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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광해군 두문자 : 광북 폐실 이한유허 창오동대파기

by noksan2023 2023.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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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광해군

 

광해군 : 광북 폐실 이한유허 창오동대파기

 

광 : 해군(1608~1623)

북 : 인정권

폐 : 모살제

실 : 리외교

이 : 수광

한 : 백겸(동국지리지)

유 : 몽인(어우유담)

허 : 균(호민론)

창 : 덕궁 중건

오  : 5대 사고

동 : 의보감

대 : 동법(경기도 시행)

파 : 주천도론

기 : 유약조(20척/100석 동평관 폐쇄)

 

 

1. 해군(1608~1623)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국왕으로 15년간(1608~1623) 재위하였으나, 정변을 맞아 폐위당한 인물이다. 부왕 선조의 핍박과 명나라의 세자 책봉 거부 등 숱한 난관을 뚫고 즉위하였다. 하지만 정적을 제거하는 데 집착하면서 주로 대북 계열을 중용하였으며,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무리수까지 두었다. 마침 명과 후금이 전쟁을 벌이자, 명과는 사대관계를 유지하되 후금과도 우호관계를 맺으려 하였다. 하지만 숭명배금 노선을 절대시한 신료들의 거센 반대가 장기화하면서 국가 행정이 사실상 마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당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로 크게 달랐으며, 현재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편이다. 먼저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평가가 최악이었다. 인조의 후예들이 왕위를 잇는 상황에서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곧 인조반정의 취지에 조금이라도 해가 될 수 있는 내용은 입에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폐주(廢主)요, 혼군(昏君)이었다. 광해군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는 1930년대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였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광해군이 취한 노선을 매우 높게 평가하고, 옥사 문제는 모두 대북 탓으로 돌린 새로운 해석이다. 이는 만주사변(1931) 이후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여 한반도와 같은 문명권으로 보려던 일제 관학자들의 정치적 해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해방 후 1959년 이병도가 그대로 수용하여 퍼트리면서 통설로 자리 잡아, 각종 교과서와 개설서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익숙하다. 하지만 1990년대 이래 광해군 관련 연구가 상당히 쌓이면서 통설은 그 지위를 거의 상실하였다. 무엇보다도 광해군의 외교 노선이 과연 현명한 ‘중립’ 외교였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가 거센 편이며, 내치에서도 광해군이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결코 대북 같은 특정 정파에 휘둘리지 않았다는 실증적 연구가 나왔다. 아울러 광해군의 여러 업적이 다소 부풀려졌다는 비판도 무시하기 힘들다. 요컨대, 광해군에 대한 평가 문제는 시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2. 인정권

북인은 조선시대 광해군 대 집권 세력이었던 붕당의 한 정파이다. 동인은 분당 이후 임진왜란 종전까지 20여 년 동안 정국을 주도했는데, 주류는 퇴계학파, 비주류는 남명 · 화담학파였다. 동인 비주류 세력이었던 북인은 1589년 기축옥사 당시 서인으로부터 큰 피해를 입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적극적인 의병 참여와 주전론(主戰論)의 제기를 통해 세력을 키웠다. 광해군을 줄곧 지지했던 이들은 광해군이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집권 세력이 되었다.

 

북인은 비타협적이고 강경한 입장에서 실천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다. 임진왜란 때의 활약으로 입지를 굳힌 북인은 선조 말년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永昌大君, 1606~1614)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분열하였다.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대북이 정권을 장악했고,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명⋅청 교체의 혼란기에 노련한 외교술을 통해 국가의 실리를 도모했다. 이후 북인 내부에는 다양한 분열이 있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종장으로 모신 남인, 서인과 달리 남명 조식과 화담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신 북인은 상대적으로 학통상 열세에 있었다. 퇴계와 율곡의 학문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 대다수의 유생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성리학이 중심이지만 노장 사상의 색채도 지니고 있었던 남명과 화담의 학풍은 일반 유생들의 지지를 얻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대북 정권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광해군의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광해군의 명목상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廢母)하는 등 무리수를 강행하였고, 결국 이것은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빌미가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대북 세력은 완전히 축출되었고, 잔존한 소북 세력은 이후 남인에 점차 흡수되었다.

 

3. 모살제

폐모살제(廢母殺弟)’ - 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이다. 1613년 경상북도 문경 새재에서 강도사건이 일어남. 범인들은 은 수백 냥을 약탈. 주요 관리들의 서자(첩의 소생) 7. 이 사건이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에 의해 정치적 사건으로 변질. 당시의 훔친 돈이 광해군을 모함하고 제거한 후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고 몰아감. 영창대군은 성인으로 성장하고 있던 선조의 적장자. 그러니 광해군과 대북파에겐 위협적인 존재. 그러니 영창대군과 그를 지지하는 소북파가 광해군을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벌였다고 한 것임.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이 목숨을 잃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어 작은 골방에 불을 때서 증살(蒸殺)시킴. 인목왕후는 광해군보다 나이가 어렸지만법적으로 어머니였기 때문에 죽일 수 없었어요. 대신, 오늘날의 덕수궁에 가두어 창덕궁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함. 어머니를 가두고 동생을 죽이는 폐모살제의 행동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지만, 대의와 명분, 효를 강조하는 서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결국 서인을 중심으로 남인이 동조하여 인조반정이 발생함. 광해군과 인조(당시, 능양군)는 서로 삼촌과 조카 관계. 인조는 삼촌인 광해군에 대한 반감이 높았음. 광해군이 자신의 불안한 왕위를 지키기 위해, 위협이 될 만한 종친들을 모두 제거. 결국 종친 견제로 인한 왕족의 반발과 폐모살제 및 중립외교에 대한 신하들의 반발이 서로 일치하면서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것임.

 

4. 리외교 

광해군 즉위 당시 국제 정세는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전통의 강국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을 보내온 것과 함께 정쟁이 겹치면서 국력이 크게 약화됐다. 이 틈을 비집고 압록강 북쪽 여진족 내부에서는 누르하치가 중심이 돼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여진족의 세 분파 중 하나)을 통일하고, 1599년에 해서여진의 하다(哈達)를, 1607년에는 후이파(輝發), 1613년에는 우라(烏拉) 등을 병합했다. 여진족 대부분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것. 역사적으로 동북아시아 이민족들은 세력이 강해지면 항상 중국의 중원을 공격했다. 흉노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등이 모두 그랬다. 누르하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명군과 연합해 여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명군의 오인 사격으로 희생된 개인적인 원한까지 있었다. 당연히 명 정벌이 누르하치의 최종 목표였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광해군은 명과의 외교를 적극적으로 하면서도 후금(後金) 또한 자극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다. 여진어를 사용할 수 있는 역관을 양성해 후금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화기도감을 설치해 무기 개발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서 후금은 더욱 강성해졌다. 1616년 누르하치는 ‘칸’으로 즉위하고 국호를 ‘후금’이라 칭하면서 동북아의 실질적인 맹주임을 선언했다. 12세기 초 아골타가 세운 금(金)나라 이후 다시 동북아 강국으로 자리를 잡은 후금과 명의 대결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1618년 누르하치는 조부와 부친의 죽음 등 명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 한(恨)’을 내세우면서 무순(撫順) 지역을 공격했다. 무순의 점령은 중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었고, 명의 위기의식은 커졌다. 다급해진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분을 들어 광해군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1618년 윤 4월의 일로서, 광해군이 출병을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사대(事大)외교는 조선 외교의 기본 방향이었고, 불과 20여년전 위기에 몰린 조선을 명나라가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워준 은혜)’의 빚도 너무 컸기 때문이다. 신료들도 오만한 오랑캐 후금을 응징하자는 데는 의견을 같이했다. 이 문제만큼은 당쟁도 없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임진왜란 때 만들어진 임시조정)를 이끌며 직접 참전한 경험이 있었던 그는 당시의 정세를 냉정하게 인식했다. 전후 복구가 시급한 상황에서 군사를 파견하는 것도 부적절했거니와, 후금을 자극해 조선이 공격을 받는 최악의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광해군은 조선의 방어를 핑계로 명으로의 출병을 최대한 막고자 했다.

 

“훈련되지 않은 군졸을 적의 소굴로 몰아넣는 것은 비유컨대 양떼를 갖고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같으니, 정벌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우리나라 입장으로 보면 도리어 수비하지 못하게 되는 근심만 있게 될 것이다.”

 

1618년 4월 무순이 함락되자, 명나라는 다시 한 번 조선의 파병을 요청했다. 처음엔 총독 왕가수(汪可受)가 약 4만명을 청했으나, 경략(관직 명칭으로 지방장관)이었던 양호가 “조선에 병마가 적은 것은 내가 일찍부터 잘 안다”면서 그 수를 총 1만명 선으로 감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참판 강홍립을 5도 도원수(都元帥)로, 평안병사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고 최종적으로 5도의 군사 1만여명을 뽑아 출정에 나섰다. 이때 광해군의 외교적 역량이 돋보이는 부분이 강홍립을 파병군 총사령관인 도원수에 임명한 점이다. 강홍립은 국왕 직속의 통역관인 어전통사(御前通事) 출신으로 중국어에 능통했고, 광해군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는 측근이었다. 장수적인 능력보다 외교적인 역량을 총사령관 선임의 주요 요건으로 삼은 것이다. 파병 부대는 1618년 9월 평양에 이르렀고, 1619년 2월 1일 선발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강홍립이 거느리는 본진은 2월 23일 압록강을 건넜다. 사실 강홍립은 출정에 앞서 광해군으로부터 비밀 지침을 받았다.

 

“명나라 장수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해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하라.”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다 항복해도 좋다는 메시지까지 전달받았다. 1619년 3월 2일 조선군은 마침내 심하(深河)에서 후금군을 처음 맞이했다. 이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후금군에 대항해 치열하게 싸웠지만, 철기(鐵騎)를 앞세운 후금군의 위력 앞에 전세는 점차 불리해져갔다. 김응하, 이계종, 이유길 등 지휘관을 비롯해 수천의 병사들이 심하 전투에서 희생됐다. 중영장으로 참전했던 김응하는 죽기 직전까지 무수한 적을 베었고 창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칼을 놓치지 않아 후금에서조차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김응하의 전사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호조판서의 벼슬을 내렸고, 그를 추모하는 사당을 짓게 했다. 심하 전투에서 김응하와 대비됐던 인물이 강홍립이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강홍립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아야겠다고 판단해 후금 진영과의 적극적인 강화 협상을 도모했다. 광해군 밀지가 강홍립의 선택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강홍립은 통사 황연해를 시켜 후금 진영에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나라가 너희들과 본래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겠느냐. 지금 여기 들어온 것은 부득이한 것임을 너희 나라에서는 모르느냐.”

 

도원수 강홍립과 부원수 김경서가 후금군에 투항하고 누르하치를 만난 사실은 광해군을 제외한 대부분 신료들을 분노케 했다. 변변한 전투 없이 오랑캐에게 바로 항복한 강홍립을 처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광해군은 강홍립과 그의 가족을 끝까지 보호했다. 1623년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서인 세력에 의해 강홍립은 전형적인 매국노로 인식됐고, 이후 조선의 역사에서도 강홍립은 결코 긍정적으로 기억되지 않았다. 그러나 강홍립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충실히 수행했을 뿐 아니라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 장수로 출정했을 때도 조선과 후금의 강화 협상을 주선하는 등 오늘날 관점에서 재평가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조선이 자신들과 친교의 뜻이 있음을 확인한 후금은 조선 침공은 유보한 채 명나라 공격에 주력군을 파견함으로써 광해군 시절만큼은 국제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후금과의 일촉즉발 전쟁의 위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냉철하게 힘의 현실을 인식하고 후금을 자극하지 않은 광해군의 외교적 역량이 큰 몫을 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강력한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외교 전략을 수정했다가,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의 굴욕(이때  광해군은 생존해 있었다, 1641년 사망)을 당한 것과 비교된다.

 

5. 수광

이수광은 조선시대 공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563년(명종 18)에 태어나 1628년(인조 6)에 사망했다. 세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인조반정 후 고위직을 지내며 시무책 12조를 올렸다. 임진왜란·정묘호란·광해군 재위기의 정치적 갈등 같은 어려운 정국에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1614년(광해군 6)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지봉유설』을 편찬하면서 서양문물과 『천주실의』 등 천주교 교리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조선후기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6. 백겸(동국지리지)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5년 교정청(校正廳)이 신설되자 정구(鄭逑) 등과 함께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이 되었으며, 이어 경기전참봉·선릉참봉 등에 제수되었으나 재직중 병으로 사직하였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자살한 정여립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스레 염(殮)하였다. 그러나 뒤에 그 사실이 발각되고, 또한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李震吉)과 친분이 두터웠다는 이유로 연좌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귀양을 갔다.

 

임진왜란 때 대사면령으로 석방되었는데, 귀양지에서 적군에게 아부해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참살한 공로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기용되었다. 1595년 호조좌랑, 1601년 형조좌랑·청주목사, 1607년 판결사·호조참의 등에 기용되었다. 이듬해 선조가 죽자 빈전도감당상(殯殿都監堂上)이 되어 상례(喪禮)를 주관하였다.

 

1610년(광해군 2) 강원도안무사(江原道安撫使), 1611년 파주목사에 기용되었다가 사임하고 양주의 물이촌(勿移村)에 거하였다. 역학(易學)에 해박해 선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했던 『주역전의(周易傳義)』의 교정을 보았다. 그리고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연구하였다. 또한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수정해 이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고양하였다. 그 결과 『동국지리지』의 저술과 『기전고(箕田考)』 가운데 실린 「기자도(箕子圖)」·「기전설(箕田說)」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 밖에 저서로 『구암집』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다.

 

7. 몽인(어우유담)

유몽인은 성혼(成渾)과 신호(申濩)에게서 수학했으나 경박하다는 책망을 받고 쫓겨나, 성혼과는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89년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92년 수찬으로 명나라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오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를 평양까지 호종하였다. 왜란 중 문안사(問安使) 등 대명 외교를 맡았으며 세자의 분조(分朝: 임란 당시 세자를 중심으로 한 임시 조정)에도 따라가 활약하였다. 그 뒤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세 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다가 왕이 불러 남원부사로 나갔다. 그 뒤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성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에 따라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 해 7월 현령 유응경(柳應泂)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해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져 아들 유약(柳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서인들이 중북파(中北派)라 부르며 끝내 반대 세력으로 몰아 죽인 것이었다. 이 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의 공으로 봉해진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篆書)·예서·해서·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유몽인의 청명(淸名)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 개인의 시호를 국가에서가 아닌 사적인 방법으로 내림.)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향하였다. 신원된 뒤에 나라에서도 다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

 

8. 균(호민론)

허균은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문인이다. 1569년(선조 2)에 태어나 1618년(광해군 10)에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문재에 뛰어났고 학문은 유성룡에게, 시는 이달에게 배웠다. 명 사신 접대에 종사관으로 기용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명나라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광해군 즉위 후 대북파에 가담하여 폐모론을 적극 주장했다. 유학 외에 불교와 도교 등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비판적 개혁사상가로서 여러 이론을 개진했고, 사회모순을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 「한정록」 등의 작품을 남겼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이 지은 『택당집(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에 나타난 사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 「관론(官論)」 · 「정론(政論)」 · 「병론(兵論)」 · 「유재론(遺才論)」 등에서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대해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이 있어 그의 그러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문을 했다고 한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9. 덕궁 중건

창덕궁은 1405년 (태종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한 창덕궁은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선조는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의 복구를 선조 40년(1607)에 시작하였으며, 창덕궁은 광해군 2년(1610)에 중건이 마무리 되었다. 그 후 창덕궁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인정전을 제외하고 또다시 불에 타는 시련을 겪는다. 인조 25년(1647)에 복구되었으나 크고 작은 화재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특히 1917년 대조전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손실되는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때 창덕궁을 복구하기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을 비롯한 강녕전 동·서행각 등의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부터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가지 총 258년 동안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하며 정사를 편 궁궐이다. 북한산의 매봉 기슭에 세운 창덕궁은 다른 궁궐과는 달리 나무가 유난히 많다. 자연의 산세를 갈려 건축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궁궐이다. 경복궁의 주요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였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시대의 뛰어난 조경을 보여주는 창덕궁의 후원을 통해 궁궐의 조경양식을 알 수 있다. 후원에는 160여 종의 나무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300년이 넘는 나무도 있어 원형이 비교적 충실히 보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의 조경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10. 5대 사고

조선시대는 고려의 사관(史官 : 춘추관의 별칭)과 사고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세종 때 『태종실록』을 편찬하기까지 내사고(內史庫)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지고, 1429년(세종 10)에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상장의궤(喪葬儀軌)를 충주 사고(忠州史庫)에 보관한 것으로 보아 충주 사고가 외사고(外史庫)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439년(세종 21) 7월, 춘추관이 올린 외사고 확충 계획에 따라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더 지어 실록을 보관하게 하였다. 이로써 내사고인 춘추관 실록각(春秋館實錄閣)과 외사고인 충주·전주·성주의 사고가 정비되어 4사고(史庫)가 운영되었다. 이렇게 정비되어 내려온 4사고는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춘추관·충주·성주의 사고가 불타 버리고 전주 사고본(全州史庫本)만 병화를 면하였다. 전주 사고본 실록은 유생인 안의(安義)·손홍록(孫弘祿) 등의 노력으로 정읍의 내장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해로(海路)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普賢寺別殿)으로 옮겨졌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보현사의 실록을 다시 영변 객사(寧邊客舍)로 옮겨 두었고, 1603년(선조 36) 5월에는 등서(謄書)의 편의를 위하여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실록의 재인(再印)은 엄청난 비용과 인력이 요구되는 일이었으나 1603년(선조 36) 7월에 인쇄에 들어가 1606년(선조 39) 4월에 인쇄가 모두 끝났다. 본래 남아 있던 전주 사고본 1질(秩)과 재인본 3질 및 교정본 1질 등 모두 5질이었으므로 이들 실록 5질에 대한 소장처가 논의되었다. 결국 새로이 선정된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을 비롯하여 외사고인 강화·묘향산·태백산·오대산의 5사고가 마련되었다. 내사고인 춘추관 사고는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화재로 일부가 불탔고,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 때는 일부가 강화도로 소개(疎開:한 곳에 집중된 시설물을 분산시키는 것)되었으며,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다시 소개되면서 산실(散失)되었다. 외사고는 4사고로 증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산 속으로 옮겨 병화에 의한 소실을 방지하는 데 진력하였다. 강화 사고는 본래 부내(府內)의 봉선전(奉先殿) 서쪽에 있다가 1606년(선조 39)에 마니산으로 옮겨 신설되었고, 1660년(현종 1)에는 다시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사고를 새로 마련하였다. 묘향산 사고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무주(茂朱)의 적상산(赤裳山)으로 옮기자는 의논이 일어나 1633년(인조 11) 정월에 적상산성 안에 사고를 마련하고 수호사찰(守護寺刹)을 지었다.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覺華寺)가 근처에 있었고, 오대산 사고는 상원사(上院寺)와 월정사(月精寺)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 다른 외사고들과 마찬가지로 수호사찰을 두고 승려들을 머물게 해서 지키게 하였다.

 

11. 의보감

『동의보감』은 조선시대 의관 허준이 중국과 조선의 의서를 집대성하여 1610년에 저술한 의학서이다. 총 25권 25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596년 선조의 명으로 허준 등 5인이 공동으로 편찬을 진행하다가 병란으로 중단된 것을 허준이 단독으로 추진하여 1610년에 완성하였다. 병의 치료보다 예방을 강조하고 중국과 조선 의학의 핵심을 잘 정리하여 백과사전에 맞먹을 정도로 뛰어나게 편집한 책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의서이다. 중국에서 30여 차례 출간되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될 정도로 국제적인 의서가 되었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동의보감』의 주요 특징은 세 가지이다. 첫째, 병났을 때의 치료보다 병을 예방하거나 건강을 추구하는 양생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이 책은 중국에서 별개의 전통으로 내려오던 의학과 양생의 전통을 하나로 합쳐냈다. 병의 치료와 예방, 건강도모를 같은 수준에서 헤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둘째, 기존 중국과 조선 의학의 핵심을 잘 정리하였다. 허준은 중국의 한나라에서 명나라에 이르는 200여 종의 문헌과 『의방유취』 ·  『향약집성방』  ·  『의림촬요』와 같은 수 종(種)의 조선의서를 참고한 내용을 자신의 학식과 경륜에 결합하여 『동의보감』 안에 녹여내었고, 의학의 경전인 『영추(靈樞)』와 『소문(素問)』의 정신에 따라 의학의 줄기와 가지를 잡고, 다양한 학설과 처방을 병의 증상 · 진단 · 예후 · 예방법 등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셋째, 뛰어난 편집 방식이다. 목차 2권은 오늘날 백과사전의 색인 구실을 할 정도로 상세하며, 본문의 관련 내용끼리는 상호 참조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참고한 자료의 인용처를 일일이 밝힘으로써 원(原) 저작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인용 대목이 갈리는 곳은 ‘O’를 쳐서 구별하고, 제목과 본문 내용을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써서 쉽게 구별하도록 하였다. 이런 특징을 경쟁력의 원천으로 삼아 출간 직후부터 『동의보감』은 조선을 대표하는 의서로 자리잡았으며, 18세기 이후 『동의보감』은 국제적인 책이 되었다. 『동의보감』은 출간 이후 현재까지 중국에서 대략 30여 차례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도 두 차례 출간되었다. 특히 중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나, 중국 의서 가운데 『동의보감』과 성격이 비슷한 종합의서로서 『동의보감』보다 많이 찍은 책은 불과 수 종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동의보감』은 국내 및 국제적인 기여를 인정받아 2009년 7월 제9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바베이도스)에서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대동법 시행
대동법 시행


12. 동법(경기도 시행)

대동법이란 조선 후기 공물(貢物)을 현물이 아닌 쌀로 바치도록 개선한 제도를 말한다.

 

(1) 공납의 문제점

조선의 수취 체제 가운데 공납은 전체 세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현물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현물로 납부해야 하는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고 제때에 납부하더라도 현물의 상태를 빌미로 ‘점퇴(點退)’시킬 경우 백성들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에 백성들은 공납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방납업자(防納業者)에게 수수료를 부담하면서 맡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공납의 구조 때문에 국가에서 사용하는 것은 10에 1~2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 5~6은 방납업자가 가져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심각했다.

 

(2) 공납의 개혁

공납제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공물을 쌀로 거두려는 노력이 임진왜란 당시부터 나타났다. 공물을 쌀로 거두자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 그것인데 실제로 개선안으로 활용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방별로 현물이 아닌 쌀로 공물을 거두어 서울에 상납하는 등 지역에서 공납제를 자체적으로 개선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에 ‘외방에 있는 각 관의 공물이 실제 토산이 아닌 경우 농민들은 모두 미곡을 가지고 사다가 상납한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공납제를 대체한 제도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대동법의 시행

양란 이후 국가 재정이 흔들리면서 공납제를 개선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실제 개혁으로 이어졌다. 대동법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즉위 직후 이원익(李元翼, 1547~1634)과 한백겸(韓百謙, 1552~1615)의 건의로 1608년 경기도에서 최초로 시행되었다. 이후 1624년(인조 2) 이원익의 건의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 대동법이 시행되었으나 세곡 운반이 어렵고 대토지 소유자 등이 반대하여 충청도와 전라도에 시행된 대동법은 폐지되었다. 무엇보다 당대의 정치가들이 대동법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인조(仁祖, 재위 1623~1649) 대에 들어 대동법이 확대되기 시작하는데 김육(金堉, 1580~1658)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김육은 당시 상소에서 대동법으로 세금 부담을 고르게 하고 백성들도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양란 이후 세금 부담이 가장 컸던 충청도를 중심으로 대동법에 대한 요구가 나타났고 이를 배경으로 1651년(효종 2)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다시 시행되었다. 충청도에 시행된 대동법을 통해 그 효과가 나타났고 이를 기점으로 전국적인 범위로 대동법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당시 만들어진 「호서대동절목(湖西大同節目)」은 다른 도에 시행된 대동법의 표준이 될 정도로 철저한 준비 끝에 만들어졌다. 이에 따르면 토지 1결을 기준으로 쌀 10두를 봄과 가을에 나누어 거두었다. 그리고 대동미를 거둘 때 소비되는 비용을 별도로 설정하여 이전에 암묵적으로 더 거두었던 폐단을 막고, 내역의 기준을 명확히 정하여 징수하였다.

충청도에서 실시된 대동법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자 백성들은 전라도에서도 시행하기를 바랐다. 호남 지역의 유생들이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상소를 올려 보낼 정도였다. 이에 1658년(효종 9) 호남의 연해 27개 고을에서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1662년(현종 3)에는 전라도 산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호남과 호서에서 성과를 거두자 대동법은 대세가 되었다. 대동법은 1708년(숙종 34) 황해도에서 실시되는 등 17세기 후반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공납제를 대체하게 되었다.

 

(4) 의의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면서 기존 공납제가 안고 있던 현물납의 모순이 일정 부분 극복되었다. 특히 쌀로 공물을 대신 내면서 현물로는 불가능한 표준 가치로의 전환이 가능해졌고 이를 통해 합리적인 재정 규모의 산출과 운영이 가능해졌다. 이전부터 암묵적으로 실시되던 공납의 문제점을 정부가 인정하고 법제화하여 공납의 자의적 운영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은 대동법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13. 주천도론

파주천도론은 1612년 9월 풍수지리가 이의신(李懿信)의 상소로 제기되어 광해군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천도의 이유는 서울의 지기(地氣)가 다했다는 것인데, 그 증거로 임진왜란, 누차의 모반사건, 격화된 당쟁, 그리고 서울근처 산림의 황폐 등을 들었다. 그 대신 새로운 길지로서 이의신은 교하를 건의하였는데, 대부분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논리였으며, 강화도와 인접하여 전략상 유리하다는 점도 들었다. 여기에 혹한 광해군은 1613년 정월 대신들에게 비밀교서를 내려 교하지역을 답사하도록 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삼공(三公)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의 반대를 받았다. 이에 왕은 “천도가 아닌 이궁(離宮)을 지을 뿐”이라고 회유하였으나, 승정원ㆍ삼사 및 기타 관원들의 끈질긴 간쟁으로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천도에 대한 반대 이유는 서울이 정치ㆍ군사ㆍ경제 등의 입지적 조건에서 천혜의 요지인 반면, 교하는 그 평탄한 지형 때문에 외적의 방어에 불리하고, 많은 인구를 지탱하기 위한 음료수와 연료 및 재목의 조달이 어려우며, 민심의 동요와 국고의 고갈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교하천도론은 발의단계에서 저지되었으나, 조선 후기 사회불안에 따른 풍수도참설의 유행과 서울의 지기 쇠약의식이 보편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4. 유약조(20척/100석 동평관 폐쇄)

기유약조는 1609년(광해군 1) 조선이 일본과의 통교를 위해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맺은 강화조약이다. 임진왜란 직후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 도쿠가와막부)에서는 우리나라의 사정에 밝은 대마도주에게 외교권을 행사하도록 하였고, 대마도주는 조선에 세 차례 사절을 파견하여 통교를 요청하였다.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함으로써 국교가 재개되었다.

 

일본에서 강화를 하려는 노력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이루어졌다. 1599년(선조 32) 7월, 일본은 야나가와 세게노부(柳川調信) 명의의 서계(書契)를 보내왔다. 일본측에서 적극적으로 피로인(被虜人, 포로)을 송환할 것이니, 조선측에서는 사신을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후 일본은 조선의 강화 교섭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1600년(선조 33)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외교권을 장악했고, 이듬해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확실하게 실권을 잡았다.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 일본은 명군 인질을 모두 송환하였고, 조선에 지속적으로 통신사(通信使)를 파견해주기를 요청하였다. 1602년(선조 35) 말에는 도쿠가와로부터 강화 교섭을 일임받은 대마도주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국교 재개를 계속 거부하면 다시 침략할 것이라는 협박성의 논조였다. 조선에서는 일본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1604년(선조 37)에 조선은 유정(惟政, 사명대사)과 손문욱(孫文彧)을 탐적사(探賊使), 즉 ’적을 정탐하는 사신‘이라는 명칭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도쿠가와를 만나고 일본 정세를 살피고 귀국하였다. 전쟁 중에 잡혀간 피로인 3천여 명도 같이 돌아왔다. 1606년(선조 39) 조선은 화친을 원한다면 일본에서 먼저 화친 요청 국서를 조선에 보내고, 조선 왕릉(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의 능인 정릉)을 파헤친 범인[범릉적(犯陵賊)]들을 묶어 보내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일본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였다. 몇 개월 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의의 국서와 범릉적을 조선에 보내왔다. 이듬해에는 조선이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절을 보냈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과의 국교는 재개되었다.

 

기유약조의 내용은 『통문관지(通文館志)』, 『변례집요(邊例集要)』, 『고사촬요(攷事撮要)』, 『대마도종가문서(對馬島宗家文書)』 등의 여러 사료에 수록되어 있는데, 각기 조문의 수와 내용이 다르게 되어 있다. 『통문관지』에 13개 조로 되어 있는 기유약조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왜관(倭館) 접대는 국왕사(國王使), 대마도주 특송사(對馬島主特送使), 대마도 수직인(對馬島受職人, 대마도인으로서 조선의 관직을 받은 사람)의 세 가지 예(例)가 있다.
2) 국왕사가 올 때는 상선(上船)과 부선(副船)만 허락한다.
3) 대마도주의 세사미두는 모두 100석을 지급한다.
4)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20척으로 제한하며, 이 중 특송선은 3척이다.
5) 수직인(受職人)은 연 1회 내조(來朝)하고,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없다.
6) 배는 세 등급이 있는데, 승선 인원 25명 이하를 소선(小船), 26~27명을 중선(中船), 28~30명을 대선(大船)이라 한다. 선부(船夫, 뱃사람)는 대선 40명, 중선 30명, 소선 20명으로 한정하며, 정해진 수를 넘을 수 없다. 선체의 크기를 재고 선부가 정해진 수를 넘었는지 점고(點考, 명부에 점을 찍어가며 수효를 조사)한다.
7) 입국하는 일본 배는 모두 대마도주의 문인(文引)을 소지해야 한다.
8) 대마도주에게 전례에 따라 도서(圖書)를 만들어 주되, 종이에 견본을 찍어 예조·교서관·부산포(釜山浦)에 보관하여 서계(書契, 조선과 대마도가 주고받은 공식 외교문서)가 올 때마다 진위를 살피며 격식을 위배한 자는 되돌려 보낸다.
9) 문인이 없는 사람과 부산포 외의 다른 곳으로 입항한 자는 적으로 간주한다.
10) 일본 사신이 공적인 업무로 조선에 왔다가 돌아갈 때 그 소요되는 기간에 따라 지급하던 식량은 대마도인 5일분, 대마도주 특송인 10일분, 국왕사 20일분을 준다.
11) 왜관의 체류 시일은 대마도주 특송 110일, 기타 세견선 85일, 표류인(漂流人)의 송환을 비롯한 기타의 경우는 55일로 제한한다.
12) 대마도주의 세견선은 대소를 구별하지 않는다.
13) 기타는 전례에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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