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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38도선_하루 아침에 땅도 사람도 나뉘다

by noksan2023 2026.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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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_하루 아침에 땅도 사람도 나뉘다

 

 

 

 

 

사진 속 사람들은 미군 병사에게 

 

"여기서 무얼 하는 거요?"

 

라고 묻고 있는 듯 하다. 미군 병사 옆에는 38도선을 알리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미국 구역(US ZONE), 남조선(SOUTH KOREA) / 러시아 구역(PYCCKN 30H), 북조선(CEBEP KOPEN)이라 적힌 표지판의 큰 글씨 사이에는 '북위 38도선'이라는 말이 러시아어와 영어로 각각 쓰여 있다. 이 38도선은 누가, 왜 그었을까?

 

38도선은 1945년 8월 11일 새벽에 미국의 3부(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조정 위원회에서 다급하게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3부 조정 위원회에서 사무국 역할을 하며 업무를 조정하던 기구는 전쟁부의 작전국 전략 정책단 정책과였다. 11일 새벽 전략 정책단장 린컨 준장은 3부 구성원인 국무부 차관보로부터 

 

"소련이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으로 남진 중이므로 분할해 미국의 주둔지를 확보하라"

 

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린컨은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를 참고하여 약 1시간 동안 38도선을 확정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1945년 8월 11일까지 소련군은 한반도로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 미국 국무부는 왜 위와 같은 지시를 내렸던 것일까? 전문가들은 미국과 소련이 이미 포츠담 회담(1945.7.)에서 한반도 분할에 관해 암묵적으로 동의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일본을 지키기 위해 소련의 남하를 막고 서울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는 동아시아 전략을 계획하였다. 이에 미국 국무부는 일찍부터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계획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쪽 지도에서 보듯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그은 38도선은 산과 강으로 나눠진 자연 경계선이 아닌 일직선으로 구분된 인공적 경계선이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기의 논 사이로 38도선이 지났고, 어느 날 갑자기 이웃한 형과 동생의 집이 38도선으로 나뉘기도 하였다. 지금의 군사 분계선처럼 철조망이 쳐진 것도 아니고 표지판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속칭 가랫양지마을인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추전리는 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른 계곡이 38도선에 해당하였다. 이에 9월 23일 이 계곡 위의 다리 북쪽에는 느닷없이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였다. 70여 호의 추전리는 남쪽 응달마을 40여 호와 북쪽 양지마을 30호로 두 동강이 났다. 이 마을이 생긴 이후 수백 년 동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처럼 토지의 분단, 사람의 분단, 마을의 분단이 남북 분단의 서곡이었다. 38도선은 처음엔 임시적인 경계였지만, 6·25전쟁을 거치며 휴전선이라는 고정적인 경계로 다시 그어져 분단의 상징이 되었다. 

 

 

 

삼팔선三八線

 

 

 

인제 삼팔선 표석

 

 

 

1. 정의

 

한반도의 중앙부를 가로지르고 있는 북위 38°선.

 

2. 내용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우리나라에 진주한 미소 점령군의 군사분할선(軍事分割線)으로, 한반도 중앙부를 가로지르는 북위 38°선을 지칭한다.
조국의 광복이 실현되는 날 하나로 통일된 민족국가가 세워질 것을 내다보며, 국내외 각지에서 항일구국투쟁을 펼쳐 온 우리 민족의 자주적 의사와는 관계없이, 제2차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몇몇 전승 강대국들의 군사적 편의에 따라 그어진 선으로,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우리 국토를 남북으로 갈라놓는 분단선으로 고정되었다.

38선의 획정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전세의 주도권을 장악한 연합국측이 마지막 군사작전을 마무리짓기 위한 방책과 세계 각지의 전후처리 문제들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1943년 12월 미국·영국·중국 등 3개국 수뇌가 카이로에서 회동하고, 종전이 예견되던 1945년 2월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 수뇌들이 얄타에서 회동하였다.

이 얄타회담에서는 소련이 일본에 대항하여 참전하는 대가로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가 만주일대에서 장악하고 있던 경제적·군사적 이권들을 되찾아 가기로 양해하는 동시에, 한국에 대하여는 독립의 실현에 앞서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였다. 이로써 소련은 만주에서의 발판을 확보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문제에 대한 발언권도 굳히게 되었다.

루스벨트(Roosevelt,F.D.)를 승계한 트루먼(Truman,H.S.) 대통령은 얄타회담이 끝난 뒤,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입장이 지나치게 강화되어 일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우려하면서, 이러한 만약의 사태를 미리 막아내는 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7월 트루먼과 소련의 수상 스탈린(Stalin,I.)이 포츠담에서 만났을 때, 이들을 따라온 군수뇌들이 대일작전(對日作戰)을 마무리짓기 위한 연합군 참모장공동회의를 가졌다.

이 실무협의 결과 한반도에서는 공동작전을 펴기로 한다는 데 묵시적으로나마 의견의 접근을 보았다. 이러한 묵시적 양해는, 한반도에 관한 한 지상작전에서는 소련군측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반면, 해상 및 공중작전에서는 미군측이 상대적인 우위에 있다는 군사능력의 실세에 바탕을 두고 성립되었다.

한반도에서의 공동작전 문제와 관련하여, 당시 미국의 정책당국은 한반도의 전후처리에 있어 그 주도권을 소련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될 것이므로, 설령 한반도에서의 지상작전을 소련군이 전담할 경우에라도 종전 뒤의 점령만은 두 나라가 공동으로 해야 할 것이며, 다시 그로부터 국제신탁통치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리라고 판단하였다.

포츠담회담이 끝날 때까지 38°선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분계선을 정하여 두 나라 군대가 작전구역 또는 점령구역을 나누어 갖기로 합의한 사실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까지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이때쯤 미국 군부 및 고위정책당국이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위한 그런 식의 구상을 검토하고 있었거나 검토를 마쳐 놓고 있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일단, 소련군의 점령 아래 들어간 지역은 공산화를 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미국 당국은 이미 폴란드사태를 통하여 충분히 경험하고 있을 때였다.

그뿐 아니라 포츠담회담이 끝난 다음부터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할 때까지의 약 10여 일 사이에, 가령 38°선을 분할진주선(分割進駐線)으로 하는 점령계획 따위를 두 나라 정부가 양해 또는 합의했을 가능성도 빼놓을 수 없다. 두 차례에 걸쳐 원자폭탄이 떨어진 다음 일본의 항복이 확실해짐에 따라 소련은 1945년 8월 8일 재빨리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휩쓸며 한반도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8월 10일 일본이 비로소 포츠담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을 할 뜻을 밝혀오자, 미국 정부의 실무진은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연합군이 진주할 책임구역을 나라별로 할당하고,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우리 나라에 있는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하도록 제의하여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이 항복한 직후, 그 최종안을 미국육군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D.)에게 하달하는 한편, 소련을 비롯한 관계국 정부에 이에 대한 동의를 구하였다.

맥아더는 1945년 9월 2일 전후처리를 위한 ‘미국육군 태평양지역 총사령부 일반명령 제1호’를 포고,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은 38°선 이남에서는 맥아더 사령관 본인에게, 이북에서는 소련극동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남북한에는 미소점령군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원래 카이로선언에서는 미국·영국·중국 3국의 수뇌들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약속한다는 합의사항을 밝힘으로써 피압박민족이던 한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얄타회담에서도 이와 같은 합의사항을 재확인하고, 한국을 구분된 지역이 아닌 단일체로 취급하기로 하였으나, 신탁통치를 하자는 논의에는 한민족으로서는 불만이었다. 얄타회담에 소련이 개입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였던 카이로정신은 변질되어 국토는 분단되고 말았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거론하자, 우리 국민은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주장하였으나, 소련공산당의 조종을 받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하루아침에 민족의 의사를 뒤엎고 신탁통치 찬성으로 기울어, 국토 양단의 불길한 전망은 더욱 굳어져 갔다. 한반도에 단일임시정부를 세우자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논의에 따라서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어 그 절차를 논의하였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를 위하여 잠정적으로 설정되었던 점령지역 군사분계선이 동서냉전의 흐름에 휩쓸려 그 성격이 변질하여 정치적 분계선으로 고착화되어 갔다. 한국의 통일을 위해 국제연합의 결의에 따라 파견된 한국통일부흥위원단의 입북(入北)마저 북한측은 거절하였다. 광복 직후 38°선을 넘나들며 간헐적으로나마 이어지던 인원·물자·우편 등의 교류마저 끊어지고 38°선에는 철의 장막이 구축되었다.

남북을 통틀어 하나의 나라를 세우려던 노력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쳐놓은 장벽에 막혀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는 국제연합의 승인과 선거관리 아래 38°선 이남 지역에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같은 해 9월 북한에서는 소련 당국의 조작과 비호 아래 공산정권을 등장시킴으로써 남북한 사이에 대립이 항구화하기에 이르렀다.

38°선은 1950년 북한공산군의 남침과 더불어 소멸되었으나,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휴전선’이 다시 그어져 우리 국토는 여전히 갈라진 상태로 남게 되었다.

 

 

 

38선

 

 

 

38선 배경

 

 

 

38선(삼팔선, 三八線)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기 위해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그은 군사분계선이다.

 

1.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초안

 

1945년 7월에 미국 육군부(현재의 미국 국방부) 작전국(OPD)에서 처음으로 연합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계획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미국이 경기도 · 강원도(함경남도 원산, 안변 포함) · 충청북도 · 경상남북도를, 소련이 함경남북도(원산·안변 제외)를, 영국이 평안남북도와 황해도를, 중화민국이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2. 미국 합동전쟁계획위원회의 초안

 

1945년 8월 미국 합동참모본부 내 합동전쟁계획위원회(JWPC)는 '일본 주요 열도와 한국에 대한 연합국 관리 및 점령군 계획(JWPC385/1)'에서 일본 열도와 한반도에 대한 4국 분할점령 계획을 작성했다. 미국, 소련, 영국, 중화민국 4개국은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킨 후 서울, 청진, 원산, 평양, 군산, 제주 등 주요 전략지점에 연합군을 주둔시키고, 이후 한국이 독립할 때까지 한반도를 분할관리한다는 계획을 입안했다.

하지만 9월 22일 작성된 수정안 'JWPC385/5'에서는 38도선 분할이 확실시되어 영국과 중화민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소련 양국의 분할점령안으로 바뀌었다. 'JWPC385/1'은 현실적으로 군사적 점령이 불가능하다는 미국 군부의 반대로 채택되지 않았다.

 

3. 3부 조정위원회의 최종안

 

38선을 확정한 것은 미국 국무부, 육군부, 해군부 기관원의 협의체인 3부 조정위원회(SWNCC)였다. 소련군이 만주 전략공세작전을 개시한 후, 3부 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 Dunn)은 1945년 8월 11일에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서울과 인천을 점령하도록 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미국 육군부 작전국의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대령과 미 육군장관 보좌관이었던 딘 러스크(Dean Rusk) 중령은 작전국에 걸려 있던 내셔널 지오그래픽사의 벽걸이 지도에 38선을 그어본 후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 합참과 3부 조정위원회에 보고했고, 이 안이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일반 명령 제1호'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38선 분할 점령안을 미국이 제안하자 소련은 별 이의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5], 1945년 8월 23일 개성시까지 내려갔던 소련군은 9월 초에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했다.

 

4. 한반도의 분할

 

미국과 소련은 1945년 9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해주항이 위치한 해주시의 룡당포(龍塘浦)는 38도선 이남이지만, 미·소군정은 이를 38선 이북으로 간주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군정은 38도선 이남의 연천군을 파주군에,[8] 양구군을 춘천군에, 인제군을 홍천군에, 양양군을 강릉군에 편입하고, 벽성군은 해주시의 서쪽 지역을 옹진군에, 동쪽 지역을 연백군에 편입시켰다. 소련군정은 38도선 이북의 춘천군 사내면(가평군 포함)을 김화군 관할로 하였다가 화천군에 편입시켰으며, 그 밖의 춘천군 지역을 화천군에 편입시켰고, 개풍군과 장단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장풍군으로 통합하였으며, 옹진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벽성군에 편입하였다. 또, 포천군의 38선 이북 지역은 영평군으로 개칭하여 관리하다가 1946년 12월에 철원군에 편입하였다.

 

5. 정전협정에 따른 군사분계선으로 대체

 

1953년 7월 27일 발효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따라 설정된 군사분계선은 위도상 북위 38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만, 38선과 비교해 서쪽 경계가 남하하였고 동쪽 경계가 북상하였다. 이에 따라 38선 남서쪽의 황해도 옹진군·연백군과 경기도 개성시·개풍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38선 북동쪽의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화천군·양구군·인제군·양양군은 대한민국에 속하게 되었다. 고성군은 남북으로 분리되었다.

38선(1945.9.2~1950.6.25)과 현재의 군사분계선(1953.7.27~)은 다르지만, 한반도 분단에 있어서 차지하는 상징성이 크고 분단의 직접적 원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군사분계선을 '38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도 38선은 대한민국의 행정 구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파주시 적성면, 양주시 남면, 홍천군 내면, 화천군 사내면은 38선 분단에 따라 소속 시군이 변경된 것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연천군 미산면 삼화리는 38선 분단 전과는 다른 행정 구역에 속해 있다.

 

 

분단의 상징 '38선'은 누가, 어떻게 그었나?

 

 

 

연천에는 부서진 38선 표시석과 설명석이 분단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위) 분단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부서진 38선 표시석 옆에 새로 세운 연천의 3.8선 표시석(아래)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의 잘못된 전쟁." 1951년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미 의회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에 대항해 중국 본토를 공격하자는 맥아더의 계획에 대해 중국과의 전쟁을 압축해서 표현한 유명한 표현이다.

1980년대 미국 유학시절 '정책결정론' 수업 교재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한민국을 적화통일로부터 구한 구세주'로 알고 있었던 맥아더가 사실은 잘못된 정책 결정으로 미국을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로 끌고 갔으며, 맥아더가 남긴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갈 따름이다"라는 멋진 말도 이 같은 강경론을 주장하다가 해임당하면서 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3번 국도를 타고 동두천을 지나 연천에 들어서 한탄강 바로 직전에 오른쪽을 보면 두 개의 커다란 조형물이 나타난다. 먼저 나타나는 것은 '38선'이라고 쓴 커다란 돌이다. '여기는 겨레의 한이 맺힌 분단의 현장 38선입니다'라고 쓰여 있는 이 표시석은 1971년 만든 것이다. 원래 있었던 38선 표시석은 1950년 6월 25일 남하하는 북한군 탱크에 파괴된 것으로, 그 옆에 역사적 유물로 다시 세워 놓았다. 이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분단의 현장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이를 조금 지나 북쪽으로 향하면 조그마한 탑이 보인다. 탑에는 영어로, 그것도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 있어 무슨 탑인지 알기가 쉽지 않다. 자세히 읽어 보니, 한국전쟁 발발 1년 뒤인 1951년 5월 28일 미군 제 1기병사단이 그리스군과 태국군의 지원을 받아 38선을 돌파한 것을 기념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세 나라 군인들을 추모하는 '38선 돌파기념비'다.

 

한국현대사, 구체적으로 1945년 해방에서 한국전쟁이 휴전되는 1953년까지의 해방 8년사에서, 38선은 네 번 중요하게 등장한다. 첫 번째는, 분단이다. 1945년 8월,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했고 그 결과 분단이 시작됐다. 두 번째는, 1948년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개의 '독립된 국가'가 설립되면서 38선은 '두 체제'의 국경선이 되고 만다. 세 번째는 한국전쟁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선을 넘어 전면전을 일으킨 것이다. 네 번째, 북진이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뒤엎고 서울을 수복한 미군과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했다.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해 북한을 무너트리고 북진통일을 이루는가 싶었을 때, 중국군이 물밀 듯이 압록강을 건너왔다.

중국군은 인해전술로 다시 한 번 38선을 넘어 평택까지 남하했다. 따라서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38선은 여기에서 다섯 번째로 쟁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다시 연합군이 반격을 해 황해도와 개성 등 서부지역을 제외하고 연천지역부터 강원도까지는 우리가 38선을 넘어 북쪽의 일부를 차지했으니 38선은 여섯 번째로 쟁점이 된 것이다. 연천의 38선 돌파기념비는 바로 이 반격작전 때 38선을 재돌파한 것을 기념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생겨난 휴전선은 크게 보아 원래의 38선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는 네 번째 속에서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38도가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러면 38도 이남은 우리가, 이북은 당신들이 점령합시다."

최근 공개된 여러 문서들에 따르면,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밝히면서 이미 한반도 국경에 도착한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할 가능성이 매우 커지자,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부 정책과장보가 찰스 본스틸 전쟁부 정책과장과 함께 서울과 인천을 미국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 군사경계선으로 38선을 긋자는 미국의 제의를 소련이 받아들임으로써 분단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여기에서 정작 놀라운 것은 트루먼 대통령 등 당시 미국의 관계자들이 나중에 밝혔듯이, 소련이 이를 덥석 받아들인 것이다. 멀리 떨어진 미국과 달리 소련은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고 이미 소련군이 한반도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소련이 38선에 반대하고 훨씬 남쪽에 경계선을 하자고 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미소 양국의 분할점령이 바로 분단이라는 비극의 시초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38선 표시석을 바라보니, 가슴이 더욱 아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의 이 같은 선언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일성은 1948년 남북한에 각각 독립된 정부를 수립했다. 이로써 1945년 미소 양국에 의해 이루어진 군사적 분단이 항구적인 분단체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분단도 분단이지만, 북한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며 38선을 넘어 전면전을 일으킨 것도 문제다. 물론 당시 많은 사람들이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 통일에 대한 강한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 등 한국전쟁이 가져온 처참한 결과, 그리고 그 이후 남북한에 나타난 비정상적인 억압체제와 이들 간의 대립을 생각하면, 이는 정당화 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내가 이 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을 하라." 용산 전쟁박물관에 가면 이승만의 북진 명령을 비롯해 유엔군의 북진 작전을 대대적으로 부각시켜 놓았다(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미국에 국군통수권을 양도한 만큼 자신이 최고통수권자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이 문제라면, 북진도 문제이긴 마찬가지다. 물론 맥아더와 이승만의 강경노선에 기초한 38선 돌파에 대해 북한이 먼저 38선을 넘어 남침을 한 만큼 우리도 38선을 넘어 북진을 한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 현실을 무시한 잘못된 결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유엔군이 북진을 할 경우 중국이 이를 중국에 대한 침략으로 간주해 참전할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북진을 함으로써 미국은, 나아가 우리도,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적과 잘못된 전쟁'을 하게 된 것이다.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에 대한 영국의 극비 문서들을 연구한 김계동 국가정보대학원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인천상륙작전 후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해 참전하겠다는 중국의 경고를 설명한 전쟁기념관의 전시물

 

 

 

중국은 1950년 9월 초부터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25만 명을 파병할 수 있다는 경고성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인도의 네루 총리는 유엔군이 북진을 하지 말도록 영국에 긴급 제의했고, 영국은 미국에 유엔군이 북한군에 항복을 권하며 최소 7~14일간 38선에서 북진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의 최고지도부는 맥아더의 분석과 주장에 기초해 '중국이 뻥을 치고 있다'고 생각,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10월 9일 전면적인 북진을 시작했다. 영국은 다시 북위 40도선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중국의 우려를 해소시켜줘야 한다고 제의했지만 미국은 이를 다시 묵살했다. 그 결과가 바로 중국의 참전이다.

 

결국 중국의 경고를 무시한 맥아더 등 강경파들의 오판에 기초한 북진 결정으로 네댓 달이면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 무려 3년이나 이어졌고, 미국과 중국이 정면충돌하는 국제전으로 발전되고 말았다(최근 당시 비밀문서에 대한 한 연구는 중국에 대한 핵무기 사용의 경우 맥아더보다도 워싱턴이 더 강경파였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 결과,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 희생자는 논외로 하더라도, 국군 13만 7899명, 북한군 52만 명, 미군 3만3668명, 중국군 14만8600명 등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온 한반도가 쑥대밭이 돼야 했다. 중국의 경고를 받아들였다면, 중국군은 전혀 죽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한국군, 북한군, 미군 등도 최소한 6분의 5는 죽지 않아도 됐다는 이야기이다.

 

 

 

이승만의 북진명령서와 북진을 표지 기사로 보도한 타임지

 

 

 

이처럼 맥아더가 해임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고, 중국이 '항미원조(抗米援朝,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운) 전쟁'이라고 부르는 한국전쟁에 대해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비판하는 데에도 나름 이유가 있다. 즉 미국이 한국전쟁의 발발에 책임이 없는지 모르지만, 북진을 통한 확전에는 분명히 책임이 있다(물론 중국도 스탈린과 함께 북한이 한국전쟁을 일으키는 데 지원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미국의 많은 '정책결정론' 수업에 한국전쟁을 가르치는 것이다.

38선 표시석과 38선 돌파 기념비를 보고 있자, 38선을 둘러싼 우리의 비극적 역사, 구체적으로 분단, 단독정부 수립, 북한군의 남침, 유엔군의 북진이라는 사건들이 차례로 지나가면서, '정책결정론'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한국전쟁, 구체적으로 북진은, 가장 똑똑한 엘리트들이 집단사고에 빠지는 경우 얼마나 멍청한 결정을 내리고 국민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는가를 가르쳐주는 좋은 사례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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