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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신석기 시대 토기 두문자 : 신 이 민 덧 눌 빛 뇌 파

by noksan2023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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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 토기의 비밀
빗살무늬 토기의 비밀

 

신석기 토기 : 신 이 민 덧 눌 빗 뇌 파

 

: 무늬토기

: 무늬토기

: 눌러찍기무늬토기

: 살무늬토기 

뇌 : 문(번개무늬)

파 : 상문(물결무늬토기)

 

 

1. 른 민무늬 토기

이른 민무늬 토기는 신석기시대에 이용된 민무늬, 즉 무늬가 없는 토기입니다. 보통 민무늬 토기는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신석기시대에도 민무늬 토기는 있었습니다. 바로 이른 민무늬 토기입니다. 청동기 시대보다 신석기시대가 "이른" 시대이므로 신석기시대의 민무늬 토기는 이른 민무늬 토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른민무늬 토기
이른민무늬 토기

 

 

2. 무늬토기

 

덧무늬토기
덧무늬토기

 

 

토기 겉면에 띠를 덧붙이거나 겉면을 돋게 하여 여러 가지 무늬를 장식한 토기다. 기원전 6천 년부터 기원전 4천 년 무렵까지 사용되었고, 주로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에서 출토되며 빗살무늬토기보다 먼저 등장하였다. 이 덧무늬토기는 조개더미[貝塚]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아가리 밑에 가로로 한줄 덧띠를 두르고 그 위에 손톱으로 눌러 무늬를 내었다. 그 아래로부터 몸통 중간까지 가는 덧띠로 세모꼴을 연속으로 구획하고 다시 안팎에 가는 덧띠를 채웠다.

 

 

3. 러찍기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는 손가락이나 동물뼈·나뭇가지 등으로 무늬를 찍은 신석기시대 토기를 말한다. 압날문토기(押捺文土器)라고도 한다. 한반도의 남해안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었으며, 주로 신석기시대 전기와 중기에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만드는 방법과 무늬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그릇 표면을 엄지와 검지로 찍거나 집어 눌러서 돌출부분과 다음 돌출부분 사이에 하트 문양이 생기게 하는 방식, 그릇 표면을 동물뼈의 마디 부분으로 찍어 문양을 새기는 방식, 끝이 뾰족하거나 둥근 도구 및 속이 빈 대롱모양의 도구로 문양을 찍어 열을 짓게 하는 방식 등이 있다. 손가락·손톱으로 만든 문양을 조압문(爪押文), 끝이 뾰족하거나 둥근 도구로 찔러 만든 문양을 자돌문(刺突文)이라고 부른다.

 

4. 살무늬 토기

 

빗살무늬토기(서울암사동)
빗살무늬토기(서울암사동)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한반도에 거주한 주민이 사용한, 표면에 빗살무늬가 있는 토기이다.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물질적 표상 중의 하나이며, 즐문토기로도 불린다. 서기전 1만 년을 전후한 무렵에 한반도에 출현하여 각 지역으로 확산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빗살무늬토기는 토기 연대와 양식적인 특징을 기준으로 초창기, 조기, 전기, 중기, 후기, 말기 토기로 구분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다양한 기형과 문양이 출현하여 성행하며 자체적인 변천 과정을 거치고 있다.

 

토기는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물질적 표상 중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으며, 토기의 발명과 사용은 가식 식물의 범위 확대와 새로운 조리법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인류의 생활양식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다양한 문양이 시문된 빗살무늬토기는 타 문화권의 신석기 토기와 차별화되는 특징을 보여 준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계통과 편년, 나아가 사회 변화상과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빗살무늬 토기

 

 

 

이 토기를 왜 빗살무늬 토기라 부를까?

 

토기 표면에 새겨진 여러 무늬 중 기장 많은 빗금이 머리를 벗는 빗의 살 형태로 처져 있기 때문이다. 토지를 제작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던 신석기 시대에 굳이 번거롭게 무늬를 새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부에서는 빗살이 토지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거나 내부에 열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실용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또 한편으로는 빗살무늬가 햇살이나 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주술과 장식의 의미가 있다고 추정한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왜 이 토지는 밑바닥이 뾰족할까? 밑바닥이 뾰족하면 바닥에 제대로 놓이지 않고 넘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러 고정하기 위한 장치를 추가로 들어야 하지 않나? 이 의문은 위의 것에 비해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농경만으로 식량을 먹을 만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신석기 인들은 조개나 물고기 등을 얻기 위해 강가나 바다에 자리 잡았다. 물가 주변의 땅은 모래나 진흙으로 되어 있어 토지를 땅아 꽂거냐 묻어 두는 편이 쓰기에 더 안정적 이었을 것이다. 빗살무늬 토기 중 밑이 평평한 것도 있다. 이런 경우는 물가가 아닌 에서 사용했을것이다.

 

다음으로 눈길이 가는 것은 여기저기 뚫려 있는 구멍이다. 음식의 조리나 곡식의 장을 위해 만든 토지에 구멍 이 왜 필요할까? 게다가 지금까지 출토된 빗살무늬 토기를 보면 구멍의 위치나 개수가 일정하지 않고 제각각이다. 끈으로 토지를 묶어 어딘가에 걸어 놓기 위한 걸까? 아니면 음식을 끓일 때 김을 빼기 위한 용도였을까? 그도 아니면 조개를 잡고 물을 빼려고 그랬을까? 고고학계에서는 이 구멍들을 수리의 흔적으로 보고 있다. 토지가 귀한 시대였기 때문에 균열이 생기거나 파손되면 그 주위에 구멍을 뚫고 끈으로 단단히 묶어 더는 파손되지 않도록 긴급 처지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추정일 뿐 빗살무늬 토기는 말이 없다.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오면서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곡식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기 위해 토지를 제작하였다. 예전에는 음식을 날로 먹거나 모닥불에 구워 먹는 수준이 었지만, 토지를 이용하면 도토리를 갈아 죽을 해 먹거나 조개를 끓여 먹는 것도 가능했다. 토지는 음식을 한결 부드럽게 만들었고 위생에도 도움이 되었다. 건강 상태가 좋아진 신석기인들의 수명은 더욱 늘어났고, 이에 따라 인구도 증가하였다. 신석기 인들은 안정적인 정착 생활을 통해 문명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빗살무늬 토지는 단순히 하나의 그릇이 아니다. 빗살무늬 토지는 우리가 농업 혁명이라고 부르는 격변의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5. 문토기(번개무늬토기)

 

 

뇌문토기

 

 

 

뇌문토기라 함은 신석기시대 말기 번개를 상징하는 네모 또는 마름모꼴의 무늬를 여러 겹 포개서 새긴 빗살무늬토기를 말한다. 점이나 빗금으로 채워진 평행선띠, 또는 2, 3줄의 평행선·점선 등으로 사각형·마름모꼴 등의 각을 이루면서 꺾이는 기하학적 무늬를 가진 토기이다. ‘뇌문토기(雷文土器)’·‘돌림무늬토기’로도 불린다.

 

무늬의 형태에 따라 대개 5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농포형(農圃形)은 그릇 동체부분에 가로로 돌아가는 무늬구획을 마련하고 그 안에 무늬띠를 나선형으로 감아두른 것이다. 구연부와 평행으로 그어 4각형이 되게 하거나 대각선으로 그어 마름모꼴을 만들었다. 둘 다 무늬를 이루고 있는 띠가 2줄의 평행선 안에 빗금이나 점으로 채워진 점이 공통적이다.

 

함경북도 지방의 청진 농포동, 무산 호곡동(범의구석)과 웅기 송평동, 원수대(元帥臺), 연해주 글라드카야 등에서 출토된다. 납작바닥의 단지와 바리·보시기 등의 그릇이 주류를 이룬다. 청등말래형은 동체부 전면에 2, 3줄의 평행선으로 대각선을 그어 매 구획 안에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작은 마름모꼴을 연속으로 그린 것이다. 무늬띠가 직각으로 꺾이는 것은 농포형과 같으나 무늬구성요소가 평행선으로 된 점에서 차이가 난다. 농포형과는 달리, 여러 가지 빗살무늬, 융기문과 결합된다. 평북 지방의 용천 신암리 청등말래, 위원 용연리, 용송리, 영변 세죽리 등에서 출토된다. 목이 달린 호형(壺型)이 기본형태이다. 쌍학리형(雙鶴里形)은 무늬수법이 다양해 농포형처럼 2줄의 평행선 테두리 안에 빗금이나 점선으로 채운 것도 있고 1줄의 점선으로 그린 것도 있다. 계단형태, 3·4줄의 평행선으로 이루어진 나선형, 마름모꼴 등의 무늬가 토기 전면에 시문되어 청등말래형과 공통점이 있다. 용천군 쌍학리, 신도조금소 등에서 나왔다. 납작바닥에 긴 목이 달린 호(壺)가 기본형이다.

 

당산형(堂山形)은 평행선 테두리 안에 빗금을 채운 띠나, 4·5줄의 짧은 사선으로 된 무늬띠를 직각 또는 예각으로 꺾어 노끈을 꼬듯이 꼬아간 것이다. 정주 당산이 대표적인 유적이며 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이나 융기문과 결합되어 나타난다. 직립구연(直立口緣)의 발형(鉢型)이 주류이며 궁산(弓山)문화의 토기와 비슷하다.

서포항형(西浦項形)은 연속된 마름모꼴의 무늬를 남겨두고 그 배면(背面)을 점선이나 선으로 채워넣는 방식이다. 다른 무늬와 결합하는 예가 없이 단독으로 나타나는데 서포항 4기층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납작바닥의 작은 잔, 원통형의 단지가 기본유형이다. 무늬요소로 볼 때는 동북·서북 지방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두만강·압록강유역을 통해 거의 동시에 한반도에 전해져 함경도·평안도 지방에서 유행하였다. 그 뒤 함경도요소와 평안도요소가 중간지점에서 서로 결합하기도 한다. 북한지방을 제외하고는 한강유역인 미사리에서 1점 출토된 바 있다. 만주지방에서는 앙앙치(昻昻溪)에서 보인다.

 

이 토기는 크게 보면 신석기 말기의 중국 채문토기무늬에서 채용, 발전된 것으로 농경문화의 파급과 더불어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6. 상문토기(물결무늬토기)

 

 

물결무늬토기

 

 

 

파상문이라 함은 점을 연결하거나 선을 그어 만든 물결 모양의 문양을 말한다.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와 신라토기(新羅土器)에 많이 시문되어 나타난다. 물결무늬의 양상은 신석기시대 유적인 궁산리(弓山里)·금탄리(金灘里) 등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에서 보인다. 신라토기에서는 고배(高杯, 굽다리접시)의 뚜껑에 주로 나타나는데, 빗살 모양의 시문구(施文具)로 물결 모양의 띠무늬를 둘러 장식한 것이다. 물결모양은 2∼3개나 5∼6개, 또는 12∼14개의 줄 무늬가 물결처럼 굴곡을 이루고 시문되는데 파상이 크게 나타난 것과 잔잔하게 나타난 것 등 다양한 형식이 보인다. 그 시문 기법은 고려도자(高麗陶磁)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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