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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근로 정신대_아물지 않은 상처

by noksan2023 2026.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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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 정신대_아물지 않은 상처

 

 

 

 

 

사진은 앳된 여성들이 군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과 깃발을 들고 군대가 행진하듯 줄지어 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들은 왜 일본에 갔을까?

 

일제는 1930년대 만주 침공을 시작으로 중국과 대대적인 전쟁을 하였다. 1940년대 들어서는 전선을 넓혀 동남아시아, 미국과도 전쟁을 벌였다. 전쟁이 길어지자 일제는 인력과 물자 공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다급해진 일제는 근로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한국인 여성을 강제 동원하여 전쟁에 나간 남성을 대신해서 일하게 하였다. 

 

근로 정신대에 동원된 한국인은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미쓰비시 등 군수 물자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이렇게 끌려간 여성은 대략 5만 ~ 7만 명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은 초등 교육 기관을 졸업한 10대 중반이었다. 어느 정도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야 공장에서 일을 시키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근로 정신대에 참여한 여성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스스로 자원한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총독부에서 학교에 강제로 인원을 할당해 모집하는 방식이었다. 학교에서는 근로 정신대로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번다거나,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는 거짓말로 여학생들을 유인하였다. 그래도 지원자가 나오지 않은 학교에서는 제비를 뽑거나 교 사가 임의로 뽑아 인원을 채웠다. 

 

이렇게 끌려간 여성은 일본 각지의 공장으로 보내져 고된 노동을 하였다. 그곳에서는 약속과 달리 교육의 기회도, 많은 월급도 없었다. 월급은 강제 저축을 한다는 명목으로 손도 댈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식사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각종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노동이 끝난 후에도 군대식 통제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근로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의 고통은 나라를 되찾은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근로 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를 모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여겼다. 여성을 착취한다는 개념에서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일제는 정신대를 모집한다고 해 놓고서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피해 여성은 일본군 위안부가 받았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함께 받았다. 일례로 14살나주에서 근로 정신대로 끌려갔던 양금덕 할머니는 고생 끝에 고국에 돌아왔지만, 이후 만난 남편에게 근로 정신대를 다녀왔다는 이유로 이혼을 당했다. 

 

할머니가 된 소녀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지금도 법정에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와 진정한 사과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물론 강제 동원의 이익을 얻었던 미쓰비시, 후지코시 등 대기업도 이를 끝끝내 외면하고 있다. 그들의 뻔뻔함에 할머니들은 오늘도 또 한 번 상처를 입은 채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조선여자근로 정신대

 

 

 

조선여자근로정신대(朝鮮女子勤勞挺身隊)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직된 태평양 전쟁 수행을 위한 착취 조직이다.

 

1. 개요

 

본래 정신대는 '국가를 위해 솔선수범하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여러 분야의 전쟁 지원 단체에 붙어 사용되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되기 시작하였으며 여성 대원으로 이루어진 '여자근로정신대'도 결성되었다.

실제 조선에서 여자근로정신대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미 특별한 법적 근거 없이 실시되고 있던 조선의 여자근로정신대는 1944년 8월 23일에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합법적인 근거가 마련되고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이 법령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되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는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소속되었으며,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동원 방법은 관청의 알선, 공개 모집, 자발적인 지원,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근로정신대로서 동원된 일본과 조선의 여성은 20만명이며, 그 중 조선인은 5만에서 7만명이다.

 

2. 사례

 

1944년 봄에 취업 및 진학을 시켜준다고 꾀어 당시 12세에서 14세의 소녀들을 충청남도와 전라남도에서 모집한 뒤 미쓰비시 중공업의 군용 항공기 공장에서 임금을 전혀 주지 않고 강제로 노동을 시켰다. 이 가운데는 일본인 교사의 소개로 간 경우도 있었다. 이 공장에서 강제로 노동한 조선인 여성은 약 400명으로 파악된다.

경상북도 등지에서 모집된 소녀들이 군수업체인 후지코시 철재공업주식회사 도야마공장에서 강제로 노역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들도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경성가정의숙 학생이던 김금진은 이 학교 교장인 황신덕이 1943년에 다른 학교와 달리 근로정신대에 지원하는 학생이 없다며 한탄하는 것을 듣고 근로정신대에 자원해 들어갔다. 김금진은 후지코시 공장에서 총알 만드는 일을 하다가 종전 후 귀국하였다.

이밖에 도쿄 마사방적주식회사 누마즈 공장, 미쓰비시 나고야항공기제작소 도토쿠 공장, 나가사키 조선소, 사가미 해군공창, 야하타 제철소 등이 강제로 끌려가 노역한 곳으로 지적되었다.

 

3. 일본군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노동력의 동원이라는 점에서 성적 착취가 이루어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르지만 사실 근로정신대라고 모집해 놓고 위안부로 끌려가거나 성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따라서 일제에 대한 여성착취라는 개념에서 한 분류로 인식돼 종전 후 위안부와 혼용하여 정신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다. 성 착취를 당하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근로정신대로 강제노역을 마치고 온 여성들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 경력자로 오해받을까봐 근로정신대원이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고 살아온 경우도 있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내몰린 조선의 소녀들

 

 

근로 정신대

 

 

 

1. 개요

 

조선여자근로정신대는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 조선의 여성들을 전쟁 물자 생산에 동원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특히 10대 초반의 어린 여자 아이들까지 동원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일제가 자행한 조선인 강제동원의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공식적으로는 1944년 8월 23일 공포된 여자정신근로령에 따라 관알선 형식으로 동원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미 1944년 초부터 여자정신대라는 이름의 동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여자정신근로령은 이미 시행하고 있던 여자근로정신대 제도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법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자정신근로령에 따르면 동원 대상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더 어린 나이에 끌려간 사례도 확인된다.

 

2. 일제의 여성 동원과 여자근로정신대

 

일제가 자국의 여성들을 전시 동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중일전쟁 이듬해인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 시행 이후부터였다. 중국과 개전 이후 전선이 확장됨에 따라 더 많은 남자들이 군대에 입영하게 되었는데 그 빈자리를 여성 동원을 통해 메웠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군국 여성’이라는 틀 속에서 건강한 남자아이를 ‘황군(皇軍)’으로 양성하는 역할이 주어졌지만, 중국과 전면전이 심화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력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식민지 조선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제의 여성 노동력 동원은 1938년 이후 근로보국대 제도 시행으로 가시화되었다. 조선총독부 역시 1938년 6월 근로보국대 실시요령을 발표하였고, 7월 1일에는 내무부장이 부윤과 군수 등에게 통첩을 하달했다. 근로보국대는 도·부·군·면 등 지방 행정단위별로 결성되었고 그 아래 정동회(町洞會) 및 부락 단위로도 조직되었다. 근로보국대는 청년근로봉사대, 부인노동단, 학교근로보국대 등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근로보국대가 처음 결성될 당시 동원 대상 연령은 20~40세 남녀로 규정되어 있었으나 1941년 남자는 14~40세, 여자는 14~25세 미만으로 낮춰졌다.

1943년 9월에는 「여자 근로동원 촉진에 관한 건」을 통해 여자정신대 결성이 추진되기도 했다. 일제 당국은 “17개 직종에 남자 취업을 금지하고, 25세 미만 미혼 여성을 근로정신대로 동원한다”는 ‘국내필승근로대책’을 수립하여 본격적인 여성 동원에 돌입했다. 그리고 1944년 8월 급기야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었다. 여자정신근로령은 12세 이상부터 40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동원 대상으로 했으며 결과적으로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들까지 전쟁에 내모는 법적 근거로 작용했다.

 

3.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 실태

 

여자정신근로령에 따라 조선여자근로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강제동원된 사례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피해 사례는 후지코시 강재(不二越鋼材) 도야마(富山) 공장,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나고야(名古屋) 항공기제작소 등이다.

후지코시 강재는 1928년 12월 후지코시강재공업주식회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립되었다. 주로 기계 부품과 공구를 생산하는 제조회사였고 이로 인해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의 지정공장이 되었다. 1941년에는 해군 고각포(高角砲) 대공사격을 위해 만들어진 고사포의 일종으로 일본 해군에서 불리던 명칭 , 기관총 부품 등을 생산했고 1944년에는 군수회사로 지정되었다.

후지코시 강재에 조선여자근로정신대가 동원된 것은 1944년 4월부터 1945년 2월까지였다. 회사 역사서에는 1945년 5월 말 현재, 조선여자근로정신대 1,089명, 남자보국대 535명이 소속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다만 이것이 동원된 전체 규모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이 중 115명을 강제동원 피해자로 판정했다.

미쓰비시중공업은 근대 일본의 3대 재벌이자 대표적인 전범 기업이었던 미쓰비시의 계열사였다. 미쓰비시는 일제 침략의 한 축을 담당하며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수많은 계열 회사들을 거미줄처럼 거느리고 있었다. 특히 미쓰비시중공업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군 항공기의 주요 제작 업체였다. 미쓰비시중공업의 항공기 생산 공장은 아이치현(愛知縣)과 구마모토현(熊本縣), 그리고 오카야마현(岡山縣) 등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중 아이치현에 있는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조선인 피해자들이 다수 동원되어 있었다.

나고야항공기제작소는 오에(大江)와 도토쿠(道德) 등 두 곳에 공장을 운영했다. 조선 소녀들은 이미 1942년부터 동원되기 시작했고 1944년 6월 가장 많은 수가 끌려갔다. 자료에 따라 270~300명의 소녀들이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중 42명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피해자로 공식 판정되었다.

소녀들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학교에 보내준다거나 돈을 벌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서 끌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공장에서 꿈에 그리던 학교는 찾을 수 없었고, 공부라고는 일본에 대한 지식과 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전부였다. 식사량도 턱없이 부족했고, 급료는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공장에 간다 소리만, 취직시켜준다고 했거든 공장에다. 그런께 어딘지 모르고 따라갔지. 아이고 열세 살 먹은 것들이 뭐 알겄소? 그저 가라하면 가고, 서라면 서고, 그러고 살았지.(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그 경험과 기억』, 146쪽)

도착한 다음 날 즉시 공장에 가서 여러 가지 설명과 주의사항을 듣고 분야별로 배치받았습니다. 기숙사에서 공장까지는 매일 ‘신풍(神風)’이라는 글씨가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4열 종대로 ‘우리는 소녀 정신대!’를 부르며 행진했습니다. 비행기 부품에 국방색 페인트를 칠하고, 무거운 짐짝을 운반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환풍기는 없었고, 마스크도 하지 않았기에 페인트 용제 냄새로 머리가 아파 의식을 잃고 쓰러진 적이 있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여학교는 없었고, 공부라고는 기숙사에서 일본에 관한 공부와 군가 등을 가르쳐주는 정도였습니다. 급료는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원고 진술서」(1999년 10월 1일, 나고야 지방 재판소 민사 제4부) 정혜경, 『전사가 되어라-조선여자근로정신대』, 54쪽)

작업을 게을리하거나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감독의 구타가 이어졌다. 그 와중에 공습과 지진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1944년 12월 7일 진도 7.9의 도난카이(東南海)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으로 미쓰비시중공업 도토쿠공장이 무너지면서 6명의 조선 소녀가 사망했다.

지진이 나갖고 300명… 삼백 몇 명 죽었어요. 일본사람이. 그리고 우리 학생이 6명. 목포에서 둘, 나주에서 둘, 광주에서 둘, 그렇게 해서 6명이 죽었어요. 근데 우리는 좋은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입구라. 방공굴이야. 방공굴에 들어간 놈들은 살았지. 근데 여기 애기들은 막 방공굴로 들어가라니까 다~ 들어가고, 인자 늦게서 들어간 놈들은 그냥 이렇게 (테이블을 손으로 치며) 폭삭 내려앉아버리니까…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조선여자근로정신대, 그 경험과 기억』, 152~153쪽)

이외에도 도쿄아사이토(東京麻絲) 방적 누마즈(沼津) 공장, 인천육군조병창 평양제조소 등에도 조선여자근로정신대가 동원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가리지 않고 군수물자 생산에 어린 소녀들이 대규모로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관부재판의 경과와 역사적 피해의 현재

 

1992년 「부산 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공식 사죄 등 청구 소송」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3명과 미쓰비시와 후지코시에 동원되었던 근로정신대 피해자 7명이 원고로 참여했다. 사람들은 이 재판을 관부재판(關釜裁判)이라고 불렀다. 부산에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을 타고 강제동원되었고, 재판을 위해 다시 그 길을 오갔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는 최종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한편 1999년 3월에는 양금덕 등 7명이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다시 소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역시 2008년 11월 원고에게 청구권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이듬해인 2009년 양금덕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후생연금보험탈퇴수당금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일본 사회보험청 연금보험과에 수당금을 신청했다. 사회보험청은 양금덕에게 99엔(약 930원)의 수당금을 지급했다. 가입 당시 액면가(額面價)대로 지급했다는 것이 일본 측의 설명이었다. 애초 후생연금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숨겨오다가 마지못해 지급한 99엔을 양금덕은 받을 수 없었다.

피해자들은 일본 재판소의 패소, 또는 기각 판결을 딛고 다시 한번 소송을 제기했다. 이번에는 한국의 재판정이었다. 2013년 이후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한국 법원에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3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우리 대법원은 2018년 11월 판결을 시작으로 모두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30년 가까이 이어온 관부재판의 해피엔딩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피해자들의 처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한국 법원의 판결이 ‘한일청구권협정 위반’이라며 승복하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는 입장을 고수한 채 시간을 보냈다. 결국 2023년 3월 정부는 일본 기업이 지불해야 할 ‘위자료’를 대신 지급하겠다는 ‘제3자 변제안’을 들고 나왔다. 애초 피해자들이 소를 제기한 것은 일본의 전범 기업들에게 사과와 보상을 받으려는 의도였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대신 ‘위자료’를 지급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재판의 취지는 물거품이 되었다. 정부는 일본 측의 사과가 없다는 언론의 지적에 일본에게 “사과 한번 더 받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답변하기도 했다.

 

5. 남겨진 과제

 

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끌려갔던 여성들은 해방 이후 긴 세월을 오해와 편견 속에 살아야 했다. ‘정신대’라는 이름이 일본군‘위안부’와 뒤섞여 쓰이면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는 것조차 꺼릴 수밖에 없었다. 학계와 시민사회는 그들을 향한 오해와 편견에 무관심했다. 무관심은 오해를 키웠고, 그사이 피해자들은 상처와 침묵 속에서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양국 정부 역시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피해 진상규명과 지원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피해자들이 요구한 법적 책임 규명과 사회적 존엄 회복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꾸준히 법적 책임을 외면해 왔다. 이러한 태도는 강제동원 피해를 역사 속 주변부로 밀어내고 피해자들의 경험이 제도적 기억 속에 온전히 자리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관부재판으로 대표되는 지난 수십 년의 법적 투쟁은 피해자들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 간 합의와 사법적 판결, 그리고 정부의 정책적 대응 사이에 놓인 간극을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결국 문제는 단순한 배상 여부가 아니라 피해 경험을 어떻게 역사적 범주 속에 위치시키고 사회적·제도적 차원에서 수용할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책소개
일제 강제동원, 그 잔혹한 역사의 현장으로!

강제병합 100주년을 맞아 한일 과거사 문제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책『일제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 국민일보 현직기자들이 각종 피해자들의 증언과 관련 연구 기록을 토대로 식민지 조선인 강제동원의 실상을 낱낱이 밝힌다.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부터 러시아 사할린, 남양군도까지, 주요 강제동원지를 중심으로 한 일본 전범기업의 만행과 조선인들의 행적을 추적한다. 그동안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미발굴 자료, 새로운 증언들이 현장 사진들과 함께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저자소개
저자 : 김호경
저자 김호경은 고려대학교 생물학과를 졸업했다. 전공과 무관한 길을 택해 1997년 국민일보에 입사했다. 주로 정치부 정당팀과 사회부 사건팀·법조팀에서 일했다. 문화부에서도 약 2년 근무하며 미술·출판 분야 등을 담당했다. 사회부 사건팀장 시절 고위공직자 등의 ‘쌀 직불금 부당수령’ 사건 보도로 동료들과 함께 삼성언론상, 한국신문상을 수상했다.

저자 : 권기석
저자 권기석은 서강대학교 사회학과와 같은 곳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3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탐사기획팀, 정치부에서 일했다. ‘월남越南 1세대, 그들이 사라진다’, ‘한국 속 난민, 그들은 누구인가’, ‘국민기초생활보장제 10년 긴급 점검’ 등의 기획 보도를 했다. ‘사형수 63인 리포트’ 기획 보도로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에 이어 관훈언론상을 수상했다.

저자 : 우성규
저자 우성규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국민일보에 입사해 국제부, 사회부, 정치부, 탐사기획팀을 거쳤다. 선배 기자와 함께 고위공직 후보자 논문 문제를 탐사 보도해 한국기자상과  한국신문상을 수상했다. ‘이명박 대선 후보 위장전입’ 추적 보도, ‘기후변화-조용한 재앙’ 특별기획 보도로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책속으로
2003년 8월 ‘태평양전쟁 희생자유족회’, ‘일제 강제연행 한국 생존자협회’, ‘나눔의 집’, ‘시베리아 삭풍회’ 등 일제 피해자 단체 회원 약 300여 명이 청와대 앞에서 국적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한국 정부가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과 대일 관계를 이유로 희생자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절규했다. 나라를 잃어 타국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청춘을 바친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그 국가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는 일 만큼 비극적인 게 또 있을까. 막다른 곳에 다다른 고령의 피해자들이 최후의 선택을 한 것이다.  ―본문 521쪽

과거에 대한 피해의식 차원이 아니라, 역사의 퇴행을 막기 위한 작은 안전장치로서 이 책이 독자들의 역사 인식에 보탬이 되기를 소망한다. 피해자가 기억하고 가해자도 기억해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고 미래도 열린다. 어설픈 초월이나 망각은 역사의 교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프리모 레비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에서 던진 명제를 상기한다. “과거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 「들어가는 글」 10쪽

 

출판사 서평
일본 홋카이도부터 러시아 사할린까지,
65년 전 그곳,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 연인원 600~700만 명. 1939~1945년, 그 6년 사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나? 강제병합 100년을 맞는 올해, 한일 과거사 문제의 최대 쟁점 중의 하나인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책이 출간됐다. 일본 본토는 물론 사할린, 남양군도까지 일본 전범기업이 조선인 노무자들을 강제 동원했던 작업장을 중심으로 취재한 르포이다. 일제가 조선인 강제동원을 시행하게 된 전후 배경부터 강제동원이 본격화된 1939년 이후의 상황을 피해자의 증언과 관련 연구 기록을 토대로 새롭게 복원했다. 


이 책의 필자는 현직 기자들이다. 2009년 말 미쓰비시에 강제 동원됐던 근로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후생연금 탈퇴 수당금 명목으로 99엔 지불을 판결한 일명 ‘99엔 사건’에 충격을 받아 이 문제에 뛰어들게 됐다고 한다. 필자들은 현장 취재를 중심으로 하되, 이와 병행하여 자료조사에도 많은 공력을 들였다.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조사위)와 같은 정부 기관과 국내외 연구 기관들의 방대한 자료를 치밀하게 검토하는 한편,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일본 내 사회운동가들이 제공한 각종 문서와 사진자료 등을 취합하고 기존 연구자료와 꼼꼼히 대조해나갔다. 역사적 진실을 다루는 문제인 만큼 작은 통계 수치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2010년 초부터 9월까지 <잊혀진 만행, 일본 전범기업을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연재됐다. 이 책은 그 기획기사를 골격으로 하여, 연재 당시 지면의 한계로 빠진 부분과 취재 때 미진했던 부분들을 대폭 보완하여 엮어낸 것이다. 


이 책은 총론과 본론 4부로 이뤄졌다. 총론에서는 이 책에서 다룰 주제들을 전반적으로 개괄하고 있다.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을 위해, 조선인 강제동원의 방식과 유형, 과정을 실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사례를 짚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한다. 또한 강제동원의 한 축으로 작동한 일본 기업들의 숨겨진 역할에 대한 중요한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1부에서 2부까지는 일본 본토의 강제동원지를 취재한 글을 각 기업별로 묶었다. 우리 사회에도 잘 알려진 미쓰비시나 미쓰이 등 일본의 굵직굵직한 대기업은 물론 국내에 비교적 덜 알려진 일본 기업들의 조선인 노무자 작업장을 취재했다. 필자들이 찾아간 대부분의 작업장은 폐광됐거나 관광지로 탈바꿈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역사의 흔적을 찾으려는 필자들의 힘겨운 취재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3부는 일본 본토를 제외한 강제동원지인 남양군도, 사할린 등에 대한 현장 취재와 국내 동원, 유골 반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국내 동원의 경우 일제가 조선인들을 석탄을 캐는 일보다 금을 캐는 일에 집중적으로 동원시킨 사례가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4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과 일본 정부와 기업 간의 피해 배상, 미불임금 보상에 대한 소송 투쟁의 역사를 보여준다. 반복되는 패소에도 불구하고 소송을 멈추지 않는 피해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그들을 돕는 한일 양국 시민운동가들의 뜨거운 열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강제동원 기간 6년은 ‘전 민족적 수난’ 
일본 전범기업은 조선인 강제동원에 어떤 역할을 했나?
 
이 책은 기존 국내에 출간된 강제동원 자료집과 피해자들의 증언록과는 뚜렷이 차별되는 내용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먼저 이 책은 일제시대 강제동원 분야 중 징병과 군 위안부 부분은 거의 다루지 않고 징용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징병과 군 위안부 피해 사실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인지도가 상당히 높은 반면, 피해자 규모 면에서는 훨씬 압도적인 징용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일반적 관심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실제 필자들이 학계의 연구 결과를 검토한 바에 따르면, 1939년부터 해방 전까지 6년 동안 매년 조선 인구의 30%나 되는 600~700만 명이 일제의 강제동원 현장에 투입됐다. 그리고 이렇게 동원된 노무자 중 적게는 10~20만 명, 많게는 50만 명이 작업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필자들이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전 민족적 수난’이었다고 기술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다음으로 이 책은 기존 국내 연구들이 간과해온 강제동원의 주요 축인 일본 기업들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39년경 일본 대기업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조달할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군수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당시 대기업들은 생산 인력에 필요한 인원을 모집하기 위해 식민지에 눈을 돌렸다. 대기업들이 고용한 브로커들이 조선 현지로 찾아가 모집 활동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노무자 인솔부터 작업장 관리까지 기업의 손이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필자들은 조선인 강제동원지로 알려진 나가사키 조선소, 미쓰이 탄광 등의 당시 강제동원 작업장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일본 기업들이 강제동원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실증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증언과 자료를 찾는 데 주력했다.


셋째, 이 책에는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한 필자들의 다각적인 노력과 고민의 과정이 담겨 있다. 전문가 집단의 자문, 외국 사례의 검토, 중국인 동원 피해자들이 일본기업 배상 청구 소송으로부터 화해를 이끌어낸 사례를 점검한다. 이를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는 결코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아님을 역설한다. 특히 필자들은 독일의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EVZ)의 사례를 주목하면서, 전범기업들이 전후 일본 정부에 맡긴 미불임금에 대한 공탁금 등을 토대로 일본 정부와 함께 기금을 창설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중국인 강제연행 피해자들이 니시마츠건설과 화해를 이끌어내어 보상금을 받아낸 데에는 중국 정부의 노력과 중국 국민의 여론이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투자 ? 영업 활동에 제약을 줄 수 있는 압박 수단들을 강구할 수 있다면, 전범기업들이 지금처럼 강제동원 문제를 미온적으로 대응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지적이다. 

국적을 포기한 사람들…… 피해자 보상 문제 그렇게 어려운가?
소수자의 문제로 방치된 과거사!

2010년 11월 2일 민주당 이용섭 의원은 대정부질문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9대 정책을 제안했다. 이 의원은 “해방된 지 65년이 지났지만 일제 강점기 아래 강제 동원된 근로자 문제에 대해 양국 간 과거사 청산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제안의 취지를 밝혔다. 이 의원이 제시한 9대 정책은 일본 전범기업들의 기금 마련이나 포스코와 같은 한일협정 대일청구권자금의 수혜 기업들의 기금 조성 등, 이 책의 필자들이 제시한 해법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강제동원 피해자 보상 문제와 관련한 해법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이 논의되어왔다. 그중에 몇몇 제안들은 충분히 실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 문제의 해결에 난항을 겪고 있는 것은 왜일까? 필자들은 그 주된 이유가 우리 정부의 의지 부족에 있다고 본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대일청구권 문제는 끝났다는 입장이고, 과거 정부와 기업들이 행한 범죄 사실을 먼저 나서서 밝힐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에 도의적 책임을 묻기 전에 우리 정부가 강제동원 문제를 보다 치밀하게 조사하고 피해자들의 보상 해법을 강구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현황 조사는 물론이고 미불임금 규모, 일본 내 미귀환 유골 파악 등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수적인 사전조사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배상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 정부와 기업들을 제대로 압박하지도 못했다. 2004년 특별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보상 문제도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럼 그동안 정부는 이 문제에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대처했을까. 필자들은 강제동원의 문제가 한편으로 소수자 문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피해자들 대부분이 고령에다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 힘든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이다. 실제 통계를 보면 강제동원 피해자의 대다수가 오늘날까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다. 보통 마을에서 가장 못 배우고 힘이 없는 사람들이 징용 대상자로 뽑혀 끌려갔다. 그들은 한창 경제적 활동을 할 나이에 돈 한 푼 없이 귀향해야 했고, 그중에는 부상자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그들은 고국에 돌아와서도 수십 년간 사회적 ? 경제적으로 낮은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소수자인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다. 그러다 2003년 청와대 앞에서 사건이 터졌다. 자신들의 호소에 무관심한 국가를 향해 일제 피해자 단체 회원들이 강력한 시위를 벌인 것이다. 일명 ‘국적 포기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부는 2004년부터 위로금 지원 사업을 시작한다. 일본 정부와 기업이 돌려주어야 할 돈을 한국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대신 주겠다는 것이다.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유족, 부상자의 유족, 생환자 등을 구별하여 보상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필자들은 우리 정부가 이만큼이나마 강제동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환영할 일이나, 여전히 여러 가지 면에서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먼저 강제동원 노무자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록이 빈약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기록은 주로 일본에 기댈 수밖에 없는데, 일본 정부와 기업으로부터는 기초적인 자료들밖에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보다 전략적으로 일본 정부의 협조를 얻어내야 한다는 게 필자들의 생각이다. 그 밖에 국내 동원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지원되지 않는 점, 미불임금 지급금이 현대 물가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점도 필자들은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한일관계 어떻게 만들 수 있나
피해자, 가해자 모두가 기억해야 진정한 화해 가능

고(故) 박경식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기록』은 조선인 강제동원 희생자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로, 1965년 한일협정이 맺어진 해에 출간됐다. 그는 서문에서 “조선과 일본의 우호친선과 진정으로 평등한 국제 연대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혔다. 국가 간에 진정한 우호관계가 형성되려면 두 나라의 과거사 청산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강제병합 100주년에 즈음하여 일본 간 나오토 총리의 담화가 있었다. 다음 100년을 내다보며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구축하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국내 여론들은 담화 내용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한일 강제병합 조약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발언도 없었고, 군 위안부나 징용 노무자 등 전쟁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에 대한 언급도 찾을 수 없었다. 한마디로 알맹이는 모두 빠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적 과오에 대한 분명한 청산 없이 한일관계의 미래를 얘기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필자들이 이 책을 통해 던지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또한 필자들은 우리 정부와 사회 또한 과거사 문제에 대해 너무 무관심해왔다고 지적한다. 민주정부가 들어서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강제동원 문제가 불거진 것도 점도 그렇고,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일제의 침략전쟁 과정에 벌어진 피해 사실들을 제기하며 일본 정부를 압박하지 못했던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어쩌면 정부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가 우리 사회 일반의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필자들은 일본 현지 취재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준 일본인 사회운동가들에게 깊은 감동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자비를 들여 평생을 걸쳐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를 연구해온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비교하면 크게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오는 11월 27일에 윤도현 밴드가 교토에서 단바망간기념관 재건을 위한 기금 마련 자선 공연을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단바망간기념관은 고(故) 이정호 씨가 단바 지역의 망간광산에 강제 징용된 조선인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으로 2009년 폐관됐다. 우리 사회의 의식 있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대중들에게 중요한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 역사를 제대로 알 때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프리모 레비의 이 말은 역사의 피해자나 역사의 가해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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