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두문자

식민지 교육의 현실_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 경주 수학여행

by noksan2023 2026. 3. 29.
반응형

식민지 교육의 현실_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 경주 수학여행

 

 

 

 

사진 속 학생들은 신라 유적인 첨성대에 올라가서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복에 중절모를 쓴 선생님인 듯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고, 말을 탄 사람도 있는 것을 보면 공식적인 기념사진인 것 같다. 

 

고등보통학교는 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정도의 학교였다. 보통학교란 보통 수준의 교육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한국인은 식민지 백성이기 때문에, 보통 수준의 교육만 받으면 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이 다니는 초등학교는 보통학교, 그다음 단계가 고등보통학교였다. 이에 반해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는 소학교, 중학교, 다음 단계인 대학교를 연상할 수 있도록 학교 이름을 붙였다. 

 

1930년대 초반까지도 보통학교에 다니느 학생은 학령 아동(학교에 갈 나이가 된 아동) 100명 중에서 17명 정도였고,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2~3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일반적인 한국인의 경제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사진 속의 학생들은 당시 한국인 중에서는 꽤 잘 사는 축에 들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워낙 소수였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때 고등보통학교 학생은 대단한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여러 가지 민족 운동 또는 사상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학여행은 근대 교육이 시작된 1900년대 초부터 시행되었다. 수학여행이 당시에는 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던지, 일정과 행선지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1921년 10월 19일 자에는 중앙생 제천단 참관이란 제목으로 중앙학교 학생들이 강화도로 수학여행 간 것을 실었다. 이후 경주, 부여, 개성 등으로 수학여행을 갔다는 기사도 실렸다. 이 지역들은 모두 민족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가 이러한 수학여행을 두고 보지만은 않았다. 1920~1930년대의 수학여행은 만주, 일본과 같은 국외로 대상지가 확대되었다. 견학 장소도 만주에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전적지, 만주에 진출한 일본의 근대적인 공업 시설, 일보느이 유명한 신사, 현대화된 일본 도시들이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한국을 식민 지배하고 있던 일본의 국력을 실감했을 것이다.

 

당시 수학여행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 학교 수업료는 월 1~2원 정도인데, 수학여행비는 평균 10원 정도가 들었기 때문에 수학여행은 사치라는 비판을 받았다. 1920년대 「별건곤」이라는 잡지에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지에 관한 토론이 게재될 정도였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 수학여행은 아주 소수의 학생만이 경험한 특별한 행사였다. 사진 속에서 첨성대 위에 올라가 한 손을 치켜 든 학생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휘문고등학교

 

 

 

 

휘문고등학교는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를 말한다. 

 

1. 연원 및 변천

 

1906년 5월 1일 민영휘(閔泳徽)가 서울 종로구 원서동 관상감(觀象監) 터에 교사를 신축하여 휘문의숙(徽文義塾)으로 개교하였다. 고종으로부터 ‘휘문’이란 교명을 하사받았으며, 학생 수는 고등소학과 65명, 중학과 65명이었다.
본래 휘문의숙의 전신은 1904년 9월민영휘가 구국사업의 일환으로 종로구 경운동에 있던 자택에 개설한 광성의숙(廣成義塾)으로, 학생 수가 증가하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면서 학부(學部)의 정식 인가를 받아 휘문의숙으로 개교하게 된 것이다.

1910년에 제1회 졸업생 32명을 배출하였으며, 당시 교과목은 수신ㆍ한문ㆍ역사ㆍ지지(地誌)ㆍ물리ㆍ산술ㆍ작문ㆍ영어ㆍ도화ㆍ체조 등이었다. 개교와 함께 인쇄부인 휘문관(徽文館)을 두어 모든 교재를 자체 출판하였으며, 저작자는 모두 휘문의숙의 교사였다. 1908년부터 교복을 착용하였고, 1910년 3월 휘문의숙교우회가 발족되었다.

1918년 4월휘문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22년 4월 수업연한이 4년에서 5년으로 연장되었다. 1938년 4월휘문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46년 7월 수업연한이 6년으로 개편되었다.

1951년 9월 학제개정에 따라 휘문중학교와 분리되어 휘문고등학교로 개편되었으며, 1977년 9월 같은 구내에 있던 휘문중학교가 서울 강남구 삼성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1978년 1월서울시 강남구 대치동 현재의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96년『휘문 90년사』와 2006년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휘문 100년사』를 간행하였다.

 

2. 기능과 역할

 

교훈은 ‘큰 사람이 되자’이다. 지ㆍ덕ㆍ체를 겸비한 창의적 인재 육성을 교육목표로 해서 영어전용구역(English Only Zone), 영어 전용교실, 원어민 교사 배치 등 영어 공교육 강화와 학교 선택권 확대, 방과후학교 활성화, 학교생활 안정망 구축 등에 역점을 두고 교육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학생운동에 있어서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사학의 아성답게 3ㆍ1운동 당시 만세운동에 앞장서 3명이 옥고를 치룬 기록이 남아있다. 1921년 한글학회의 모체가 되는 조선어연구회에 임경재(任暻宰) 교장과 국어교사 이병기(李秉岐)ㆍ권덕규(權悳奎)가 참여하면서 학교 강당에서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8년 교장의 친일적 태도에 항거하고 조선어 시간의 연장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가 30여 명이 퇴교조치 되었으며, 1930년에는 광주학생사건이 발생하자 400여 명의 학생이 동조시위에 참가하여 수십 명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계발활동으로는 현재 보컬반ㆍ애니메이션반ㆍ천체관측반ㆍ합창반 등 60여 개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다. 10월 중순에 열리는 종합축제 ‘휘문의 밤’에서는 문예반의 작품발표회와 1913년 고종이 악기를 하사하여 창설된 기악반의 연주회, 방송반의 방송축제를 비롯하여 각 동아리의 전시와 공연이 펼쳐진다. 1961년부터 학생들의 창작 의욕을 북돋아 주고자 희중문학상(稀重文學賞)을 신설하여 학생들의 작품을 매년 시상해 오고 있는데, 최우수 작품에는 박종화(朴鍾和)의 월탄상(月灘賞)이 수여된다.

운동부로는 농구부와 1907년에 창설된 야구부가 활동하고 있다. 야구부는 1996년 제30회 대통령배 전국야구대회와 제51회 청룡기 전국야구대회를 석권하였고, 농구부는 신동파ㆍ서장훈ㆍ현주엽 등을 배출하는 등 고교 농구계의 강자로 자리잡고 있다.

학술활동으로는 문예반이 1923년에 교지 『휘문(徽文)』, 영어반이 1955년 고등학교로는 최초로 영자신문인 『The Whimoon Times』, 학보반이 1958년에 교내신문 『휘문』을 창간한 후 현재까지 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있다.

 

3. 현황

 

2010년 현재 47학급에 총 1,989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교직원은 107명이 재직하고 있고, 102회 졸업식을 거치면서 총 3만 3,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수학여행 명소와 식민 교육의 기획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 한 여행 가운데 가장 여행단의 규모가 컸던 사례는 단연 수학여행(修學旅行)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학생들의 단체 여행인 ‘수학여행’은 일본에서 1886년 도쿄 고등 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가 실시한 원거리 소풍에서 유래하였으며,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87년 『대일본 교육회 잡지(大日本敎育會雜誌)』 54호라고 한다. 중국과 영국에 유학한 적이 있고 한국 감리 교회를 일으킨 양주삼(梁柱三)의 글 가운데 수학여행이 실시된 곳은 일본과 조선뿐이라고 하였던 것도 이러한 정황을 이해하는 데에 다소 참고가 된다.

일본에서 실시된 수학여행은 현지(實地)에서 사물을 조사하고 표본을 얻는 것과 채집, 지리 역사 탐구를 포함한 긴 행군을 의미하였다. 오사카 부립 심상중학교(大阪府立尋常中學校)의 1894년 당시의 수학여행 규칙 제1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학여행의 주요 목적을 학생들의 극기(克己)와 단체 훈련에 두어 군국주의(軍國主義) 색채가 농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1890년 초반부터 각급(各級)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실시하였고, 러일 전쟁(1904∼1905) 이후에는 중국과 한국으로의 해외 수학여행도 실시하였다.

한편 구한말의 신문 기사 속에서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처음 보이는 것은 『황성신문(皇城新聞)』 1901년 7월 26일자의 ‘아국 동양어 학교생(俄國東洋語學校生) 수학여행’이라는 기사인 것 같다. 조선에서의 수학여행은 『황성신문』 1909년 5월 9일자에 보성학교 학생이 평양 수학여행을 한다는 기사가 보이고, 1911년에 경상북도 문경군 금룡사에서 주지 승려가 학생들을 대동하고 부근 사찰로 수학여행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912년 10월 25일에는 중앙 학교 학생 100여 명이 평양과 개성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황성신문』 1909년 10월 26일자에는 일본인 경성 소학교와 고등 여학교에서 수원과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리고 『매일신문』 1911년 4월 23일자에는 대구 거류민단(居留民團) 학교 생도 72명이 2명의 교원이 인솔한 가운데 대전을 시찰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이 보편화되는 것은 신문과 잡지에 수학여행 관련 보도가 빈번하게 게재되고 있는 정황으로 보아 3·1 운동 이후로 생각된다. 1920년 5월 21일부터 25일까지 보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경주와 개성(108명)으로 수학여행을 하였으며, 휘문 고등 보통학교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경주와 개성으로 6월 7일부터 사흘 동안 수학여행을 하였다. 보성 전문학교 학생은 1922년 상과 재학생이 개성, 금강산,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고, 1924년에는 처음으로 만주까지 수학여행을 하였다. 백천 창동 학교에서는 3, 4학년생이 1박 2일로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하였으며, 개성 송도 고등 보통학교는 1학년 150여 명은 사흘 동안 평양으로, 2, 3학년 90여 명은 나흘 동안 원산으로, 4학년 20여 명은 나흘 동안 경주로 각각 수학여행을 실시하였다. 경상북도 상주 공립 농잠학교(상주 대학교의 전신) 학생은 1924년부터 수학여행을 실시하였는데, 1학년은 부근 지역을, 2학년은 전국의 명승지를, 3학년은 일본과 만주 지역을 여행하였다. 1923년에 개성 송도 보통학교는 1학년 170여 명이 평양으로, 2학년 198명은 함흥으로, 3학년 100여 명은 부여로, 4학년 50여 명은 경주로, 5학년 19명은 펑톈(奉川)으로 각각 수학여행을 다녀왔다.359) 개성 학당 상업학교 학생 21명은 1926년 5월 11일부터 17, 18일까지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360) 수학여행 장소는 학년별로 달랐는데, 저학년은 학교 인근 지역으로, 고학년이 될수록 국내 원거리로 떠나 경성, 경주, 평양, 부여 등지를 여행하였다. 고등 보통학교와 사범학교 등은 졸업 학년이 되면 만주나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군산 메리 물턴 여학교에서는 경성 수학여행을 요구하여 동맹 휴학(同盟休學)을 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수학여행을 학창 시절의 통과 의례로 여겼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의 마음이 들뜨고 흥분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1921년 10월 12일에 인천 수학여행을 떠난 보성 소학교 일행은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들들들 굴러 가는 기차 바퀴는 종일토록 쉬지 안코 다라나도다. 십리만리 갈 길이 비록 멀으나 살과 가티 신속히 득달하누나”라는 기차가(汽車歌)와 “경개 조흔 산과 물은 재가 사랑함이로다 사면강산 단이다가, 조흔 곳 왓네”라는362) 탐승가(探勝歌)를 목청껏 부르며 ‘발을 구르며 손을 휘두르며’ 들뜬 마음으로 여행길에 나섰다. 경주 수학여행을 간 동덕 여학교 학생은 다음과 같이 여관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밥을 먹고, 밤중에 몰래 친구들과 수다를 떨 계획을 세웠다가 피곤하여 자버린 탓에 다음날 전날 밤참으로 준비해 놓은 찬밥을 먹느라 고생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

 

 

 

밥, 고생, 수학여행기 중에서

 

 

 

수학여행길에 남은 에피소드가 어디 이뿐이랴? 일제 강점기에도 수학여행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기는 행사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한편 그들이 머문 여관은 어떠하였을까? 1920년 5월 4박 5일의 일정으로 인솔 교사 2명과 18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보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이 대구에서 머문 여관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대구 여관은 어찌 온돌만 놓고 불 넣을 줄 모르는지, 사명당(四溟堂) 사처는 명함도 못 드리게 차고, 음식품은 가액(價額)만 받으면 그만이고 여객의 편의는 도시 부지부관(不知不關)이고…… 다 얼어 죽어라 하는 듯한 삼층 냉돌에서 잠을 잤다.”고 하며 개선을 촉구하기도 하였다.364)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여관의 숙박료가 4, 5원 정도인 데 비하여 조선인이 경영하는 여관은 1원 내외였다는 점, 더욱이 수학여행의 개인당 총비용은 10원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학생들의 수학여행에서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저렴한 여관을 이용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 이러한 수학여행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와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여행 경비가 가계(家計)에 부담이 되고 여행이 주마간산식(走馬看山式)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그 폐단이 없지 않았지만, 『동아일보』 1936년 5월 5일자를 보면 매일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오는 초·중등 학교의 수가 10여 개로 3,000여 명 이상이 개성을 찾고 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중일 전쟁(1937) 무렵까지는 수학여행이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몇몇 학교의 수학여행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수학여행의 명소는 경주, 부여, 개성, 평양, 인천(강화도), 경성 등지였다. 이러한 지역은 대개 유서(由緖) 깊은 사적지(史蹟地)라는 공통점이 있다. 왜 이러한 여행지를 선호하였던 것일까? 이는 아무래도 조선 총독부의 교육 방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일 병합 초기의 교육 방침을 보면, 특히 수신(修身) 교육에서는 고대 일본과 조선의 깊은 관계를 일본 역사에 비추어 잘 설명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社說, 「朝鮮敎育に就て」, 『敎育時論』 958號, 開發社, 1911年 11月 25日 ; 『近代日本のアジア敎育認識 資料篇』 第1卷, 龍溪書舍, 254∼155쪽.

 

 

 

이러한 의도를 기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고대에 일본의 속국(屬國)이었던 조선이 다시 일본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고대 일본의 한국 지배설을 ‘역사상 증명되는 사실’이라고 강조하여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하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폈다.

 

한편 1915년에 조선 총독부 학무국(學務局)에서 주관한 공립 보통학교 교원 대상 강습회 강연에서도 조선사 강의를 담당한 오다 쇼고(小田省吾) 총독부 편집 과장이 고대사의 시기 구분을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있을 정도로,369) 이러한 고대사 인식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역사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1921년 신학기부터 보통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국사 교과서 『심상소학 국사 보충 교재(尋常小學國史補充敎材)』 1권의 내용으로도 연결된다.

 

결국 기다 사다키치나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고대사 인식이 그대로 교과서에 투영되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학생들에게 주입하였다.

수학여행은 이러한 교육 목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일제 강점기의 수학여행지 선정에는 식민 통치 당국이 기획한 정치적인 의도가 농후하게 작용하였다.

수학여행의 목적이 주로 역사 이해에 있었음은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면 1920년 봄, 경주로 여행을 떠난 보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 신경수는 수학여행의 의미에 대해 “지리로 배운 것을 실지로 보아 넓히기 위함”이고 “지리에 승지(勝地) 강산이며, 사학(史學)에 미술 고적과 인정 풍속을 실탐(實探)하야 알고 증명코저 할진대 여행을 놓고는 구하야 얻을 곳이 없다.”고 하고 있다. 1931년 수학여행의 존폐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의견을 제시한 주요섭(朱耀燮)도 수학여행의 목적은

 

1. 수학여행’이라는 글자 뜻대로 수학하기 위한 여행

2. 휴양

3. 쾌락

 

이라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점도 역시 조선에서의 수학여행이 주로 명승고적을 통한 역사 이해에 중점을 두고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수학여행의 주체인 학생들은 여행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들의 여행기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1920년 5월 4박 5일의 일정으로 인솔 교사 2명과 학생 18명으로 구성된 보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은 5월 21일 오전 7시 50분에 출발하여 대구 달성 공원을 돌아보고 대구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22일 아침에 경주로 가는 경편 열차를 탄다. 경주에 도착한 후 고물 진열관(古物陳列館)을 견학한다. 학생 신경수는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유물은 봉덕사종(奉德寺鍾, 성덕 대왕 신종)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런데 귀성길에는 토함산에서 울어 오는 산새소리가 고국의 원한을 하소연하는 듯하였고 “우리 졌던 천년 고화(古花) 다시 피는 그 날까지” 잘 있으라는 인사를 남기고 경주역을 떠난다.373) 그들은 번영하던 신라시대와 다른, 현재 조선의 식민지적 상황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점은 그들에게 결과적으로 망국 조선의 국민으로서 착잡한 심경을 안겨 주는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배재 고등 보통학교 수학여행단은 경주 고물 진열관 관람으로 경주 수학여행을 시작한다. 제1 고물 진열실에는 수천 년 전의 석기(石器) 등을, 제2호실에는 신라시대 기와를, 제3호실에는 석비·석등 등을 진열하였는데, 수년 전에 분황사 9층탑을 수선하는 중에 발견된 돌조각, 아미타불 상, 돌사자, 여의륜관음상(如意輪觀音像), 이차돈 공양 석동(異次頓供養石棟) 등이 유명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분황사 9층탑은 임진왜란 때 손상을 입고 그 후에도 쇠락하여 3층만 남은 것을 1915년 조선 총독부에서 개축하여 원래 모습은 아니라고 적고 있다. 쇠락한 조선의 문화재를 복원시키고 보호해 주는 주체는 바로 조선 총독부였다. 그러한 현실 또한 식민지적 현실을 되새기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1921년 10월 12일에 인천 수학여행을 떠난 보성 소학교 일행은 인천에서 ‘편리한 증기선’을 타고 강화도 전등사(傳燈寺)로 가기를 기대하였으나 부득이 ‘목선(木船)’을 타고 갔다고 한다. 강화도 근처의 여러 섬을 지날 때는 조선이 당한 외침(外侵)의 역사의 한복판에 강화도가 있었고 오늘날 식민지적 상황의 직접적 단서가 강화도에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비통한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니산의 제천단(祭天壇)을 보면서도 “이 보단(寶壇)이 영미(英米)나 일본에 잇서 보라, 그들이 얼마나 힘 잇게 보존하얏겟는가”라고 생각하고 “단 군 한아버지의 엄책(嚴責)이 나리는 듯하여” “우리 일행은 다 각기 아모 말업시 침묵리에 후생(後生)의 무능을 자책하면서 장래를 위하야 의분(義奮)을 내엇섯다.”고 한다.

 

많은 청소년이 수학여행을 통해 조선의 명승지를 찾았지만 그 여행은 그들에게 즐거울 수만은 없는 여행이었다. 대개 고대 일본과 교류가 있었다고 하는 신라의 옛터와 외침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강화도를 보면서 그들은 망국의 현실을 더 깊이 느껴야 했고, 부여를 찾아 고대에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깊었음을 예시하는 유물들을 접하고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생각하며 귀향하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근대 여행의 형태가 구성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박람회, 공진회 등 사람들의 방문을 유혹하는 근대 문물의 장치, 철도와 연계한 명승고적의 재배치, 사계(四季) 여행 코스의 기획 등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나라 사람도 여행의 중요한 소비 주체로 자기매김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숙박 시설은 일본인이 주도하였고 주요 관광 명소에는 호텔이나 일본식 여관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숙박 시설 은 청결이나 친절 등의 면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숙박 시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여행자가 증가하면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여관은 급속도로 증가해 나갔던 것도 사실이다. 경성에 위치한 조선 호텔은 대개 외국인과 일본인 투숙객이 많았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조선 호텔은 문명을 맛볼 수 있는 장소로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여행자들은 벚꽃 명소를 소개하는 신문 기사를 통해, 혹은 관앵단 모집에 응하여, 혹은 열차 할인에 현혹되어 봄에는 이들 명소를 찾았다. 그리고 일본식의 유카타(浴衣)가 제공되는 온천을 찾아 휴식을 즐겼으며, 관계 당국과 언론사가 기획해 놓은 관광 명소 선전에 고무되어 온천과 명승지를 찾았다.

수학여행은 ‘기획된 여행 코스’에 입각하여 집단적으로 수행된 대표적 단체 여행이었다. 청소년들은 긴 여행에 들떠 설렌 마음으로 명승지를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그들의 마음은 그저 보람 있고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명승지에서 그들은 일제의 조선 지배의 정당성을 암암리에 유도하는 장치에 구속되어 결과적으로 식민 조선의 현실을 긍정하고 체념하는 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 벚꽃, 온천욕, 여행지의 스탬프 같은 일본 국내에서의 여행 방식이 식민지 조선에서도 그대로 전개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조선의 여행자들도 익숙해진 모습이 엿보인다. 그리하여 조선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도 이전의 조선이 아닌 일본인 통치자의 기획에 의해 새롭게 재편성된 ‘관광 명소’로서의 ‘식민 조선’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여행의 공통점은 여행의 방식에서 여행자들은 ‘문명’적인 청결함과 편의와 안락함을 점점 선호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도 ‘기획된 근대 여행’의 틀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안착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제2차 조선교육령

제2차 조선교육령(第二次朝鮮敎育令)은 1922년 2월 공포한 일본의 식민지 교육 정책이다.

 

1. 시행

 

조선 총독부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교육방침에 따라서 1921년 1월 임시 교육조사위원회를 개최하여, 일본 본토의 교육제도에 준거한 학제의 개혁을 심의케 했고, 1922년 2월에는 교육령을 전면 개정하여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였다.

교육령을 개정하여 표면상 일본학제와 동일하게 함으로써 융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기본의도가 다른 곳에 있었음은 자명한 일이었고 '2차 교육령'에 담긴 '문화'란 이름의 교육정책 내면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3·1 운동 후에 일어난 자극된 것에 불과하였다. 사이토의 문화정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학교 교정에 심어져 있는 무궁화를 뽑고 '사쿠라(벚꽃)'를 심도록 하는 데까지 뻗어나갔다. 사이토 총독의 문화정치는 전대(前代)의 무단정치보다 더 가혹한 통치방법이 되었다.

 

2. 주요내용

 

  •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4년에서 6년으로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 5년, 4년으로 함), 고등보통학교는 4년에서 5년으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3년에서 4년(또는 5년)으로 연장하였다.
  • 일본어의 수업시수를 증가하면서 일본어 교육을 강화하였다.
  • 새로 사범학교와 대학설치의 길을 마련했다.
  • 실업교육·전문교육·대학교육은 일본의 제도에 따랐다.
  • 동일한 교육제도·교육기간을 확충함으로써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여 한국민족 사상을 말살하려는 데 있었다.
  • 새 교육령의 전체내용은 곧 일본어 습득에 있었다.
  • 대학의 설치를 규정함으로써 한국에 대학교육의 문이 열린 것처럼 가장하였다.
  •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학을 원칙으로 하였다.

 

3. 의미

 

일제는 조선 병탄 직후부터 간단하고 실제적인 교육을 내용으로 하는 별도의 교육을 조선에서 실시해야 한다며 칙령으로 「조선교육령」을 제정하였다. 1911년 제정된 제1차 「조선교육령」은 무단통치와 함께 일본신민화를 꾀하기 위해 조선민족에 일본어 교수를 강제하고 일본역사와 문화를 주입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교육칙어를 조선인에 적용하고, 학교제도는 시세와 민도에 따라 간이하고 실용적으로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선의 학교 수업연한을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 여자고등보통학교 3년으로 하여 일본의 학교제도와는 수업연한부터 다르게 하여 차별적이고 이동이 불가능한 학교제도가 만들어졌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은 내지연장주의 방침으로의 통치 방침 변화와 3·1운동 이후의 조선인들의 교육적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제개정되었는데, 국어[일본어]를 상용하는 자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로 구분하고 「조선교육령」은 국어를 상용하지 않는 자, 즉 조선인에게만 적용하는 교육령으로 공포되었다.

제개정 과정에서 핵심 쟁점으로 부각된 것은 조선인과 일본인 동일의 교육, 일본어 교수 중시, 교육칙어 폐지 등이었다. 「조선교육령」은 내지연장주의를 지향하지만 조선에서의 교육은 특례로 운영한다는 특례주의, 보통교육 단계는 별도 계통의 학교를 두고 교차 입학만 허락하는 비동일제도 별학제, 조선의 특수 사정을 고려한 교과 운영을 인정한다는 교육과정 독자주의 원칙으로 제정되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은 지원병 제도, 창씨 개명과 함께 황민화 정책의 3대 기둥이었다. 특히 「조선교육령」 개정은 지원병 제도와 동반된 것으로, 일본 군부 발 개정이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조선 사정보다는 일본 '내지(內地)'의 필요에 따라, 조선에도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큰 틀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학교 명칭, 수업 연한, 교과 내용 등 일본과 동일한 학교제도가 조선에 적용되었고, 보통교육에서도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일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내선공학(內鮮共學)제도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보통학교에서 소학교[1941년 초등학교로 변경], 고등보통학교에서 중학교로 학교 이름만 바뀌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내선별학(內鮮別學)과 차별이 여전하였다.

제3차 「조선교육령」은 5년 후 1943년 3월 다시 개정되었다. 제4차 「조선교육령」 제정은 내외지(內外地) 행정일원화 조치에 따라 일본의 교육관련 법령 개정과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대동아전쟁 완수와 대동아 건설, 황국의 도에 따라 국민연성(國民鍊成)의 일관적인 체제를 완비하여 교육의 국방체제를 정립하고자 제개정하였다. 주요 내용은 수업연한 단축과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 물적 동원의 법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전쟁 동원이 더욱 절박해지자 1943년 10월 12일 교육에 관한 전시비상조치 방책을 발표하였다. 이제 법령이 아니라 방책이라는 정책 조치에 의해 학교제도가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어 1944년 7월 전시교육령을 제정했으나 패전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4. 의의 및 평가

 

「조선교육령」은 조선교육의 방침을 정한 칙령으로, 개별적인 학교령 수준이 아니라 처음으로 종합적인 교육법규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조선 교육제도 수립의 방향을 간이 실용으로 하고, 차별적인 학교제도 수립을 정당화하는 법적 근거로 작용하였다.

 

 

 

일제, 한민족 말살 위한 2차 조선교육령 발표

 

1922년 2월 5일, 일제는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며 조선인의 고등교육을 시행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의 민족성을 말살하려 했다.

조선교육령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교육 방침과 교육 관련 법령이다. 조선인의 사상을 말살하거나 일본화 하는 데 주안점을 둔 법령이다. 일제는 이를 총 4차례 발표했다.

제1차 조선교육령 공포, 조선인 우민화 정책 본격화

1911년 8월,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주요 내용은 ▲일본어 보급 ▲조선인을 일제에 충실한 국민으로 만들기 ▲노동력 착취를 위한 실업 교육 장려 ▲조선인 우민화 등이다.

일제는 일본인 교육과 달리 조선인의 초등 교육 기간을 4년으로 단축했다. 이는 조선인의 지적 발달 기회를 박탈해 무지 상태로 만들려는 정책이었다.

 

3·1운동 이후 민족 분열 통치… 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기존 식민지 통치를 ‘문화통치(민족 분열 통치)’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1922년 2월 6일 ‘제2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제2차 조선교육령은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동일한 교육제도를 보장한다고 했으나, 실상은 조선인의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말살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조선어 과목이 대폭 축소되고 일본어 교육이 강화됐다. 조선사는 형식적으로만 교육됐으며, 그마저도 조선인의 자주성을 상실한 내용으로 구성됐다.

보통학교 5~6학년부터는 일본의 역사와 지리만 배우게 했고, 조선의 역사와 지리는 교육과정에서 배제됐다.

조선어 말살… 제3차·제4차 조선교육령 공포

1938년 3월, 일제는 조선인을 ‘황국 신민’으로 세뇌하기 위해 ‘제3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조선어는 필수 과목에서 선택 과목으로 변경되며 학교에서 사실상 사용이 금지됐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인을 군사 인력으로 동원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43년 3월, ‘제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했다. 이때부터 조선어 교육은 완전히 폐지됐다.

1941년 3월 31일, 일제는 보통학교 명칭을 ‘황국 신민’을 뜻하는 ‘국민학교’로 변경했다. 이 명칭은 해방 이후에도 ‘행정 편의’를 이유로 1996년 3월 1일 ‘초등학교’로 변경될 때까지 사용됐다.


 

 

 

광복 이후 40여년, 일제 잔재 청산 더뎌

조선교육령을 통해 일제는 조선인의 정체성을 말살하고, 일본어를 강요하며 조선을 식민지 사회로 완전히 장악하려고 했다.

광복 이후 40여년이 지나서야 겨우 ‘국민학교’ 명칭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교육제도뿐만 아니라, 일제의 흔적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