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 : 정 인 서 모 광 아 정 이 강 형
정 : 정묘호란(1627)
인 : 인조반정
서 : 서인의 친명배금정책
모 : 모문룡 가도주둔 사건
광 : 광해군 복귀
아 : 후금 아민대장 의주 황주 침입
정 : 용골산성 정봉수 장군
이 : 의주 이립 의병활동
강 : 강화도 피난 화의 요청
형 : 형제관계 조공 중립 약속 중강회령개시
1. 정묘호란(1627)
정묘호란 1627년 후금이 침입해 일어난 전쟁을 말한다.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틈을 타 건주위(建州衛)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를 추대해 여러 부족을 통합, 1616년(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탐내어 명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대군으로 후금 토벌에 나서는 한편, 조선에 대해서도 출병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조선에서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경향이 고조되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의 쇠퇴와 후금의 발흥이라는 정세 변화를 주시하면서 신중한 중립 외교 정책을 펴나갔다. 광해군은 강홍립(姜弘立)에게 1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판단하여 향배(向背)를 달리할 것을 비밀히 지시하였다. 명군이 사르후 전투[薩爾滸戰鬪]에서 대패한 뒤 계속 수세에 몰리자,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이 불가피한 상황을 해명하였다. 한편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서인을 중심으로 친명 배금 정책을 수행하였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하여 주전론을 주장해 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이 충청도와 전라도의 호소사가 되어 막부를 세워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김덕우(金德宇)는 의병과 군량미를 모아 무장현 동백정에서 취합한 뒤 배로 군량미를 보내는 한편, 의병의 편제를 지어 북상하였다. 그러나 강화가 성립되어서 실전에 참여하지 못한 채 귀향하였다.
2. 인조반정
인조반정이라 함은 1623년(광해군 15) 이귀(李貴) 등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이이첨(李爾瞻) 등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綾陽君倧: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정변을 가리킨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臨海君)과 유일한 적통(嫡統)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경계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임해군이 불궤(不軌: 법을 어김)를 꾀하였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다. 그 뒤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李稷)에게 살해하게 하였다.
그리고 칠서지옥(七庶之獄: 서얼 출신 7인이 은상인을 살해한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옥사)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하였다. 선왕의 유교칠신(遺敎七臣: 유훈을 받들은 일곱 신하) 중 재직자인 신흠(申欽)·박동량(朴東亮)·서성(徐渻)·한준겸(韓浚謙)을 내쫓았다. 이어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8세의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하였다. 또, 정원군(定遠君: 인조의 아버지로 뒤에 원종으로 추존)의 아들 능창군 전(綾昌君佺: 인조의 아우)을 교동에 금고하였다가 살해하였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에 이르러 폐모론이 대두되었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및 정홍익(鄭弘翼)·김덕함(金德諴) 등이 반대하자, 오히려 이들을 멀리 귀양보냈다.
그 뒤 우의정 한효순(韓孝純)의 발론(發論)을 계기로 대비 김씨의 존호(尊號)를 폐하여 다만 서궁(西宮)이라 칭하고, 공봉(供奉: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바침)을 감하고 조알(朝謁: 왕을 조정에서 찾아뵘.)을 중지시켰다.
그런 뒤에도 실권을 행사하던 이이첨은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白大珩)을 시켜 이위경(李偉卿)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慶運宮)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하였으나, 영의정 박승종(朴承宗) 등이 급히 이르러 추방해 실패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의 존호를 박탈하고 동생을 살해함.) 등의 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중요한 구실을 주었다.
서인의 이귀·김자점(金自點)·김류(金瑬)·이괄(李适) 등은 마침내 이를 이유로 무력정변을 기도하게 되었다.
일찍이 함흥판관으로 있었던 이귀는 북우후(北虞候) 신경진(申景禛)과 맺고, 또 유생 심기원(沈器遠)·김자점과 통하여 인망이 높던 전 부사 김류를 대장으로 삼아, 대북 정권을 타도하고 능양군 종을 옹립할 계획을 세웠다. 1622년 이귀는 평산부사, 신경진은 효성령별장(曉星嶺別將)으로 있었다. 마침 평산 지방에는 호환(虎患)이 심해, 이귀는 범사냥하는 군사에게는 경계의 제한을 두지 않기를 청해 그것을 기회로 거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모의가 누설되어 실패하였고, 다음해에는 그의 모계(謀計)가 도하에 떠들썩하여 이귀 등은 서둘러 계획을 실천하게 되었다. 마침내 1623년 3월 13일 밤에 이귀·심기원·최명길(崔鳴吉)·김자점 등은 병력 600∼700명으로 홍제원(弘濟院)에 모여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능양군은 친병(親兵)을 거느리고 고양 연서역(延曙驛)에 나아가 장단부사 이서(李曙)의 병력 700여명과 합류하였다.
먼저 창의문(彰義門)을 돌파하고 창덕궁으로 향하였다. 궁중에서의 연회(宴會)가 한창이던 광해군은 반군이 대궐에 들어간 뒤에야 피신하였다. 그러나 반군의 횃불이 창덕궁의 제전(諸殿)에 인화되어 모두 불탔다. 능양군은 보새(寶璽)를 거두어 경운궁에 유폐중인 대비 김씨에게 바치니, 대비는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을 즉위시켰다. 이가 곧 인조이며 이 정변이 인조반정이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었다. 대비 김씨는 광해군의 죄를 들어 처형하려 하였으나, 새 왕의 간청으로 서인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로 귀양보내고,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이위경 등 몇십 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명을 귀양보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의 이귀·김류 등 33명은 세 등급으로 나누어져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논공이 공평하지 못해 서인간에 다소의 반목이 있었으며, 1년 뒤 이괄의 난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남인 이원익이 다시 조정에 들어와 상위(相位)에 오름으로써 남인이 제2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3. 서인의 친명배금정책
서인의 친명배금정책이라 함은, 반정(反正)을 통해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을 폐위하고 정권을 잡았던 인조(仁祖, 재위 1623~1649) 정권이 명(明)을 중시하고 후금(後金)을 멀리하겠다면서 내세웠던 외교 정책의 방향을 말한다. 인조는 1623년 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폐위하고 재위에 올랐다. 인조는 광해군을 폐위해야 하는 이유로 그의 10가지 죄악을 제시했다.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했다[廢母殺弟]’는 사유 외에 9가지의 죄상 중 외교에 관한 내용이 중요하게 언급되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 주었던 명의 은혜[再造之恩]를 잊고 오랑캐 후금에게 성의를 베풀었기 때문에 폐위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처럼 인조 정권은 명에 대해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폐위했기 때문에 외교 정책에서 친명적 태도를 보여 주는 동시에 후금과의 관계에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인조 정권의 이러한 외교 정책과 태도를 ‘친명배금’ 혹은 ‘숭명배금(崇明排金)’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인조는 후금을 정벌해서 명에 대한 은혜를 갚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인조는 즉위 직후부터 이괄(李适)의 난 등으로 국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후금은 점차 강해지고 명은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주장했던 친명배금의 외교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오로지 인조 정권의 한계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외교 방향은 명을 중심으로 설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후금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조 정권 역시 친명적 외교 정책 기조를 지속하기는 어려운 현실이었다. 인조 정권은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도 기본적으로 숭명배금 정책을 취했지만 현실적 여건상 후금을 외교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4. 모문룡 가도주둔 사건
가도사건(椵島事件)은 1621년~1637년,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가도에 들어와 동강진을 설치한 뒤로 조선 · 명 · 후금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다. 모문룡이 조선의 가도에 진을 친 이후 조선 · 명 · 후금 사이는 다음 3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모문룡이 조선과의 군사 공조를 꾀한 시기, 둘째, 유흥치의 정변 등 동강진의 내부적 권력 갈등으로 조선과의 관계가 불안정해진 시기, 셋째, 부총병 심세괴가 동강진을 이끈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에는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가도를 점령하면서 동강진이 소멸되었다.
인조는 반정 직후 모문룡과의 전심 협력을 누차 다짐하였다. 그는 이 점을 광해군과의 차별성으로 내세웠으며,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과 부원수(副元帥) 이괄(李适)로 하여금 그의 지시에 따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인조 정권이 광해군 대와 달리 모문룡을 깊이 신뢰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모문룡이 내실을 기하기보다는 허장성세를 늘어놓는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반정 직후 인조 정권이 그에게 적극 협조한 사실은 명 황제의 국왕 책봉을 성사시키는 데 있어 그의 입김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 주는 것일 뿐이었다. 실제로 1624년(인조 2) 이괄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을 때, 모문룡은 전혀 협조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내실 있는 행동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 급기야 1626년(인조 4)에는 후금과 사신을 주고받는 점이 여러 차례 목격되어 불신감이 깊어지는 실정이었다.
정묘호란이 발발했을 때에도 모문룡은 후금군과의 전투를 회피할 뿐이었고, 조선과 후금이 화친하게 되자 도리어 청천강 이북의 조선인에 대한 약탈을 거듭 자행함으로써 공분을 자아냈다. 이렇듯 정묘호란을 전후한 시기 조선과 동강진은 후금을 견제한다는 목표하의 군사 공조를 추구하였으나, 실상은 상호 불신으로 가득하였고 이는 정묘호란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표출되었다. 정묘호란 이후 모문룡은 독자적인 세력으로 탈피하려는 행각을 벌여 조선과 명 모두에게 부담을 안겨 주었다. 1629년(인조 7) 6월, 독수(督師) 원숭환(袁崇煥)에게 소환되어 쌍도(雙島)에서 주살되었다. 죄목은 전공의 과장, 도를 넘은 군량 요청, 영원성 전투(1626) 당시 협조하지 않은 것 등 군사적 실효성에 대한 의문, 조선에 대한 과도한 수탈 등이었다. 이러한 죄목은 동강진이 조선과 명의 연결고리로 존재하면서도 현실적인 군사 공조를 오히려 저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가도사건은 조선과 명, 후금의 복잡한 관계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새로이 왕성해지던 후금의 위협으로 인해 변질된 조명 관계, 새로 수립되는 조청 관계의 일단면을 살펴볼 수 있으며 그중에서도 의례(儀禮)의 이면에서 전개된 현실적인 외교를 살펴볼 수 있다. 모문룡에 의한 동강진의 설치는 후금이 요동을 점령하여 요동아문이 후퇴하면서 새로이 조선과의 중개를 담당하였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군사 공조의 성격이 강하였다. 가도를 중심으로 펼쳐진 일련의 사건에서 조선과 명은 협력보다는 갈등을 빚었는데, 이는 후금의 세력 및 영향력 확대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이 명과의 의례적 관계를 단절하였다면, 불과 2개월 뒤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청나라의 군사들과 함께 가도를 함락하게 됨으로써 현실적인 관계에도 종언을 고하게 된다.
5.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 명분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經濟斷交)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홍 타이지, 숭덕제)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627년 3월 1일 인조 5년에 후금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케 했다.
6. 후금 아민대장 의주 황주 침입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그 잔당이 후금과 내통하게 되었다. 이에 즉위 전부터 조선에 대한 화친 방침에 반대, 주전론을 주장해왔던 청나라 태종은 더욱 침략의 뜻을 굳혀 1627년 1월 아민(阿敏)에게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의 주력 부대는 용천·선천을 거쳐 안주성 방면으로 남하하고, 일부 병력은 가도의 모문룡을 공격하였다. 조선군은 곽산의 능한산성(凌漢山城)을 비롯, 곳곳에서 후금군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가도의 모문룡도 신미도(身彌島)로 패주하였다. 후금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조는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삼아 적을 막게 하고, 여러 신하를 각지에 파견해 근군(勤軍)을 모집하였다. 그 동안 후금군은 남진을 계속, 안주성을 점령하고 다시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 사이 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7. 용골산성 정봉수 장군
용골산성전투라 함은 의병장 정봉수가 의병을 일으켜 용골산성에서 후금군을 크게 물리치고 승리한 싸움이다. 1627년 정월 후금이 침입하면서 이들이 급히 남으로 진군하자 관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해 1월 말부터 2월에 걸쳐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해 후금군에 저항하였다. 이 때 의병장 정봉수가 이끄는 의병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졌다. 정봉수는 영산현감을 지낸 전직관료로서, 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당시 철산 용골산성에는 성이 험해 적을 피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인근 고을 백성들이 이곳으로 모여 들어 정봉수를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때를 기다리던 정봉수가 쾌히 응하고 의병 모집에 박차를 가하자 며칠 안 되어 수천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그는 출신(出身) 김종민을 중군으로 삼고 미곶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 등과 함께 성을 지켜 피난온 백성들을 구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고립되어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본성을 지킨다는 것은 무리라 판단하고 평안감사에게 피난민들을 산군(山郡)으로 철수시킬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정봉수는 이를 듣지 않았다. 성을 함께 지키기로 한 장사준이 배신해 후금 진영과 내통하면서 정봉수도 함께 투항할 것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정봉수는 성안에 들어가 장사준을 베고 성안의 남은 병사를 모아 함께 죽을 결심을 하고 적의 완강한 공격을 물리쳤다. 정봉수는 조선과 후금 사이에 이미 화의가 성립되었음에도 계속 성에 머물면서 항전하였다. 이에 후금군은 의주 · 창성 · 곽산의 병력을 총집결해 이 성을 맹렬히 공격했으나 많은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이어 후금군 부장(副將) 유해(劉海 : 일명 興朝)가 거듭 출성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응하자, 재차 공격을 감행했으나 또 많은 사상자만 내고 의주로 퇴각하였다. 화의가 성립된 뒤의 저항이라 하여 후금에게 맹약의 위배라는 구실을 주기는 했으나 조선에도 힘과 용기 있는 인물이 있음을 보여준 싸움이었다.
8. 의주 이립 의병활동
의병장 이립은 1627년 1월 후금의 아민이 이끄는 3만 명의 청군이 쳐들어와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용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627년 3월 18일 적군 1000명이 침입하자 2일 동안 싸워 200명을 사살하고 3월 23일 북위포에서 적군 2000명과 싸워 200명을 사살하고 갑주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공으로 인산첨사에 임명되었고 6월 25일에는 관서의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섬과 육지를 오가며 여진족을 토벌하던 도중 섬에서 병사하였다. 사후 1736년 안주의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9. 강화도 피난 화의 요청
전세가 극도로 불리하자 김상용(金尙容)이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을 지키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남하하였다. 이 사이 인조는 전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갔다. 한편,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하는 등 분전하였다. 특히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는 데 따르는 후방의 위협을 염려하게 되었고, 조선은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남지 않았다.
이에 후금군은 평산 이남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않고 곧 철병하고, 양국은 형제의 나라로 일컬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더라도 상국인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으로 3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었다.
조선과 후금의 화약은 두 나라가 다같이 만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형제 관계를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더욱이 막대한 세폐(歲幣)와 수시로 강요하는 물자의 조달에 따르는 과중한 경제적 부담에 반발, 배금의 길을 굳히게 되었다. 후금 역시 세폐와 중강(中江)의 개시(開市)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문룡의 세력을 공멸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배금 경향이 날로 고조되는 데 불안을 느꼈다. 이러한 양국의 관계는 후금이 더욱 팽창된 세력을 배경으로 조선에 강압적인 태도를 강화함으로써 악화일로를 걷게 되어 결국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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