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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선조 두문자 : 선 붕 동 정 기 건 남 북 임 불 경 고 담 호

by noksan2023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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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 판문점
선조 : 판문점

 

선조 :  선 붕 동 정 기 건 남 북 임  불 경 고 담 호

 

선 : 조(1567~1608)

붕 : 당의 발생(1575)

동 : 서분당(을해당론 이조 전량 문제)

정 : 여립 모반사건(1589)

기 : 축옥사

건 :  저의 사건(1591)

 : 인의 인(이황 유성룡 온건파)

북 : 인(서경덕 조식 강경파)

임 : 진왜란(1592)

불 : 국사 소실

경 : 복궁 소실(사고 소실)

고 : 

담 : 

호 : 박 

 

 

1. 조(1567~1608)

선조는 조선의 제1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1567∼1608년이며,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즉위했다. 즉위 초부터 사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하고 이황·이이 등을 중용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림들은 파벌로 갈라져 당쟁이 극심해졌고 국력은 더욱 쇠잔해졌다. 이 와중에 정여립의 모반사건도 일어났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뒤이은 정유재란으로 나라 전체가 황폐해지는 수난을 겪었다. 왜란 후 전후 복구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다. 능호는 목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선조가 국왕으로 즉위할 무렵인 16세기 중반은 훈구·척신 계열이 권력을 점차 잃어가고, 성리학적 기반을 바탕으로 한 사림들이 점차 권력을 장악하면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국정 전반으로 확산되어 갔던 시기였다.

선조는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하동부 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이자 중종(中宗)의 손자로, 1552년 11월 11일에 한성의 안달방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으며, 명종[조선](明宗)이 총애하여 하성군(河城君)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명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1567년(명종 22) 조선의 14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 사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던 윤원형(尹元衡)의 관작 삭탈로 시작된 구체제 개혁이, 선조 즉위와 함께 더욱 가속화되었다. 윤원형, 이기(李芑) 등과 관련된 인물들의 축출이 본격화되었다. 심통원(沈通源)이 관직을 삭탈당하고 서울 밖으로 쫓겨났으며, 그 밖에 다수의 척신계 인물들에 대한 제거가 이루어졌다. 이어서 정치적 복권이 대규모로 단행되었다. 유희춘(柳希春), 노수신(盧守愼) 등이 직첩을 돌려받았으며, 을사사화와 관련하여 화를 입었던 권벌(權撥)과 이언적(李彦迪)을 포함하여 이미 사망한 25명이 직첩을 돌려받아 정치적으로 복권되었다.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에게 시호를 내리고 증직하였으며, 또한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삭탈함으로써, 사화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였다.

선조는 즉위 초부터 좋은 정치에 뜻을 두고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황(李滉)을 구심점으로 하며 스스로 ‘사림(士林)’이라 불렀던 신진세력들과 덕망 있는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문신들로 하여금 한강가의 독서당(讀書堂)에서 공부하면서 매달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이이(李珥)의 《동호문답(東湖問答)》도 독서당에서 제출된 것이다. 과거시험을 통한 관직 진출만으로는 덕망 있는 선비를 조정에 불러들이기 어려운 점을 고려하여 덕망 있는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였고, 그런 가운데 조식(曺植)·성혼(成渾)과 같은 유능한 인재들을 관직에 발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인적 쇄신과 함께 근사록(近思錄)·심경(心經)·소학(小學)·삼강행실(三綱行實) 등의 서적을 간행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적 질서가 사회 전반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내의 개혁과 더불어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매듭지었다. 명나라의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고려 말 권신이었던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술되어 있는 것을 사신인 이후백(李後白), 윤근수(尹根壽) 등을 보내어 고치도록 했던 것이다.

 

2. 당의 발생(1575)

붕당(朋黨)은 혈연, 지연, 학연 등과 같은 인연을 매개로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이들이 국가의 공식적인 조직과 별개로 사사롭게 결성한 모임을 뜻한다. 붕당은 한 번 결성되면 몇 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대립하였으며, 이들의 대립을 당쟁이라고 불렀다. 조선 중기 이후 사화(史禍)의 시련을 극복한 사림파(士林派)는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정치적 사안에 대한 입장의 차이와 지역적, 학문적 연원의 차이로 인해 사림 세력 사이에는 정치적 노선의 차이가 드러나게 되고, 그에 따라 조정에 붕당이 형성되게 된다. 선조(宣祖) 때 동서분당을 시작으로 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서고 이후 서인 또한 노론과 소론이 분립하게 되어 이른바 사색당파가 성립되었다. 붕당간의 정치 투쟁인 당쟁은 조선 후기 이후 나라의 커다란 폐단으로 지목되어 영·정조 때에는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이 추진되어 당쟁을 해소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은 크게 성공하지 못하였고, 정국은 노론 일당의 장기 집권 체제가 지속되다가 세도정치로 변질되게 된다.

 

조선 시대 권력의 근원은 국왕이었고 국왕 중심의 왕조 국가에서 관료들이 붕당을 결성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중국 명의 형법인 『대명률(大明律)』에는 “만약 조정의 관원들이 붕당을 지어 국가의 정치를 문란하게 한다면 모두 목을 베어 죽이고, 처자는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관청에서 몰수한다.” 하고 규정되어 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형법은 대명률을 준용한다고 하였으니 이 규정은 조선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에서도 붕당을 형성하면 참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사화기에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들이나 조광조(趙光祖) 일파는 모두 붕당을 결성하였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은 바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존숭하는 주자학(朱子學)에서는 붕당을 긍정하였다. 주자학의 붕당론은 본래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에서 비롯되었다. 북송의 구양수는 붕당론에서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를 같이 함으로써 붕(朋)을 삼으며, 소인은 소인끼리 이를 같이 해 붕을 이루니, 이는 자연의 이치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소인에게는 붕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구양수에 따르면 진정한 붕당은 군자에게만 있고, 소인은 이익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하므로 소인의 붕당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임금이 소인의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붕당을 기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붕당론은 북송대 신법당과 구법당의 투쟁 과정에서 이론적으로 발전하여 주자에게까지 이어졌다. 주자를 존숭하였던 조선의 사림 세력은 이러한 붕당론을 받아들여 자신들이 처한 정치 상황을 이해하는 구조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3.  서분당(을해당론 이조 정량 문제)

동서분당은 이조정랑(吏曹正郞) 자리를 둘러싼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알력에서 비롯되었다. 심의겸은 영의정을 지낸 심연원(沈連源)의 손자이며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우였고 명종(明宗) 때의 권신 이량(李樑)의 조카였다. 그는 이량에 맞서 사림을 적극 보호함으로써 사림의 신망을 얻었지만 김효원은 그를 척신이라고 배척하였다. 한편 김효원은 문장으로 이름 높은 선비로서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신진 사림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심의겸은 김효원이 명종조의 권신 윤원형(尹元衡)의 문객이었던 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를 비난하였다. 당시 이조정랑은 문관의 인사와 관련하여 정승, 판서를 제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또 언론 3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청요직(淸要職)을 추천하고 재야인사에 대한 추천권을 가지는 등 여러 가지 특권이 있었다. 자신의 후임을 스스로 지명하는 이른바 자대권(自代權)도 주요한 특권이었다. 이처럼 인사권과 언론권이 집중된 직책이기 때문에 이조정랑을 누가 차지하는가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갈릴 수 있었다.

 

이때 심의겸을 옹호했던 이들은 서인(西人), 김효원을 옹호했던 이들은 동인(東人)이 되었는데, 김효원의 집은 한양 동쪽에, 심의겸의 집은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동인들은 대부분 퇴계 이황(李滉)과 남명(南冥) 조식(曺植) 계통의 인물이 중심이 되었고, 서인과 그 자제들은 대개가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교우 및 문인들이었다. 동인 가운데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우성전(禹性傳) 등은 퇴계의 문인이고 김효원, 김우옹(金宇顒),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곽재우(郭再祐) 등은 남명의 문인이었다. 정구(鄭逑), 정탁(鄭琢) 등은 퇴계와 남명의 양쪽 문하를 모두 출입하였다. 동인과 서인의 분열이 가시화되자, 이이(李珥)는 극단적인 대립을 막기 위해 조정책을 제시했다. 그리하여 김효원과 심의겸을 외직으로 내보내려 하였다. 하지만 멀고 가까운 차이 때문에 그러한 조치조차 분란의 요인이 되었다. 이이는 당시 보다 우세한 세력이었던 동인을 억눌러 균형을 맞추려 하였기 때문에 서인을 편든다는 오해를 받았다. 이이는 힘닿는 데까지 동서 분당을 조정해 보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정을 떠났고, 그가 물러난 뒤에는 더 이상 조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4. 여립 모반사건(1589) 축옥사

정여립 모반사건은 1589년(己丑年) 10월에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3년여에 걸쳐 그와 관련된 1,000여명의 동인계(東人系)가 피해를 입은 사건을 말한다. 발단은 1589년 10월 황해도관찰사 한준(韓準)과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안악군수 이축(李軸), 신천군수 한응인(韓應寅) 등이 전 홍문관수찬이었던 전주사람 정여립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들의 고변에서 열거된 정여립의 역모죄상은 그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전주와 진안·금구 등지를 내왕하면서 무뢰배와 공·사노비들을 모아 ‘대동계(大同契)’라는 단체를 만들어 매월 활쏘기를 익혔다는 것이다. 또 당시 민간에 유포되어 있던 도참설을 이용해 민심을 현혹시킨 뒤, 기축년말에 서울에 쳐들어갈 계획을 세우고, 그 책임 부서까지 정해 놓았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선전관과 의금부도사 황해도와 전라도에 파견하여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정여립은 안악에 사는 변숭복(邊崇福)에게서 그의 제자였던 안악교생 조구(趙球)가 자복했다는 말을 전해듣고, 아들 옥남(玉男)과 함께 도망하여 진안에 숨어 있다가 자결하였다. 그리고 옥남은 잡혀 문초를 받은 끝에 길삼봉(吉三峯)이 모의 주모자이고, 해서사람 김세겸(金世謙)·박연령(朴延齡)·이기(李箕)·이광수(李光秀)·변숭복 등이 공모했다고 자백하였다. 그 결과 다시 이들이 잡혀가 일부는 조구와 같은 내용을 자백하고, 일부는 불복하다가 장살 당하였다. 정여립의 자결과 일부 연루자의 자백에 의해 그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은 사실로 단정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지고 서인인 정철(鄭澈)이 옥사를 엄하게 다스려서 이발(李潑)·이길(李洁)·김우옹(金宇顒)·백유양(白惟讓)·정언신(鄭彦信)·홍종록(洪宗祿)·정언지(鄭彦智)·정창연(鄭昌衍) 등 당시 동인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연루되어 처형 또는 유배당하였다. 그 가운데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가 발견되어 다시 불려가 고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그의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를 비롯한 50여인의 상소로 나사침(羅士忱)·나덕명(羅德明)·나덕준(羅德峻)·정인홍(鄭仁弘)·한효순(韓孝純)·정개청(鄭介淸)·유종지(柳宗智)·김우굉(金宇宏)·윤의중(尹毅中)·유몽정(柳夢井)·조대중(曺大中)·우성전(禹性傳)·남언경(南彦經) 등 30여인이 연루되어, 처형되거나 혹은 유배되었다. 이때의 상소로 조정의 동인계 고관과 함께 호남 지방 사류가 다수 연좌되었다. 그리하여 그 뒤부터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남 지역 사류간 반목과 대립이 후대에까지 이어져 여러 가지 문제를 낳게 되었다. 또, 진주에 거주하던 처사 최영경(崔永慶)은 모주인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옥사하였는데, 그의 연좌 또한 지극히 모호한 내용이어서 많은 말썽을 불러일으켰다. 그 뒤 약 3년여 동안 정여립과 친교가 있었거나, 또는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자가 무려 1,000여인에 이르는 대옥사로 발전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 문제는 그뒤 당쟁의 전개 과정에서 주요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이 옥사의 발생원인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누어진다. ① 노비 출신인 송익필(宋翼弼)이 당시 서인의 참모격으로 활약했는데, 자신과 그의 친족 70여인을 다시 노비로 전락시키려는 동인의 이발·백유양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설. ② 당시 위관(委官:죄인을 치죄할 때 의정대신 가운데 임시로 뽑아서 임명하던 재판장)으로 있던 정철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 ③ 이이(李珥)가 죽은 뒤 열세에 몰린 서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날조한 사건이라는 설. ④ 일부 조작된 바도 있으나, 당시 정여립이 전제군주정치 아래에서는 용납되기 어려운 선양(禪讓)에 의한 왕위계승방식을 주장하는 등 혁명성을 가진 주장이 옥사를 발생시킨 요인이 되었다는 설, 즉 정여립의 모역상도 어느 정도는 인정된다고 보는 설 등으로, 아직 정설은 없다.

 

5. 철 건저의 사건(1591)

건저, 즉 왕세자 책봉 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연려실기술》에는 ‘신묘년(辛卯年)의 시사(時事)’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는 왕비의 소생인 원자(元子)가 없었고, 다만 후궁 소생의 왕자만이 있었으므로 왕세자 책립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 때 이 건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좌의정이었던 정철(鄭澈)이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부제학 이성중(李誠中), 대사헌 이해수(李海壽) 등과 같이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할 것을 주청하려 하였다. 또, 정철은 이 건저 문제를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에게도 상의하고, 건저 주청 문제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이들은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한편, 이산해는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김빈(金嬪)의 오빠되는 김공량(金公諒)과 결탁, 왕의 뜻을 살피면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이산해는 왕이 김빈의 소생 신성군 후(信誠君珝)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김빈에게 정철이 장차 건저를 주청한 뒤 모자를 죽이려 한다고 무고하였다. 김빈이 왕에게 이 사실을 울면서 호소하게 되자 왕은 이에 매우 노하게 되었다. 그 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정철은 경연에서 건저 문제를 거론하였다. 이 때문에 왕이 크게 노하자 같은 자리의 이산해·유성룡 등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침묵을 지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건저 문제를 발설한 서인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이해수 등은 모두 외직으로 강등되었다. 이것은 군주전제국가에 있어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사건이지만, 이 문제가 동서분당의 쟁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겠다.

 

즉, 당쟁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는 이 사건은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로 당한 동인들이 서인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기축옥사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원인이 된 옥사였다. 즉, 정철 등 서인들이 당시 정여립을 옹호한 동인들을 정여립과의 공모자로 몰았던 것이다. 이에 동인인 이발(李潑)·이길(李洁)·백유양(白惟讓)·유몽정(柳夢井)·최영경(崔永慶) 등은 처형되고, 정언신(鄭彦信)·정언지(鄭彦智)·정개청(鄭介淸) 등은 귀양가게 되었으며, 노수신(盧守愼)은 파직당하였다. 이 기축옥사로 많은 동인이 희생되고, 또 정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옥사의 보복으로 꾸며진 것이 바로 건저 문제이다.

 

6. 인의 남인(이황 유성룡 온건파) VS 인(서경덕 조식 강경파)

1575년 조선의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이후 동인은 다시 학파상의 차이, 왕위를 이을 세자를 정하는 건저 및 1589년 기축옥사 등 정치적 사건에 대한 입창 차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하였다. 남인의 핵심 인물은 유성룡(柳成龍), 우성전(禹性傳) 등이었으며, 북인의 핵심 인물은 이발(李潑), 이산해(李山海), 정인홍(鄭仁弘) 등이었다.

 

동서가 분당될 당시 동인의 세력이 강해 많은 사람들이 동인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동인은 기축옥사(己丑獄事)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 기축옥사 이후 동인에 비해 열세였던 서인은 정철(鄭澈)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분노를 입게 되자 정국은 다시 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동인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리는 계기가 되었다. 동인은 정철을 논죄하면서 그뿐만 아니라 서인 모두를 대거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발(李潑), 이산해(李山海), 정인홍 등의 강경파 처벌의 범위를 가급적 줄여야 한다는 류성룡, 김성일, 우성전 등의 온건파로 갈라졌다. 이때 강경파를 북인이라고 하고 온건파를 남인이라고 하였다.

 

동서분당 때는 영남학파 중심으로 동인이라는 한 당파가 형성되었지만, 영남학파 내에서도 이미 학파의 분립이 있었다. 이황을 종주로 하는 퇴계학파 조식을 종주로 하는 남명학파의 분립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조대 중반 이황의 제자인 유성룡을 지지하는 남인과 유성룡에 선을 긋는 이발, 정인홍 중심의 북인으로 분열되었다.

 

선조 중반 분열의 조짐을 보였던 남인과 북인은 1589년 기축옥사로 동인 내에 이발, 최영경 등 다수의 희생자가 생겼으나, 유성룡이 이에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자,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학자 다수가 이산해, 정인홍을 중심으로 북인을 형성하여, 유성룡, 우성전 중심의 남인에 대항하면서 분열이 본격화되었다. 남인은 이황의 사상을 계승하여 철학과 예학 연구로 성리학의 이론적 연구에 전념한 반면, 북인은 조식과 서경덕의 사상을 계승하여 성리학의 실천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노장사상이나 불교, 양명학에도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1599년 실록의 기록에는 "유성룡이 다시 상신(相臣)이 되자 윤국형 등이 손뼉을 치고 일어나서 구별을 일삼아 자기들에게 붙는 자를 남인이라 하고 뜻을 달리하는 자를 북인이라 하여 드디어 당쟁의 실마리를 크게 열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성룡이 사당(私黨)을 부식하고 사류(士類)를 배척하는 데에 모두 국형 등이 도왔던 것입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거치면서 의병을 많이 배출했던 북인 세력은 광해군(光海君)을 옹립하면서 권력을 장악하였다. 광해군을 옹립한 세력은 북인 가운데서도 대북(大北) 세력이었는데, 대북 정권은 광해군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그의 형인 임해군(臨海君)과 배다른 동생이자 적자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다. 그리고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켜 서궁(西宮)에 유폐하였다. 계축옥사(癸丑獄事)와 같은 극단적인 정책에 더하여 광해군이 추진한 명나라와 여진 사이의 중립 외교는 사대부 사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의해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7. 진왜란 발발(1592)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이다.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끈질긴 저항으로 이겨내고 각성과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민족의 운명을 새로 개척해나간 계기가 된 전쟁이다. 명의 원조도 있었지만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거족적인 저항으로, 이순신에 의한 제해권의 장악과 전국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동은 불리했던 전쟁 국면을 전환시킨 결정적인 힘이었다.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명과 청이 교체되면서 병자호란이라는 시련을 예고하기도 했다.

 

8. 국사 복궁 소실

1593년(선조 26) 5월 왜구가 침입하여 백성들과 물건을 노략질할 때 좌병사(左兵使)는 활과 칼 등을 이 절의 지장전 벽 사이에 옮겨다 감추었고, 왜병 수십 명이 이 절에 와서 불상과 건물과 석조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감탄하다가 무기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여덟 사람을 밟아죽이고 절을 불태워버렸다. 그때, 난을 피하여 장수사(長壽寺)에 와 있었던 담화(曇華)가 문도를 이끌고 불국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이미 대웅전·극락전·자하문 기타 2,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린 뒤였고,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石橋)와 탑만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때 타버린 목조건물들은 20년이 지난 뒤부터 점차 복구되었다.

 

세종 대 크게 정비되었던 경복궁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선조(宣祖)가 한양을 떠난 사이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때 창덕궁과 창경궁(昌慶宮), 종묘(宗廟)도 모두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5년(선조 38) 중건 대상으로 논의되었던 궁궐은 경복궁이었다. 궁궐을 중건하기로 논의가 모아진 직후인 1605년 11월 궁궐영건도감에서 경복궁의 정전 구역을 먼저 착공하기로 결정하면서, “조종조(祖宗朝)의 법궁(法宮)”이 경복궁임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착공을 하고 공사가 진행되자 인력과 물자의 투입이 과도하니 줄여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라 제기되었다. 이런 가운데 선조는 승정원에 국초에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을 영건할 때 신료들의 논의와 술사들의 의견을 빠짐없이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영건해야 한다는 술사의 주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중건하기로 결정하였다.

 

9.   박 수입

고추는 가짓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이다. 줄기는 60㎝에 달하며 꽃은 여름에 핀다. 열매는 길이가 5㎝이며 익으면 붉은색이 된다. 중부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우리나라에는 17세기 초엽에 전래되었다. 고춧가루용 고추는 3월 상순에서 하순에 걸쳐 파종하고 9월부터 3~4회 수확한다. 고추가 매운 것은 캡사이신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이 성분은 기름의 산패를 막아주고 젖산균의 발육을 돕은 기능을 한다. 비타민A로 전환되는 성분이 많고 특히 비타민C의 함량이 높다. 붉은색으로 인해 벽사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매운맛은 시집살이를 비유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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