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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한반도 출토 화폐 두문자 : 명 연 반 진 오 한 왕 신

by noksan2023 2023.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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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출토 화폐 : 명 연 반 진 오 한 왕 신

 

명 : 도전

연 : 나라

반 : 량전

진 : 나라

오 : 수전

한 : 나라

왕 : 망전

신 : 나라

 

 

1. 도전 나라

 

명도전

 

 

 

명도전우리나라에서 사용되었던 중국 전국시대의 연나라의 화폐를 말한다. ‘언도(匽刀)’·‘이도(易刀)’ 등으로도 불린다. 손칼〔刀子〕으로부터 나오게 된 손칼모양 동제 화폐의 일종으로, 표면에 ‘명(明)’자 비슷한 것이 주출 되어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전국시대 초엽에 도전(刀錢)의 하나인 첨수도(尖首刀: 도전의 칼날 끝부분이 뾰족한 것)에서 전화된 것으로 대부분이 연(燕)에서 쓰였고 일부는 제(齊)와 조(趙)에서 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퇴장유적(退藏遺蹟)에서 주로 출토되며 일부 주거지와 고분에서 출토되기도 한다. 크기는 일반적으로 길이 12.4∼13.5㎝, 너비 1.5∼1.9㎝이고, 무게는 12∼19g이다. 손잡이 끝에는 고리〔環〕를 가지고 있고, 손잡이에는 3조의 직선문양이 길이로 나 있다. 재료는 모두 청동이며, 거푸집〔鎔范〕에 의해 주조된다. 통상 발견되는 도전의 90% 정도로 그 수가 많으며, 수백·수천 매의 묶음으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명도전은 형식과 ‘명(明)’자의 형태에 의해 3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종류는 칼등 쪽이 부드럽게 만곡 되고, 명자가 ‘{{#039}}’으로 표시되어 있다. 뒷면의 문자는 초기 것이 숫자·간지(干支) 등으로, 후기 것이 ‘좌(左)’·‘우(右)’·‘{{#040}}’ 등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종류는 첫 번째와 형식은 매우 닮았으나 크기에서 차이가 나고 ‘明’ 자의 형태가 ‘{{#041}}’으로 되어 있다. 뒷면에는 ‘제화(齊化)’, ‘제화이십(齊化二十)’, ‘제화공금(齊化共金)’, ‘점백□(簟佰□)’, ‘안양백□(安陽佰□)’ 등 제나라와 관련된 지명과 ‘성백(成白)’ 등 조나라 지명을 쓴 것, 부호 같은 글자를 하나 쓴 것 등이 보인다. 이 종류는 발견 예가 극히 적다. 

 

세 번째 종류는 칼등 쪽으로 칼몸과 손잡이의 접속점이 ‘〈’형으로 꺾여 있으며, ‘명(明)’자는 ‘{{#038}}’형태로 표시되어 있다. 질이 위의 두 종류에 비해서 아주 나쁘다. 뒷면의 글자는 첫 번째 종류와 거의 비슷하다. 수량은 이 종류가 가장 많다. 

 

명도전은 첨수도와 마찬가지로 연나라에서 통용되던 화폐로 연나라에서 직접 주조, 발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대는 대체로 첫 번째 종류가 전국시대 초기, 두 번째 종류는 연나라가 제나라를 점령했을 때, 세 번째 종류는 전국시대 후기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명도전이 출토된 유적은 대체로 청천강을 중심으로 이북에 몰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분포를 연의 동방진출과 연관해서 해석하려는 견해도 있다. 즉, 명도전이 서기전 3세기 무렵으로 편년 될 경우, 연의 영향권 내에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에 의해, 서기전 2세기 무렵이면 진한(秦漢) 교체기나 위만조선 단계에 거주하던 주민에 의해 매납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주요 유적으로는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 및 영변군 세죽리 등의 퇴장유적과 시중군 노남리의 초기철기시대 주거지유적, 평양시 정백동의 3호 목곽분유적 등을 들 수 있다. 정백동 3호분에서는 명도전이 오수전(五銖錢)과 함께 출토되어 주목된다.

 

명도전은 전국시대 말기 중국 북변의 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된 것을 나타내는 자료로서 유적의 연대 추정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아울러 고조선과 연 사이의 활발했던 문화교류를 잘 보여준다.

 

 

2. 량전 나라

 

반량전

 

 

 

반량전(半兩錢)은 중국 진나라부터 전한 시대까지 사용한 청동 화폐를 말한다. '半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진~한에 주조된 화폐로서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함과 동시에 화폐제도를 통일하여 유일한 화폐로 정했다. 기존의 전국시대에는 '포전'(布錢)과 '도전'(刀錢) 같은 화폐가 통일되지 않은 채로 사용되고 있었다. 반량전은 진나라 시황제 때 만들어졌다.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 원형이며, 둘레의 테는 없고, ‘반량(半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형태에서 원은 하늘을, 사각형은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동전 하나에서 하늘과 땅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심오한 사상이 숨어 있다. 또한 가운데의 사각 구멍은 제조와 유통상의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한 결과였으며, 사각 구멍에 금속막대를 넣어 고정시켜 한꺼번에 줄질 하기 쉽게 했다.

 

무게는 가벼운 것이 2g, 무거운 것은 20g에 이르는 것까지 다양하게 확인된다. 문헌기록에 확인되는 한나라의 반량전으로는 유협반량(楡莢半兩), 팔수반량(八銖半兩), 오분반량(五分半兩, 고후 오분전), 사수반량(四銖半兩, 문경 사수반량), 유곽반량(有郭半兩, 무제 사수반량)이 있다. 

 

 

3. 오수전 한나라

 

 

오수전

 

 

 

오수전(五銖錢)서기전 2세기 말부터 한반도에 유입되어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분묘와 취락지, 성터, 절터 등에서 출토되는 중국의 고대 화폐이다. 한 무제 때(서기전 118년)에 처음 주조되었고, 무게가 5수(五銖: 중량 3.25g)이어서 오수전이라 한다. 대체로 동전의 크기와 모양, 글자체 등을 기준으로 문헌 기록에 따라 군국오수(郡國五銖), 적측오수(赤仄五銖), 삼관오수(三官五銖), 소제오수(昭帝五銖), 선제오수(宣帝五銖) 등으로 분류한다.

 

오수전은 진시황 때 주조된 반량전(半兩錢: 중량 8g)의 형태를 본받아, 한(漢) 무제(武帝) 원수(元狩) 5년(서기전 118년)에 각지의 군(郡)과 국(國)에서 주조되었다. 이로 인해 무게가 일정하지 않고 불량인 동전이 많아짐에 따라, 원정(元鼎) 3년(서기전 114년)에는 관영 공방에서 적측오수전(赤仄五銖錢)을 주조하였으며, 후원(后元) 2년(서기전 87년)까지 상림삼관(上林三官)을 설치하여 오수전을 전문적으로 주조하였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기 양(梁) 무제(武帝)가 보통(普通) 4년(523년)에 쇠로 주조한 철제오수전을 발행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4년(621년)에 개원통보(開元通寶)가 발행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될 때까지 약 730여 년 동안 유통되었다.

 

형태는 원전(圓錢)으로 직경이 2.45~2.65㎝ 정도이고 가운데에 방형(方形)의 구멍이 나 있다. 이 구멍을 사이에 두고 우측에 ‘오(五)’ 자, 좌측에 ‘수(銖)’ 자가 배치되어 있는데, 글자의 위치가 서로 바뀐 것도 있다. 특히, 주조 시 동전의 표면에 생긴 기호에 따라서 천상횡문(穿上橫文), 천하횡문(穿下橫文), 천상반성(穿上半星), 천하반성(穿下半星), 사각결문(四角決文), 사출문(四出文)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후한 이후에는 동전의 둘레를 갈아서 작게 하거나 방형의 구멍을 크게 잘라 내는 등 형태를 변형시킨 마곽오수(磨郭五銖), 전륜오수(剪輪五銖), 정환전(鋌環錢) 등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사주전(私鑄錢)이 대대적으로 횡행하며 전국적으로 유통되자 실질적 가치가 점차 하락하면서 화폐로서의 가치가 상실되기도 하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철제오수전은 양 무제 시기에 동전을 꿰어 유통시킨 당시의 사회적 양상을 보여 준다.

 

서기전 108년 무렵, 한반도에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유입되기 시작한 오수전은 대동강 상류에서 청천강으로 이어지는 지정학적 요충지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는데,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서북부 지역에 밀집해 있다. 평양 정백동 3호분, 정오동 12호분, 석암리 120호 등지의 낙랑무덤뿐만 아니라, 황해도 은율군 운성리, 봉산군 지탑리, 황주군 선봉리, 흑교리 등의 움무덤에서도 발견되었다. 낙랑의 귀틀무덤이나 벽돌무덤 등에는 목관의 겉면을 오수전 문양으로 장식하거나 오수전 모양의 옥 장식품이 부장된 것으로 보아 당시 중국 화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환인과 집안 일대 및 평양 등에 있는 고구려의 성터와 무덤, 주거지 및 취락, 매납유적 등에서도 산발적이지만 오수전이 출토되고 있다. 장군총 부근의 매납유적과 자강도 심귀리 적석묘(1점), 강동군 만달산 석실묘(1점), 박천군 덕성리 전곽분(38점), 안악궁터(8점), 낙랑구역 돌칸흙무덤(1점), 연천군 호로고루성(1점) 등지에서도 출토된 사례가 알려져 있다.

 

한반도 중부 이남 지역에서는 주로 해안과 내륙의 강변을 따라 초기 국가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20여 곳의 유적에서 1,060여 점이 출토되었다. 삼한의 것으로는 여수 거문도 퇴장유적(980점)과 인천 운남동 패총(1점), 운북동 주거지(20점)를 비롯하여 강릉 초당동(2점), 춘천 율문리(2점), 사천 늑도 패총(1점), 제주 산지항 유적(4점)과 같은 생활유적지나 패총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분묘유적인 경산 양지리 목관묘(26점), 임당 고분군(4점), 영천 용전리(3점), 창원 다호리 고분군(3점) 등에서 출토되었고, 서울 풍납토성(1점)에서도 발굴되었다. 특히, 삼국시대 공주 무령왕릉(90점)에서는 양 무제 때 제작된 철제오수전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오수전이 실제 화폐로 유통된 것이라기보다는 분묘에 부장하는 위신재로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제와 신라의 절터에서도 오수전이 출토되고 있다. 부여 왕흥사지(3점)와 경주 황룡사지(1점) 목탑의 심초석 주변과 경주 분황사(1점) 모전석탑에서 북제(北濟)에서 주조한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사리공양 의식을 행하는 종교적 의미에서 다른 공양품들과 함께 탑에 매납된 것이다.

 

이처럼 초기 국가시대인 서기전 2세기 말 이후 한반도에 유입된 오수전은 각종 생활유적이나 분묘뿐만 아니라 7세기 전반 무렵의 절터에 이르기까지 30여 곳의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전한 시기의 오수전은 대부분 정치적 목적의 교섭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최근에는 출토 수량과 양상 등으로 볼 때 일상적인 교역에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이해하는 연구도 있다. 한반도에서 오수전이 출토되는 중심 지역의 변화와 출토 범위의 확대, 무덤 부장품으로서 기능 상실과 사리 공양품으로 매납되는 현상 등으로 보아, 상품 거래 수단의 교역 매개물, 위세품, 분묘 부장품, 의례용 등으로 시기에 따라 그 성격과 의미가 변화되며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수전은 오랜 기간 동안 중국의 각 시대에 걸쳐 여러 차례 주조, 사용되었으므로 글자의 서체와 크기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화폐의 제작과 사용 연대에 대한 기준이 되므로 유적에서 공반된 유물에 대한 절대연대를 추정하는 양호한 역연대(歷年代) 자료로 자주 활용되고 있다.

 

 

4. 망전 나라

 

왕망전

 

 

 

왕망전이라 함은 중국 왕망대(王莽代)에 제조된 동전(銅錢)으로 우리나라 초기철기시대에도 사용되었던 화폐를 말한다. 30여 종의 왕망전(王莽錢) 중 하나이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에는 천봉원년(天鳳元年 : 서기 14)에 화포(貨布)와 함께 처음으로 주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서』 왕망전에는 지황원년(地皇元年 : 서기 20)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원전(圓錢)의 형태로 내부에 네모난 구멍〔方孔〕이 있고 구멍의 오른쪽에 화(貨)자, 왼쪽에 천(泉)자가 배치되어 있다. 크기는 오수전(五銖錢)보다 약간 작은 지름 1촌(약 2.25㎝)이며, 무게는 5수(銖: 5수는 약 3.19g)이다.

왕망대에는 10여 년(서기 7∼23)의 짧은 기간동안에 전후 4차례의 폐제개혁(幣制改革)이 단행되어 모두 37종의 화폐가 주조·발행되었다. 제1차 폐제개혁 때에는 거섭(居攝) 2년(서기 7)에 대천오십(大泉五十)·착도(錯刀)·계도(契刀) 등을 주조해 전대(前代)의 오수와 병용하였다. 제2차 개혁 때에는 시건국 원년(始建國元年 : 9)에 대천오십만을 남기고 도폐류(刀幣類) 및 오수를 폐지하였고, 따로 소천직일(小泉直一)을 발행하였다. 제3차 개혁 때에는 시건국 2년(10)에 보화제(寶貨制)를 채용했으며, 대포황천(大布黃千) 등의 포화십품(布貨十品) 등을 주조하였다. 마지막 제4차 개혁 때에는 천풍원년(天風元年 : 서기 14)에 새로이 화천과 화포를 주조하였다. 왕망전의 특징은 주조기술이 정교하고 미려하며 동질(銅質)이 양호한 점이다. 유통연대는 후한 광무화건무16년(後漢光武華建武十六年 : 서기 40)에 다시 오수전이 부활할 때까지가 정식으로 유통된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상당기간 비교적 많이 통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왕망전 중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화천·화포·대천오십·소천직일 등이 있다. 이 중 화천이 출토된 유적의 예로는 채협총(彩篋塚)·정백리 1호분 등과 낙랑토성지를 들 수 있다. 남쪽으로는 제주도 산지항(山地港)과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특히, 제주도 산지항에서는 오수전을 비롯해 화천 11점이 화포와 대천오십 등의 다른 종류의 왕망전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렇게 한 유적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화천과 같이 정확한 주조연대를 알 수 있는 화폐류가 출토되는 경우, 그 유적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고 당시 중국과 한반도가 하나의 교역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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