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민족의 쓰리봉_양세봉 김두봉, 김원봉

양세봉은 1920~1930년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의 지휘관이었다. 청산리 대첩(1920.10.) 이후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을 겪은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조직을 재정비해 3부(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성립하였다. 3부는 다시 남만주의 국민부와 북만주의 혁신 의회로 재편되었다.
양세봉은 민족주의 성향의 국민부 산하 부대였던 조선 혁명군에서 활동하며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일본군에게 눈엣가시였다. 일본군이 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비행기까지 동원하며 근거지를 폭격할 정도였다. 양세봉은 결국 일본군이 보낸 밀정의 속임수에 걸려 살해당하였다. 그의 부하들은 양세봉의 유해를 고구려 산성 밑에 매장하였으나, 일본군은 그의 묘를 파헤쳐 장군의 시신을 꺼내 목을 자르고 높이 매달아 두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양세봉은 좌우 대립이 심했던 시절 조선 혁명군의 총사령관으로 우파 민족주의를 대표해 좌파 공산주의 세력에 맞섰다. 그로 인해 좌파 세력에게 극우, 반동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념이 다른 사람들과 첨예하게 대립만 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의 군대와 연합 작전을 펼칠 정도로 유연하게 대응할 때도 있었다. 조선 혁명군은 양세봉이 사망한 후에도 중국 공산당과 연합 부대를 꾸려 활동하였다.
1932년 만주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고 있던 김일성은 자신의 아버지였던 김형직과 의형제를 맺었다고 알려진 양세봉을 찾아와 연대를 요청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때 양세봉은 김일성에게
"공산주의자가 투쟁을 과격하게 하는 바람에 인심을 잃었다"
라고 지적하였는데, 김일성이 이를 받아들이며 반성하였다는 일화가 김일성의 전기에 실려 있다고 한다. 이러한 김일성과의 인연 때문인지 해방 이후 북한에서는 양세봉의 가족에게 최고의 예우를 하였고, 양세봉은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도 북한의 혁명역사릉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역시 만주에서 활동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이었던 양세봉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립묘지인 서울 현충원에 헛무덤(유해 없이 봉안해 놓은 무덤)을 조성하였다.
양세봉의 뛰어난 활약 덕분에 지금도 그가 활동하던 만주의 신빈 지역에서는 양세봉의 항일 투쟁을 기리는 민요와 「양세봉의 노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 이 지역의 인민 정부가 양세봉의 항일 투쟁을 기리기 위하여 한일 명장 양세봉이라고 쓴 그의 흉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양세봉은 남과 북의 국립묘지에 안장된 유일한 인물인 만큼 독립운동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좌우 이념을 뛰어넘어 남북은 물론 만주 지역에서도 여전히 존경받는 위대한 독립군으로 가려지고 있다.
김두봉

김두봉은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의원, 한국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조선독립동맹 주석 등을 역임한 한글학자·정치인·독립운동가를 말한다.
1. 개요
김두봉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한국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한글학자, 정치인이다. 1913년 대동청년단 가입 후, 주시경 밑에서 한글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20년 공산당 입당을 계기로 1935년 한국민족혁명당 결성 및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45년 12월 평양 귀환 후, 김일성대학 총장, 북조선인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1차 공산당대표자대회에서 축출된 후 1960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2. 출생 및 성장
호는 백연(白淵). 경상남도 동래군(현재의 부산광역시) 출생. 1905년까지는 집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서울로 올라와 기호학교(畿湖學校:중앙고등보통학교의 전신)와 배재학교에 다녔다.
3. 생애 및 활동사항
1913년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였으며 이듬해에 배재학교를 중퇴하였다. 당시 최남선(崔南善)이 주재주1하고 있던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참여하여 소년잡지 『청춘』을 편집하는 일에 종사하기도 하였고, 조완구(趙琬九)와 함께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관계하였다.
또한, 한글 연구의 선구자인 주시경(周時經) 밑에서 한글 연구에 몰두하여 27세의 나이로 광문사(光文社)에서 발행한 『조선어문전(朝鮮語文典)』 편찬에 참여하는 등 한글 연구의 기초를 닦았다.
1917년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 · 휘문고등보통학교 · 중앙고등보통학교 등에서 시간강사를 지냈다. 그리고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같은 해 4월 신의주를 거쳐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는 신채호(申采浩)가 주필로 있던 순한문신문인 『신대한신문(新大韓新聞)』의 편집을 맡아 일하다가, 신문발행이 16호로 중지되자 김규식(金奎植) 등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가담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창기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내는 등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20년에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모임에 가담하여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한문에 깊은 소양을 쌓고 한글연구에서 선구자적 위치에 있던 그는 1922년 상해의 새글집사에서 30여 만의 우리말 단어를 수록한 『깁더조선말본(精解朝鮮語文典)』을 출판하였다.
1923년에는 고려공산당 총무국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24년에는 상해 교민단의 학무위원장에 선출되어 교민자녀교육기관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 관계하는 한편,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1928년 12월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의 지시로 해산되자, 홍남표(洪南杓) · 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대한독립당성립촉성회에 참여하였고,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한 각파혁명이론비교연구회에 가담하고 한인학우회의 강연 등에 참여하였다.
1935년 김원봉(金元鳳)과 한국민족혁명당(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결성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37년에는 후베이성[湖北省] 장링[江陵]으로 근거를 옮겼다.
다시 충칭[重慶]으로 활동무대를 바꾸었다가 1942년 옌안[延安]에서 독립동맹을 결성, 주석으로 활동했다. 옌안은 당시 중국팔로군의 근거지로서, 중국 국민당 및 임시정부와 관계를 유지하던 김원봉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최창익(崔昌益) · 무정(武丁) · 한빈(韓斌) 등과 더불어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여 주석에 취임하였다.
공산당에 가입한 적은 있었으나 당시에는 공산주의 활동보다는 반일투쟁의 운동가로서 평가받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국내의 건국동맹 등과 대일연합전선 형성을 위하여 연락하던 중 광복을 맞아 1945년 12월 독립동맹과 함께 평양으로 귀환하였다.
1946년에는 조선독립동맹을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으로 개편,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소련의 지원을 받던 김일성(金日成)과는 달리 조선의 혁명단계를 신민주주의혁명단계(新民主主義革命段階)로 규정, 모택동(毛澤東)의 중국혁명전략을 수용하였다.
1946년 8월 조선신민당이 북조선조선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될 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북조선노동당 위원장에 취임하게 된 것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통합의 상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김일성대학 총장, 북조선인민회의 의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임위원회 위원장, 조국통일전선의장단 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3월 제1차 공산당대표자대회에서 반혁명종파분자로 공격받아 축출되었다. 그 뒤 1960년 지방협동농장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넘나들면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1. 개요
남북한이 나뉘어 살면서 말도 상당히 달라졌다. 하지만 나뉘어 산 시간에 비해서는 차이보다 동질성이 더 크다. 문법의 경우도 몇 가지 지엽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남북한이 대체로 동일하다. 남북한의 언어적 동질성이 유지된 데에는 국어학자 김두봉의 역할이 컸다. 그는 일제강점기 국어 연구에 그치지 않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넘나드는 폭넓은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해방 후 북한에 자리 잡았다. 그는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로서 최현배(崔鉉培)와는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해방 후 각기 남북한의 문법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한의 언어적 동질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쟁쟁했던 독립운동가 집안
김두봉은 1889년 3월 17일 경상도 기장현(현 부산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87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김해이며 히못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한자로는 백연(白淵) 또는 백련(帛連)으로 적었다. 김두봉 자신도 훗날 독립운동가가 되었지만 그의 집안에서도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후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약수(金若水)는 본명이 김두전(金枓佺)으로 그와는 사촌간이었다. 일제강점기 기장 지역에서 3·1 운동을 벌였으며 이후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을 전개한 김도엽(金度燁)·김규엽(金圭燁) 형제와 1930년대 부산지역에서 노동운동과 반제운동을 벌인 김시엽(金時燁)·김주엽(金周燁) 형제도 그의 5촌 조카였다. 동래소년동맹에서 활동한 김응엽(金應燁)도 그의 일가였다.
한편 의열단(義烈團) 단장을 지낸 김원봉(金元鳳)은 그에게는 조카사위였으며, 그의 친동생은 『동아일보(東亞日報)』 사회부 기자로 일제의 감시 대상 인물이었던 김두백(金枓白)이었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쟁쟁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3. 주시경의 으뜸가는 제자
김두봉은 어려서 일본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아버지 김돈홍에게 한문을 배웠다. 그는 1908년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 설립한 기호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 학교를 1회로 졸업한 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였다. 그는 이 무렵 주시경을 처음 만났다.
김두봉은 주시경이 운영하던 국어강습소에 들어가 국어 연구를 시작하였다. 당시 주시경은 배재학당과 보성학교(普成學校) 등 여러 학교의 강사를 맡아 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국어강습소는 운영하고 있었다. 국어강습소는 1910년 국권 침탈 이후 부득이 조선어강습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운영하고 있었다. 김두봉은 1910년 조선어강습원에 입학하여 1913년 3월 이 강습원의 고등과를 마쳤다. 그는 이후 조선이강습원의 강사를 맡았다. 조선어강습원은 그 이외에도 이규영(李奎榮)·이병기(李秉岐)·신명균(申明均)·최현배·정열모(鄭烈模) 등 여러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사전편찬 사업을 도왔다. 주시경은 제자들과 함께 최남선(崔南善)이 세운 조선광문회(朝鮮廣文會)를 통해서 『말모이』란 제목으로 우리말사전을 편찬을 추진하였다. 『말모이』편찬은 주시경이 1914년 7월 갑작스럽게 사망함에 따라 중단되었지만, 김두봉은 주시경의 뜻을 이어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도 사전 원고를 계속 작성하였다. 김두봉은 사전 편찬과는 별도로 그 바탕이 되는 문법책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16년 4월 『조선말본』이 발행되었다. 이 책은 주시경의 『국어문법』에 바탕을 두고 더욱 확충한 것이었다. 김두봉은 주시경의 으뜸가는 제자였다.
4.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김두봉은 1911년 9월 무렵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당시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대종교는 단군(檀君)을 교조(敎祖)로 하는 민족 종교로서 1910년대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당시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대종교에 입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16년 대종교의 1대 교주인 나철(羅喆, 나인영)이 자결을 결심하고 구월산 삼성사로 떠날 때 전송한 교인 가운데 김두봉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상해에 망명한 이후에도 대종교와 관련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박은식(朴殷植)·조완구(趙琬九)·신규식(申圭植)·박찬익(朴贊翊) 등과 함께 대종교 서이도본사의 핵심 간부로서 활약하였다.
김두봉은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만들어진 비밀단체로 초대 단장은 남형우(南亨祐)이고 김동삼(金東三)·박중화(朴重華)·신백우(申伯雨)·신채호(申采浩) 등이 참가하였다. 이 단체의 구성원 가운데는 경상도 출신 신민회(新民會) 계열 인사들이 많았다. 남형우·이우식(李祐植)·윤병호(尹炳浩) 등 훗날 조선어학회와 관계한 사람도 많았다. 경상도 기장현 출신인 김두봉이 이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두봉은 일본에 탈취당한 경제권을 되찾기 위해 1915년 조직된 항일운동단체인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도 참여하였다. 조선산직장려계에는 김두봉뿐 아니라 총무 윤창식(尹昶植)과 평의원 남형우 등 조선어강습원 관계자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5.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다
주시경의 뜻을 이어받아 강습소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있던 김두봉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즉각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다.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한 달 동안 피신하다가 그해 4월 신의주에서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중국 단동에서 망명객들의 안내역을 맡고 있던 장건상(張建相)의 도움을 받았다. 이 무렵 그의 조카사위인 김원봉도 장건상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김두봉은 상해에 도착해서 임시정부 산하 임시사료편찬위원회의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 이 사료집은 일제의 침략 과정과 3·1 운동의 내막을 담은 것으로 당시 임시정부가 가장 시급한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선출되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해임되었다. 대신 당시 임시정부의 방침에 비판적이었던 신채호가 주필로 있던 『신대한(新大韓)』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김두봉은 이렇게 임시정부에서는 밀려났지만 상해를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상해에서 그의 삶에 있어서 본령이라고 할 수 있는 국어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 결과 1922년 『깁더조선말본』을 펴낼 수 있었다. 깁더란 깁고 더했다는 뜻으로 1916년 국내에서 펴낸 『조선말본』을 수정·보완한 것이었다. 그는 1924년 상하이교민단 의사원 선거에 당선되어 다시금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김두봉은 1924년 상하이에 거주하는 교민의 자녀를 위한 인성학교의 교사가 되어 국어와 한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는 1928년에는 상하이교민단 학무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인성학교(仁成學校)의 4대 교장을 맡아 학교의 살림을 떠맡았다. 그는 이후 1932년까지 인성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다.
6.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이유
김두봉은 1920년 상해에서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결성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다. 이 정당은 상해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동휘는 1917년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결성한 바 있다. 그는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어 상해로 건너오면서 상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하여 이 정당을 조직하였다.
김두봉이 가입한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역사적 내력을 거슬러 올라가면, 1910년대 초 주시경을 지도자로 결성된 비밀결사 배달말글몯움에 이르게 된다. 배달말글몯움 구성원들이 주축이 되어 1915년 신아동맹당(新亞同盟團) 한국 지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920년 국내에서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을 결성하였다. 사회혁명당 구성원들은 연해주의 한인사회당과 제휴하여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만들었다. 이렇게 배달말글몯움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역사적 뿌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만큼 주시경의 으뜸가는 제자였던 김두봉이 이 정당에 가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비록 겉으로는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했지만, 역사적 내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족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김두봉도 1920년대 초 겉으로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였지만, 그의 사상 전체를 살펴볼 때 그는 여전히 민족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7. 독립운동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
김두봉은 1920년대 후반 국내외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당시 국내에서는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으며 중국에서도 이것에 자극을 받아 민족유일당운동이 벌어졌다. 중국 북경에서는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가 결성되었으며 이듬해인 1927년 3월 상해에서도 촉성회가 조직되었다. 김두봉은 상해촉성회의 집행위원이었다. 상해에 이어 광동·무한·남경 등지에도 촉성회가 만들어졌으며 같은 해 11월 중국 관내의 여러 촉성회들의 연합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그는 상해촉성회를 대표하여 연합회의 상집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7월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국공합작이 파탄나면서 중국 관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좌우합작 운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좌파와 우파는 결별하게 되었으며 1930년 1월 우파들만이 결집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 김두봉은 이때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비서장이 되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시작될 무렵 그는 좌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우합작운동을 거치면서 좌파에서 우파로 바뀌었다.
김두봉은 이후 한국독립당을 기반으로 우파 진영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이하 통일동맹)이 결성되었다. 통일동맹에는 한국독립당을 비롯하여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의열단·한국광복동지회(韓國光復同志會) 등의 5개 정당이 참가하였다. 그는 통일동맹의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통일동맹은 1935년 6월 3차 대회를 통해 발전적으로 해소되었고, 새롭게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조직되었다. 그는 새로 만들어진 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장에 선출되었다.
8. 태항산의 호랑이
1937년 7월 일어난 중일전쟁은 중국 관내의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당장 일본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피신을 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은 장기적으로 일본과 맞서 본격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간 것처럼 김두봉이 몸담고 있던 민족혁명당도 중경으로 옮겨갔다. 그도 민족혁명당 구성원들과 함께 중경으로 길을 떠났다. 하지만 민족혁명당의 소장파들과 그들의 군대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주력은 중경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고 화북(華北)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화북에는 민족혁명당 소장파뿐 아니라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들은 1941년 1월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를 결성하였으며, 이 단체는 1942년 7월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으로 개칭하였다. 김두봉은 바로 이 무렵 화북으로 이동하였다. 그는 화북에 도착하자마자 조선독립동맹의 주석(主席)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김두봉은 화북으로 넘어와 조선독립동맹에 참여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통합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즉 그는 조선독립동맹에서 민족주의자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김두봉은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서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본군과 싸웠다.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으로 확대 개편하여 일본군에 맞서 이른바 반소탕전(反掃蕩戰)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용군은 상당한 인적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였다. 한편 김두봉이 이끄는 조선독립동맹은 중경의 임시정부와 지속적인 연락을 취했다. 독립동맹의 간부인 김학무(金學武)가 중경과 연안을 오가면서 임시정부의 김구(金九)와 조선독립동맹의 김두봉 사이의 서신 연락을 담당하였다. 즉 김두봉은 조선독립동맹 내에서 민족주의자를 대표하였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와의 가교 역할까지 맡았던 것이다.
9. 해방 이후 북한으로 귀환하다
김두봉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귀환하였다. 그가 이끌던 조선독립동맹은 1946년 2월 26일 조선신민당(朝鮮新民黨)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신민당이라는 명칭은 당시 중국 공산당이 채택하고 있던 신민주주의(新民主主義)에서 따온 것이었다. 신민당은 1946년 8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쳐서 북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다. 그는 북조선노동당의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국가수반을 맡았다. 이렇게 그는 해방후 북한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이는 명목상 지위였을 뿐 실권을 갖지는 못했다.
김두봉은 1948년 봄 남북한의 분단을 막기 위해 추진된 남북협상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김구와 김규식(金奎植)이 연명(連名)으로 북측에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하면서 남북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시 김구는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내 과거 임시정부 시절 중경과 연안에서 연락을 주고 받던 것을 상기시키면서 남북협상을 시작할 것을 제안하였다. 김두봉과 김일성(金日成)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남북협상은 실질적 성과를 내지 못했다.
김두봉은 정치인이기 이전에 학자였다. 해방 후 북한에서도 학자로서 나름대로 역할을 맡았다. 그는 1946년 10월 김일성대학이 창설될 때 초대 총장을 맡았다. 이후 이 대학이 개설한 조선어문학 강좌는 물론 이 대학에 설치된 조선어문연구회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다. 김두봉이 일제강점기에 펴낸 『조선말본』과 『깁더조선말본』은 북한의 언어정책에 강령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같은 경상도 출신 국어학자인 이극로(李克魯)가 월북한 것도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북한의 국어 정책은 김두봉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북한의 유일지도체제 구축 과정에서 숙청되었다. 1961년 전후 지방의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원봉, 의열단을 이끌며 독립 투쟁을 벌이다

“독립운동가 중 일제가 가장 많은 현상금을 내걸 정도로 두려워했던 사람이 누군 줄 알아?”
“글쎄, 아무래도 유명한 김구 선생이 아닐까?”
“아니야, 일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사람은 바로 의열단 단장이었대.”
이 의열단 단장은 누구였을까요? 의열단은 어떤 일을 했을까요?
일장기를 화장실에 빠뜨리다
의열단 단장이었던 이 사람은 바로 김원봉이에요. 그는 189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어요. 그가 밀양공립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지요.
김원봉은 어린 시절부터 일제에 대한 저항심이 남달랐어요. 1911년 그가 보통학교 다니던 때의 일이에요. 일왕의 생일 축하 기념행사를 학교에서 열게 되었어요. 행사를 앞두고 학교에서 소동이 벌어졌어요.
“아니 일장기를 화장실에 다 처넣었다고? 누구 짓인지 빨리 밝혀내라!”
이 일은 김원봉과 윤세주가 한 일로, 그 때문에 그들은 퇴학을 당하고 말았지요. 이후 그는 동화중학을 거쳐 서울의 중앙학교에 다니게 되었어요. 두 학교에서 그는 독립 정신을 키워 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지요.
“강력한 무력이 있어야 우리가 강도 일본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 빨리 군대를 조직해야 한다.”
김원봉은 군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먼저 군사학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가려 했어요. 그래서 우선 독일어를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어요. 하지만 방학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좌진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나게 되면서 생각에 변화가 생겼어요. 그는 중국으로 건너가 빨리 군대를 조직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의열단을 조직해 투쟁하다
1919년 온 민족이 참여한 3·1 운동이 일어났어요.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었지요. 하지만 비폭력 원칙에 따라 펼쳐진 만세운동을 일제는 총과 칼로 무자비하게 탄압했어요. 그들의 총칼에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죽어 나가고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요.
이 소식을 접한 김원봉은 평화적인 방법으로만은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만주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으며 본격적인 독립항쟁을 펼칠 준비를 해나갔어요.
“우리도 이제 무력으로 투쟁합시다. 비밀 조직을 만들어서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합시다.”
1919년 11월, 그는 신흥무관학교 출신 사람들과 뜻을 모아 만주 땅에서 의열단을 조직했어요. 처음에 13명으로 시작했는데, 단원의 수는 점점 늘어 70여 명까지 되었어요.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단원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의 독립을 앞당기는 데 힘을 보태려 했어요. 조선총독부, 경찰서 등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에 폭탄을 던지고, 일본 주요 인물과 경찰, 군인 등을 처단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했어요. 김원봉은 직접 폭탄을 만들고, 성능 좋은 폭탄을 외국에서 들여오기도 했지요.
의열단 단원들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큰일을 앞둔 사람들이니 늘 긴장하고 살았을 것 같다고요?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사격 연습을 하고 의거를 준비하는 등 큰일을 앞둔 사람들답게 진지했어요. 하지만 수영과 테니스 등 운동을 하며 가장 좋은 몸 상태를 만들었지요. 그러면서 마음의 여유를 갖기 위해 오락을 즐기며 명랑하게 생활했어요.
무엇보다 의열단 단원들은 사진 찍기를 무척 좋아했어요. 사진 찍을 때면 항상 양복을 갖춰 입고, 머리 모양도 깔끔하게 정리했어요. 마지막 사진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에요.
의열단 단원들, 일제의 심장에 폭탄을 던지다
의열단 단원들의 활동은 거침이 없었어요. 김익상은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두 개와 권총 두 자루를 받아들고 국내로 들어왔어요. 그는 일본인 전기 수리공으로 변신하고, 막힘없이 일본말을 하며 철통같은 경비를 뚫었어요. 전기 수리를 하러 왔다고 해 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총독부 안에 폭탄을 던져, 건물 일부를 파괴했어요. 그런 뒤 여유 있게 걸어 나와 5일 만에 중국에 있는 김원봉 앞에 나타나 그를 깜짝 놀라게 했지요.
김상옥은 종로 경찰서에,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지요. 김상옥은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을 벌이며 수백여 명의 일제 경찰들과 맞서기도 했지요. 총격전은 3시간여 동안 계속되었고, 거리에서는 아주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어요. 목숨 건 의열단 단원들의 투쟁은 독립투쟁 중 가장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투쟁 중 하나였어요. 일본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지요.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시 나가사키 형무소로 보내라. 비용은 모두 외무성에서 댈 것이다.”
일제 경찰은 김원봉을 체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요. 현상금도 어마어마하게 내걸었어요. 일제 식민 통치 기간 가장 높은 현상금이 걸린 사람이 바로 김원봉이었어요. 하지만 귀신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는 쉽게 잡히지 않았어요.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의열단의 선언문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의열단 단원들은 어느 독립운동 단체보다 격렬하게 일제와 싸웠어요. 의열단에는 여성들도 있었어요.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박차정이지요. 김원봉과 결혼한 그녀는 이후 남편과 함께 독립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조선의용대를 만들고,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되다

의열단의 활동은 사람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고, 독립의 희망을 불어넣었지요. 하지만 암살과 파괴만으로는 독립을 앞당길 수 없었어요. 많은 의열단 단원이 체포되어 희생되기도 했지요. 김원봉은 다른 방향을 고민해야만 했어요.
“이제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투쟁을 준비해야 하겠군.”
1926년 김원봉은 황푸군관학교에 들어가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았어요. 중국 국민당 정부 사람들 등 많은 사람도 만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조직적인 군대를 만들어 무장 투쟁을 할 궁리를 했어요. 이후 그는 의열단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시켰어요. 그리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조선인혁명간부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독립운동가로 길러냈어요.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어요. 김원봉은 다음 해 조선의용대를 만들었어요.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동의를 얻어 만든 군대예요. 사실 다른 나라에서 군대를 만든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어요. 군대가 만들어지자 우리 청년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그 수가 300여 명이나 되었지요.
중국 국민당 정부는 본토 깊숙이 쳐들어오는 일본에 맞서는 데 조선의용대의 도움을 받았어요. 이들은 주로 전투보다는 포로 심문, 군사 문서 번역, 선전 활동 등을 통해 일본에 타격을 주었어요. 조선의용대에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조선의용대는 훗날 둘로 나뉘었어요. 일부 대원들은 김원봉을 따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만든 한국광복군에 들어갔어요. 그 덕분에 한국광복군은 전투력이 훨씬 강해졌지요. 나머지 대원들은 사회주의 계열 조직의 부대가 되었어요.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부장(지금의 국방부 장관)과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어요.

김원봉, 광복 이후 북으로 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나라 밖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하나, 둘 조국으로 돌아왔어요. 김원봉도 들어와 통일된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그는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이에 걸맞는 대접을 받지 못했어요.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도 있었어요. 결국 그는 공산주의의 우두머리로 몰려 친일파였던 경찰에게 체포되어 뺨을 맞고 고문까지 받았어요.
“내가 일본 놈들에게도 당하지 않은 수모를 광복을 맞이한 후 친일파 경찰에게 당하다니…”
김원봉은 그날 이후 3일 내내 통곡을 했다고 해요. 이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로 인해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야 했지요. 그러던 중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가 김일성을 만나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남북 협상을 벌였어요.
하지만 남쪽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자, 김원봉은 돌아오지 않고 북에 남게 되었어요. 이후 북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정치 활동을 했지요. 그러던 중 1958년쯤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어요. 그가 왜 죽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어요. 김일성과 다른 입장을 가져 제거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어요.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열렬히 독립운동을 펼친 사람이지만, 남과 북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어요. 남한에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주는 훈장도 받지 못했고, 북한에서도 대우받지 못했지요.
요즘들어 김원봉의 활동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고 있어요. 그러면서 그의 공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어요. 우리도 김원봉처럼 모든 것을 걸고, 독립운동을 했지만 잊혀져야만 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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