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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카이로 회담_적절한 절차(?)를 통한 한국의 독립

by noksan2023 2026.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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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 회담_적절한 절차(?)를 통한 한국의 독립

 

 

 

 

 

 

 

1943년 11월, 연합국의 일원인 미국 영국 중국의 수뇌부들과 군사 대표들이 이집트 카이로 시내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떨어져 있는 한 호텔에 모였다. 이들이 이집트를 회담 장소로 선택하는 데에는 기후 교통 안전 등의 영향이 컸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처음 회담 장소로 알래스카(이후에는 워싱턴)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중국의 장제스가 이를 거부처칠의 제안으로 이집트 카이로로 정해졌다. 처칠이 이집트 카이로를 추천한 이유는 영국이 관할하는 지역으로 항구와 비행장 등을 갖추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논의했을까?

 

1943년 9월 동맹국의 한 축이이었던 이탈리아가 항복하였다. 이에 3국 지도자들은 이곳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의 수행과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때 발표한 카이로 선언에는 다음 세 가지 주요 사항이 담겨 있었다. 

 

  • 일본에 대한 향후의 군사 작전에 관한 합의
  •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점령했던 태평양 모든 섬의 탈환과 중국으로부터 빼앗았던 모든 영토, 즉 만주, 타이완, 펑후 제도의 반환
  •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를 통한 한국의 독립

 

카이로 선언으로 한국의 독립은 국제적으로 보장되었다. 그러나 적절한 절차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이후 신탁 통치라는 어마어마한 후폭풍도 남기게 되었다. 왜 이런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회담 시작 이후 하루가 지난 11월 23일 저녁, 장제스는 루스벨트가 준비한 만찬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한국의 독립에 관한 논의를 하였다. 당시 중국은 한중 연합 작전 등으로 한국의 지위를 인정하고 있었다. 또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인 김구 등과 사전에 협의하기도 하여 회담 전에 한국의 독립을 중요한 논의 사항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만찬에 참여한 미국 대표가 작성한 초안에는 일본의 몰락 후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라고 표현되었고, 이를 루스벨트 대통령이 적절한 순간에(at the proper moment)로 수정하였다. 미국은 이를 25일 오전에 영국에 제출하였고, 처칠 등은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한국이 자유와 독립(상태가)될 것을 결의함으로 수정하였다. 이로써 한국의 독립 시점과 절차도 애매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 장관이 모여서 다시 한번 한국의 독립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다. 

 

 

 

카이로 선언

 

 

1943년 카이로 회담

 

 

 

카이로 선언(1943. 12. 1)


3국(미국, 영국, 중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 행동을 합의하였다.


세 주요 연합국은 해로와 육로, 항공로로 야만적인 적국에 대하여 끊임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 압박은 이미 증대하고 있다.


세 주요 연합국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이를 벌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연합국은 자국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요구하지 않으며, 영토를 확장할 의도 역시 갖고 있지 않다.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전쟁 이후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타이완 및 펑후 제도와 같이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일체의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축출될 것이다. 세 주요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념하며,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로) 되어야 함을 결의한다.


이를 위해 세 주요 연합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받기에 필요한 중요한 작전을 장기적으로 계속 수행할 것이다.

 

 

Cairo Declaration(1943. 12. 1)


The several military missions have agreed upon future military operations against Japan. The Three Great Allies expressed their resolve to bring unrelenting pressure against their brutal enemies by sea, Iand, and air. This pressure is already rising.


The Three Great Allies are fighting this war to restrain and punish the aggression of Japan. They covet no gain for themselves and have no thought of territorial expansion. It is their purpose that Japan shall be stripped of all the islands in the Pacific which she has seized or occupied since the beginning of the first World War in 1914, and that all the territories Japan has stolen from the Chinese, such as Manchuria, Formosa, and the Pescadores, shall be restored to the Republic of China. Japan will also be expelled from all other territories which she has taken by violence and greed.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With these objects in view the three Allies, in harmony with those of the United Nations at war with Japan, will continue to persevere in the serious and prolonged operations necessary to procure the unconditional surrender of Japan.

「The Cairo Conference: Statement Released December 1, 1943」, RG 338

 

 

이 사료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3년 11월 23일부터 27일까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수상, 중국의 장제스(蒋介石) 총통 등 연합국의 수뇌가 이집트의 카이로에 모여 전후 처리에 관해 협의한 뒤 발표한 「카이로 선언」이다.


1943년 11월에 진행된 카이로회담은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처음으로 일본에 대한 전략과 처리방침을 논의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유럽 내에서 독일에 대한 공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연합국은 본격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전선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이 식민지배를 하고 있던 동남아시아 지역도 점령한 상태였다. 이에 연합국은 카이로회담에서 일본이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일체의 지역에서 일본을 완전히 몰아낼 것을 선언했다.


카이로선언은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는 동시에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의 처리방침 역시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전후 동북아질서가 새롭게 구축되는 과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우선 연합국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하고 “만주, 타이완, 펑후 제도와 같이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일체의 지역”을 중화민국에 반환할 것을 결의했다. 이때 일본이 탈취하거나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즉 일본이 박탈하고 반환할 지역을 엄밀히 구분하는 문제는 전후 일본과 주변국들의 영토갈등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특히 카이로선언은 한국의 독립에 관해 언급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카이로선언에서 언급하고 있는 한국조항은 다음과 같다. “세 위대한 연합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한국이 적절한 시기에 자유롭게 독립할 것을 결의한다.” 카이로선언의 한국조항은 ‘전후’ 한국의 독립을 연합국이 최초로 약속한 것이었으며, 한국은 연합국으로부터 독립을 약속받은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다. 카이로선언에서 다른 식민지 지역의 독립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명확히 약속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연합국이 동남아시아의 다른 식민지와 달리 한국의 독립을 분명히 약속한 근본적인 이유는 연합국이 한국을 일본과는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연합국은 일본 제국이 지배했던 조선, 타이완, 만주를 일본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은 자주 국가로서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연합국이 이러한 결정을 하는 데 있어서 식민지배 기간 한국인들이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일제에 저항한 역사가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연합국으로부터 대표성을 인정받기 위해 외교적으로 노력했던 것 역시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또한 「카이로선언」의 한국 관련 조항에서 중요한 것은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루스벨트가 전후 식민지 처리방침으로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신탁통치안이 한국에 적용될 것이란 점을 의미한다. 실제로 「카이로회담」 직후인 11월 28일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은 테헤란에서 한국 신탁통치안을 다시 거론했으며, 1945년 2월 8일 미·영·소련의 대표들이 참여한 「얄타 회담」에서는 일정기간 동안 미·영·소·중 4개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한 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합의되었다. 이처럼 연합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합의된 한국 신탁통치 문제는 한반도에서 탁치정국이라는 정치적 파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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