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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권기옥_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

by noksan2023 2026.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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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옥_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과 이상정, 이상화

 

 

 

떴~다 떴다 비행기 /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 우리 비행기

 

어릴 적 많이 불렀던 이 동요의 마지막 가사 "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이다. 이 노랫말처럼 우리 비행기가 없던 일제 강점기, 우리 비행기를 간절히 갖고 싶어 한 사람이 있었다. 

 

"비행기를 몰고 도쿄 천황궁에 폭탄을 꼭 떨어뜨리겠다"

 

라고 다짐했던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이다. 비행기는 1903년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기를 개발한 후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10여 년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권기옥17살 때인 1917년,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서 미국인 조종사가 펼친 곡예비행을 본 후 비행사의 꿈을 키웠다. 1919년에는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만든 비밀 조직 송죽회의 회원으로서 평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출소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공채 판매 활동부터 평안남도 도청 폭파 작전 같은 무력 투쟁까지 함께하였다.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권기옥의 꿈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3·1운동의 성과로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과 싸움에서 열세인 군사력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도 공군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군무총장 노백린1920년미국 캘리포니아주에 한인 비행 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재정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이에 계획을 바꿔 한국 청년들을 중국의 비행 학교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때 어린 나이였지만 독립운동의 경험이 많고, 비행사가 되려고 따로 영어 공부까지 하고 있던 권기옥이 추천되었다. 1923년 권기옥은 중국 윈난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어릴 적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1년 뒤 단독 비행에 처음 성공한 날,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최고의 비행사가 되겠다는 각오가 담긴 글을 기념사진과 함께 도산 안창호에게 보냈다. 

 

이후 권기옥은 임시 정부의 열악한 재정 상황으로 공군 창설이 어려워지자, 중국 국민혁명군의 비행사로 근무하였다. 1932년 상하이 사변 때는 비행기를 몰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무공훈장까지 받았다. 한편으로는 김원봉 등 의열단원과 교류하면서 우리 비행기를 마련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일제의 첩보 자료에는 권기옥을 중국 국민 정부 비행사이자 의열단 여자부 연락원으로 기록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 정부는 다시 공군 창설을 준비하였다. 권기옥은 임시 정부의 공군 설계 위원회에 참여해 미국 공군과 항일 연합 작전을 펼쳐 비행대 창설 계획을 세웠다. 예상보다 빠른 일본의 패망으로 실현하지 못했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해방 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하였고, 지금까지도 공군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난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

 

 

 

공군의 어머니 권기옥

 

 

 

“왜 비행사가 되고 싶은 것이오?”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날아가, 일왕이 사는 궁성을 폭파하고 싶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위해 비행사가 되고자 한 이 사람이 바로 권기옥이에요. 그녀는 어떻게 비행사가 되었을까요? 과연 그녀의 꿈은 이루어졌을까요?

 

하늘을 나는 꿈을 꾸다

 

권기옥은 1901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어요.

“또 딸이야. 갈네라고 불러야겠군.”

둘째 아이도 아들이 아닌 딸이 태어나자, 그녀의 아버지는 ‘갈네’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가라’는 뜻으로 얼른 죽으라는 의미였지요. 당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여성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 엿볼 수 있어요.

권기옥의 집안은 원래 부자였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노름에 정신이 팔려 그 많던 재산을 날렸지요. 살 집도 없어 남의 집 문간방에 살아야 했어요. 11살밖에 안 된 그녀도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어야 했어요. 학교에 다니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었지요. 어깨너머로 언니의 책을 들여다보며 글자를 배웠어요.

그러던 그녀에게 배움의 길이 열렸어요. 12살의 나이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송현소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지요. 송현소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숭의여학교(현 숭의여자 중·고등학교) 3학년부터 다니게 되었어요.

권기옥이 비행사를 꿈꾼 것은 언제였는지 아세요? 바로 열일곱 살 때였어요. 평양에서 미국인 아트 스미스가 하늘에서 곡예비행을 하는 것을 보았던 그때였지요.

‘하늘을 나는 기분은 어떨까? 나도 하늘을 날고 싶다.’

난생처음 비행기가 나는 것을 본 권기옥은 그날 이후 비행사를 꿈꾸게 되었어요.

 

송죽회에 가입하고, 만세 운동에 참여하다

 

1919년 졸업반이던 권기옥은 숭의여학교 교사인 박현숙의 권유로 비밀조직인 송죽회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송죽회는 숭의여학교의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여성 독립운동 단체예요. 절개를 상징하는 소나무의 ‘송’자와 대나무의 ‘죽’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지요.

송죽회에 가입한 권기옥은 3·1 운동을 준비하며 일본인 기숙사 사감의 눈을 피해 태극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가 만세 운동을 펼쳤어요. 하지만 교사 박현숙에 이어 그녀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3주 동안 갇히게 되었지요.

 

 

 

숭의여학교의 학생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 자금을 모으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졌어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려니 많은 자금이 필요했어요. 권기옥도 숭의여학교 학생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어요.

“제 머리카락을 잘라 마련한 돈이에요. 얼마 안 되지만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이건 저희 어머니께서 가락지를 팔아 마련해 주신 돈이에요.”

학생들은 독립을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련한 돈을 가져왔어요. 권기옥은 모금한 돈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냈어요. 그녀는 1919년 10월 평양의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어요.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하기도 했어요.

“임시 정부와의 관계를 얼른 대거라.”
“이 여자는 지독하군. 도무지 말을 하지 않는군.”

권기옥의 의지는 대단했어요. 아무리 혹독한 고문을 해도 비밀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비밀을 캐내지 못한 경찰은 ‘검찰에서 단단히 다루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고 해요.

그녀는 감옥에서 6개월을 보낸 뒤 풀려났어요. 풀려난 뒤에도 독립을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어요. 일제의 식민 통치 기구 중 하나인 평안남도 도청을 폭파하기 위해 온 임시 정부 요원을 숨겨 주었어요.

이후 권기옥은 임시 정부로부터 받은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다 일본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지요. 불안하고 힘겨운 날들을 보내던 그녀는 일본의 눈을 피해 몰래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기로 결심하고 멸치잡이 배를 탔어요. 작은 나무배였기에 20여 일이 지난 후에야 상하이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윈난항공학교에 입학하다

 

상하이로 건너간 권기옥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요 인물들을 만났어요. 비행사 양성의 필요성을 알고 있던 노백린과 안창호를 만나면서 그녀의 꿈은 더욱 확실해졌어요.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가 일왕이 살고 있는 궁에 폭탄을 던지는 꿈 말이에요. 그래서 항공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했어요.

 

안창호는 독립운동에 비행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했어요.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비행하며 중요한 정보를 전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또 한국인 비행사가 하늘을 나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지요. 훗날 임시 정부에서 공군을 조직해 그녀를 공군 비행사로 쓸 큰 꿈도 꾸었어요.

 

하지만 권기옥이 중국에 있는 항공학교에 입학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어요. 두 곳에서는 여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어요. 입학 허가를 얻어낸 곳에는 비행기가 없어 제대로 훈련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녀가 선택한 곳은 중국 서남단 윈난성 쿤밍에 있는 윈난항공학교였어요. 그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써준 추천서를 가슴에 품고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윈난성의 쿤밍시에 도착해 직접 학교를 방문했어요.

 

 

 

권기옥의 이동 경로

 

 

 

“저는 비행사가 되어 조선 총독부 건물을 폭파하고 일본 도쿄에 있는 일왕의 궁성에 폭탄을 투척하고 싶습니다.”

권기옥의 당당하고 결의에 찬 태도에 운남성의 군사령관인 탕지야오는 흔쾌히 입학을 허락했어요. 이렇게 그녀는 윈난항공학교의 학생이 되었어요. 하늘을 찌를 듯한 권기옥의 의지와 단단한 마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지요. 온 힘을 다해 공부하고 훈련을 받았어요. 비행기 공부는 물론 조종하는 방법과 체력을 기르는 다양한 훈련도 받았지요. 대략 9시간 비행 훈련을 마친 뒤 혼자서 단독 비행까지 할 수 있게 되었어요.

 

항공학교에 권기옥이 있다는 소식이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 경찰은 그녀를 검거하려 눈에 불을 켰어요. 심지어 사람을 보내 암살을 하려고도 했어요. 길거리에서 그녀를 발견하면 무조건 죽이라고까지 했어요. 그녀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새벽에 비행 훈련을 해야 했고, 학교 밖으로는 나갈 수도 없었어요.

1925년 2월 드디어 권기옥은 윈난항공학교 제1기 졸업생이 되었어요. 첫 한국인 여성 비행사가 된 것이지요.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공군이 되지는 못했어요. 당시 임시 정부는 공군을 조직할 만큼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중국군의 비행사가 되었어요.

그즈음 권기옥은 독립운동가인 이상정과 결혼하고 함께 중국 국민당 공군으로 활동하며 일본에 맞섰어요. 김원봉이 중심이 된 의열단과도 교류하며 다양한 독립운동의 방법을 찾기도 했어요.

 

 

 

원난항공학교 졸업장

 

 


중국 공군으로 활약하다

 

1935년 드디어 그녀의 꿈을 이룰 기회가 왔어요. 중국 공군이 실력을 선전하고 중국 청년들이 공군에 지원하도록 하기 위한 비행을 계획했거든요. 선전 효과를 더욱 높이기 위해 여성 비행사가 비행하도록 했지요. 권기옥과 또 한 명의 여성 비행사가 뽑혔어요.

 

 

 

선전 비행을 준비 중인 권기옥(왼쪽에서 두 번째)

 

 

 

“드디어 일왕이 사는 궁성에 폭탄을 퍼 부울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르겠군.”

권기옥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렸어요. 그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렸지요. 하지만 그녀의 꿈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비행기 프로펠러가 부서지는 바람에 계획이 2주나 연기되었어요. 그사이 일본이 베이징 부근 지역을 점령하는 바람에 선전 비행은 이루어지지 못했어요. 안타깝게도 그녀는 얼마 후 공군도서관으로 이동 명령이 났고 비행사로서 더 이상 활약할 수 없게 되었지요.

 

교관으로 활동하고, 한국애국부인회회에 참여하다

 

일본이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중국을 공격하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충칭으로 옮겨갔어요.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마지막 청사가 있던 곳이지요. 그곳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였어요. 영어와 일어를 가르치고 일본인을 구별하는 방법도 가르쳤다고 해요. 비행사로서 독립 투쟁을 벌일 수는 없었지만, 이런 활동 모두 우리의 독립을 위한 것이었지요.

1943년에는 다시 만들어진 한국애국부인회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그녀는 사교부장을 맡아 여러 갈래로 나뉜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하나로 모으고 독립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어요. 또 한국광복군 비행대를 만들 구상도 했어요. 미국 군대와 협력해 일본에 맞서 직접 전투에 참여할 계획도 세웠어요.

 

 

 

한국애국부인회 사람들(권기옥은 오른쪽 두 번째)

 

 

 

그러던 중 1945년 8월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했어요. 그녀는 2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이후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약하며 공군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또한 출판사 사장을 하면서 책을 출판하기도 했어요. 나이가 들어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배움을 포기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기도 했어요.

권기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순종을 강요받던 시대에 비행사를 꿈꾼 깨어있는 여성이었어요. 대부분 남성들이 조종하던 군용 비행기를 조종한 최초 한국인 여성 비행사로 차별과 편견의 벽을 허물어뜨렸지요. 또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어요. 그 공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기도 했어요.

그녀는 자신의 꿈을 온전히 이루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며 살았기에 늘 설레는 마음으로 비행하지 않았을까요? 권기옥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녀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너희도 나처럼 큰 꿈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어."

 

 

 

한국최초 여성 비행사 권기옥

 

권기옥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숭현소학교를 졸업하고 숭의여학교를 1919년 졸업하였다. 숭의여학교 졸업반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권기옥은 수학 교사 박현숙의 권고로 숭의여학교 비밀결사대 송죽회(松竹會)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1923년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하고 한국 최초 여류비행사가 되어 중국 국민군에서 비행사로 활약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권기옥에게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숭의여학교 비밀결사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권기옥(權基玉, 1903~1988년)은 평안남도 평양부 상수구리 출신으로 권돈각(權敦珏)과 장문명(張文明)의 4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권기옥의 할아버지 때는 집안형편이 부유하였으나 아버지가 유산을 날려 4살 때 남의 집 문간방 신세를 질 정도로 가난해졌다. 권기옥은 11살 때에 은단공장에 취직하였고, 다음 해 12살 나이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숭현(崇賢)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권기옥은 숭현소학교 졸업 후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권기옥은 수학 교사 박현숙(朴賢淑) 권고로 숭의여학교 비밀결사대 송죽회(松竹會)에 가입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권기옥은 박현숙의 지휘 아래 한선부(韓善富)·차진희(車鎭姬)·김순복(金順福)·김명덕(金明德)·최순덕(崔順德)·장성심(張聖心) 등과 함께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신홍식에게서 만세운동 관련 연락을 받았다. 이후 기숙사 일본인 사감인 호시코의 눈을 피해 태극기를 만들고, 애국가 가사도 등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숭덕학교에서는 강규찬(姜奎燦) 목사의 개회선언, 김선주(金善柱) 목사의 독립선언문 낭독 후 곽건응(郭權應) 목사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으로 교정에서 나와 만세운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교사 박현숙이 3월 4일 체포되자 권기옥은 김순복, 한선부 등 20여 명과 거리로 나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권기옥은 이 일로 형사에게 붙잡혀 3주 구류처분을 받고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격해지는 독립운동과 심해지는 일제의 감시


이후 권기옥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연락원 임득삼(林得三), 김순일(金淳一), 김정직(金鼎稷), 김재덕(金在德) 등과 독립운동자금 모금과 임시정부 공채를 판매하여 임시정부로 자금을 송금하는 일에 투신하였다. 권기옥은 평양청년회에서 활동하던 김재덕(金在德)의 부탁으로 권총을 전달하던 중 총기 오발사고가 일어나 평양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후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으나 그녀를 미행하던 형사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권기옥은 체포 후 혹독한 고문으로 여러 번 졸도하였다. 검찰은 권기옥에게 죄가 있다는 증거가 부족함에도 제령위반(制令違反)이라는 죄목으로 그녀에게 징역 6개월 형을 선고했다. 

형기를 채우고 출옥한 권기옥은 1920년 평안남도 도청 폭파를 준비하던 문일민(文一民)·장덕진(張德震) 등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았다. 권기옥은 숭현소학교 수위의 도움으로 학교 지하실 석탄창고에 숨어 폭탄을 제조하였다. 며칠 후 평안남도 도청 폭발사고가 발생했으나 폭파범은 누구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권기옥은 숭실학교 브람스 밴드 리더 차광석(車光錫)의 조언으로 ‘평양청년회 여자전도대’를 조직하여 애국동지들과의 연락을 취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권기옥은 장대현교회에서 첫 전도회를 열고 평안도 일대를 순회하였다. 권기옥은 전도대장 직분으로 경찰에 연행되어 시말서를 썼다. 경찰 감시가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지자 권기옥은 1920년 상해(上海)로 탈출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손정도(孫貞道) 의장 집에서 기거하였다. 그리고 김규식(金奎植) 부인 김순애(金淳愛) 소개로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홍도(弘道) 여자중학에서 21살에 학업을 시작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한국인 최초 여성비행사로 하늘을 날다


1923년 권기옥은 임시정부 추천으로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敎)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권기옥은 항공학교 입학 이후 “비행기 타는 공부를 하여 일본으로 폭탄을 안고 날아가리라.”라는 각오를 하였다. 항공학교 입학 동기는 이영무(李英茂), 장지일(張志日), 이춘(李春) 등이다. 권기옥은 기초이론과 지상 실습교육을 끝내고 처음으로 프랑스제 꼬드롱 쌍첩(雙葉) 훈련기를 탔다. 중국에서 한국 여학생 여류 조종사 소문이 퍼지고,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다 망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 관헌은 한국인 청년을 매수하여 권기옥을 암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눈치챈 권기옥은 이영무· 장지일 등과 청년을 공동묘지로 유인·사살하였다. 

1925년 권기옥은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임시정부의 소개로 풍옥상(馮玉祥) 휘하 공군에서 한국 최초 여류비행사로 복무하였다. 『동아일보』 1926년 5월 21일 자에서는 권기옥의 중국 국민군 복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중국창공(中國蒼空)에 조선(朝鮮)의 붕익(鵬翼), 중국하늘을 뎡복하는 조선용사 그 중에서 꼿가튼 녀류용사도 잇서. 안창남(安昌男), 최용덕(崔用德), 여류비행가(女流飛行家) 권기옥(權基玉) 등 국민군(國民軍)에서 활약.”  

1927년 8월 28일자 『중외일보』도 권기옥과 안창남, 최용태, 권태용 등 조선인 비행가들이 중국혁명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식을 게재하였다. 권기옥은 1927년 장개석(蔣介石)이 북벌(北伐)시 동로항공사령부(東路航空司令部) 최용덕과 참여하는 등 중국 공군에 10여 년 동안 복무하였다. 권기옥은 중국 혁명공군 초창기 공군을 선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고, 기금 모금과 선전을 위한 중국 여자 혁명가를 비행기로 중국 일주하기도 하였다. 권기옥은 총 7,000시간 비행시간을 가지고 있으나 중국 군인 신분으로 군대 훈련 과정으로 비행 과정만 마쳐 비행사 자격은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권기옥은 당시 한국인 최초 여자비행사로 여겨진다.

 

 

 

한국 여성으로 하늘을 날다_권기옥

 

 

 

1928년 권기옥은 이상정(李相定)과 결혼하였다. 이상정은 일본 유학으로 역사학을 전공하고, 1926년부터 풍옥상(馮玉祥) 서북국민부대(西北國民部隊) 준장급 참모로 활약하였다. 이상정은 서북국민부대가 장개석 부대와 통합되자 국민정부(國民政府) 정규군 소장이 되어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권기옥은 1943년 중경 임시정부 직할로 김순애(金淳愛), 최선엽(崔善燁), 방순희(方順熙), 최형록(崔亨祿), 최애림(崔愛林) 등과 한국애국부인회를 재조직하였다. 광복 후 1948년 권기옥은 귀국하여 1950년부터 1955년까지 국방위원회 전문위원, 1957년부터 1972년까지 『한국 연감(年鑑)』 발행인, 1966년부터 1975년까지 한중문화협회 부회장을 지내고, 재향군인회 명예회원, 부인회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권기옥에게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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