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글자를 창제한 사람은 세종대왕이고, 그 글자에 이름을 부여한 사람은 최세진이고, 이를 오늘날에 맞게 새롭게 편집한 사람은 주시경 선생입니다. 우선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에 대해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397년(태조 6년) 5월 15일(음력 4월 10일), 한성 준수방(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당시 정안군이던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씨(원경왕후)의 여섯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와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아명은 막동(莫同)이고, 이름은 도(祹)이다. <위키백과>
이름은 이도이고 묘호가 세종이다. 여기서 묘호(廟號, Temple name)란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사관(신하)들이 붙인 이름이다.
뛰어난 왕 : 조 평범한 왕 : 종 못난이 왕 : 군
여기에 나라의 건국한 시조 왕에게는 태조라고 특별히 명명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왕 중에 태조라 명명되는 임금이 2분 계시는데 고려 태조 왕건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있다. 위와 같이 묘호는 일반적인 경우 신하들이 그 중에서 사관들이 임금 생전의 공과 덕과 그리고 과실을 평가하여 붙이는 이름이기에 평가적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구심이 든다. 조선의 왕 중에서 최고의 왕을 한 명 꼽으라 하면 단연코 세종을 꼽는 사람이 열에 아홉은 될 터인데(十中八九) 어찌 훈민정음을 창제한 왕인 이도에게 묘호가 세종이라고 "종"의 평가를 내렸을까?이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면 안 되는 점이 바로 이런 묘호는 임금이 돌아가신 후에 사관들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백성의 입장이 아닌 신하들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즉, 신하들에게 있어 세종은 못된 임금이고 나쁜 임금인 것이다. 사사건건 참견하고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백성을 위해 헌신을 한 임금이었기에 신하들을 달달 볶았던 것이다. 닦달했던 것이다. 이러니 신하의 입장에서 임금이 곱게 보이겠는가?
그리고 한 가지 더 첨언하면 훈민정음을 집현전 학자들과 협력하여 만들었다고 학계에서조차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기록에 의해서도 분명히 親製(친제)라고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집현전 학자들 조차도 훈민정음 창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일의 진행을 방해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세종이 직접 연구에 연구를 몰두하여 직접 글자를 만들어서 집현전 학자에게 이 글자들을 이용해서 실제 사용 설명서를 만들으라 명하여 만들어진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인 것이다.
그럼 당시 집현전 학자들도 왜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를 하고 방해까지 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솔직하게 한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점잖은 체 백성을 위하는 위정자로서의 모습을 취하는 집현전 학자도 자신의 기득권을 잃고 싶지 않았으리라 싶다. 글은 힘이고 권력이다. 법 앞에의 평등처럼 현재의 우리나라의 상황에서도 상위 1%만 법 앞에서 평등하다. 나머지 99%는 불평등의 법 적용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글자도 역시 힘이고 권력이기에 권력은 절대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독점하는 것이다. 이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치기 싫었던 집현전 학자들조차 훈민정음 탄생을 방해했던 것이다.
이에 훗날 우리 백성들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권력을 일반 백성에게까지 나눠 주시고자 한 임금의 널른 은혜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묘호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 '대왕'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역사상 2명의 군주에게 대왕이라 백성들이 이름 붙이며 그분들의 은혜를 칭송하는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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