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 한 진 명 행 정 명 노 기
한 : 한산도 대첩
진 : 진주 대첩
명 : 명나라 참전
행 : 행주대첩
정 : 정유재란
명 : 명량 해전
노 : 노량 해전
기 : 기유약조(1609)
1. 임진왜란(1592)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다.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저항으로 이겨내고 각성과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민족의 운명을 새로 개척해나간 계기가 된 전쟁이다. 명의 원조도 있었지만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거족적인 저항으로,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과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동은 불리했던 전쟁 국면을 전환시킨 결정적인 힘이었다.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명과 청이 교체되면서 병자호란이라는 시련을 예고하기도 했다.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이 결렬되자 바로 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나고야[名護屋]에서 제군(諸軍)을 지휘할 계획을 세웠으며,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각 대를 지휘한 주장(主將)과 병력은 다음과 같다. 제1번대는 주장 고니시로 병력 1만 8700명이며, 제2번대는 주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로 병력 2만 2800명, 제3번대는 주장 구로다[黑田長政]로 병력 1만 1000명, 제4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吉成] · 시마즈[島津義弘]로 병력 1만 4000명, 제5번대는 주장 후쿠시마[福島正則]로 병력 2만 5000명, 제6번대는 주장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로 병력 1만 5000명, 제7번대는 주장 모리[毛利元之]로 병력 3만명, 제8번대는 주장 우키다[宇喜多秀家]로 병력 1만명, 제9번대는 주장 하시바[羽柴秀勝]로 병력 1만 1500명으로 구성되었다.
고니시가 인솔한 제1번대는 1592년 4월 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일본군을 맞이한 부산진의 첨사 정발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적은 이어 동래부를 침공했고, 부사 송상현 또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고니시의 부대는 그 뒤 거의 조선 관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중로(中路)를 택하여 양산 · 밀양 · 청도 · 대구 · 인동 · 선산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순변사 이일이 거느린 조선의 관군을 파하고 조령으로 향하였다. 가토가 인솔한 제2번대는 나고야를 떠나 대마도에 도착하여 제1번대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부산 상륙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고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그 길로 경상 좌도를 택하여 장기 · 기장을 거쳐서 좌병영 울산을 함락하고, 경주 · 영천 · 신령 · 의흥 · 군위 · 비안을 거쳐 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빠져 중로군과 합하여 충주로 들어갔다. 같은날 구로다가 인솔한 제3번대는 동래에서 김해로 침입하여 경상 우도를 따라 올라와 성주의 무계(茂溪)에서 지례 · 김산(金山)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의 영동으로 나와 청주 방면으로 침입하였다. 모리 · 시마즈가 이끄는 제4번대는 김해에서 제3번대와 함께 창녕을 점령한 다음 성주 · 개령을 거쳐 추풍령 방면으로 향하였다. 후쿠시마 등이 인솔한 제5번대는 제4번대의 뒤를 따라 부산에 상륙하여 북으로 침입하였고, 고바야가와 등이 이끄는 제6번대와 모리 등이 이끄는 제7번대는 후방을 지키며 북상하였다. 우키다의 제8번대는 5월초 부산에 상륙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서울을 향하여 급히 북상하였다. 그리고 제9번대는 4월 24일 이키도에 유진(留陣)하고 있으면서 침략을 대기하고 있었다.
적이 대거 침입했다는 변보(邊報)가 중앙에 전달된 것은 난이 일어난 지 4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부산진성이 함락된 것 같다는 장계(狀啓)에 이어 그 장계 내용이 확실하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급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급히 대책을 논의한 끝에 임시변통으로 다음의 인물들을 선발하여 적의 북침에 대비하게 하였다.
2. 한산도 대첩
1592년(선조 25) 4월 일본군은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을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들 수군이 남해·서해로 침범하던 중 옥포(玉浦)·당포(唐浦)·당항포(唐項浦)·율포(栗浦) 등지에서 연전연패하였다. 그러자 수군의 유능한 장수였던 와키자카[脇坂安治]는 정예 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등지를 침범하였다. 수군장수였던 구키[九鬼嘉隆]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일본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7월 6일 본영을 출발해 노량(露梁: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에 이르러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세하니 3도의 전선은 모두 55척이었다. 7일 저녁 당포 앞바다에 이르러 목동 김천손(金千孫)에게 일본 전선 70여 척이 견내량(見乃梁: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 이르러 이를 확인하였다. 그 때 일본 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자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板屋戰船)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일본 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일본 수군들은 그 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鶴翼陣)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지·현자총통(地玄字銃筒) 등 각종 총통을 쏘면서 돌진하였다. 싸움의 결과 중위장 권준(權俊)이 층각대선(層閣大船)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焚破)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일본 수군 장수 와키자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조선 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 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일본군 400여 명은 당황하여 한산섬으로 도주했다가 뒷날 겨우 탈출하였다.
3. 진주 대첩
1592년(선조 25)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7일 간 계속되었다. 왜군은 진주가 전라도로 가는 경상우도의 대읍이며, 경상우도의 주력군이 진주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주성 공격계획을 세웠다.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나가오카(長岡忠興) 등은 9월 24일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집결지 김해를 떠나 노현(露峴)·창원·함안을 거쳐 마현(馬峴)과 불천(佛遷)으로 나누어 쳐들어왔다. 이러한 적군의 동태를 접한 경상우도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은 각지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진주에는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군사 3,700여 명과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의 군사 100여 명밖에 없었다. 10월 5일 적의 선봉 1,000여 기(騎)가 진주 동쪽 마현의 북봉에 출현하자, 김성일은 남녀노소까지 동원해 무장시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6일 적군은 3개 부대로 나누어 1대는 동문 밖 순천당(順天堂) 산 위에 진을 치고 성을 내려다보며, 1대는 개경원(開慶院)에서 동문을 지나 봉명루(鳳鳴樓) 앞에 진을 치고, 또 1대는 향교 뒷산에서 똑바로 순천당을 지나서 봉명루 앞에 있는 적군과 합세하였다. 왜군의 조총수들은 성 안으로 총포를 난사하였다. 그리고 초막을 짓고 밤에는 불을 피워 기세를 올렸다. 그날 밤 곽재우(郭再祐)는 심대승(沈大升)을 보내 의병 200여 명을 이끌고 향교 뒷산에 올라갔다. 그 곳에서 횃불을 들고 뿔피리를 불면서 적의 배후를 위협하였다. 7일 적은 하루 종일 총탄과 화살을 발사하였다. 8일에는 공격용 죽제(竹梯)와 3층이나 되는 누대(飛樓)를 만들어 침공해 왔다. 이에 김시민은 현자포(玄字砲)를 발사하고, 적이 성의 못[城濠]을 메우려고 모아 놓은 솔가지와 죽제를, 짚으로 묶은 화약에 불을 붙여 던져 불살랐다. 또 이동하는 적의 누대를 자루가 긴 도끼와 낫으로 부수면서 적을 무찔렀다. 고성의 임시현령 조응도(趙凝道)와 진주의 복병장 정유경(鄭惟敬)은 밤을 틈타 군사 500여 명을 이끌고 진현(晉峴)고개 위에 올라가 적을 위협하였다. 9일에는 성 밖에 머물러 있던 합천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과 정기룡(鄭起龍)·조경형(曺慶亨)이 왜군과 대결하였다.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임계영(任啓英)도 구원병 2,000여 명을 이끌고 와서 적을 견제하였다.
10일 사경(四更) 초에 적군은 2대로 나누어 1대는 북문 밖으로 쳐들어오고 1대는 동문을 공격해 왔다. 이들은 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르면서, 그 뒤에 기병 1,000여 명이 조총을 난사하며 돌진하였다. 이때 김시민은 동문 북쪽에서, 판관 성수경(成守慶)은 동문 옹성(甕城)에서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들은 죽을 힘을 다해 활·진천뢰(震天雷)·질려포(蒺藜砲)·돌과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졌다. 또한 끓는 물을 붓거나 짚에 불을 붙여 던지면서 적의 공격을 막았다 북문 쪽에서는 전 만호 최득량(崔得良)과 목사의 군관 이눌(李訥)이 분전하였다. 목사 김시민이 적의 탄환에 맞아 쓰러지자 곤양군수 이광악이 대신 작전을 지휘해 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3대첩(三大捷)의 하나로 큰 전과를 올린 싸움이다. 1593년 6월 20일부터 29일까지 열흘 간 계속되었다. 명나라와 일본이 화의를 진행하고 있을 때 경상남도 일대를 본거지로 삼고 있던 왜군은 앞서 김시민에게 패한 것을 설욕하고, 강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다시 진주를 공격하였다. 이 때 명나라는 회담을 이유로 싸움을 피하고 있었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전라순찰사 권율(權慄) 등이 조정의 명으로 의령에 도착했으나, 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였다. 그러나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발분해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黃進), 의병장 고종후(高從厚), 사천현감 장윤(張潤)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갔다.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먼저 와 있었고, 이어 의병장 강희열(姜希悅)이 도착하였다. 이 때 군사는 수천 명에 불과했고, 성 안의 주민은 6만∼7만 명으로 적의 대군과 싸우기에는 전투력이 크게 부족하였다. 게다가 목사 서예원(徐禮元)은 명장접대차사원(明將接待差使員)으로 오랫동안 상주에 있다가 진주로 급히 돌아와 미처 조처를 취할 여유가 없었다. 김천일이 지휘를 담당하니 주객 간에 어색한 점이 많았다.
적은 6월 21일 진주성을 포위하고, 22일부터 본격적인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성 안에서는 부대를 편성해 구역을 나누어 성을 지켰다. 황진·이종인·장윤 등은 각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다니며 응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25일 적은 동문 밖에 흙을 쌓아 높은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흙집을 지어 성을 내려다보면서 탄환을 쏘아대기 시작하였다. 성 안에서도 주민들이 협조해 높은 언덕을 마주 만들어 거기서 현자포를 쏘아 적굴(敵窟)을 격파하면서 항전하였다. 26일 적은 나무궤짝에 생피(生皮)를 둘러 이것으로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자성(子城)을 헐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 위에서는 큰 돌을 굴리고 화살을 내리퍼부었다. 27일 적은 다시 철갑을 두른 채 쇠몽둥이로 성을 헐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종인이 뛰어난 완력으로 연달아 적 5명을 죽이니 적은 잠시 물러갔다. 적은 성의 밑뿌리를 파서 성을 무너뜨릴 심산이었고, 성 안에서는 이를 막는 데 사력을 다하였다. 적의 시체가 성 밖에 삼대[麻]처럼 깔려 있었지만, 적은 단념하지 않았다. 28일 큰비가 내려 성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황진은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장수들은 동분서주하며 성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29일 적은 소가죽을 여러 장 덮은 구갑차(龜甲車)를 앞세워 동문 성벽 밑에 접근하고 무너진 성벽으로 난입하였다. 이종인은 군사들과 함께 활을 버리고 창과 칼로써 처참한 백병전을 벌였다. 김천일·고종후·최경회 등은 촉석루(矗石樓)에서 북향재배한 뒤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4. 명나라 참전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제 3국이 개입하는 국제전이 되었고 이 사실은 향후 동북아시아 정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전쟁 초기 조선의 요청으로 명나라군이 참전하게 되어 조선이 위기를 면하는데 기여하는데 임진왜란에서 명나라의 참전 상황과 그 결과, 의미 등을 건국대 사학과 신병주 교수와 함께 조명한다.
초기 일본의 승세 꺾는데 기여
임진왜란 초기 왜군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던 조선군의 퇴각으로 조선이 큰 위기를 맞게되는데 북방으로 피난간 선조가 명군의 파병을 요청하여 처음엔 3000여명의 군사를 파병하는데 일본군에게 패배하게되고 다시 정세를 파악한 명군이 이여송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파병하면서 평양성을 탈환하고 파죽지세의 일본군의 세력을 억제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소극적인 개입
평양성을 탈환한 명군은 이후 별 전과를 올리지 못한다. 애초 그들의 목적은 조선이 완전히 함락함으로써 일본군에게 명나라도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한 소극적인 태도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왜군을 칠 의사가 없었다. 평양성을 탈환한 후 기세를 몰아 왜군을 남쪽으로 완전히 몰아내야함에도 오히려 벽제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하는 등 명나라의 군대는 초기를 제외하곤 미미하였다. 명나라 군대가 지나간 자리엔 민가를 약탈하는 등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명군과 함께 따라온 상인들은 장사하는데 급급하는 등 소극적인 명군의 태도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조선군의 활약
명나라 군대의 소극적인 대응에 비해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군은 중반 이후 군과 민이 합심하여 왜구를 무찔러 승세를 잡았다. 대표적인 것이 벽제전투에서 명나라군이 대패한 후 행주산성에서 벌어진 행주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권율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은 왜군을 무침히 격퇴해 조선군의 사기를 드높였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은 진주성 대첩, 한산 대첩과 행주대첩이다.
명과 왜군의 강화 회담
임진왜란은 7년전쟁으로 1592년에서 1598년까지 계속되는데 초반 2년의 치열한 전투에 비해 그 이후엔 소강상태가 지속되는데 이 기간 동안 명나라는 왜구와 강화 협상을 진행한다. 조선이 배제된 상태에서 제 3국끼리 강화 조약을 위한 협상이 진행된 것이다. 애초 명의 목적은 일본군을 완전히 패배시키기 보다는 자국이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실리를 찾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서둘러 왜구와 강화 회담을 추진했다. 결국 강화회담이 만족스러운 결과를 끌어내지 못하자 왜군은 다시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침공한다.
5. 행주대첩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이 적병을 행주에서 격파하였다. 당시 경성에는 적들은 연합하여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기세가 등등하였는데 권율은 명나라 군사와 연대하여 경성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러고는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전군을 거느리고 금천(衿川)의 광교산(光敎山)에 주둔케 하고, 권율 자신은 정병(精兵) 4000명을 뽑아 양천(陽川)에서 강을 건너 행주산 위에 진을 치고는 책(柵)을 설치하여 방비를 하였다. 적은 외로운 군사가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수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새벽에 책을 포위하였다. 그들이 울려 대는 징소리⋅북소리가 땅을 진동하니 온 책 안이 두려움에 사로잡혔는데, 권율은 거듭 영을 내려 진정시켰다.적은 군사를 나누어 교대로 진격해 왔는데 묘시(卯時)에서 유시(酉時)에 이르기까지 안팎이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우리 군사가 점령한 지역은 높고 험준하였으며, 뒤로는 강벽(江壁)에 막혀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모두 죽을 각오를 하였다. 적은 올려다보고 공격하는 처지가 되어 탄환도 자연 맞지 않는 데 반해 호남의 씩씩한 군사들은 모두 활을 잘 쏘아 쏘는 대로 적중시켰으며 화살이 마치 비오듯 쏟아지니 적의 기세가 번번이 꺾이곤 하였다. 왜적이 각자 짚단을 가지고 와 책(柵)에 불을 놓아 태우자 책 안에서는 물을 길어 불을 껐다. 적이 서북쪽 책 한 칸을 허물자 지키고 있던 승군(僧軍)이 조금 물러나니 권율이 직접 칼을 빼어 물러난 자 몇 사람을 베고, 다시 책을 세워 방어하였다.화살이 거의 떨어질 쯤에 수사 이빈(李蘋)이 배로 수만 개의 화살을 실어다 대 주었다. 적이 결국 패해 후퇴하면서 시체를 네 무더기로 쌓아 놓고 풀로 덮고 태웠는데, 그 냄새가 몇 리 밖까지 풍겼다. 우리 군사가 나머지 시체를 거두어 참획한 것만도 130급이나 되었다. 다음 날 사대수(査大受)가 접전한 곳을 와서 보고 말하기를, “외국에 진짜 장군이 있다. ”고 하였다. 송경략(宋經略)이 우리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 위로하고 추장(推奬)하는 한편 비단과 은(銀)을 상으로 주고 황제에게 알렸다. 황제가 홍려시(鴻臚寺)의 관원을 보내 우리나라에 선유(宣諭)하기를, “조선은 본디 강국으로 일컬어졌는데, 지금 보건대 권율이 참획한 것이 매우 많으니 조선의 인민이 그래도 진작될 수 있겠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라고 하였다. 권율이 파주의 대흥산성(大興山城)으로 옮겨 진을 치자 적병이 또 침입해 왔으나 모두 싸우지 않고 물러갔다. 제독이 이 소식을 듣고 갑작스레 회군한 것에 대해 자못 후회하면서 장세작(張世爵)으로 하여금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다시 개성에 가서 군량을 비축해 놓고 기다리게 하였다.
6. 정유재란
정유재란(丁酉再亂)은 임진왜란 중 강화 교섭의 결렬로 왜군이 정유년(1597)에 다시 침략한 전쟁이다. 명 · 일 강화 교섭이 1596년 9월 그 기만성이 드러나면서 결렬되었고, 1597년에 왜군이 14만 병력으로 침략하였다. 전라도 점령을 1차 목표로 하였으며 칠천량해전, 남원전투, 황석산전투, 전주 함락 등 일본군이 승리하다가, 명나라군의 반격이 시작되어 9월 직산전투, 1598년 사로병진작전으로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공격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1597년 2월 21일, 14만 병력을 편성하였다. 1596년 9월, 강화 교섭이 결렬된 이후에도 조선은 전쟁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통신사를 통해 일본 측과 교섭을 유지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김응서 간의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사명대사 간의 협상도 진행되었는데, 조선의 왕자를 일본으로 보내라는 요구 등을 조선이 거절하자 결국 재침략이 시작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1차 목표가 호남 지방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침략은 해로와 육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해로는 6월 19일부터 안골포 · 가덕도에서 해전이 시작되어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괴멸 수준에 이르는 패배를 하게 되었다. 육로로 진격한 일본군은 남원전투, 황석산전투, 전주 함락 등 승승장구하였으나, 9월 7일 직산전투에서 명군이 일본군을 격퇴함으로써 서울로 북상하지 못하였고, 남해안에서는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격퇴시키면서 제해권을 되찾았다. 한편, 전라도를 목표로 한 이 전쟁은 철저한 전라도 지역 유린으로 이어졌으며, 남원 · 영광 · 진원 · 금구 · 김제 등 수만 명에 달하는 ‘코베기’가 자행되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침략에 명나라는 양호(楊鎬)에게 4만여 군사를 이끌고 권율의 1만여 군사와 합세하여 5만여 군사로 12월, 울산왜성(도산성)을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전개하였다. 동로의 마귀(麻貴)가 울산을 공격, 중로의 동일원(董一元)이 사천을 공격, 서로의 유정(劉綎)과 수로의 진린(陳璘)이 순천왜교성을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였다. 치열한 전투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일본군들이 철군하였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7. 명량 해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대부분 패하였다. 이에 그 해 7월 22일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중에 남아 있던 쓸만한 전선(戰船)은 칠천량해전에서 배설(裵楔) 장군이 탈출시킨 12척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서 13척이 되었다. 이때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 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리 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진입하였다. 일본 수군의 진입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 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일본 수군의 수로 통과를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했으며,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는 기세였다. 매우 위급한 순간, 이순신은 뒤에 처져 있는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 등에게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자, 전투는 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한 조류는 소수의 전선이 활동하는 조선 수군에 비해 많은 전선을 거느리고 있는 왜군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하였다. 협수로에서의 불규칙한 조류 분포로 인해 서로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붕괴되고 있었다.
격전중 이순신의 전선에 동승하였던 투항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때의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이순신이 김석손(金石孫)을 시켜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일본수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에 전투의 기세를 잡은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면서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 수군은 물러나 도주하고 말았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그들의 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쇠(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다.
8. 노량 해전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월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과 함께 1598년 9월 고금도(古今島) 수군 진영을 떠나 노량 근해에 이르렀다.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펴 왜교(倭橋)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 고니시(小西行長)의 부대를 섬멸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진린은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요청한 통신선 1척을 빠져 나가게 하고, 이순신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泗川) 등지의 시마쓰(島津義弘)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러한 고니시의 전략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진린을 꾸짖고 함께 진형을 재정비해 왜군을 맞아 격멸하기로 하였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200여척의 조·명 연합수군을 거느린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讎若除死則無憾)”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은 막바지에 이르고 이순신과 진린은 서로 위급함을 구하면서 전투를 독려하자 왜의 수군 선박 200여척이 불에 타 침몰하거나 파손되고 100여 척이 이순신함대에 나포되었으며 나머지 패잔선들이 관음포 쪽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같은 날 오전 관음포(觀音浦)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勿言我死)”는 세계사상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樂安郡守) 방덕룡(方德龍) 등이 전사하였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해 시마쓰의 군과 함께 부산에 집결, 철수했다.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은 막을 내렸다.
9. 기유약조(1609)
기유약조는 1609년(광해군 1) 조선이 일본과의 통교를 위해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맺은 강화조약이다. 임진왜란 직후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 도쿠가와막부)에서는 우리나라의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에게 외교권을 행사하도록 하였고, 대마도주는 조선에 세 차례 사절을 파견하여 통교를 요청하였다.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함으로써 국교가 재개되었다.
일본에서 강화를 하려는 노력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이루어졌다. 1599년(선조 32) 7월, 일본은 야나가와 세게노부(柳川調信) 명의의 서계(書契)를 보내왔다. 일본측에서 적극적으로 피로인(被虜人, 포로)을 송환할 것이니, 조선측에서는 사신을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강화 교섭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1600년(선조 33)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외교권을 장악했고, 이듬해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확실하게 실권을 잡았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 일본은 명군 인질을 모두 송환하였고, 조선에 지속적으로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해주기를 요청하였다. 1602년(선조 35) 말에는 도쿠가와로부터 강화 교섭을 일임받은 대마도주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국교 재개를 계속 거부하면 다시 침략할 것이라는 협박성의 논조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1604년(선조 37)에 조선은 유정(惟政, 사명대사)과 손문욱(孫文彧)을 탐적사(探賊使), 즉 ’적을 정탐하는 사신‘이라는 명칭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도쿠가와를 만나고 일본 정세를 살피고 귀국하였다. 전쟁 중에 잡혀간 피로인 3천여 명도 같이 돌아왔다. 1606년(선조 39) 조선은 화친을 원한다면 일본에서 먼저 화친 요청 국서를 조선에 보내고, 조선 왕릉(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을 파헤친 범인[범릉적(犯陵賊)]들을 묶어 보내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일본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몇 개월 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의의 국서와 범릉적을 조선에 보내왔다. 이듬해에는 조선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절을 보냈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과의 국교는 재개되었다.
기유약조의 내용은 『통문관지(通文館志)』, 『변례집요(邊例集要)』, 『고사촬요(攷事撮要)』, 『대마도종가문서(對馬島宗家文書)』 등의 여러 사료에 수록되어 있는데, 각기 조문의 수와 내용이 다르게 되어 있다. 『통문관지』에 13개 조로 되어 있는 기유약조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왜관(倭館) 접대는 국왕사(國王使), 대마도주 특송사(對馬島主特送使), 대마도 수직인(對馬島受職人, 대마도인으로서 조선의 관직을 받은 사람)의 세 가지 예(例)가 있다.
2) 국왕사가 올 때는 상선(上船)과 부선(副船)만 허락한다.
3) 대마도주의 세사미두는 모두 100석을 지급한다.
4)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하며, 이 중 특송선은 3척이다.
5) 수직인(受職人)은 연 1회 내조(來朝)하고,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없다.
6) 배는 세 등급이 있는데, 승선 인원 25명 이하를 소선(小船), 26~27명을 중선(中船), 28~30명을 대선(大船)이라 한다. 선부(船夫, 뱃사람)는 대선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한정하며, 정해진 수를 넘을 수 없다. 선체의 크기를 재고 선부가 정해진 수를 넘었는지 점고(點考, 명부에 점을 찍어가며 수효를 조사)한다.
7) 입국하는 일본 배는 모두 대마도주의 문인(文引)을 소지해야 한다.
8) 대마도주에게 전례에 따라 도서(圖書)를 만들어 주되, 종이에 견본을 찍어 예조·교서관·부산포(釜山浦)에 보관하여 서계(書契, 조선과 대마도가 주고받은 공식 외교문서)가 올 때마다 진위를 살피며 격식을 위배한 자는 되돌려 보낸다.
9) 문인이 없는 사람과 부산포 외의 다른 곳으로 입항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10) 일본 사신이 공적인 업무로 조선에 왔다가 돌아갈 때 그 소요되는 기간에 따라 지급하던 식량은 대마도인 5일분, 대마도주 특송인 10일분, 국왕사 20일분을 준다.
11) 왜관의 체류 시일은 대마도주 특송 110일, 기타 세견선 85일, 표류인(漂流人)의 송환을 비롯한 기타의 경우는 55일로 제한한다.
12)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대소를 구별하지 않는다.
13) 기타는 전례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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