습직 축하 등 주로 정치 · 외교적인 목적에서였다.

이 점은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파견되는 일본 국왕사가 동(銅)을 가져와 대신 생필품인 쌀 · 콩 · 목면을 구해가는 경제적인 목적이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을 가져가는 문화적이었던 점과 대조를 이룬다.

한편 조선 후기의 경우는 임진왜란 직후, 전쟁상태 종결을 위한 강화교섭, 피로인(被擄人) 쇄환(刷還), 국정탐색, 막부장군의 습직 축하 등 역시 정치 · 외교적인 목적에서 통신사를 파견했다. 반면 조선 후기 일본으로부터 일본 국왕사의 조선파견은 금지되었다.

조선 전기 일본 국왕사의 상경로가 임란 당시 일본군의 침략로로 이용되는 등 피해가 심하자, 조선에서는 일본 국왕사의 상경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 일본국왕사의 파견은 중단되고, 대신 막부장군에 관한 일은 차왜(差倭)가 대신하게 된다.

그런데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 · 1617년 · 1624년에 파견된 사절단은 통신사라 하지 않고,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칭호를 썼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는 이 시기만 하더라도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신의를 통할 수 있는 통신국(通信國)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신사의 호칭이 다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36년부터인데, 이러한 배경에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동이 주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명 · 청의 세력 교체와 그에 따른 중화질서(中華秩序)의 붕괴는 조 · 일 양국에 새로운 연대감과 탈중화(脫中華)의 교린관계를 구축하게 했다. 따라서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청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를 배제하고, 조 · 일 양국의 독자적인 대등외교의 수립이라는 외교사적인 의미가 있다.

이러한 국제환경 속에서 통신사의 목적과 서계 · 예단 · 여정 등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통신사가 정례화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대마도와의 실질적인 통교를 위하여 문위행(問慰行)과 팔송사(八送使) 및 차왜(差倭)제도를 확립하였다.

통신사 파견이 정례화된 이후, 파견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대부분이 장군습직의 축하였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그때마다 다른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1636년은 명 · 청의 세력 교체에 따른 일본과의 연대감 확립, 국서개작사건 이후 대마도주의 옹호와 국정탐색, 1643년은 청나라의 압력에 대한 견제와 겸대(兼帶)의 제도 이후 늘어나는 무역량의 축소 교섭, 일본의 해금정책(海禁政策)과 도원생변(島原生變)에 대한 국정탐색이었다.

그 뒤 1655년의 통신사는 일본이 ‘가도조선’(假道朝鮮)한다는 정보를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1682년은 대마도와의 무역통제를 위한 7개 조의 조시약정(朝市約定)이었다. 1711년의 통신사는 아라이 하쿠세끼[新井白石]의 외교의례 개정에 대한 국가의 체면 유지와 일본과의 계속적인 우호관계가 목적이었다.

1719년은 외교의례 복귀에 대한 조선의 외교방침 전달 및 대마도에서의 ‘표인차왜(漂人差倭)’의 조약체결 등 구체적인 양국의 현안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와 대륙의 정세가 안정되자 통신사 파견도 외교적인 현안보다는 의례적이 되었다. 따라서 1748년과 1764년의 통신사는 장군습직 축하와 교린관계 확인이 주목적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에 들어와 통신사 파견의 외교적인 의미가 상실되면서, 1811년 통신사는 여정을 바꾸어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의례적인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막을 내리며, 이후 정례화된 통신사는 없었다.

물론 그 뒤에도 장군이 습직할 때마다 ‘대판역지통신(大阪易地通信)’ 또는 ‘대마역지통신(對馬易地通信)’이 결정되었지만 시행되지 않았다. 이미 이 시기가 되면 양국은 통신사 파견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없었다.

더구나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세계가 서구세력의 위협을 받게 되면서부터 조 · 일 양국은 통신사를 통한 우호교린보다는 서로 상반된 대외인식에 의해 서구세력에 대처해 나가게 되었고, 일본에 의한 일방적인 교린체제의 파괴는 통신사의 폐절과 함께 교린관계의 종말을 가져왔다.

 

통신사 일행이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는 데 2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들에게는 중도에 연향이 베풀어졌는데, 처음에는 충주 · 안동 · 경주 · 부산의 4개 소에서 베풀어졌으나 후기에 와서는 민폐 때문에 부산 한곳에서만 베풀어졌다. 이들은 부산에 도착하여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

이 해신제는 길일(吉日)을 택하여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바로 그날 거행되었다. 해신제는 통신사 출향 직전의 필수적인 의식으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해독제(海瀆祭)에 준하여 거행되었다. 즉, 영가대 높은 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희생과 폐백(幣帛)을 차려 놓고 집사(執事)의 사회 아래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이 제전의 내용은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海游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영가대는 통신사 일행과 인연이 깊은 부산의 명승지로, 그들은 이곳에서 일본으로 떠나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 뒤 1614년(광해군 6) 순찰사 권반(權盼)은 이곳에 못을 파고 호수를 만들어 전함을 계류(繫留)하는 장소로 하였는데, 그것은 임진왜란의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고자 한 시책이었다 한다.

그리고 그 옆에 10여 발 되는 높은 언덕을 만들어 전형적인 건축양식의 누정(樓亭)을 세웠다. 이 누정을 영가(永嘉)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권반의 본관인 ‘안동’을 옛날에 영가라 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딴 것이라 한다. 전함을 계류하였던 영가대 호수의 흔적은 1906년까지만 하여도 완연히 남아 있었으나, 그 뒤 일본인들의 매축(埋築)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낸 통신사는 국서를 받들고 기선 3척과 복선 3척에 나누어 타고 그 날로 출발하여 호위하는 대마선단에 선도되어 대마 와니우라(鰐浦)에 입항한 뒤 부중(府中)으로 들어갔다.

대마 부중에서 도주의 연향을 받은 다음, 이정암(以酊庵) 장로(長老) 2인의 안내를 받아 이키도(壹岐島)에서 후쿠오카현(福岡縣 粕屋郡 相島)을 거쳐 아카마세키[赤間關: 下關]를 항로로 취하여 세토나이해를 거슬러 올라갔다.

이후 각 번의 향응과 호행을 받으면서 기다리고 있던 유자(儒者) · 문인(文人)과의 필담창화(筆談唱和)를 하면서 해로를 따라 대판(大阪)에 이른 뒤 누선(樓船)으로 갈아타고 상륙하여 동 · 서본원사(東西本願寺)에 들어갔다. 그 뒤 6척의 아국선과 몇 명의 경비요원만을 남겨둔 채 여러 대명(大名)이 제공한 배를 타고 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한다.

이어 인마(人馬)의 도움을 받아 육로로 교토(京都)로 향했다. 무로마치(室町) 막부 때에는 여기가 종점이었지만, 에도 막부 때에는 1617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도까지 갔다. 쿠사(草津)를 출발하여 1620년대 특별히 건설하였던 ‘조선인가도(朝鮮人街道)’를 지나 도카이도[東海道]를 지나갔다.

그 중도에는 배다리[船橋]가 있었는데, 1682년 통신사 일행은 이 길을 가면서 “다리를 놓는 데 쓰인 배가 무려 300척이나 되었다.” “열선(列船)의 비용과 철색운판(鐵索運板)의 비용이 수천여 금에 이르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편, 오카자키[岡崎]에 도착하여서는 막부에서 보낸 사자(使者: 問安使)의 출영을 받으면서 육로로 목적지인 에도에 들어갔다.

숙사는 1682년 무렵부터 본원사로 하였으나 뒤에 동본원사(東本願寺)로 바꾸었다. 통신사 일행이 통과하는 객사에서의 교류는 한시문 · 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른 화려하고 사치한 향응은 결국 일본의 재정을 핍박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일본학자 아라이 하쿠세끼[新井白石]는 이 상황을 비판하여 통신사 접대에 대한 제 규정의 시정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가 제시한 시정안은 향응장소를 5개소(大阪 · 京都 · 名古屋 · 駿府, 왕로에는 赤間關, 귀로에는 牛窓)만으로 한정하고, 다른 곳에서는 음식만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혁안은 결국 한번으로 끝나고 또다시 종전의 형태로 돌아가 호화로운 향응을 계속하였다.

에도에 체류하는 동안에 1636 · 1643 · 1655년에 파견된 통신사 일행들은 도쿠가와 장군의 묘소[日光東照宮]의 참배를 강요받기도 하였다. 또, 1636년부터는 막부의 요청에 의하여 곡마단(曲馬團)의 공연이 있었는데, 1680년부터는 이를 위하여 마상재(馬上才)의 파견이 항례화되었다.

막부로부터 길일이 택하여져 허락이 있으면 국서와 별폭을 건네주고는 며칠 뒤 장군의 회답 · 별폭, 그리고 정사 이하에게 물품과 금은이 답례로 주어지고, 다시 대마도주와 함께 왔던 길을 돌아서 귀로에 올랐다. 제후들의 향응과 접대가 처음 올 때와 마찬가지로 행하여졌으며, 대마도로부터는 신사송재판차왜가 동행하여 부산에 입항한 뒤 한양으로 돌아왔다.

통신사들의 왕래 일정에는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대개는 5개월에서 8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무더운 여름이나 엄동이 낀 노정기간에는 2년 여에 걸친 사행도 있었다. 1428년(세종 10) 장군습직 축하로부터 시작된 통신사는 1811년(순조 11) 대마도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역지통신(易地通信)으로 변질되었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마지막 통신사 김이교 일행 334인이 대마도에 먼저 도착하여 막부 장군이 보내 오는 사신을 기다린 것이라든가, 정하여진 규례에 따른 양국 사신간의 단조로운 행사, 일본 막부의 금령으로 일본 백성에게 통신사 일행과의 접촉을 금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통신사에 대한 일본인의 반응은 정치담당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무사를 비롯한 문인 · 묵객 · 서민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통신사는 그들이 방문한 곳마다 서화 · 시문 · 글씨 등을 많이 남겼으며, 그것은 병풍 · 회권 · 판화 등의 형태로 만들어져 널리 유행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편, 통신사들은 국내로 돌아와 일본에서 겪은 견문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기록들을 살펴보면 신유한(申維翰)의 『해유록』, 강홍중(姜弘重)의 『동사록(東槎錄)』, 홍우재(洪禹載)의 『동사록』, 신숙주(申叔舟)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 유상필(柳相弼)의 『동사록』, 조명채(曺命采)의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 김세렴(金世濂)의 『해사록(海槎錄)』, 작자 미상의 『계미동사일기(癸未東槎日記)』, 남용익(南龍翼)의 『부상록(扶桑錄)』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기록들은 당시 통신사에 참여한 인물들이 일본에서 경험한 사실들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하여 남겨 놓은 것으로, 당시 문물교류를 살피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통신사는 일본과의 관계 유지라는 외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학술 · 사상 · 기술 · 예술상의 문화교류라는 또 하나의 문화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조선 통신사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하면서 그들이 가져온 구리를 식량, 옷감과 교환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다음에는 그들과의 교류를 끊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에서는 새로운 지배자가 나왔다. 그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다시 예전처럼 교섭을 허용해 주고, 전처럼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간청해 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의 뜻을 받아들여 사절단을 보내었는데, 이를 조선 통신사라 한다.

조선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에 통신사를 보냈다. 처음에는 왜란 때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우리 나라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서였고, 나중에는 두 나라 사이의 믿음을 두텁게 하여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통신사 행렬도 ①

 



통신사란 신뢰로 서로 통하는 사절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통신사 일행은 가는 목적에 따라 300명에서 500명 정도로 그 수를 조절하였다.

일본은 최고 권력자가 바뀌면 대마도(쓰시마 섬)의 영주를 조선에 보내어 그 사실을 알리고, 통신사를 보내 줄 것을 희망하였다. 이 때, 조선 조정은 일본이 또다시 욕심을 부려 조선을 공격해 올지 모르므로, 일본 사절단이 서울까지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부산에서 맞았다.

일본은 우리 나라 통신사들을 매우 정중히 맞이하였다. 일본 사절단은 왜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서울에서 통신사 일행이 내려가면 이들을 대마도까지 안내하였다. 대마도로부터 오늘날 도쿄까지의 안내는 대마도 영주가 맡아 하였다.

 

 

조선 통신사 행렬도 ②

 



통신사 행렬도를 보고, 일본 사람들이 조선 통신사 일행을 대우한 모습을 이야기해 보자. 일본 지식인들은 우리 나라 통신사 일행이 머무르는 곳마다 몰려들어, 학문과 기술, 예술 등 우리 나라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절과 일본 학자들 간에는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특히, 조선의 유학은 그들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고,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조선 통신사 행렬도 ③

 



그들은 통신사 일행이 건네 준 한시, 그림, 글씨, 책, 도자기 등을 가보로 삼는 등 조선 통신사 일행과의 접촉을 더할 수 없는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다음은 통신사 일기 중 한 대목으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 신시(오후 4시)에 항구에 들어서니 배를 끌고 갈 수많은 왜선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청색 비단으로 만든 깃발에 정⋅부⋅종 세 글자를 써서 각각 표지를 삼았다. 우리 측 사신이 모두 무사히 도착하자, 왜인들은 앞다투어 축하하였다. …(중략)… 각 사신들을 2~3명의 왜인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니 온갖 것이 질서 정연하였다.

○ 왜인들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몰려와서 글씨를 받아 갔다. 간혹 초서를 쓸 때 필체가 시원스럽게 내려가면 곁에서 보고 있던 왜인들이 모두 감탄하는 소리를 내었다.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가 시작됐다

 

 

 

▲경복궁 광화문을 나와 양재역으로 향하는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 회원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소환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이때 파견된 사신은 회답 겸 쇄환사였다. 일본의 쇼군이 보낸 국서에 답서를 가지고 가서 포로를 소환해 오는 사신이라는 뜻이다.

1607년 1월 12일 첫 번째 회답 겸 쇄환사가 파견되었다. 이때 상사는 통정대부 여우길(呂祐吉)이다. 부사는 홍문관 교리 경섬(慶暹)이다. 종사관은 전 도사(都事) 정호관(丁好寬)이다. 이때 왕으로부터 국서를 받아 출발한 곳이 현재 덕수궁 석어당(昔御堂) 또는 즉조당(卽阼堂)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임진왜란으로 왕궁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회답 겸 쇄환사는 1617년 5월 28일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출발한다. 선조에 이어 즉위한 광해군이 통치하던 시절로 인정전이 다시 지어진 것 같다. 이때 상사가 병조참지 오윤겸(吳允謙) 부사가 군기시정 박재(朴榟) 종사관이 예조정랑 이경직(李景稷)이었다.

이들은 왕을 알현해 술과 마장(馬裝)을 하사받고, 다시 장악관(掌樂館)에서 전별회를 받고 떠난다. 그리고 남대문을 지나 한강에 이른다. 저물녘 한강을 건너 어둠을 뚫고 양재역(良才驛)에 도착해 하루를 묵는다.

 

제10차 조선통신사 옛길 걷기팀이 9일(일) 통신사 선조들이 일본에 간 길을 따라 경복궁에서 양재역까지 걸었다. 출발은 오전 9시 경복궁 흥례문 앞에서 이루어졌다. 이 행사는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이던 2005년 처음 시작되었다. 통신사 옛길을 따라 서울에서 도쿄까지 1,557.5㎞를 걷기로 한 것이다.

2007년은 조선통신사 파견 400주년이 되는 해로 통신사행이 추구했던 성신교린(誠信交隣) 정신을 되살리기로 했다. 그 때문에 양국간 우정과 평화를 위해 격년으로 평화의 도보 대행진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 후 2년마다 통신사 한일 우정 걷기가 지속되어 금년에 제10차가 된 것이다. 이 행사를 주최하는 단체는 (사)한국체육진흥회, (사)일본Walking협회, (사)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다. 행사를 주관하는 팀은 한국걷기연맹과 21세기 조선통신사 한·일우정걷기다. 이번 행사에는 전 구간 참가자 28명, 일부 구간 참가자가 200명 정도 된다.

오전 9시 출발지인 경복궁에 모인 사람들은 250명쯤 된다.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 통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통신사 후손들이 많이 참가했다. 통신사 후손 모임인 (사)조선시대통신사현창회에 소속된 회원들이다.

 

제1차 회답 겸 쇄환사 상사 여우길의 후손 여운준, 부사 경섬의 후손 경은선, 조선 전기 통신사 이예(李藝)의 후손 이명훈, 임진왜란 전 탐적사 정사 황윤길의 후손 황재하 등이 보인다. 그리고 (사)우리문화숨결 궁궐길라잡이 회원들이 나왔다.

그중 김홍렬은 용산공원(미군부대)에 남아 있는 통신사길과 문화유산을 보존하려고 애쓰고 있다. 충주 지역에서 통신사 문화유산을 활용하기 위해 애쓰는 중심고을연구원 회원들도 참가했다.

 

 

 

▲통신사 우정걷기 서울-도쿄 전 구간을 완주하는 사람들: 전쟁기념관에서의 기념 사진

 

 


한강을 건너기 전 남대문과 제천정에서 있었던 일

 

이번 통신사 옛길 걷기 출정식 행사는 탄핵 시국임을 감안해 규모를 축소해 진행되었다. 예년에는 정사, 부사, 종사관이 제대로 복장을 갖추고, 취타대와 농악대를 동원해 흥겹게 진행했다. 그러다 보니 참가하는 단체와 사람 숫자도 훨씬 많았다. 또 영천지역의 경상도 전별연에서는 말을 동원해 마상재를 보여주기도 했다. 정사 부사 종사관도 걷기 편한 복장으로 참가했다. 농악대가 광화문 사거리까지 대열을 이끌었다. 또 교통경찰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체 인원으로 신호를 지키며 남대문으로 향했다. 처음 출발한 인원은 200명 정도였다.

행렬은 시청, 덕수궁, 남대문, 후암동 고개, 용산고등학교, 전쟁기념관, 용산구청, 보광동, 한남동으로 이어졌다. 마침 덕수궁에서 남대문으로 이동하는 취타대와 근위대를 만나 마치 그들이 통신사 행렬을 호위하는 양상이 되었다. 그들은 10시 남대문 개장식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중이었다.

과거에는 통신사 일행이 남대문에 이르면 남관왕묘에서 관복을 벗고 편복을 착용했다. 그리고 일가친척들과 작별을 고했다. 왜냐하면 일본으로 가는 뱃길이 어렵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이번 행사팀은 남대문을 지나 후암동 고개를 넘어 용산고등학교 앞에 이른다. 그곳에는 이태원터 표지석이 있다.

 

조선시대 이태원은 현재 미군부대 안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산 쪽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러므로 통신사 옛길 걷기 일행은 미군부대를 ㄷ자로 한 바퀴 돌아 전쟁기념관에 이른다.

여기서 간식도 먹고 휴식도 취하며 30분 정도 쉬어간다. 이곳에서 참가자가 50명 정도 줄어든다. 용산구청을 지나 보광동으로 이어지는 장문로에는 외국대사관이 늘어서 있다. 조선와 일본의 외교를 위해 지나던 길에 주한 외국대사관이 들어선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보광동을 지나면 한남동에 이르는데, 그곳 한강가에 제천정(濟川亭)이 있었다. 한남동 현대 하이페리온 앞쪽 길가 장문로와 서빙고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곳에는 제천정터와 수표(水標)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제천정은 통신사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한양에 오가는 시인묵객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한강 주변 정자 중 스토리가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제1차 회답 겸 쇄환사 부사 경섬이 남긴 <해사록>(海槎錄)에 보면 당시 한강이 얼어 제천정 옛터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다.

 

양재역 지나 청계산 정토사까지 가기로 했으나

 

 

 

▲한남대교로 들어서는 통신사 옛길걷기 회원들

 

 



제천정 옛터를 지나면 길은 독서당로를 통해 한남대교로 이어진다. 그것은 서빙고로가 한남대교 아래로 통과하기 때문이다. 한남대교에서는 보광동과 한남동 언덕 위의 주택들을 돌아볼 수 있다.

한강에서는 어떤 목적인지 요트 형태의 배가 운행한다. 한남대교를 건너면 길은 경부고속도로로 이어지지만, 걷기 길은 잠원로를 돌아 경부고속도 옆으로 난 공원길로 이어진다. 통신사 걷기 참가자들은 신사동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한다. 식사 후 50명 정도가 줄어든다.

남은 회원들 100명 정도가 양재역을 향해 떠난다. 양재역은 순우리말로 말죽거리라고 불렸다. 역의 기능이 말을 바꿔 타는 등 관리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에는 항상 10여 필의 말이 대기하고 있었다. 통신사 삼사는 가마나 말을 타고 갔기 때문에 역을 반드시 지나가야 했다. 그러므로 한양에서는 청파역이, 과천현에서는 양재역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동안 통신사 우정 걷기팀은 첫날 양재역이 아닌 청계산 정토사까지 갔다. 그것은 정토사에서 숙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일러가 고장 나 통신사 걷기팀을 받을 수 없단다. 그 때문에 첫날 걷기를 청계산입구역에서 마칠 수밖에 없었다.

 

 

 

▲양재역에 세운 말죽거리 표지석

 

 



통신사 우정걷기팀은 둘째 날 달래내 고개에서 용인까지 간다. 셋째 날 용인에서 죽산까지 간다. 넷째 날 죽산에서 생극까지 간다. 다섯째 날 생극에서 충주까지 간다. 충주에 이르면 충청감사가 통신사 일행에게 전별연을 베풀어주었기 때문에 하루 쉬어간다. 이를 감안해 우정 걷기팀을 위한 문화유산 답사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일곱째 날 충주에서 수안보까지 간다. 여덟째 날 수안보에서 해발이 가장 높은 새재를 넘어 문경까지 간다. 건기 일행이 경상도에 접어드는 것이다. 그 후 경상도 지역을 지나 제21차인 3월 29일(토)에 동래에 도착한다. 3월 30일(일) 해신제 등을 하며 하루 쉬고, 4월 1일(월) 배를 타고 부산에서 대마도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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