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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거북선_조선 수군의 돌격 대장

by noksan2023 202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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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_조선 수군의 돌격 대장

 

 

 

 

 

 

거북선은 조선 수군의 돌격 대장이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거북선이 적의 함대로 돌격하여 적의 배를 부딪쳐 깨뜨렸다. 사방에서 대포를 쏘아대는 거북선의 모습은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배를 포위해도 일본군은 송곳과 창이 꽂힌 지붕으로 올라탈 수가 없었고, 배의 속도와 회전이 빨라 금세 포위마을 빠져나갔다.

 

조선의 주력 함선인 판옥선은 왜구를 효과적으로 막아 내기 위해 개발되었다. 화포를 탑재하여 원거리 포격이 가능해졌고, 적이 기어오르기 어렵게 크고 높게 설계되었으며, 밑바닥이 평평하여 회전이 쉽고 안정적이어서 섬이 많고 조류가 급한 조선의 바다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그렇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갑판이 쉽게 노출되어 사장자가 많이 나왔다. 그래서 갑판을 뚜껑으로 덮어 활용할  수 있는 돌격선으로 거북선이 제작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거북선의 전투 모습을 직접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다. 흔히 이순신은 제작을 명하고 군관 나대용이 거북선을 설계하였다고 알려졌지만, 그 원형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 다시 등장한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새로 개량하여 건조하였거나, 적어도 쓰이지 않던 거북선을 부활시킨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의 구조에 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어 논란이 거세다. 먼저 거북선이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지만 근거는 희박하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 기록에서는 거북선에 철갑을 덮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고, 일본 측 문헌과 후대의 기록은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 다음으로 내부가 몇 층인가 하는 문제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에 뚜껑을 덮어 개조한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2층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 경우 전투 공간과 노를 젓는 공간이 겹치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고 3층 구조였다고 생각하면, 높이가 너무 높아 안정적인 운항이 가능했을지 의심된다. 마지막으로 용머리의 기능에 관한 것이다. 용머리는 우뚝 솟아 있었을까? 아니면 전방으로 돌출되어 있었을까? 고정되어 있었을까? 안으로 들락거렸을까? 대포를 탑재하였을까? 연막을 내뿜는 용도였을까? 현재 남아 있는 거북선에 관한 기록과 삽화로는 이러한 궁금증을 증명하기가 어렵다.

 

임진왜란하면 이순신, 이순신하면 거북선이 떠오른다. 하지만 실제 조선 수군의 주력 함선은 판옥선이었으며, 임진왜란 초기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보유했던 거북선은 3척에 불과했다.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이 전멸당한 칠천량 해전에서 거북선도 모두 침몰했고, 이후 이순신은 거북선을 건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에 보여 준 거북선의 활약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까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만은 확신하다. 

 

 

거북선

 

 

 

거북선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3척으로 추정되는데, 명칭은 본영거북선, 방답거북선, 순천거북선으로 모두 여수에서 만들어졌다. 제작 지역은 본영선소[중앙동]와 방답진선소[돌산읍], 그리고 순천부선소[시전동]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그림으로 전해지는 거북선의 종류는 세 가지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충무공전서』에 실린 통제영 거북선[통영]과 전라좌수영[여수] 거북선이다. 충무공 이순신 종가에도 거북선 그림 두 장이 전해져 오는데, 이 거북선은 『충무공전서』의 거북선과는 다른 모양이다. 

 

1934년 언더우드(Underwood)가 최초로 거북선을 연구한 이래, 지금까지 거북선은 대체로 판옥선에 지붕을 씌운 배라는 점, 다른 많은 한국 전통 배와 마찬가지로 한국식 노를 사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였다. 그러나 거북선의 구체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간단하게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충무공전서』는 통제영 거북선이 충무공 이순신이 개발한 거북선의 원형에 가깝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충무공전서』에는 통제영 거북선의 내부 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부족하다. 때문에 통제영 거북선의 갑판 구조에 대해 1층 구조였다는 주장과 반 2층 구조였다는 주장, 그리고 2층 구조였다는 주장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

 

1층 구조일 경우 판옥선에서 2층 갑판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셈이며, 2층 구조일 경우 판옥선의 구조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씌운 셈이다.

 

그러나 통제영 거북선이 충무공 이순신이 개발한 거북선의 원형에 가깝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이상, 거북선 원형의 갑판은 2층 구조일 가능성은 없다.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을 보면, 1층 갑판의 천장 위치에서부터 곡면의 지붕이 씌워진 모습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의 경우 그림상 2층 구조일 가능성이 있으나,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 순수한 2층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

 

문제는 거북선의 지붕 좌우에 있는 포 구멍이다. 통제영 거북선 그림을 보면 지붕 좌우에 12개의 구멍이 그려져 있는데, 『이충무공전서』 본문을 보면 이 구멍에 대해 포혈(砲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만약 거북선을 순수한 1층 구조로 볼 경우 이 포 구멍을 설명할 수가 없다. 1층 구조라면 지붕 부근에 포혈을 만들 필요가 없고, 설사 만든다 해도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외관상 2층이 아니면서도 지붕 부근에 포혈이 존재하는 구조라면, 거북선의 내부 구조는 반 2층 구조일 수밖에 없다. 반 2층 구조일 경우에도 판옥선의 상층 갑판을 그대로 두고 여장만 제거한 채 지붕만 씌운 경우와, 판옥선의 상층 갑판을 완전 제거한 경우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판옥선의 상층 갑판을 그대로 둔 경우에는, 판옥선에서 개조하기에는 간편하나, 지붕의 높이가 낮아 사람이 설 수 있는 공간은 상층 갑판을 제거한 경우와 별로 차이가 없으므로 별로 실익은 없다. 일부 연구가들은 판옥선에 상층 갑판을 제거하는 식의 개조는 조선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못으로 제작한 한선은 필요할 경우 해체, 재조립이 가능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문제이다. 채광이나 활동의 편의성을 고려한다면 상층 갑판을 제거하고 반 2층 갑판을 설치한 경우가 좀더 합리적일 것이다. 이 경우 비교적 좁은 반 2층 공간에서 대형 총통, 특히 대장군전 등을 발사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소형의 승자총통이나 활을 사격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일부 연구가들은 거북선 원형이 1층 구조나 반 2층 구조일 경우, 사실상 2층 구조의 판옥선에서 퇴보한 것이며, 판옥선의 2층 갑판을 단순히 지붕으로 개조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만약 1층 구조나 반 2층 구조일 경우 노를 젓는 격군과 대부분의 전투 요원이 같은 층에 있게 되므로, 운용하기에 상당히 불편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실물 복원 거북선을 타본 사람이라면 다소 불편하기는 해도, 같은 층에서 노를 젓고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통제영 거북선이 2층 구조였다면, 『이충무공전서』의 통제영 거북선 그림을 설명할 방법이 없게 된다. 최초의 거북선 원형이 아무런 결점 없는 완벽한 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거북선 원형에는 결점이 있었을 것이며, 그러한 결점을 개량하기 위해 전라좌수영 거북선이나 충무공 이순신 종가 거북선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용머리(혹은 거북머리)의 용도에 대해서도 학자들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소포[현 여수시 종화동]에서 직접 용머리에서 현자화포를 쏘았다고 기록한 이상 임진왜란 당시의 용머리는 화포 발사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용머리 내부에 현자화포를 발사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되어야 하므로, 지금 복원된 거북선보다는 용머리가 커야 할 것이고, 높이도 조금 낮아야 할 것이다. 거북선 이물비우[船首材]에 그려진 귀면(鬼面)은 충각용 돌기(Ram)일지, 아니면 단순한 장식용 그림일지 학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현재 밝혀진 사료로서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충무공전서』에서는 통제영 거북선이 충무공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과 유사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연히 통제영 거북선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모습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충무공전서』에는 전라좌수영[여수] 거북선이 언제 개발된 것인지 아무런 구체적 설명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몇 가지 다른 종류의 거북선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충무공 이순신 종가에 소장된 거북선 그림은 판옥선처럼 장대(將臺)가 존재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런 형태의 거북선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충무공전서』가 편찬된 정조대 이후에 개발된 새로운 종류의 거북선인 것 같다. 충무공 이순신 후손 중에 수군통제사를 역임한 사람이 여러 명이므로, 후손 중의 한 명이 조선 말기의 거북선 그림을 집안에 소장하게 된 것 같다. 

 

충무공 이순신 종가 거북선 그림 중에 하나는 거북머리가 없다. 이 때문에 ‘머리 없는 거북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머리 없는 거북선’은 거북선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머리와 장대를 제거한 그림일 뿐, 종류가 다른 별도의 거북선은 아닌 것 같다. 일부 연구가들은 이 그림을 근거로 거북선의 머리가 안팎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위의 그림을 가지고 그런 주장을 한다면, 위 거북선 그림의 장대도 상하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현재 10여 종이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수군 훈련도』에 묘사된 거북선 중 상당수가 장대가 있는 거북선이다. 적어도 19세기 이후에는 장대가 있는 거북선이 일반화되었던 것 같다.

충무공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2월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1년 2개월 동안 다가올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대비해 거북선, 철쇄 방비 시설, 북봉 연대 등 방비 시설을 새로 구축하는 등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북선 건조가 충무공 이순신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고, 임진왜란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이런 거북선이 여수에서 건조되고 운용되었음은 『난중일기』를 비롯한 많은 문헌과 선소를 비롯한 많은 유적에서 나타나며, 이것은 거북선의 고향이 여수임을 말해 주고 있다.

 



세계 7대 명품 함정에 꼽힌 거북선 1895년 조선 수군이 해체될 때까지 있었다

 

 

 

 

 

 

미국해군연구소(USNI)가 현지시각 4월 9일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뉴스를 전해 왔다. 이 연구소가 운영하는 《USNI뉴스》는 군 관계자와 군사전문가와 국방에 관심이 있는 독자 2만6000명을 대상으로, “어떤 함정이 세계 해군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느냐”고 묻고 일곱 척의 리스트를 발표했다.
 
  그 결과 미 해군의 항공모함, 아이오와급 잠수함, 최초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인 노틸러스, 미·영 독립전쟁의 범선(帆船) ‘컨스티튜선’ 등 네 척이 미국 것이었다. 영국과 독일 것으로는 각각 전함(戰艦) 드레드노트와 경(輕) 순양함 ‘엠덴’이 이름을 올렸다. 나머지 한 척이 바로 조선시대 거북선이다.
 
  거북선을 살피기에 앞서 미국 항공모함을 살펴보자. 항공모함의 원조(元祖)는 영국이다. 영국해군은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비행기를 대형 순양함에 설치한 갑판을 통해 발진시키는 방법을 고안했고 그 결과 순양함 ‘퓨리어스(Furious)’를 지금의 항공모함과 가까운 형태로 만들었다.

 

‘비행기 탑재함(airplane carrier)’이라는 이름은 1918년 본격 항공모함 ‘아거스(Argus)’을 탄생시키는 모태가 됐다. ‘아거스’는 1만4000t급이며 스무 대의 비행기를 탑재했다. 항공모함 시대가 온 것을 직감한 나라가 미국과 일본이다. 1922년 미국과 일본은 각각 2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했다.
 
  미국의 렉싱턴(Lexington)과 새러토가(Saratoga)는 무려 3만3000t이나 됐고 일본의 아카기(赤城)와 가가(加賀)도 2만7000t급이었다. 미국은 2차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1만4500t급의 레인저(Ranger), 1만9900t급 요크타운(Yorktown)형 3척을 더 건조해 최강의 항공모함 보유국이 됐다.

 

일본에 기습공격을 당했던 미국이 태평양 해상에서 일본해군을 격멸시킨 원동력이 바로 항공모함이었다. 2차 대전의 주인공이 항공모함이었다면 2차 대전 이후 걸프전까지 바다를 주름잡은 것이 ‘아이오와급 전함’이다. 아이오와급 전함이 처음 건조된 것은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아이오와, 뉴저지, 위스콘신, 미주리 총 4척이 건조되는데, 1번 함인 아이오와가 1943년 5월, 미주리가 마지막으로 1944년 11월에 취역했다. 아이오와급 전함의 특징은 항공모함을 방불케 하는 크기와 화력(火力)이다. 대개 아이오와급 전함은 16인치(406mm) 함포 9문을 장착하는데 16인치 함포는 850kg에서 1.2t의 각종 포탄을, 최대 40km까지 쏠 수 있다.
 
  이 가운데 철갑탄인 ‘Mk. 8’의 경우 두께 9m의 콘크리트벽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위력이 세다. 1분에 최대 2발로 5분이면 90t가량의 포탄을 쏘아댈 수 있는데 전장(戰場)에서 기상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이런 화력을 지닌 무기는 지상에서도, 바다에서도, 공중에서도 아이오와급 전함이 유일했다.
 
  아이오와급 전함은 1980년대 핵추진 미사일 순양함이 등장하기 전까지 무적에 가까웠다. 일례로 미주리호는 1945년 9월 2일 이루어진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장소였을 뿐 아니라 6·25 때 북한군에 공포의 대상이 됐으며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원자력잠수함인 ‘노틸러스(Nautilus)’에서 노틸러스는 ‘앵무조개’라는 뜻이다. 이 노틸러스라는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1869년 프랑스 과학소설가 쥘 베른이 쓴 《해저 2만리》라는 소설에 등장한다. 베른은 소설 속에서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잠수함 ‘노틸러스호’를 등장시켰다.
 
  잠수함을 가진 네모 선장과 프랑스 과학자 피에르 아로낙스 교수의 모험담을 그렸는데 관심을 끈 것은 2중 선체를 지녔고 내부가 여러 공간으로 나뉘어 한 곳이 침수(浸水)되더라도 가라앉지 않는 구조를 가진 ‘노틸러스’였다. 쥘 베른은 노틸러스의 엔진에도 상상력을 총동원했다.
 
  쥘 베른이 활동하던 당시 배를 움직이는 것은 내연(內燃)기관이었는데, 이 시대를 앞서간 소설가는 나트륨 수은 전지를 사용하고 잠수함에서 쓰는 물은 기관에서 공급하는 열로 바닷물을 증류해 얻는다는 기술을 소개한 것이다. 소설 속 노틸러스호의 속도는 최대 43.2노트(약 시속 80km)나 됐다.

 

 소설이 나온 지 80여 년이 지난 1955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잠수함이 항해를 시작했다. ‘본 함(艦)은 원자력으로 항해 중이다’는 역사적인 메시지로 세상에 충격을 안겨주면서 등장한 세계 첫 원자력잠수함 노틸러스는 기존의 잠수함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록을 깨뜨렸다.
 
  길이 97m, 배수량 3180t인 노틸러스는 가압수형 원자로 1기와 증기터빈 2조를 통해 1만5000마력의 힘을 냈는데 첫 항해 후 연료보급 없이 26개월간 7만 해리(13만km)를 항해한 뒤 1957년 첫 번째 연료 공급을 받았다. 1959년 2차 연료 재공급 때까지 항해거리가 9만3000해리였다.
 
  9만3000해리는 약 17만2000km로, 지구 둘레 4바퀴 반에 해당하는 거리다. 네 번째 범선 ‘컨스티튜션’은 3개의 돛을 단 목선(木船)으로 1794년 미 해군법에 의한 승인을 받아 건조된 6척의 프리깃(Frigate)함 가운데 하나다. 프리깃함은 ‘호위함’으로 불리는데 당시론 대형 범선을 뜻했다.
 
  ‘헌법’을 뜻하는 컨스티튜션(Consti-tution)은 1797년에 취항했는데 이번 조사에서 ‘사상 최고의 함정’으로 꼽히게 된 것은 1812년 미국과 영국 간의 전쟁에서 보여준 활약 때문이었다. 길이 62m인 이 배는 전투 당시 영국 군함에서 발사한 포탄이 선체에 맞았지만 대부분 튕겨나갔을 만큼 튼튼했다.

 

 영국이 1905년에 건설해 이듬해 취역시킨 ‘드레드노트’는 전함(戰艦)의 원조 격이다. 이름 드레드노트(Dread-nought)는 ‘공포(Dread)’와 ‘없다(nought)’는 말을 합성한 것이다. 즉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사상 최강의 전함’이라는 뜻이다.
 
  영국 해군제독 피셔는 이 전함을 만들 때 3가지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 첫 번째, 주포(主砲)를 단일 구경으로 통일하되 최대한 많은 포를 한 함정에 탑재해야 한다. 두 번째, 최대한 원거리에서 명중률 높은 포격을 함으로써 적의 공격을 피해야 한다. 세 번째, 고속을 낼 증기터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드레스덴급 경순양함인 독일의 ‘엠덴’은 1909년 취역했다. 함선의 명칭은 이 배를 건조한 항구도시 엠덴에서 따왔다. ‘엠덴’은 사실 특별한 화력이나 특징을 가지진 못했으나 제1차 대전 당시 동양함대에서 신출귀몰한 위력을 발휘해 세계 최고의 명품전함 일곱 종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1차 대전 당시 독일의 동양함대는 영국·프랑스·러시아의 동양함대와 맞서야 했다. 독일 동양함대 사령관 그라프 슈페 제독은 적에 비해 전력이 열세인 점을 감안해 전원 철수키로 했지만 ‘엠덴’에만은 인도양으로 가 영국의 인도양 통상(通商)을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엠덴’은 콜롬보, 캘커타, 마드라스, 차고스 제도(諸島), 페낭 등에서 영국 해군을 괴롭히며 ‘치고 빠지기 식’ 전략을 구사하다 1914년 11월 9일 두 달여간의 게릴라전에 종막을 고한다. ‘엠덴’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단 1척의 배로 인도양이라는 대양의 해운을 완전히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거북선 창제자, 실제 건조책임자는 나대용

 

 

 

거북선

 

 

 

 우리 거북선은 어떨까. 거북선에 대해 《USNI뉴스》는 “볼록한 덮개로 선체를 덮어 거북 등껍질과 비슷했다”며 “(적군의 선내) 침투가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속도가 빠르고 기동성도 좋았다”고 했다. 또 “선수(船首)에 장착된 용머리 모양의 연기 분출 장치는 강력한 심리적 무기였다”고 덧붙였다.
 
  《USNI뉴스》는 거북선이 임진왜란 때 해상전투에서 “수치상으로 우세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군을 물리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당시 해전의 군사적 영향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거북선의 역사에 대한 단편적인 평가에 불과하다.
 
  거북선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 유영식 해군제독에게 “전문가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그는 정진술 해군사관학교 충무공연구회 자문위원의 연락처를 보내 왔다. 해사 출신으로 이 분야에 정통하다는 그는 전화를 걸자 대뜸 “거북선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은데…”라며 의구심을 나타냈다.
 
  우리 사서(史書)에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초다. 1413년 《태종실록》의 〈태종이 ‘임진도에서 거북선과 왜선의 전투를 구경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흡족해하는 태종에게 좌대언 탁신이 “적선이 거북선과 충돌하면 견디지 못한다”며 “거북선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 무적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고 아뢰었다〉는 대목이다.
 
  그런가 하면 2년 뒤인 1415년에도 〈거북선이 수많은 적에 충돌해도 적이 우리를 해칠 수 없다〉는 대목이 나온다. 묘하게도 태종 때 실록 이후 이순신 장군이 다시 거북선을 만들기까지 200년 동안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각종 함선의 보유량을 규정한 《경국대전》에서도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 거북선이 만들어진 것은 조선 초입니까.
 
  “조선 초에 기록이 처음 등장하니 그때부터라고 봐야지요.”
 
  — 일설에는 고려시대에도 거북선과 비슷한 모양의 함선이 있었다는데 ….
 
  “고려시대에는 없었습니다.”
 
  — 거북선이 조선 태종 때 있었는데 왜 다음 기록은 임진왜란이 돼서야 나옵니까.
 
  “거북선이 태종 때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실전에 배치되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자동차 전시회에 상상을 가미한 제품이 나온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가요.
 
  “《태종실록》에 13종의 함선이 나오는데 그 리스트에 거북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 그 13종은 대략 어떤 함선들이었습니까.
 
  “대선·중선·하선·맹선·쾌선 같은 것들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거북선은 임진왜란 직전에 건조된 것이겠군요.
 
  “처음 조선 수군이 보유한 거북선은 3척이었습니다. 훗날 5척으로 늘어났지요.”
 
  — 근거가 있습니까.
 
  “전투 기록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봐도 됩니까.
 
  “창제자라고 봐도 되지요.”
 
  — 그렇지만 그분이 배 만드는 기술자는 아니잖아요.
 
  “창제자라는 것은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라고 했다는 뜻이고 실제 건조자는 나대용입니다. 그가 전선 건조 감독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 지금 거북선의 설계도가 있습니까.
 
  “임진왜란 때 것은 없고 정조 때 나온 《이충무전서》에는 나와 있지요. 두 가지로요.”

 

— 두 가지나 됩니까.
 
  “지금의 경남 통영이 원래 수군 통제영에서 나온 말입니다. 1795년에 통영에 보관된 거북선의 그림과 이순신 장군이 머물던 전라좌수영에 보관하던 거북선의 그림이 《이충무전서》에 나옵니다.”
 
  — 그 뜻은 정조 때도 거북선이 있었다는 건가요.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만 활약한 것이 아니라 순조 때까지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우리 군이 일본에 의해 해산되기 직전인 1895년까지도 마지막 18척이 남아 있었습니다. 최고로 많이 가지고 있을 때는 18세기 중반에 42척을 보유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 그 증거가 뭡니까.
 
  “회화(繪畵) 자료입니다.”
 
  — 18세기 중반이면 숙종~영조 때 아닌가요.
 
  “그즈음 됩니다.”
 
  — 거북선에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125명에서 130명입니다.”
 
  — 어떻게 그렇게 5명 단위로 추정할 수 있습니까.
 
  “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임진왜란 초 이순신 장군이 보유했던 거북선은 3척이다. 두 척을 더 건조한 사실은 임진왜란 중 중국에 보낸 외교문서를 모아 둔 《사대문궤》라는 책에 나온다. 그 책에 〈전라좌수영 거북선이 5척〉이라고 기록된 것이다. 이로 미루어 이순신 장군이 2척을 추가로 건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임진왜란 당시 최대 7~8척의 거북선을 보유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임진왜란 후에는 한동안 이 숫자가 유지되다가 1746년 편찬된 《속대전》에서 거북선 보유량이 14척,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에서는 40척으로 늘어났다. 1808년에 편찬한 《만기요람》에 30척, 1817년에 편찬된 수군의 함선 목록인 〈선안〉에는 18척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판옥선이었다. 거북선은 돌격선이라는 특수임무를 맡고 있었다.
  거북선 숫자는 주력 군함인 판옥선에 비하면 적은 것이다. 1746년을 기준으로 거북선 보유량(14척)은 판옥선(117척)에 비해 8분의 1에 불과했다. 기록상 가장 많은 거북선이 등장하는 1770년을 기준으로 따져도 판옥선 보유량은 83척으로 거북선 40척의 2배가 넘었다. 이를 통해 판옥선이 조선 수군의 주력이고 거북선은 돌격선이라는 특수임무를 맡았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순신 장군이 올린 장계인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신이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거북선을 만들었는데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능히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하여 비록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에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1593년 9월에 선조에게 올린 〈조진수륙전사장(條陳水陸戰事狀)〉에도 비슷한 기록이 나온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철갑선이 아닌 소나무로 만든 장갑선
 

1795년 작성된 《이충무전서》에는 거북선의 외판 두께가 4치(약 12~13cm)라고 나와 있다. 전나무보다 훨씬 더 단단한 소나무를 사용한 거북선은 50m 이상 거리에서 발포한 조총으로 관통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다시 정진술 자문위원과의 대화다.
 
  — 임진왜란 때 거북선과 정조 때의 거북선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총혈(銃穴)이 모두 14개였습니다. 좌우로 각 6개, 꽁무니에 한 개, 앞의 용머리에 한 개를 합쳐서요. 좌수영에 있던 거북선은 모두 36개의 총혈이 있었던 반면 통제영에 있던 거북선에는 모두 72개의 총혈이 있었습니다.”
 
  — 해군사관학교에 전시되어 있는 거북선은 제대로 고증을 거친 것입니까.
 
  “설계도대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 만든 것들은 제가 일일이 평가할 수 없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 없고요.”
 
  — 우리는 보통 거북선을 철갑(鐵甲)을 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철갑선은 아니었습니다. 장갑(裝甲)을 했다고 봐야지요.”
 
  — 그런데 왜 우리는 철갑선으로 알고 있을까요.
 
  “우리가 거북선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흥선대원군이 외세의 침략을 받을 때 ‘거북선 같은 철갑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거나, 단재 신채호 선생, 유길준이 《서유견문》 등에서 거북선을 철갑선처럼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정확한 지식 없이 ‘거북선이 철갑이라더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그게 통설처럼 굳어진 거지요.”
 
  — 그렇다면 무엇으로 장갑을 했다는 겁니까.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재질이 단단한 나무를 두껍게 사용해 배를 만든 겁니다. 저는 소나무로 장갑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 소나무여야 하느냐를 알려면 조총(鳥銃)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1795년의 《이충무전서》에는 거북선의 외판 두께가 4치(약 12~13cm)라고 돼 있다. 연구자들이 구경 9mm급 조총의 관통력을 시험해 본 적이 있다. 이 조총을 30m 밖에서 쐈을 때 두께 4.8cm의 전나무 판자를 관통했지만 50m 밖에서 쐈을 때는 같은 두께의 전나무 판자는 관통하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수군함은 전나무보다 훨씬 더 단단한 소나무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조총으로 50m 이상 거리에서 두께 12~13cm의 거북선 외판을 관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거북선은 방패판처럼 더 중요한 부분은 소나무보다 더 단단한 참나무를 이용해 방호력을 높였다.
 
  참고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에 걸쳐 우리나라에서 널리 사용한 조총은 구경 13~16mm급이 많았다. 김육(金堉·1580~1658)은 《잠곡유고》라는 책에서 〈대포는 비록 3척(약 90cm) 두께의 방패라도 쉽게 뚫으나 조총의 철환(鐵丸)은 1촌(약 3cm)도 뚫지 못한다〉고 기록했다.
 

미국인 선교사 겸 동양학자였던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는 1882년에 펴낸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 조선군의 군함에 대해 ‘금속으로 표면을 감쌌다(covered with metal)’라고 잘못 기술했다.
  다시 정 자문위원과의 대화다.
 
  — 그런데 왜 하필 거북이 모양의 배를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거북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배를 만들고 나서 보니 거북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고 해 구선(龜船)이라는 이름을 붙인 겁니다.”
 
  — 사실 거북선의 존재를 외국에 처음 알린 게 우리 학자들이 아니고 전부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었지요.
 
  “그렇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겸 동양학자였던 윌리엄 엘리엇 그리피스가 1882년에 펴낸 《은둔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에서 처음으로 조선군의 군함을 설명하며 ‘금속으로 표면을 감쌌다(covered with metal)’고 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도 미국의 월간잡지 1899년 6월호에 거북선을 거북배(tortoise-boat)라고 표현하면서 철판(Iron Plate)으로 감싼 구조라고 했습니다.”
 
  — 그로 인해 지금 거북선이 철갑선으로 둔갑한 거군요.
 
  “헐버트는 거북선을 ‘철갑선(Ironclad)’이라면서 ‘한국은 철갑선과 금속 활판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발명한 국가’라고 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오보(誤報)이긴 하지만 기분 좋기도 한데, 사실은 바로잡아야지요.”
 
  이로 인해 1929년에는 세계 유수의 백과사전인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4판에 거북선은 ‘세계 최초의 철갑선 군함(first Ironclad war vessel)’으로 소개됐다.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인 언더우드(1890~1951)는 1933년 영국왕립아시아학회 조선분과지에 발표한 그의 논문(Korea Boats and Ships)에서 비로소 〈거북선 개판(蓋板·껍데기)의 두꺼운 나무 판자만으로도 충분히 일본군의 조총 사격을 막을 수 있었다〉며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 장갑선임을 밝혔다.
 
 
 
“거북선, 다 부서져 없을것”
 
  이렇게 보면 우리 선조의 위대한 발명품인 거북선은 조선이 멸망하면서 거의 자체 연구 없이 외국인에 의해 호기심의 대상처럼 알려지게 됐다. 그로 인해 한때 ‘세계 최초의 잠수함이었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나왔고 이순신 장군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에 올랐다가 조선 수군을 일거에 궤멸시킨 원균의 칠천량 해전이 벌어졌던 장소에서 거북선을 인양하겠다는 시도도 있었다.
 
  — 어째 거북선에 대해 외국인들이 더 많이 아는 것 같습니다.
 
  “헐버트나 언더우드뿐 아니라 미 해군 대령인 해커먼은 1955년에 이미 자세한 논문을 쓰기도 했어요.”
 
  — 우리나라에 거북선 전문가가 몇 분이나 됩니까.
 
  “수천 명쯤 될 겁니다.”
 
  — 수천 명이요?
 
  “인터넷에 보세요.(기자는 이 뜻을 거북선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 저런 가설을 늘어놓는 사람들을 은근히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 한때 거북선을 바닷가에서 찾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거북선이 뭘로 만들어졌습니까?”
 
  — 나무로 만들어졌다면서요.
 
  “그럼 물에 뜨겠습니까, 가라앉겠습니까?”
 
  — 나무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뜨겠지요.
 
  “그런데 칠천량 뻘에 남아 있겠습니까? 당연히 다 부서져서 없겠지요.”
 
  — 그런 시도들이 무의미하다는 겁니까.

 

 

'228년만' 18세기 거북선 실제 모습 복원 성공

 

 

1795년 통제영 거북선의 단면도

 

 

 

그동안 참고문헌 등을 통해서 모습을 추측했던 거북선이 실제 설계자료를 토대로 완벽하게 복원됐다. 채연석 박사(전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는 거북선 건조에 사용했던 설계자료를 토대로 228년 만에 거북선 축소모델과 컴퓨터 그래픽(CG)으로 실제 복원에 성공했다고 19일 밝혔다.

1795년 왕명으로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의 귀선도설은 19세기 초 거북선 건조에 사용한 설계도였다. 이 같은 사실은 채 박사가 최근 '충무공 이순신과 한국 해양 제9호'에 발표한 논문을 통해 처음 밝혀졌다.

채 박사는 이충무공전서 귀선도설 기술방식이 전통 화약무기, 화차 등 설계자료와 비슷한 점과 거북선 제작 설계자료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히 기록된 점에 착안해 이 자료가 실제로 거북선 건조에 사용했던 근거를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1793~1794년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던 신대현이 순조 9년(1809년) 작성한 상소 기록을 통해 당시 거북선 건조를 위한 기본 설계자료로 사용했음을 확인했다.

채 박사는 이충무공전서 귀선도설에서 통제영 거북선을 우선 대상으로 연구에 착수했다. 그동안의 1795년 통제영 거북선에 관한 많은 연구에서는 주로 조선시대 여객선 개념인 사신선 규격을 참고해 거북선 2·3층 상장(갑판) 크기를 추정했기 때문에 연구자마다 규격이 다르다.

채 박사는 통제영 거북선 상장 크기를 같은 거북선이나 판옥선 규격 특징을 파악해야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과거 문헌을 통해 1882년 거북선과 판옥선 저판(밑바닥) 및 상장 규격 기록을 참고했다. 이를 활용해 1795년 통제영 거북선 상장 규격 85척(26.6m), 폭 32척(10m) 규격을 찾았다. 기존에 알려진 거북선보다 상장 폭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복원된 거북선 개판(지붕) 또한 전체를 둥글게 씌운 형태가 아니고 3층 갑판 중앙 부분에만 판자를 세우고 지붕을 올린 것이 그동안 알려졌던 거북선 모습과 가장 다른 모습이다.

과거 신기전과 조선 총통 등을 복원한 채 박사는 그동안 복원된 거북선에 대해 제각각인 구조를 지적해온 바 있다. 이후 과학적 접근을 통해 거북선을 복원할 수 있는 복원 연구를 이어온 끝에 이번 복원에 성공했다.

 

채 박사는 “그동안 거북선 관련 유물이나 사진이 존재하지 않아 실제 모습을 확인하는 방법은 설계도를 찾아서 복원하는 방법뿐이었다”며 “228년 만에 축소모델과 컴퓨터 모델을 통해 18세기 거북선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순신의 거북선 433년 만에 특허받는다!

 

 

 

거북선 기본 구조

 

 

 

 

거북선이 세차게 바다 물살을 가르며 일본 병사들이 탄 배로 돌격해요. 거북선 앞에는 무시무시한 용 머리가 달려 있어요. 용의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불꽃을 내뿜고요. 불꽃과 함께 포탄도 마구 튀어나와 일본 배는 차례대로 폭발하며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요. 1592년,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한 거북선 모습입니다.

거북선은 전 세계가 인정한 군함이에요. 2020년 미국은 세계 해군 역사상 7위 안에 꼽히는 ‘명품 군함’으로 거북선을 선정할 정도니까요. 4월 4일, 우리나라도 거북선의 특허(特許) 심사를 진행한다고 밝혔죠. 이는 거북선을 만든 지 434년 만이에요. 특허청은 4월 말에 결과를 발표한다고 했어요. 특허 심사위원들은 거북선의 디자인, 성능, 그리고 위력을 살펴볼 예정인데요. 거북선이 특허를 받을 수 있을지 같이 살펴볼까요?

1. 디자인: 갑판에 판 덧대고, 뾰족뾰족한 송곳 꽂은 거북이 모양

거북선은 1591년에 조선의 장군 이순신 손에서 탄생했어요. 이순신은 언젠가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거라고 여겼기 때문이에요. 그는 이제껏 해전에서 쓰이던 배와는 다른 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는 당시 조선 병사들의 전함이던 판옥선을 개조해 거북선을 만들었어요. 판옥선은 배를 덮는 갑판이 한 층이 아니라, 판을 하나 덧댄 배를 뜻해요. 이순신은 판을 하나 덧대고 그 위에 뾰족뾰족하고 거대한 송곳을 박았어요. 일본 병사들이 올라타지 못하도록 한 거예요. 거북선은 배에 지붕을 덮은 모습이 마치 거북이 등과 비슷해 이름이 붙었답니다.

2. 성능: 대포 14문 장착해 사방으로 포탄 발사

길이만 34m가 넘는 거북선에는 선원이 150명 탈 수 있었어요. 이는 대형 버스 3대를 붙여도 안 되는 길이죠. 거북선은 거대한 돛 2개로 바람을 받으며 나아갔어요. 여기에 노 16개를 저으면 시속 9km 정도로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어요. 여기에 거북선에는 대포 14문이 장착됐어요. 이에 일본 적함 사이에 깊숙이 파고들어 사방으로 대포를 쏴 빠른 공격을 할 수 있었죠.

3. 위력: 거북선 2척 앞세워 일본 배 60척 침몰

1592년 8월, 조선군과 일본군이 맞붙은 ‘한산도 대첩’은 거북선이 크게 활약한 전투였는데요. 조선군 배 55척과 일본군 배 73척이 맞붙은 전투였죠. 거북선 2척이 앞장선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렸어요. 조선군은 사상자가 13명에 불과했던 반면, 일본은 대장선을 비롯한 60척이 바닷속으로 침몰했어요. 이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지도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조선 수군과 싸우지 못하도록 했어요. 바다를 장악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계속해서 일본군을 쫓으며 몰아붙였는데요. 일본군은 거북선의 무시무시한 위력에 너도나도 도망치기 바빴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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