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박사 석주명_우리 나비에 우리말 이름을 지어 주다
사진 속 젊은 남자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가 안경 너머로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비 표본이고, 이 남자는 한국의 파브르라 불린 나비 박사 석주명이다.
석주명은 일본에서 농생물학을 배우고 돌아와 1931년부터 모교인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생물을 가르치면서 나비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곤충 채집을 방학 숙제로 내 주던 선생님의 원조였다. 석주명은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는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에게 매번 나비 200마리씩을 잡아 오라는 숙제를 냈다. 부족한 표본은 직접 전국을 다니면서 채집하였다. 이렇게 모은 수십만 마리의 나비를 일일이 관찰해 그동안 서양과 일본 학자들이 같은 종인데 다른 종으로 잘못 분류한 844종을 정리했고, 일본 학자들이 붙인 한국산 나비의 이름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새로 지었다. 그는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졌다라며 이때를 회고하였다.
그의 연구는 영국 왕립학회의 요청으로 1940년에 출간한 「조선산 나비 총목록」이라는 책에 담겼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이 과학 분야에서 영문으로 펴낸 유일한 책으로 전 세계에 판매되었다. 그 결과 석주명은 세계에서 30여 명밖에 안 되는 세계 나비학회 정회원이 되었다.
석주명은 왜 나비를 연구하게 되었을까? 그는 해방 후 쓴 글에서
"자연과학에서는 생물학만큼 황토색이 농후한 것이 없어서 조선적 생물학이란 학문도 성립할 수가 있다"
라고 밝혔다. 조선적 생물학은 어떤 의미일까? 석주명이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부임한 1931년은 이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해였다. 일제는 노골적으로 한국의 고유문화를 억눌러 한국인을 일본에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맞서 민족주의자들은 조선적인 것을 연구하여 민족 문화를 건설하는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재홍과 정인보는 조선 후기 새로운 사상으로 실학에 주목했고, 이를 집대성한 인물로 정약용을 강조하였다. 이에 정약용 서거 100주년 사업으로 그의 저서를 모은 「여유당전서」를 출간하였다.
조선학 운동은 우리말과 글, 우리 역사 연구에 그치지 않고, 과학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학 운동의 중심인물들과 교류했던 석주명은 자신의 나비 연구를 단순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조선학의 일부로 생각하였다. 연구 대상을 철저하게 조선의 나비로 한정하였고, 논문 대부분은 조선산~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나비의 역사를 찾으려고 「조선왕조실록」을 뒤졌고, 나비와 관련 있는 역사적 인물을 조사하기도 하였다. 식민지인으로 살아가는 석주명에게 이 모든 것이 조선적 생물학이자, 새로운 민족 문화 건설 운동이었다.
석주명 (石宙明)

석주명은 수원농사시험장 병리곤충부장,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흰배추나비의 변이곡선」, 『한국산접류연구』 등을 저술한 동물학자를 말한다.
평안남도 평양 출생. 1926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모교인 송도중학교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나비연구에만 전념하여 나비박사의 별호까지 얻었다.
1943년 경성제국대학 부속 제주도생약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는 제주도의 곤충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제주도방언집』(1947)·『제주도문헌집』(1949)·『제주도의 성명조사서』(1949) 등을 출판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수원농사시험장 병리곤충부장에 취임하였다.
1946년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으로 재직하면서도 연구생활을 계속하였는데 그간에 제작된 귀중한 표본과 연구업적은 범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100여 편의 나비관계 연구논문 중 특히 「흰배추나비의 변이곡선」은 특출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유고로는 『한국산접류연구』·『한국산접류분포도』 이외에 『제주도의 인문과 자연』이라는 수필집과 『제주도재료집』을 남겼다.
석주명

1. 개요
우리나라 나비연구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적인 생물학자. 1929년 일본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기관를 졸업한 뒤 1930년 모교인 송도중학교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나비 연구에만 전념해 나비박사의 별호까지 얻었고, 광복 후에 수원농사시험장 병리곤충부장,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 등을 역임하였다.『제주도 방언집서적』, 『조선 나비 이름 유래기』, 『국제 에스페란토 소사전』 등 언어학 관련 저술과 제주도 관련 총서들을 남겼다.[5] 또 「흰배추나비의 변이곡선」, 『한국산접류연구』 등을 저술하였다.
2. 출생과 학력
석주명인물은 1908년 11월 13일 평양 대동문 근처 이문리에서 석승서(石承瑞)인물와 김의식(石承瑞)의 4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석승서는 평양에서 가장 큰 요릿집을 경영했기에 석주명은 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여덟 살에 평양 종로공립보통학교기관에 들어가 열세 살에 졸업한 뒤 평양 숭실보통고등학교기관에 진학했다.숭실고보에 들어가 1년 반쯤 뒤 개성 송도보통고등학교기관로 전학했다. 송도고보를 세운 사람은 윤치호인데, 농촌을 사랑하자는 취지로 낙농 실습을 위한 목장과 농장을 운영한 윤치호의 교육 환경의 영향으로 석주명은 낙농 사업을 하려는 꿈을 위해 송도고보를 졸업한 뒤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기관에 농학과로 유학을 갔다.
3. 곤충 공부와 언어학에 대한 관심
석주명은 가고시마 고농에서 일본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 긴지(岡島銀次)인물 교수의 지도를 받아 곤충학을 공부했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공부로 곤충병리학이 농업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또 석주명은 교내 에스페란토 연구회에서 시게마쓰 다쓰이치로우(重松達一郎)인물 교수에게 에스페란토를 배웠다. 석주명은 창씨 개명 속에서도 조선어 이름을 끝까지 지켜 모든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D. M. Seok(석주명의 평안도식 발음 '석두명')으로 표기했으며, 논문 개요를 에스페란토로 작성했다. 국내 에스페란토 운동이 일제의 탄압을 받을 때에도 학술 교류라는 명분으로 에스페란토 사용을 고집해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의 명맥을 지켰다.
4. 나비 연구
가고시마 고농을 졸업한 뒤 석주명은 모교인 송도고보의 박물교사가 된 후 나비를 채집하는 일에서부터 나비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석주명은 기존의 도감과 자신의 채집 결과 간 큰 차이를 발견했다. 많은 학자들이 소수의 표본만으로 조사하여 같은 종의 개체 변이를 새로운 학명으로 보고하거나 하는 문제들이 있었다. 이에 따라 석주명은 많은 표본을 채집하여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히는데 집중적인 관심을 쏟게 되었고, 이후 개체변이 범위를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는 정량적 형질을 추출하고 이를 통계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과학계에 후발주자로 뛰어든 그였지만 효과적인 방법론과 이를 뒷받침한 부지런함으로 왜곡되지 않은 한국 나비상을 규명하겠다는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해냈다. 그는 연구에 불리한 ‘교사 겸 연구자’라는 처지를, 제자들을 활용해 조직적인 채집활동을 벌이고 학생들의 과제물까지 연구재료로 흡수하면서 자신의 연구가 지니는 강점으로 전환시켰다.
5. 인문학 연구
제주도 방언집에서 첫 결실을 맺은 그의 제주연구의 끈은 1936년 7월 나비채집을 위해 제주도를 찾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통계처리를 기본으로 하는 석주명식 분류학을 위해 한반도 곳곳을 누비던 그는 지역마다 상이한 특성을 보이는 방언에 대한 관심을 키웠고, 특히 제주도의 특이한 방언은 그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는 제주도 총서의 집필로 이어졌고, 지역학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기도 전에 석주명이 명명한 ‘제주도학’이 시작했던 것이다.
6. 석주명의 최후와 그 후
6.25전쟁 중에도 석주명은 연구실로 지켰으나 폭격에 국립과학관기관이 불타 표본들이 불타버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10월 6일, 국립과학관 재건회의에 가던 중 석주명은 군인과 사소한 시비 끝에 총격을 받아 사망한다.[26] 전국토를 누비는 채집여행에서부터 시작한 석주명의 나비연구는 통계적 분류학과 생태학 초기단계인 분포연구를 거쳐 국학적 생물학으로 이어졌으며, 더 나아가 역사․언어연구까지 가지를 뻗쳐나갔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상당부분은 미완의 기획으로 남았지만 나비연구, 제주연구, 에스페란토 등 각각은 이후 개별적 발전의 굳건한 토대가 되었다.

7. 조선산 나비 총목록
‘왕립 아시아학회 한국지회’의 잡지인 <Transactions of the Kore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에 발표하기 위해 조선산 나비에 관해 150쪽가량의 준비한 논문을 바탕으로 집필한 책. 이 책의 제목이 ‘한국 나비의 동종이명 목록’이라는 사실은 석주명의 연구가 같은 종이지만 다른 학명으로 보고된 동종이명의 제거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당시에는 한반도산 특정 생물종에 대한 종합적인 목록집 자체가 드물었고, 특히 Synonymic List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과학자가 펴낸 유일한 영문 단행본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송도고보의 박물 교사였던 석주명은 이 책을 통해 일본을 넘어 구미학계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8. 제주도 방언집
47년부터 출판된 '제주도 총서' 5권중 하나이다. 1943년부터 1945년간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서 근무한 2년동안 이루어진 조사,채집,연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34] 제주도 방언에 아직도 남아 있는 15세기의 ‘ᄋᆞ’를 잘 반영하고 있으며, 몽골어 차용어를 비롯한 여러 특수 어휘를 수록하였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높다. 특히, 생물학자만이 정확하게 채록할 수 있는 동물·식물 어휘를 많이 수록하였다는 점도 큰 특징이다.
1950년 세계적 ‘나비학자’ 석주명 선생 죽음

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사살당해
“나는 나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나비에 웃고 나비에 울다가 나비처럼 이승을 떠난 석주명 선생이 1950년 오늘, 총성 속에서 부르짖은 최후의 말이다. 그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서울 시내에서 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사살당했다. 역사의 소용돌이와 동족 간의 유혈 대립 속에서 한국은 세계적인 나비학자를 그렇게 잃고 말았다.
1908년 11월 평양에서 태어난 석주명은 어릴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개성 송도고보 졸업 후 일본의 명문 가고시마 농림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 재학시 일본 곤충학회 회장을 지낸 오카지마의 총애 속에 곤충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졸업 후 귀국해 송도고보 교사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나비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나비를 찾아 전국을 헤집고 다녔다. 땅꾼으로 오해받는 일도 많았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온갖 종류의 나비표본으로 가득차게 됐고 이내 개성의 명소가 됐다. 당시 사람들은 나비에 미친 그를 ‘송도의 기인’, ‘나비박사’로 불렀다. 1931년부터 10여년간 그가 채집해 표본을 만든 나비의 수는 무려 75만마리나 된다.
그가 나비연구를 시작하던 1930대 초반에는 이미 한국산 나비에 대한 외국 학자들의 연구가 50여년 간 축적돼 있었다. 당시까지 나비연구자들은 몇몇의 개체만을 채집, 관찰하여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바로 새로운 학명을 명명했다. 그들은 한국의 나비가 844종이라고 했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개체를 채집한 석주명은 기존에 등록된 종(種)이나 아종(亞種)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는 <조선산 나비 총목록>(1940년)을 통해 잘못된 나비 분류를 바로잡고 한국의 나비는 248종이라고 정정했다. 일본말로 된 나비 이름도 우리말로 바꿔 붙였다. 수노랑나비, 유리창나비나리 등은 그가 세계 최초로 발견해 이름을 붙인 나비다. <조선산 나비 총목록>은 영국왕립학회 도서관에 소장될 정도로 세계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또 그가 나비 분포지를 표시한 지도책 ‘한국산 접류 분포도’는 생물지리학 분야에서 세계적 걸작으로 꼽힌다.
결혼생활이 파탄날 만큼 오직 나비에만 열정을 바친 그는 생전에 80편이 넘는 나비 관련 논문을 남겼다. 1945년에는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 부장과 국립대학 강사직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1950년 전쟁의 폭격은 그의 분신이던 나비표본과 원고들이 있던 과학박물관을 전소시켰다. 그가 총탄에 쓰러진 날도 과학박물관 재건을 위한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길이었다.
‘나비 박사’ 석주명, 나비만큼 제주 사랑했네

제주는 돌, 바람, 여자 등 세 가지가 많아 ‘삼다도’로 불린다. 다른 건 자연현상이라 이해되지만 여자는 왜 많은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며 그 배경을 연구한 이가 있다. ‘나비 박사’로 널리 알려진 생물학자 석주명(1908∼1950)이다.
국립제주박물관(관장 김동우)이 ‘제주에 나빌레라-광복 80주년 기념 석주명 특별전’을 통해 ‘제주학의 선구자’로서 석주명을 조명해 눈길을 끈다. 평양 출신의 석주명은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립학교에 유학을 가면서 나비 연구를 하게 됐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조선인 학자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한 영문 단행본 ‘조선산 접류 총목록(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을 낼 정도로 나비 연구로 이름을 날리던 석주명은 1943년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 소장으로 부임했다. 2년 1개월 제주에 체재하는 동안 그는 향토사학자 같은 열정으로 제주도의 언어, 사회, 문화를 연구했다.

‘제주도에는 왜 여자가 1.5배 많을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16개 마을 4600가구를 조사했고 남자들이 척박한 환경을 피해 육지와 일본으로 돈 벌러 간 결과라는 걸 밝혀냈다. 조사 결과를 묶은 ‘제주도의 생명조사서’와 함께 ‘제주도방언집’ ‘제주도 문헌집’ 등 세 권을 생전에 발간했다. 또 ‘제주도 수필’ ‘제주도 곤충상’ ‘제주도자료집’ 등 미출간 원고는 사후 20년이 지나 책으로 나왔는데, 모두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전시는 이처럼 제주학 선구자로서 석주명을 조명하는 한편, 나비 연구의 권위자 석주명의 삶을 나비와 관련된 각종 유물을 통해 조명한다. 나비 장식이 있는 고려 시대 귀이개부터 조선 시대 자수 활옷까지 106점이 나왔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구한말 나비 그림의 대가 남계우의 나비 그림이다. 별명이 ‘남나비’였던 남계우의 삶과 예술을 연구해 ‘남나비전’이라는 글을 발표한 바 있는 석주명은 남계우의 나비 그림에서 37종의 나비를 판별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생태 도감이라고 극찬했다.
'한국사 두문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지옥섬 군함도_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1) | 2026.03.29 |
|---|---|
| 식민지 교육의 현실_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 경주 수학여행 (2) | 2026.03.29 |
| 도시 빈민의 출발점 1920년대 토막민 (0) | 2026.03.21 |
| 화신 백화점_근대 소비 문화의 정점 (0) | 2026.03.20 |
| 숭례문_이제 더 이상 국보 1호가 아니다. (2) | 2026.03.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