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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청동기 토기 두문자 : 청 송 새 미 민 홍

by noksan2023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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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토기 : 미 민 홍
청동기토기 : 미 민 홍

 

청동기 토기 : 청 송 새 미 민 홍

 

청 : 동기

송  : 부여 국리식 토기

새 : 덧띠김무늬 토기

미 : 송리식 토기

민 : 무늬 토기

홍 : 붉은() 간토기

 

1. 부여 국리식 토기

 

부여 송국리식 토기
부여 송국리식 토기


‘송국리식 토기’라 불리는 청동기시대의 민무늬 토기는 아가리가 밖으로 약간 벌어졌으며, 배부른 몸통에 비해 바닥면이 매우 좁은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송국리식 토기는 생활용기뿐만 아니라 독널무덤으로도 사용되었다. 독널무덤으로 사용된 송국리식 토기는 바닥에 구멍이 뚫린 예가 많으며, 독널 안에는 주로 대롱옥이 부장되었다. 독널은 유아를 묻거나, 성인이 죽은 이후에 살을 썩힌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국리식토기는 대체로 경미하게 외반하는 짧은 구연부와 배부른 동체부에서 축약되면서 좁은 저부를 형성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구연부는 크게 외반하는 경향을 보이고 높이에 비해 저부가 넓어지며 동체부의 최대경은 중앙부에서 상부로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연부의 외반 정도와 동체부의 최대경 위치는 형식 분류의 주요 속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바탕흙〔胎土〕은 굵은 석영·장석 등의 석립(石粒)이 혼입된 것과 세사립(細沙粒)이 섞인 것이 존재한다. 토기의 색조는 적갈색·황갈색·흑갈색 등 다양하게 나타나며, 토기의 내 외면에는 부분적으로 흑반(黑斑)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릇 바깥면의 정면수법(整面手法)은 대부분 물손질이 이루어지는데, 서해안지역의 일부에서는 조개껍질〔貝殼〕을 이용하며, 전남지역에서는 마연(磨硏)수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송국리식토기는 주거생활 속에서 사용된 실생활용기였으나 무덤 조성 시에도 이용되었다. 무덤으로 사용된 대표적인 예는 독널무덤〔甕棺墓〕으로 무덤구덩〔墓壙〕을 판 후에 몸통이 긴 독모양토기〔甕形土器〕를 바로 세우거나〔直置〕 기울여 세워〔斜置〕 주검〔屍身〕을 매장하였으며, 뚜껑〔蓋〕은 대부분 돌판을 이용하였다. 특히 독널로 이용된 독모양토기의 저부는 구멍이 뚫린 예가 많다. 저부에 구멍 뚫린 토기는 집자리에서도 다량 출토되며 크기는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송국리식토기의 편년에 대해서는 방사성탄소연대자료에 의거하여 기원전 8세기까지 상향조정되고 있는 추세이다.

 

2. 덧띠김무늬 토기

 

덧띠새김무늬토기는 청동기 시대의 토기입니다. 신석기 시대에 덧무늬 토기가 있었다면, 청동기 시대에는 덧띠새김무늬토기가 있었습니다. 덧무늬 토기와 덧띠새김무늬토기는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덧무늬 토기는 토기의 표면에 점토 띠를 덧댄 것이고, 덧띠새김무늬토기는 토기의 표면에 점토 띠를 덧붙인 뒤 그 점토 띠에 빗금무늬와 같은 문양을 새긴 것입니다. 즉, 덧띠새김무늬토기는 "점토 띠 위에 무늬를 새긴 토기"인 것입니다.

 

3. 송리식 토기

 

미송리식 토기 : 손잡이
미송리식 토기 : 손잡이

 

 

미송리형토기는 중국 동북지역에서부터 한반도 북부지방에 걸쳐 사용한 토기로, 표면에 가로줄 무늬가 새겨지고 손잡이가 붙은 항아리 모양 토기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로줄 무늬의 수가 적어지고 손잡이의 모양도 간략한 것으로 변화하였다. 이것의 상한과 하한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며, 중심 시기는 대체로 서기전 8∼7세기에 해당한다.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이라는 한정된 범위에서 출토되며, 비파형동검과 더불어 고조선과 관련된 고고학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미송리형토기는 랴오둥 지역에서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까지라는 비교적 뚜렷하고 한정된 분포권을 이루고 있어, 이를 문헌에 나오는 고조선이라는 정치체와 연결시키는 견해가 많이 제기되어 왔다. 현재로서 미송리형토기가 분포하는 범위 전체를 고조선으로 인식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 가운데 어느 특정 지역으로 한정해서 고조선을 인식해야 할지 등등 아직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많으며, 문헌사 연구에서도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미송리형토기는 비파형동검과 더불어 고조선과 관련된 유력한 고고학 자료임이 분명하므로, 청동기시대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이다.

 

4. 무늬 토기

 

구멍무늬 토기 : 민무늬토기
구멍무늬 토기 :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민무늬 토기 중 하나가 구멍무늬 토기입니다. 무늬가 없는 토기라면서 구멍무늬라니, 의아하실 수 있습니다. 민무늬 토기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무늬가 없다는 뜻이지만 이는 무늬가 많이 베풀어진 신석기시대 토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특징을 표현하기 위한 명칭입니다. 청동기시대의 이른 시기 토기를 잘 관찰해 보면 바리 아가리 부분에 여러 가지 무늬가 표현돼 있습니다. 구멍무늬, 눈금[刻目]무늬, 빗금무늬가 보이는가 하면 점토 띠로 아가리 부분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이런 무늬들은 시간성과 지역성 더 나아가서는 집단성(계통)을 반영한다고 여겨져 주목받았습니다. 실제로 구멍무늬가 있는 토기들은 남한 전역에서 발견되는데 반해 점토 띠를 붙인 돋은띠무늬 토기는 한강 유역이나 남강 유역, 겹아가리에 짧은 빗금무늬가 새겨진 토기는 금강 유역 등 특정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가리에 표현된 무늬들조차 사라지게 되는데요. 구멍무늬, 낟알무늬 정도만 한강 유역이나 강원도, 영남 동남부 지역 출토 토기에서 보입니다.


신석기시대와 달리 청동기시대에는 왜 토기에 무늬가 거의 없을까요? 청동기시대에도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왜 무늬는 사라지게 될까요? 그것은 토기가 사회에서 가지는 의미와 상징성이 달라졌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신석기시대에는 집단의 정체성이나 예술성, 신념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주로 토기의 무늬였습니다. 청동기시대에는 새로운 소재인 청동기가 등장합니다. 사회에서 극소수만 누릴 수 있는 청동 제품에 정교한 기하학무늬를 베풀어 이를 더욱더 가치 있게 만들었습니다. 청동 제품에 표현된 추상적인 무늬들은 농경사회에서 경외와 신앙의 대상이 된 해, 별, 번개 등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석기시대에 실생활 도구와 예술품 사이 경계선 어딘가에 있던 토기는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무언가를 담았던 그릇 본연의 모습에 더 가까워졌다고 봅니다.

 

5. 붉은()간 토기

 

붉은간토기(홍도)
붉은간토기(홍도)

 

붉은간토기는 청동기시대, 토기의 표면에 산화철 성분의 붉은색 안료를 바르고 마연한 토기이다. 청동기시대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 확인되는 붉은간토기는 생활 유적에서도 출토되지만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서 장송의례와 관련이 깊다. 남한 전역에 분포하지만 서부 경남 지역에서 많이 출토된다. 청동기시대 늦은 시기에는 플라스크모양 붉은 간토기를 비롯하여 지역적 특색을 보이는 것이 다수 등장하며, 일본 열도의 야요이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붉은간토기는 청동기시대의 일반적인 민무늬토기[無文土器]에 비해 매우 고운 점토를 사용하였으며, 두께도 얇은 편이어서 상당히 정교한 제작 기술을 필요로 하였다. 토기의 바닥이 편평한 것은 주로 주거지에서, 둥근 것은 무덤에서 출토되는 경향이 있으며, 종류로는 항아리모양토기[壺形土器] · 바리모양토기[鉢形土器] · 굽다리토기[臺附土器]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둥근 바닥의 작은 항아리모양토기이다.

붉은간토기의 용도로 주거지 출토품은 생활의례, 무덤 출토품은 장송의례와 관련이 깊다. 특히 장송의례의 경우 붉은간토기 속에 곡물 또는 망자의 영혼을 담았다고 보기도 하는데, 이는 농경사회적인 조상신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붉은간토기는 조몬시대[繩文時代]에서 야요이시대[彌生時代]로 전환하는 시점의 일본 열도에도 전래되어 야요이문화 개시기의 주요한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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