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두문자

소록도 한센인_버려진 섬, 버려진 사람들

by noksan2023 2026. 4. 12.
반응형

소록도 한센인_버려진 섬, 버려진 사람들

 

 

 

 

 

 

한센인나균이라는 병원균에 감염되어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한센병을 앓게 되면 병균이 피부와 말초신경에 침범하여 손 발 등에 감각이 없어지거나 과도하게 감각이 예민해진다. 또한 감염 부위가 썩어 문드러지거나 떨어져 나가 피부가 흉측하게 변하기도 한다. 

 

현대 의학에서는 한센병전염 가능성이 매우 낮고, 걸린다고 하더라도 약으로 치료가 가능한 병으로 여긴다. 하지만 과거에는 하늘에서 주는 형벌이라 여길 만큼 두려운 병이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한센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옆에 있으면 자신도 병에 옮아 죽는다 생각하여 그들을 배척하였다. 

 

우리 역사에서도 오래전부터 한센병을 살이 썩어 문드러진다는 의미의 문둥병이라 부르며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배척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러한 배척과 탄압이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총독부는 법률을 정해 전국의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1916년 현 전라남도 고흥군 서남쪽에 있는 소록도에 한센인을 수용하는 자혜 의원을 설립하였다. 이후 소록도의 한센인 수용 시설은 점차 규모가 커졌고, 자혜 의원은 소록도 갱생원으로 명칭을 바꾸어 6천여 명의 한센인들을 수용하였다. 

 

소록도에서 한센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들은 마음대로 외출이나 퇴원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직원에게 일상생활을 통제받아야 했다. 가족이 면회를 와도 유리로 나누어진 면회실에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으며, 오가는 편지 내용은 모두 직원의 검사를 거쳤다. 무엇보다 환자임에도 각종 건축에 동원되어 노동해야 했다.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폭행당하거나 식사를 적게 받았으며, 감금실에 끌려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죽어서는 사망 원인을 밝히지 위해 예외 없이 검사실에서 부검 당해야 했고,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화장되었다. 임신한 여성은 낙태를 강요받았으며, 남성에게는 생식 기능을 없애는 단종 수술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단종 수술은 시설 안에서 규칙을 어긴 사람들에게 형벌의 일종으로 시행되었다. 한센인 환자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차별과 통제의 대상이었다. 

 

해방 이후에는 이러한 차별이 사라졌을까? 불행하게도 일제 강점기의 억압적인 환자 관리 정책은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단종 수술 역시 1990년대까지 시행되었다. 일반인도 한센인이 주변에 이주하거나 그들의 자녀가 자신의 자녀와 함께 학교 다니는 데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렇게 한센인들은 나라를 되찾은 후에도 오랫동안 차별 속에 살아야 했다. 소록도 갱생원은 이후 국립 소록도 병원으로 개편되었고, 현재는 한센병 치료는 물론 치료 후 환자의 사회 복귀를 위한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강제 낙태 당하고 4천만원 받았어요"

 

 

 

소록도에서 정관수술을 한 단종대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단종대'라는 제목의 이 시는 25살의 나이에 강제 정관수술을 받은 이동(李東)이란 청년이 썼다. 1950∼60년대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강제 노역을 거부하거나 탈출을 시도한 한센인은 감금실에 끌려가 체벌과 금식 등의 징벌을 받았다.

감금실에서 나온 환자들은 무조건 바로 검시실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살아나온 남자는 생식기능을 없애는 단종(斷種·정관절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아무렇지 않게 인권유린이 자행된 소록도는 생지옥 같았지. 전쟁터 같은 거기라고 사랑이 왜 없었겠어."

소록도를 거쳐 음성판정을 받고 전북 익산시 왕궁면 한센인 마을에 정착한 지 50년이 됐다는 김미정(85·가명) 할머니.

그는 나병이 확인된 16살에 소록도에 들어가 20살에 그곳에서 사랑하는 젊은이와 결혼하고 임신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지는 못했다. 유전이나 감염을 이유로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려는 국가에 의해 임신한 여자는 강제 낙태 시술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센병은 유전자 질환이 아니며 태아에게 전염되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강제 낙태의 대가로 김 할머니가 받은 돈은 고작 4천만원이다. 그것도 한센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낙태 피해자에게 4천만원, 단종 피해자에게 3천만원씩을 배상하라'는 2017년 대법원의 판결 덕분이었다. 강제 낙태를 당한 지 60년 만에 한센인 강제 단종·낙태 수술에 국가가 배상 책임이 있다고 인정한 첫 대법원 확정이 나왔을 때 그는 방 안에서 소리 없이, 그리고 밤새 울었다고 했다.

"모진 세월을 살아온 대가가 4천만원이라는 것이 허망하기도 했지만, 강제로 빼앗긴 인권을 뒤늦게나마 인정받고 되찾은 거 같아 슬프고도 기뻤다"고 회고했다.

 

 

 

한센인 관련 법률안

 

 

 

설령 감시의 눈을 피해 몰래 아이를 낳았다 하더라도 직접 키울 수는 없었다. 당시 한센인들은 자식을 낳으면 직원들이 생활하는 미감(未感)시설로 보내졌고, 아이와 부모는 한 달에 한 차례만 도로 양편으로 갈라서서 만날 수 있었다.

이장우(83·가명)씨는 "만날 때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부모와 자식의 자리는 뒤바뀌었다"며 "자녀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맞는 쪽에 있었다"고 말했다.

혹여 바람에라도 병균이 실려 올까 봐 그랬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부모들이 도로를 따라 죽 지나가면서 반대편에 있는 자기 자식의 얼굴을 얼마간이라도 겨우 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정부가 격리나 차별을 해제한 것은 병이 유전되지 않는다고 판명된 1990년 중반을 지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들은 여태 살아오던 삶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현재'를 살고 있다. 외부의 수모, 차별, 멸시에 80세 안팎인 그들은 지금도 스스로를 가두며 삶을 지탱하고 있다. 그런 자격지심에 이제껏 버스나 기차 한번 타보지 않은 한센인도 적지 않다고 한다. 


왕궁지역 한센인 대부분은 자녀가 없다. 설사 자녀가 있는 경우라도 대부분이 사회의 천대를 못 견디거나 '한센인 부모'라는 낙인 탓에 취직이나 결혼이 어려워 가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는 아이가 어릴 적부터 지인이나 친척의 호적에 올린 뒤 아예 부모-자식 간의 인연을 끊고 죽을 때까지 남남으로 산다. 이런 이유 등으로 누구보다도 서로 사정을 뻔히 아는 이들은 왕궁지역에 모여 돼지 등 축산업을 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고령과 장애로 일을 하기 힘든 이들 대부분은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며 모진 고문과 학대, 단종과 낙태 피해를 인정받아 매월 17만원을 받는 '한센인 피해 사건 피해자 위로 지원금 수급자'이다. 한센인 간이양로 주택에 지원되는 식비도 끼니당 900원에 불과하다. 

 

이씨는 "사실상 자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서로가 보호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혈연보다 끈끈하게 의지하며 고단한 삶을 지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일그러진 외모와 전염병이라는 오해로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매번 쫓겨나다시피 하는 한센인들은 갈 곳도 없고, 이제는 다들 늙고 병들어서 옆 사람을 돌봐주기도 벅찬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북지역에는 한센인 전문 의료기관이 한 곳도 없다"면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간호를 제공하는 통합 요양기관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