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빈민의 출발점 1920년대 토막민
외양간같이 누추하고 음습한 토막집의 내부. 온돌방과 그에 접한 부엌. 방과 부엌 사이에는 벽도 없이 그냥 통하였다. 토막 내는 어두컴컴하다.
유치진이 쓴 희곡, 「토막」의 일부이다. 토土는 흙으로 된, 막幕은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로 임시로 지은 집을 의미한다. 구석기인들이 짓고 살았다는 막집의 막과 같은 뜻이다. 일제 강점기에 사람들은 왜 이런 막집을 짓고 살았을까?
일제는 한국을 병합하고 나서 토지 조사 사업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수의 농민들이 경작할 땅을 잃고, 생업을 찾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다. 집을 마련할 돈이 없었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도시 주변의 빈터에 토막을 짓고 살았다. 최초의 토막민촌은 1920년대 초 황금정 7정목(현 서울 중구 을지로 7가)에 형성되었다.
토막민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다. 특히 1925년에 일어난 한강의 홍수로 많은 이재민이 생기자 토막민의 수도 그만큼 많아졌다. 1930년대 들어서는 서울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전국의 시와 읍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1935년 절정에 이른 토막은 전국적으로 약 3,570여 호, 토막민 수는 17,300여 명에 달했다.
토막의 형태는 초라한 흙벽 또는 나무판자벽에 짚 가마니나 풀을 얹은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토막의 내부 구조는 다양하였다. 어떤 토막은 내부가 방과 부엌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대부분이 온돌이었다. 하지만 모든 토막이 이런 구조로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형에 따라 땅을 파고 집을 지은 토굴이 있었는가 하면,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춘 한옥도 있었다. 심지어는 토막에 전세로 사는 일도 있었다.
이토록 어려운 주거 환경 속에서 토막민들은 무엇을 하며 먹고 살았을까? 농촌에서 내몰린 이들에게는 특별한 기술이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날품팔이나 지게품팔이가 그들의 생존 수단이었다. 경성부에서는 이들을 위해 고양시 인근에 주택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돈벌이 때문에 다시 토막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서울에 들어와 처음 자리 잡았던 남산 잔고개 일대에 주로 주거하였다. 한편, 토막민들은 점차 서울 주변으로 빠르게 밀려났다. 서울 중심에서 화려한 백화점을 무대로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누비고 있을 때, 토막민들은 외곽에서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야 했다.
누가 이처럼 비참한 사실을 알아주겠습니까? 아! 그저 죽을 수 없으니 살아가지요.
-「빈민촌 탐방기(2)」동아일보 1924.11.8.
도시빈민 (都市貧民)

도시빈민은 도시 지역 거주 빈민이라 할 수 있기에 도시화 현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도시화 현상은 일제강점기 시작되었고, 그에 따라 도시 빈민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근대 이후의 도시화는 주로 자본주의 사회의 성립과 관련되며 한국에서도 일제강점기 근대 자본주의 유입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일제강점기 도시빈민은 주로 토막(土幕)에서 생활했기에 ‘토막민’이라 불렸다. 토막민 성립 시기는 대체로 1919년 이후로 추정되며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는 토막민을 “하천부지나 임야 등 관유지·사유지를 무단 점거해 거주하는 자”라고 규정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는 『조선』 1932년 10월호에 따르면, 1930년 현재 서울근교의 토막촌은 경성부 고시정(현 후암동)과 도화정, 고양군 신당리와 북아현리 등에 형성되어 있었고, 1940년 말 경성부 사회과 자료에 의하면, 공식적인 토막민의 숫자는 1만 6,344명, 비공식적으로는 3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지속적인 토막민의 증가로 경성부는 교외지역인 홍제정·돈암정·가현정 등에 토막 수용지를설정해 부내에 산재하는 토막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이후 달동네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시빈민은 해방 이후 폭증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해외로 이주했던 수백만의 사람들이 귀환하면서 상당수가 도시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분단으로 인해 월남하는 사람이 급증하면서 서울은 100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가 되었지만, 이를 감당할만한 경제적 토대는 매우 취약했다.
이에 주택, 식량 문제를 위시한 다양한 도시문제가 대두되었고, 도시로 인입된 상당수의 주민들은 빈곤 계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돈암동 등지에는 「혈거부족」이라는 소설이 나올 정도로 토굴을 파고 생활하는 도시빈민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또 한 번 도시빈민이 폭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전쟁을 통해 북한지역에서 대거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별다른 연고가 없던 이들은 주로 도시지역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대규모의 도시빈민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 추진과 산업화 이후였다. 1960년 244만 명에 불과했던 서울 인구는 1980년대 초반 1000만 명을 넘어섰다. 불과 20여 년 만에 인구가 4배 정도 폭증한 셈이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정도의 차만 있을 뿐 다른 지역의 대도시에서도 반복되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1970년대 중반 전체 인구 중 도시 거주 비율이 50%를 넘어서게 되었다. 산업화에 따른 이촌향도(離村向都)가 도시화의 주된 원인이었고, 이들 이촌향도민들이 도시빈민의 대부분을 이루었다.
서울이 초고밀도 도시가 되어가면서 다양한 문제가 불거지자 안양, 성남, 부천 등의 위성도시가 들어서게 되었고, 도시빈민은 수도권 전체로 확산되었다. 특히 광주대단지로 출발한 성남시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1970년 서울의 무허가 판자촌에 거주하던 도시빈민을 반강제적으로 이주시킨 광주대단지는 구릉지대에 천막만 설치해 놓아 아무런 생활기반이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주택부지 분양과 관련된 서울시의 정책혼선으로 주민들의 불만과 분노가 폭발해 대규모 대중봉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불리는 이 봉기는 도시화와 도시빈민 문제가 집중되어 발생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광주대단지 사건 이후로도 도시화와 이촌향도는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고, 도시빈민 문제 또한 여전했다. 이에 다양한 도시빈민 운동이 발생했고, 1980년대 이후 도심지 재개발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철거반대 투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상계동, 사당동 등은 대표적인 철거반대 투쟁이 전개된 지역이었다.
1998년 금융위기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 등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화되면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어 도시 중산층이 감소하고, 도시빈민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토막민

1. 개요
토막민(土幕民)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도시 빈민층을 지칭하는 용어로, 주로 서울(당시 경성)과 같은 대도시 외곽에서 '토막(土幕)'이라 불리는 임시 움막에 거주하던 사람들을 의미한다. '토막'은 흙과 천, 판자, 풀 등으로 만든 비공식·임시 주거 형태로, 현대의 쪽방이나 비닐하우스형 거처의 원형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일용노동자, 실직자, 농촌 이주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도시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의 그림자로 존재했다.
2. 어원 및 정의
土(흙 토) + 幕(장막 막): 흙과 천막, 잡자재로 만든 가건물
민(民): 거주민, 즉 그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
토막은 법적 주택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도시계획에도 포함되지 않은 비공식 빈민 주거지였다. 따라서 수도, 전기, 위생시설이 전무했으며, 화재, 전염병, 범죄의 위험에 자주 노출되었다.
요컨대 토막민은 조선인 빈궁계급이 도시의 일우(一隅)에 군거(群居)하여 비참한 빈민굴을 형성하게 된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도시영세민에 불과한 그들에게 무엇 때문에 토막민이라는 특수한 명칭을 붙이게 되었는가. 이처럼 굴욕적인 명칭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밝히기는 어려우나 토막민을 조선의 다른 도시영세민과 구별하는 유일한 상이점은 그들 토막민이 토지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시내나 교외를 불문하고 제방 · 강바닥(河原) · 다리밑 · 산림 등의 유한지(遊閑地)를, 관유지 · 사유지를 가릴 것 없이 무단으로 점거하여 특유의 극히 초라한 움막을 지어 살고 있으며 날마다 달마다 그 수가 늘어가서 마침내는 비참과 혼잡과 불결을 특색으로 하는 이른바 토막부락에까지 발전하는 것이 상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토지의 불법점거는 오로지 그들의 절박한 빈곤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당국으로서는 해마다 증가하는 토막가옥의 그칠 줄 모르는 범람이 도시미관상 및 도시위생상 커다란 문제라 생각하고,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으며 이러한 도시영세민을 토막민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하게 되고 이 명칭이 점차 일반에게도 사용되어지고 있다.
경성부에서는 토막민을 「하천부지나 임야 등 관유지 · 사유지를 무단점거하여 거주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토막의 어원은,「막(幕)」은 조선어의「막」에 해당하는 자(字)이며 주막 · 원두막 · 오막살이 등의 막(幕)과 어원이 같으며 「토(土)」는 토벽 또는 황벽(荒壁)이라는 정도의 뜻일 것이다. 요컨대 「토막(土幕)」은 허술한 움막을 가리키는 말이고 「토막민(土幕民)」은 그속에 거주하는 자라는 뜻이다.
오늘날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토막의 발생은 조선에 근대자본주의가 유입된 한일병합 이후의 일에 속하며 또 그것이 하나의 사회문제로 다루어지게 된 것은 더욱 훗날의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정 8년(1919, 기미)에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어사전에서 아직 토막이라는 낱말이 수록되지 않았음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3. 역사
3-1 도시화와 토막민의 등장
일제는 조선에서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도시 근대화 정책을 시행하며, 조선인보다 일본인 거주민과 식민 관료층을 우선시하는 차별적 도시계획을 추진했다.
1920년대 이후 경성, 평양, 대구, 부산 등 주요 도시 인구 급증과 산업 노동자 수요와 함께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실업자·이농민 급증했다. 실제로 1921년에 경성부가 행한 가옥조사의 결과, 경성에 있는 가옥은 3만9천호이고 한 호에 월세, 전세의 형태로 거주하는 가구를 모두 합해 5만4천호가 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가구 수에 비할 때 1만5천호 정도의 집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 내 공식 주택은 일본인 및 고위층 위주로 공급이 이뤄졌고, 결과적으로 조선인 빈민층은 도시 외곽의 빈 땅에 비공식 거주지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환경에서 토막민이 대거 발생했다.
1936년 경성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토막민이 있었으며, 이들을 포함한 실업자와 세궁민 등이 경성 전체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했다.
3-2 생활수준
① 당시 서울토막민의 약 3분의 2는 빈농으로서 이촌향도한 사람들이며 나머지는 원주민 중의 빈곤생활자들이다.
② 그들 토막민을 인구론적으로 관찰하면 20∼30대의 청장년층의 수는 적고 혼인은 제약되어 출생률은 낮으며 자녀 사망률이 매우 높아 극빈자 특유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③ 토막민과 다를바 없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는 조선의 농촌 · 도시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앞으로 토막민은 이들을 원천으로 하여 계속 강하게 늘어갈 것이며 특히 농촌으로부터의 유입이 성해질 것으로 추측되는 바이다.
④ 토막민들의 직업은 날품팔이(일용노무자) · 인부 · 직공 · 행상 등 육체노동자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특수기능보유자는 대단히 적다. 근년(近年)의 물가와 노임(勞賃)의 앙등(仰騰)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하루 평균수입은 남자 1원 20전, 여자 56전에 불과하다. 여자의 취업률은 대단히 낮다.
⑤ 총지출중에서 음식비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총수입액의 71%에 달한다.
⑥ 부채(負債)는 1호당 평균 34원8전이며 빈곤의 도가 지나쳐서 빚(차금(借金))을 낼 수 없는 자도 적지 않다.
⑦ 주거생활의 비참함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이고 집이라는 것은 이름뿐이고 임시가설물 같은 것이 많다. 한 가구가 한방만 쓰는 집이 총호수의 80% 이상에 달하고 1인당 평균거주평수는 0.45평(1.485㎡)에 불과하다.
⑧ 1인당 의류수는 하동복(夏冬服)을 합쳐 3.5벌밖에 안되며 한벌 옷으로 지내는 자가 과반수이다. 1호당 평균 침구수는 이불 1.6매, 요 1.4매에 불과하다.
⑨ 토막민 성인남자가 하루에 섭취하는 총열량은 약 2,770칼로리이다. 부식물은 일반적으로 단백질이나 지방질이 적고 된장과 같은 가장 값싼 단백원마저 충분히 섭취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⑩ 토막민의 80% 이상이 한글도 읽지 못한다.
⑪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 토막민은 아무런 적극적 희망을 가지지 않고 극빈생활에 깊이 빠져 오로지 그날 그날의 생활에만 급급하고 있다.
⑫ 토막민의 생활상태는 의식주 기타 모든 측면에서 고찰하여 가장 비참하며 일본영토내의 제영세민중 최하위에 위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⑬ 이들 토막민에 대하여 관할관청(경성부청 기타)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이 없고 그 장래는 참으로 우려할 상태에 있다
4. 대표적 토막민 지역
경성부 성북동, 청량리, 동대문, 창신동, 신설동 일대
한강변 하류, 청계천 하류, 마포 일대 등 수변지역
철도 주변: 철도노동자 및 실직자 중심의 토막촌 형성
5. 조선총독부의 대응
5-1 부정적 시선과 통제
조선총독부는 토막민을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존재로 간주했다. 언론과 관공서는 토막촌을 "풍기문란, 범죄 발생지, 전염병의 온상"으로 묘사했다.
1930년대 이후, 도시 미화 및 위생 정책 명목으로 토막촌 강제 철거가 자주 이뤄졌다. 일부 구호 정책은 있었지만, 근본적 대책은 거의 없었다.
5-2 차별과 낙인
조선 상류층과 일본인 사회에서는 토막민을 불결하고 게으른 사람들로 간주됐다. 이들은 취직, 교육, 보건 등에서 지속적인 차별을 받았으며,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로 밀려나 있었다.
5-3 통계와 보고
조선총독부 통계(1930년대 중반 기준)에서는 경성 외곽의 토막 거주 인구를 약 3만~5만 명 수준으로 파악했으며, 전체 경성 인구의 5% 안팎을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비공식 거주지였던 만큼 실제 인구는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6. 관련 사건
이와후치(岩淵幸三郞)의 토막촌 철거사건(1933)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부동산 업자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유망한 토지를 확보하기 위해 토막촌 철거가 진행되었다. 일제는 토막민을 부동산 거래와 도시 개발의 장애물로 간주했으며, 미관, 위생, 교육상으로도 부정적 영향을 준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920년대부터 대도시 일대 토막민을 한 곳에 수용하고 기존 토막을 철거하는 '토막정리사업'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주택 건설을 명분으로 진행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7. 문학과 기록
1930년대 신경향파 문학에서는 토막민의 현실을 묘사한 작품들이 등장했다. 염상섭, 현진건 등의 작품에서 가난, 실업, 주거 문제를 중심으로 한 토막민의 삶이 종종 배경으로 활용되었다.
염상섭의 단편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는 도시 빈민의 주거 문제가 배경에 등장
박태원, 채만식 등의 소설에서 토막민의 비극적인 삶이 리얼리즘적으로 묘사됨
유치진의 <토막(희곡)>. 2막으로 구성된, 토막민들의 애환을 그린 단막극.
8. 토막민 구제 사업
1930년대 후반 일부 민간 자선단체 및 종교단체 중심으로 토막민 구호 활동 진행됐다. 그러나 규모가 작고 단기적인 전시행정에 가까웠고, 식민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큰 효과는 없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토막집을 정리해 나갔다.
9. 이후의 변화
광복 후에도 토막민은 계속 존재했으며, 해방 직후~한국전쟁 시기에는 전쟁 난민과 합쳐져 더욱 확산됐다. 이후 1960~70년대 도시정비사업을 거치며 상당수가 달동네나 쪽방촌으로 흡수된다.
토막민 이야기
토막민! 이는 일제시기에 도시 빈민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이들 토막민이 출현하게 된 것은 농민의 도시집중화가 심해진 1920년대였다. 이렇게 토막민들은 도시 노동자 집단을 형성하면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노동숙박소 같은 주거형태가 나타났다. 이 노동숙박소의 고객은 뜨내기 노동자들이었다. 경성에는 종로3가와 서대문에 비교적 큰 노동 숙박소가 있었다. 당시 숙박비는 5전이었고 방 하나에 열 명 정도가 누울 수 있는 비좁은 시설임에도 매일 100여명 정도가 묵고 있었다.
노동숙박소는 좁은 곳에 밀집해 있었기에 위생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오물과 악취가 질펀한 노동숙박소와는 달리 일본인들의 기숙사나 사택은 그야말로 판이한 모습이었다. 도시에는 이렇게 민족별, 계층별의 모순이 삶의 공간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식민지 시기 경성은 크게 일본인 중심의 남촌과 조선인 중심의 북촌으로 이원화 된 모습의 도시였다.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은 진고개였다. 개항 이래 경성으로 이주해온 일본인들의 거주지 진고개는 조선의 패망과 함께 경성의 번화가가 된다. 이곳으로 도시경제권이 집중되면서 진고개는 식민지 경성에 있는 작은 도쿄로 불리워졌다.
전통적 조선인 거주지역은 시전이 있던 북촌의 중심 종로였다. 시전 상인들의 후예였던 종로상인들은 남촌의 일본인들에게 상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 했지만 자본주의적 대중소비가 확대 될수록 남촌과 북촌의 간극은 더 커져만 갔다. 경성도 지배자 왜인들의 힘과 권력의 상징인 관공서와 지배민족 일인들의 도시 상점가가 늘면서 공간적 무게중심이 재편되어갔다. 총독부 건물과 남대문로로 이어지는 명치정으로 불린 진고개를 중심으로 제국주의 식민지적 도시화가 진행되었다. 을지로 이북의 조선인 거리는 겨우 도시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배자들의 주거지 남촌과의 경쟁은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서울 변두리에는 토막민들의 거주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독립문이나 동대문 외곽의 홍제동, 돈암동, 아현동, 신당동 등지는 살아남기 위해 몰려든 토막민들의 집단거주지가 생겨났던 것이다. 1920년대 말에는 세계적 경제 공황이 겹치면서 농민들의 몰락과 함께 도시 빈민층으로 전락되어 토막민의 명칭이 일반화 되고 있었다.
도시빈민의 시작점, 일제강점기 '토막민'을 아시나요?

플래시백
“아~ 그저 죽을 수 없으니 살아가지요.”
1924년 11월 경성 광희문 밖 신당리를 찾아간 동아일보 기자에게 주민들이 털어놓습니다. 신당리는 동아일보가 11월 7일자부터 7회 연재한 ‘빈민촌 탐방기’에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었죠. 일제의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으로 농촌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모여든 대표적 지역이었습니다. 1924년 같은 지독한 가뭄은 도시 이주를 더 강하게 몰아붙였죠. 1925~1930년에 매년 4만 명이 농촌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도시는 절망 속 농민들을 받아주는 넓은 품이 아니었죠. 가장자리에 멈춰선 이들은 언덕이나 산비탈, 성벽 밑에 흙을 파낸 뒤 바닥에 멍석을 깔고 위에도 이리저리 거적을 덧댄 ‘집 아닌 집’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토막(土幕)’입니다. 땅은 누구 소유건 상관하지 않았죠. 이내 토막 옆에 토막이 하나둘 이어지는 토막촌이 형성됩니다. 토막이라는 말은 일제가 나라를 빼앗은 1910년 무렵까지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하니 새로운 현상이었죠.
토막이 300여 채 들어선 신당리는 3년 전만해도 별로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이젠 콧구멍만한 방에 무려 네 가족까지 살을 맞대며 생활했죠. 기름때 절은 누더기 이불 하나로 딸, 아버지, 며느리 할 것 없이 잠을 잤습니다. 일 년 가도 흰 쌀밥과 고기는 구경하지 못한 채 죽을 먹었고요. 그나마 아침과 저녁뿐이었죠. 금 간 바가지는 밥그릇도 됐다가 설거지통도 되고 손과 발 씻는 대야 노릇도 했습니다. 비라도 오면 방바닥은 금세 진흙밭이 됐죠.

조각보 같은 누더기 옷에는 이가 들끓어 틈만 나면 손톱으로 눌러 죽이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학교엔 근처도 가보지 못한 아이들은 커서 부모처럼 지게꾼이 되고 막벌이꾼이 돼 빈곤을 물려받게 될 운명이었죠. 소설가 현진건이 1924년 발표한 ‘운수 좋은 날’의 주인공 인력거꾼은 토막민보다는 형편이 나았습니다. 동대문 밖 공동묘지에 들어선 토막촌의 한 노파는 “아이고 이제는 너무 추워서 머리가 다 아파 죽을 지경”이라고 울음 섞인 넋두리를 했죠.
토막민 같은 빈민들은 아플 때 굶주림 못지않은 고통을 느낍니다. 참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동아일보는 이 해 7월 초 여름 순회진료강연단을 꾸렸습니다. 조선총독부의원 의사 4명과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8명으로 2개 반을 편성해 10일 간 남북으로 각각 진료와 위생강연을 구상했죠. 지면에 알림과 사설까지 내면서 추진했지만 출발 직전 총독부가 불허 결정을 내렸습니다. 동아일보의 약속을 믿고 기대한 이들의 허탈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동아일보는 취재한 그대로를 7월 14일자에 실었습니다. 위생과장은 도마다 (무료 진료해주는) 자혜의원이 있고 군마다 공의(公醫)가 있으니 순회진료는 필요 없다고 했죠. 순회진료를 하더라도 신문사 계획을 따를 일은 아니라는 말이 진짜 속내였을 겁니다. 기어이 하려거든 개업 의사를 불러 하라고 했죠. 총독부의원 의사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작년에 오사카마이니치의 순회진료는 왜 허락했느냐고 되묻자 ‘그땐 책임자가 달랐고 작년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했죠.
총독부의원 소속이라도 휴가를 내고 가는데 왜 그러느냐고 다시 묻자 ‘휴가 중이라도 총독부의원 소속이지 않느냐’고 억지를 부립니다. 총독부의원과 경성의학전문학교는 이미 허락했다고 하자 ‘두 기관이 마음대로 허락할 수 없는 일’이라고 대답하죠. 민간사업이지만 취지가 좋으니 총독부의원 의사라고 안 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끈질기게 따지자 대답이 막힌 위생과장은 ‘경무국장의 결정’이라며 떠넘기고 맙니다.

동아일보는 이해 12월 25일자 사설에서 걸인이 생기는 원인은 개인이 아니라 걸인을 만들어낸 사회조직이나 경제조직에 가장 큰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영국이 시행한 걸인 구제책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고 소개했죠. 하지만 총독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걸인이나 빈민은 보이지 않게 눈앞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원칙이 총독부의 방침이었죠. 일제강점기 내내 빈민이 늘어나게 된 배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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