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작전_해방 후 서울에 온 광복군이 28시간 만에 되돌아간 사연

해방 3일째인 1945년 8월 18일 한낮,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미군 C-47 수송기 한 대가 착륙하였다. 비행기를 발견한 일본군 무리는 원거리에서부터 포위망을 좁히며 공격적으로 다가왔다. 비행기에 있던 22명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은 미국 OSS(전략 정보국) 대원들이었고, 4명은 한국 광복군 정진 대원이었다. 이 4명은 한국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장군과 일본군 학병을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김준엽, 장준하, 노능서였다. 이들은 왜 미군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온 것일까?
이 당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가장 큰 목표는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해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연합국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받고, 미군과 함께 일명 독수리 작전이라고 이름 붙여진 국내 진공 작전에 참여하여 교전 단체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 광복군 일부가 미국의 OSS 특수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마침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광복군 중 일부를 국내 정진군으로 편성하여 미군과 함게 국내에 진입시키고자 하였다. 정진이란 앞장서서 나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국 광복군에게 주어진 비행기 자리는 4석뿐이었다. 하지만 한국인이 선발대로서 한국 땅을 밟는다는 상징성이 무척 컸기 때문에 4명이라도 선발하여 작전에 참여시켰다.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었음에도 이들이 도착한 서울은 여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있었다. 일본군은 본국에서 어떤 지시도 받지 못했다며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 총독부는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에 상당한 권력을 이양하는 타협책을 펼쳤다. 그러나 일본군 중 강경파는 조선 총독부의 타협책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한국인을 더 강하게 무력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가 비행장에서도 이어진 것이다.
결국 8월 19일 오후, 수송기는 착륙한 지 28시간여 만에 여의도 비행장을 떠나야만 했다. 이때 정진 대원들은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고 봉토에 흙 한 줌씩을 담았다. 조국의 물과 흙조차 이들에게는 소중하였다. 서울을 떠난 비행기는 이동 중 연료 부족으로 산둥성 웨이현 비행장에 불시착하였다. 다행히 이범석 장군의 옛 친구였던 중국 유격대 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이들은 8일간 웨이현에 머물렀다.
위의 사진은 8월 27일 오전 10시경 웨이현 비행장을 떠나기 전 중국 군인들과 22명의 주인공이 함께 찍은 것이다. 해방된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정진 대원의 모습은 해방 이후에도 조국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한국의 고단한 미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독수리 작전
독수리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의 전략사무국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 간의 합동 작전이었다'. 작전의 목표는 한국인 병사들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있는 다섯 개의 주요 전략 도시인 청진시, 신의주시, 부산광역시, 평양시, 그리고 서울특별시에 침투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훈련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중단되었다.
1. 배경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일본 제국에 의해 한반도가 공식적으로 합병되었다. 1919년의 반일 독립 운동인 3·1 운동이 일본 당국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된 후,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한반도를 떠났다. 많은 저명한 한국인들은 중화민국 상하이시에 모여 망명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에 대한 거의 성공할 뻔한 암살 시도를 포함하여 다양한 반일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한국 독립 단체는 아니었다. 이념과 위치에 따라 다양한 다른 단체들이 형성되었다.
1937년,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중일 전쟁이 발발했다. 이는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 광복군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한국 광복군은 시안시에서 제한적인 활동을 수행했지만, 내부 갈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부분 자금을 지원했던 국민당과의 분쟁으로 심하게 제한받았다. 한편,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이 전쟁에 참전했다.
2. 1942년 올리비아 계획
후에 OSS의 수장이 된 윌리엄 J. 도너번 대령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직접 한국을 방문한 유일한 미국 정부 고위 지도자였다. 1919년 6월, 도너번과 그의 아내는 부산광역시에 상륙하여 기차를 타고 서울특별시로 갔다. 도너번은 그곳에서 보낸 며칠 동안 배운 한국 역사에 대한 개요를 일기에 기록했다. 그는 또한 3·1 운동 시위가 있은 지 불과 몇 달 후에 방문했기 때문에 삼엄한 보안과 억압 상태를 기록했다. 그는 한국인들이 일본어를 강제로 사용해야 했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독수리 작전이 시작되기 몇 년 전, 도너번은 OSS의 전신인 정보조정국(COI)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도록 계획했다. 1942년 1월, 도너번은 한국인을 이용하여 일본의 전쟁 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계획을 시작했다. 2월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하기 위해 에슨 게일 박사를 중국으로 보냈다. 게일은 아시아에서 거주했으며 한국 선교사 제임스 S. 게일의 조카였다. 1월 27일, 도너번의 명령에 따라 모리스 드패스 중령은 한국인 활용 방법에 대한 "올리비아"라는 암호명의 계획 초안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COI는 충칭에 작전 기지를 설립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파괴 및 암살 작전에 고용할 것이었다. 그러나 학자 로버트 S. 김은 COI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한 접근이 제한적이었으며, 그 역량을 과대평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이 임무는 결국 실현되지 못했는데, 게일이 중국에 도착했을 때 클라렌스 가우스 주중 미국 대사와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임무가 국무부의 목표와 상충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3. 협력
더 많은 자금과 해방된 한국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외국 세력, 특히 연합국과의 접촉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주요 강대국들에게 거의 무시당했던 그들은 마침내 미국의 전략사무국 (OSS)과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4. 독수리 작전의 창설
1944년 말부터 한국 광복군 관계자들은 미국 전략사무국(OSS) 요원들과의 협력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정서가 있었지만, 그들은 일본과의 전쟁이 적어도 1년 더 지속될 것이며 한국 본토와 일본 본토 침공이 포함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따라서 한국 광복군은 전쟁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위 향상을 대가로 OSS에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했다.
1944년 9월, 당시 한국 광복군 참모장이었던 이범석은 충칭에서 미국 군사 정보국의 조지프 디키 대령과 만났다.[a] 이범석은 이어서 중국어에 능통하고 전 청두 대학 교수였던 OSS 요원 클라이드 베일리 사전트 대위와 만났다. 사전트는 OSS의 총사령관 윌리엄 J. 도너번 소장에게 OSS가 한국 광복군과 협력할 것을 제안했다. 협력 합의는 1944년 10월에 이루어졌다.
2월 24일, OSS는 독수리 작전 계획을 완료했으며, 3월 13일 중국 주둔 미군 본부로부터 승인을 받았다.
한국 광복군은 사전트에게 선발된 후보자들 중 다수가 대학 졸업생이며 기초적인 영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알렸다. 계획은 8개월에 걸쳐 45명의 요원을 점진적으로 선발하는 것이었다. 이 요원들은 정보 또는 통신 부대에 배정되어 무선 통신, 첩보, 폭발물, 절벽 등반, 사격술과 같은 기술을 OSS로부터 훈련받을 예정이었다. 그 후, 그들은 청진시, 신의주시, 부산광역시, 평양시, 또는 서울특별시의 다섯 한국 도시 중 하나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정보 작전을 수행하고, 일본 작전을 방해하며, 소요를 일으킬 것이었다.
5. 훈련
첫 번째 훈련 과정을 위해 약 50명의 학생들이 시안에 모였다. 초기에는 사전트와 5명의 다른 OSS 요원들이 교관으로 활동했으며, 5월 11일까지 시안에 도착했다. 그 후, 약 40명의 OSS 요원들이 시안에 있었는데, 그 중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통역사로 일했다. 수업은 5월 2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하루 8시간씩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 번 시험을 보았고, 실패하면 프로그램에서 제외되었다. 7월 말까지 9명이 실패했다.
훈련 과정에서 몇 가지 어려움이 발생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언어 장벽이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그들은 로버트 마이어스 강사 아래 영어 회화 수업을 만들고 워싱턴에서 더 많은 통역사를 파견했다. 보안 또한 문제였다. 학생들은 허가 없이 시내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었고, 모든 우편물은 철저히 검사되었다.
8월 4일까지 1차 훈련이 완료되었고, 50명 중 38명이 합격했다. 2차 훈련은 7월 초경 푸양시 (안후이성)에서 남동쪽으로 약 500리 떨어진 리황에서 시작되었다. 1차 훈련 합격자들은 좋은 성과를 보였고, 교관들과 졸업 직후 방문한 김구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8월 20일까지 각각 4~5명으로 구성된 8개 팀을 조직하여 국내에 침투하기로 결정했다.
6. 종료
모두가 갑작스러운 일본의 항복에 놀랐다. 김구, 이범석, OSS는 계획을 재정비하기 시작했고, 한국 광복군 부대가 한반도로 돌아와 미국을 위한 정찰 및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하도록 결정했다. 그들은 연대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보낼 것이며, 첫 번째 그룹은 일주일 이내에 한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범석은 비행기를 타고 18일 오전 11시 56분 여의도공항에 착륙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군이 한국 땅을 밟은 첫 순간이었다. 착륙 허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범석과 미군은 처음에는 적대적으로 대우받았다. 그들은 다음 날 떠나야 했지만, 일본군은 이상하게도 떠나기 전에 그들을 위해 술과 저녁 파티를 열어주었다. 이범석은 실망했다. 임무에 대해 들은 웨더마이어 장군은 임무가 어떻게 조직되었는지 (특히 전쟁 포로를 돕기 위해 의료진이 동행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격분했고, 독수리 작전에서 권한을 제거했다. 독수리 작전은 8월 30일에 종료되었다.
국내 침투 작전은 8월 4일 제2지대의 1기생 38명이 훈련을 마친 시점부터 구체화 되었다. OSS는 8월 3일 평가단을 파견해 제2지대 1기 훈련 수료생을 대상으로 작전에 필요한 평가를 실시했다. 8월 7일에는 김구 주석과 지청천(池靑天) 광복군 사령관, 이범석 제2지대장과 OSS 책임자들이 회의를 가지고 공동작전 수행을 선언했다.
광복군은 OSS와 연계해 국내정진군 공작반을 편성했고, 침투 계획은 OSS의 훈련교관인 쿠퍼(Chester Cooper)에 의해 입안됐다. 그러나 침투작전을 준비하던 중 일본이 항복하여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일본이 항복하자 국내정진군을 8월 16일 출발시켜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국내정진군은 일본군의 저지를 받아 8월 19일 중국으로 귀환했다.
“1945년 韓美, 하나의 군단 됐다”… ‘항일 독수리작전’ 미군 회고록

“이범석(한국광복군 제2지대장)과 내가 공동의 목표를 위해 조성한 평등, 존중, 협동의 분위기 속에서 뛰어난 정신을 지닌 하나의 군단이 힘을 얻었다.”
태평양전쟁 말인 1945년, 한국광복군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이 공동 추진했던 ‘독수리작전’의 미국 측 책임자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1909∼1981)는 당시 대원들의 훈련 분위기를 회고록에서 이같이 밝혔다. 독수리작전은 한국광복군과 OSS가 합작해 한국 청년을 대일전 정보요원으로 양성한 뒤 한반도에 침투시키려 한 계획이다. 사전트 대위는 당시 한국인 청년들과 미군이 일제에 맞서기 위해 하나가 돼 합력(合力)했다고 봤다.
사전트 대위가 남긴 회고록과 관련 자료를 최근 확보한 독립기념관은 7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를 14일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미국 메인주에 사는 사전트 대위의 아들 로버트 사전트 씨가 소장한 기록물들로 연구를 위해 일부 공유됐을 뿐 일반에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다. 회고록은 독수리작전에 참여한 미군 관계자가 공식 문서 외 따로 남긴 유일한 현존 기록으로 평가된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이 자료를 번역 분석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한미 양국 군인들은 숙식과 훈련을 위해 중국 시안(西安)의 버려진 사당을 손수 고쳐 쓰는 등 훈련 준비에도 함께 힘을 모았다. 사전트 대위는 “생존과 조정을 위한 합리적인 것(결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도전에 직면했다”면서도 “거대한 개축과 재건, 건축에 (함께) 힘을 쏟았고, 전후 중국을 떠날 때 미국인, 중국인, 한국인들이 자랑스럽게 떠날 수 있었다”고 했다.
사전트 대위는 세상을 뜨기 한 해 전인 1980년 3월 7일 독수리작전을 회고하며 레터(Letter) 용지 10쪽 분량의 타자본으로 이 회고록을 완성했다.
학계에서는 이 회고록이 최초의 한미 동맹을 보여주는 핵심 문서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연구위원은 “회고록은 한국과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군사기관이 펼쳤던 최초의 공동 군사작전을 입증하는 귀중한 기록으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2차대전때 독수리작전, ‘최초의 한미동맹’으로 재평가해야”
사전트 대위 회고록 ‘한미공조 관점에서 본 작전’ 첫 공개
작전 기획부터 해산까지 기록
독수리작전, 미완으로 끝났지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한미 공조활동의 관점에서 본 독수리작전(Note on an aspect of U.S.-Korean collaborative activities during World War Ⅱ: The Eagle Project).’
OSS 중국전구(戰區) 비밀첩보과 소속으로 독수리작전의 미국 측 책임자였던 클라이드 사전트 대위가 쓴 회고록 제목이다. 회고록에는 △독수리작전 기획 △훈련 △광복 후 일본 전쟁포로수용소 내 미군 구출을 위한 서울 작전 등 시작부터 해산까지의 과정이 담겼다.
● “대(對)일본 정보작전에 한인 청년 활용”
사전트 대위와 한국광복군의 첫 만남은 1945년 1월이었다. 이범석 한국광복군 제2지대장(1900∼1972·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은 OSS 내 중국 정보 분석가였던 사전트 대위 등 중국에서 활동하던 OSS 장교들에게 군사합작을 제안했다. 일본군에 강제 동원됐다가 중국에서 탈주한 조선 청년 수백 명을 훈련시켜 연합군의 대일전에 참여시키자는 제안이었다. 그해 1월 31일 사전트 대위는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배치됐다가 탈출한 조선인 청년들을 중국 충칭(重慶)에서 만났다. 사전트 대위는 작전의 시작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이 계획(독수리작전)이 이범석이 중국 동부에 있는 한국 청년들의 존재를 내게 말했을 때 고안됐다고 기억하고 있다. 한국 청년들은 일본에 있는 학생들이 일본군에 징병됐다가 탈주해 중국 동부에서 발견된다고 했다. (나는) 한인 청년들을 일본에 대한 정보작전에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전트 대위는 ‘OSS-한국광복군 연합 작전 계획’을 수립했고, 그해 2월 24일 ‘비밀정보국의 한국 침투를 위한 독수리작전’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 소장된 이 보고서에는 요원 60명을 선발해 3개월간 첩보·통신 훈련을 거친 뒤 이들 가운데 적격 요원 45명을 선발하겠다는 훈련 계획과 함께, 이들을 한반도 5개 전략 지점(서울, 부산, 평양, 신의주, 청진)에 침투시킨다는 계획이 담겼다.
● “군사집단으로서 가장 지적인 집단”

사전트 대위는 중국에서 만난 조선 청년들에게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1945년 4월 3일 사전트 대위가 OSS에 보고한 문건에는 이날 충칭에서 25km 떨어진 지역에서 그가 만나고 온 조선인 청년 37명에 대해 “군사집단으로서 내가 본 가장 지적인 집단으로, 미군 청년 장교들과 알맞게 비교될 것 같다”며 “그들 모두를 독수리작전 훈련에 참가시키는 것을 제안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광복군과 OSS는 제2지대 본부가 있었던 시안에 ‘한미합동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이범석과 사전트가 양측 지휘관을 맡아 1945년 5월 21일부터 훈련을 진행했다. 사격·폭파를 비롯한 특수훈련과 첩보활동을 위한 무선교신 훈련이 3개월간 진행됐고, 1945년 8월 4일 제1기생이 훈련을 마쳐 적격 요원 50명을 선발했다. 1945년 6월 25일 1차 훈련을 마친 뒤 사전트 대위가 OSS 측에 보고한 문건에는 “기율과 사기가 훌륭하다”며 “(한국인 청년들은) 연합군 전체의 노력에 귀중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범석의 지도력에 대해선 “경의를 표한다”고도 했다.
● 최초의 한미동맹, 독수리작전

OSS 중국본부는 1945년 3월 3일 독수리작전 훈련 계획을 승인했다. 4월 3일에는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1876∼1949)이 계획을 승인했다. 김 주석과 OSS 최고책임자 윌리엄 도너번 소장(1883∼1959)은 1945년 8월 7일 중국 시안에서 만나 국내 침투 작전에 합의했다. 한미가 정식으로 한반도로 진입하는 공동 군사작전에 합의한 것이다. 도너번은 “오늘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합중국 사이에 적 일제에 대한 공동작전이 추진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며 독수리작전은 미완으로 남았다. 광복 후 OSS는 일제의 수용소에 갇힌 미군 포로를 구하기 위해 서울에 사전트 대위와 독수리작전 대원을 파견했다. 사전트 대위는 “(독수리작전은) 1945년 9월 27일에 끝났다”고 기록했다.
독립기념관이 회고록과 함께 사전트 대위의 아들로부터 입수한 ‘기지 반환 공고문’은 독수리작전이 끝나던 날 작성됐다. 레터 용지 1장 분량의 문서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가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작전기지로 점유해 왔던 사당 두 곳의 토지와 가옥을 미국 OSS가 점유해 사용하는 구두계약을 1945년 4월 15일 체결했는데, 협정이 종결되면서 해당 토지와 가옥을 다시 한국광복군에 양도한다’는 내용이다. 양도 계약의 주체로는 “OSS에 의해 대표되는 미국 정부”가 명시돼 있다. 문서 하단에는 이범석 지대장의 한자 성명과 직인이 찍혀 있고, 증인으로 사전트 대위가 영문 서명을 남겼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독수리작전과 관련된 한미 간 계약 문건은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서도 지금껏 확인된 적 없다.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두 군사기관이 맺은 동맹 관계를 입증하는 문건이 나온 건 처음이다”라고 했다. 그는 “일제에 맞서 한국 독립을 위해 공동의 군사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미동맹 체계의 원형이 갖춰졌다고 본다”고 했다.
美 OSS “한국인들 굳건히 조국 위해 맞서 완전 독립 약속해야”

“일제 지배하의 한국인들은 용감하게 그리고 굳건하게 그들의 조국을 위해 고문을 받아 왔다. 그러나 희망도 없고 궁극적인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이 그들이 집단적으로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최소한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개인의 희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이 소장한 전략사무국(OSS) 1급 기밀 보고서 ‘한국 독립 승인과 그것이 전쟁에 미치는 효과(Recognition of Korean Independence and Its Effect on the War)’의 일부다. 태평양 전쟁 당시 작성된 5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한국인들에게 전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약속하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다. 반대로 우리(미국)는 이 전쟁을 단축시킬 수 있고 귀중한 미국인의 생명을 아낄 수 있다”고 결론내렸다.
김도형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은 ‘Project Eagle(독수리작전)’이라는 책을 2017년 미국에서 출간한 한인 2세 로버트 김 변호사로부터 이 보고서를 입수했다. 김 전 연구위원은 “미국 정보기관이 대일전 승리를 위해 한국의 완전한 독립 보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OSS가 ‘한국의 완전한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한 배경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 요원들과의 두터운 신뢰 관계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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