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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신석기 시대 특징 두문자 : 모 공 폐 외 평

by noksan2023 2023.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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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신석기 특징

 

신석기 특징 : 모 공 폐 외 평

 

모 : 계사회

공 : 유생활

폐 : 쇄사회

외 : 

평 : 등사회

 

1. 계사회 : 씨족사회 +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서옥제) + 화랑도의 원화

(1) 씨족

씨족(氏族, clan)은 조상이 같거나 같다고 여겨지는 혈연 공동체를 말한다. 그 구성원은 특별하고 밀접한 권리의무 관계에 있으며, 근친상간을 방지하기 위해 씨족 내에서는 결혼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씨족 내 결혼을 하는 경우는 집안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다. 지역적 단위에서는 흔히 마을을 이루기도 한다. 수렵·채집·어로의 채집 경제에서 농경 목축의 생산 경제로 이행하여 촌락이 형성되자 공동체는 군(群)에서 단계(單系) 혈연 집단(씨족)으로 변천했다고 한다.

토지(土地)는 씨족의 공동체에 의해서 점유되고, 씨족의 성원의 공동 노동에 의해서 경작되었다. 토지의 경작권은 드디어 씨족의 성원의 것이 되어 경작권이 상속된다.

씨족이 연합한 것이 부족이다. 씨족 사회를 묶는 인연은 혈연 관계이나, 지연적 관계도 처음부터 공존했던 것 같다. 씨족의 장이 모여서 평의회를 열어 전쟁이나 강화에 관해서 협의했다.

 

(2) 고구려의 데릴사위제  : 서옥제

서옥제(壻屋制)는 고구려에서 혼인하던 풍습으로 데릴사위제 가운데 하나이다. 사위집이라고도 한다. 《삼국지》〈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은 말로써 혼약이 정해지면 처가에서 큰 본채 뒤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이를 서옥(壻屋, 사위집)이라 하였다. 해가 저물 무렵 남편이 처가 문 밖에 와서 이름을 밝히고 꿇어앉아 절하며 안에 들어가서 아내와 잘 수 있도록 요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청하면 아내의 부모가 별채에 들어가 자도록 허락한다.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남편 집으로 돌아간다. 마치 데릴사위제 가운데 서류부가(壻留婦家)로서 한국의 원시사회가 모계제사회(母系制社會)였다고 주장하는 근거의 하나이다. 서류부가는 남자가 혼인을 한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남자 집으로 돌아와 사는 혼인 형태이다.

이러한 서류부가의 혼속을 사위가 처가에 장기간 머물며 노력을 제공하는 봉사혼(奉仕婚)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이를 조선 중기 효종 때의 《반계수록(磻溪隨錄)》에는 “사대부가는 고루구간(固陋苟簡)하여 사위가 처가에 유한다. 그러므로 처를 취하지 않고 장가든다.”라고 표현하였다. 수천 년 내려온 서류부가의 혼속은 체류 기간이 조선 후기에는 1~3년으로 단축되었다.

 

(3) 신라 화랑도의 원화

원화(源花)는 일반적으로 화랑의 전신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 간 항쟁이 커지면서 진흥왕 37년(576년)에 청소년 단체를 개편해 원화를 만들었다. 범위는 3~400명이고, 원화의 장은 아름다운 처녀를 임명해 효도, 우애, 충성, 신의를 가르쳤다. 

 

신라의 진흥왕은 젊은 인재를 선발키 위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라는 두 여성을 원화로 삼아 300여 명의 젊은이들을 거느리게 해 행실을 보아 인재를 등용하려 했다. 그러나 두 여인은 서로 미모를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든 뒤 강에 빠뜨려 죽여 버렸다. 그 일이 밝혀져 준정도 사형당하고 이후에는 여성 대신 용모가 뛰어난 남성을 화랑으로 삼았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미실의 시대에 원화 제도가 다시 부활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화랑세기 자체가 진위 논란이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2. 유생활 : 두레

두레는 농촌에서 농민들이 농사일이나 길쌈 등을 협력하여 함께 하기 위해 마을 단위로 만든 공동노동조직이다. 고대 씨족공동사회에 그 연원을 둔 두레는 모내기·김매기 등 일시적으로 많은 품이 요구되는 농경에 마을의 성년남자 전원이 거의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강제성을 띤 조직이었다. 우두머리인 행수를 비롯한 임원이 있어 조직과 일을 체계적으로 관리했고, 일의 시작과 진행에 농악이 동원되었으며 일을 마친 후에는 반드시 노고를 잊고 결속을 다짐하는 공동회연이 열렸다. 토지사유화의 발달과 더불어 쇠퇴한 두레는 현재 전통유산의 형태로 남아 있다.

 

3. 쇠 사회 : 동예 책화

동예사회에는 각 씨족마다 생활권이 정하여져 있어 함부로 다른 지역에 들어가 경제활동 등을 할 수 없었는데, 만약 한 읍락이 다른 읍락의 경계를 침범하였을 때 침범자 측이 생구(生口)와 우마(牛馬)로 이를 변상하는 법속이다. 이처럼 당시 씨족은 대체로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일정한 활동영역을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자급자족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경제적 독립체여서, 그들의 주된 경제활동인 사냥·고기잡이·농경 등은 모두 이 영역 안에서 행하여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영역을 벗어난 지역, 즉 다른 씨족의 영역 안에서 경제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4. 족혼 : 씨족 이외의 사람과 결혼

배우자는 반드시 다른 씨족에서 구해야 했던 우리 나라 씨족 사회의 혼인 풍속. 씨족 사회는 원래 폐쇄적 공동체이나 족외혼 제도를 통해 점차 부족사회로 나아갔다. 동예는 특히 씨족 사회의 전통이 오랫동안 엄격하게 남아 있었다. 족외혼 풍속은 나중 동성불혼(同姓不婚) 제도와 연결된다.

 

5. 등사회 : 계급 미분화, 단 우두머리존재

(1) 신라의 화백회의(만장일치제)

화백(和白)은 고대 신라에서 나라의 중대사와 규율을 의논하던 귀족 회의 제도이며, 의결 방법은 만장일치제였다.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의 유제(遺制)로서 <수서> 신라전에 〈共有大事則聚群官詳議而完之〉, <당서> 신라전에 〈事心與衆議號和 人異則罷〉라고 한 것을 보면, 화백 회의는 중대 사건이 있어야 개최되고 회의의 참석자는 보통 백성이 아닌 백관(百官)이라는 것, 그리고 회의에서 한 사람의 반대라도 있으면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백의 만장일치 제도는 단 한 번의 예외를 남겼는데, 935년 경순왕의 고려 귀순 결정이었다. 또한 화백은 귀족의 단결을 굳게 하고, 국왕과 귀족 간의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일례로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라는 이유로 화백에서 진지왕을 폐위하였다. 화백 회의에는 20명의 진골 출신자만이 참석했으며 각각 대등(大等)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자체 의결을 통해 의장격인 상대등(上大等)을 선출하였다.

 

6. 이외 신석기 시대를 설명하는 키워드

 : 착생활 시작(움집) = 강가, 해안

 : 경의 시작 : 조, 피, 수수 등 잡곡 + 목축의 시작(개, 돼지 사육)

 : 냥, 어로, 채집이 주류

 : 기의 사용(남는 식량 저장)

 : 원시공업 : 가락바퀴 방추차 뼈바늘 = 의복, 그물 제작

 : 침신전앙와장(동쪽을 향하고 배를 하늘로 뉘인 채 장사 지냄 : 태양 숭배

 : 시종교 : 애니미즘, 토테미즘, 샤머니즘, 조상신 숭배, 영혼 불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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