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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삼국시대 역사서 두문자 : 근 고 서 진 거 국 영 이 신

by noksan2023 202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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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역사서 : 근고서진거국영이신

 

근 : 초고왕 375

고 :

서 :

진 : 흥왕 545

거 : 칠부

국 :

영 : 양왕 600

이 : 문진

신 : 집 5권

 

근초고왕 고흥의 서기

1. 초고왕 375

근초고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1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46년∼375년이다. 즉위 후 왕권 강화·확립에 주력한 후 활발한 정복활동을 전개했다.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을 영향권 안에 넣었고, 371년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 고지까지 차지하여 백제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요서지방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무역기지를 확보하는 등 해상로를 장악하여 활발한 상업활동도 전개했다. 일본에 유학사상 등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기도 했으며 이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서기』라는 국사 책을 펴냈다.

 

2. 흥의

박사(博士) 고흥(高興)이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 대에 편찬한 백제의 역사서가 서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는 개국 이후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는데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서기』가 책 이름이 아니라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고유한 책 이름으로 보고 있다.

 

『서기』는 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과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건국 설화와 같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이 책을 기본 자료로 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백제의 건국 과정과 초기 왕들의 업적 및 계보에 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울러 이 책을 편찬한 인물이 박사의 직책을 맡고 있었던 점도 주목된다. 박사는 유교 교육 기관에서 교육을 담당했던 직책으로 보이기 때문에, 유교 정치 사상에 입각한 교훈적 역사 서술을 했다고 여겨진다.

 

이 책은 또한 고구려나 신라의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 국가가 성립된 시점에 백제의 역사를 정리해 대내외에 널리 알리려는 목적에서 편찬되었을 것이다.

 

거칠부의 국사

3. 흥왕 545

진흥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재위: 540~576) 왕이다. 재위 기간에 불교를 진흥하는 한편, 화랑도를 창설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흥왕은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이전보다 3배나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다.

 

4. 칠부의

거칠부의 국사라 함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편찬케 한 신라의 역사서를 말한다. 545년(신라 진흥왕 6년) 7월,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는 진흥왕에게 역사서 편찬을 건의하였다. 이에 진흥왕은 대아찬(大阿湌)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현재 『국사』는 전해지지 않아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이사부가 역사서 편찬의 필요성에 대하여 “나라의 역사[國史]는 왕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만대에 포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라고 언급한 것을 고려하면, 유교 정치 이념에 따라 신라 역사를 기록했다고 추측된다.

 

일부에서는 『국사』가 편찬될 당시 진흥왕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였으며 대신인 이사부가 편찬을 건의한 점에 주목하여, 왕실보다는 진골 귀족의 입장이 많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이 편찬된 진흥왕 즉위 초는 율령 반포나 불교 공인과 같은 법흥왕(法興王, 재위 514~540) 대의 통치 제도 정비를 발판으로 왕권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면서 신라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따라서 『국사』는 대체로 건국 신화를 통해 신라 왕실의 신성성과 정통성을 확보하면서, 역대 왕들의 업적을 드러내는 내용을 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집 5권

 

5. 양왕 600

영양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90~618년이며, 평원왕의 장자이다. 고구려의 역사서인 『신집』 5권이 편찬되었고, 승려 혜자와 담징이 일본으로 가서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는 등 일본에 많은 문화를 전파했다. 한강유역 탈환을 둘러싸고 신라와 공방이 이어졌고 수나라와 접근하던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수나라와는 초기에 화전 양면 전술을 취하다가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어 총 4차례에 걸친 수의 공격을 받았다. 특히 130만 대군으로 이루어진 2차 공격을 을지문덕 등의 활약으로 격퇴했다.

 

 

6. 문진의 집 5권

이문진의 신집 5권이라 함은, 고구려 영양왕(嬰陽王, 재위 590~618)이 600년(고구려 영양왕 11년)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편찬케 한 역사서를 말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집(新集)』은 총 5권이며, 이전부터 있었던 역사서인 『유기(留記)』 100권을 줄이고 다듬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신집』은 오늘날 전하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신집』을 편찬한 이문진이 고구려의 교육 기관인 태학(太學)에서 유교 경전을 가르치던 박사였다는 사실로 볼 때, 『신집』은 유교적 정치 이념에 따라 『유기』에 실린 고구려 역사를 재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유기』가 있음에도 국가 차원에서 『신집』을 다시 편찬한 배경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고구려에 유학이 널리 전파됨에 따라 새로운 역사서가 필요해졌다는 견해, 둘째 유교적 충효 관념을 내세워 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려 했다는 견해, 셋째 고구려 후기에 형성된 귀족 연립 정권에서 새로 권력을 잡은 신흥 귀족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서술하기 위해서였다고 보는 견해 등이다.

 

교육 기관에서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박사에게 역사서를 편찬케 한 사실로 볼 때, 당시 고구려는 유교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이전보다 발전된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신집』이라는 새로운 역사서가 편찬된 사실은 고구려 후기에 정치 변동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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