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_신채호) 제1편 총론 제1장

제1편 총론 제1장_역사의 정의와 조선사의 범위

 

 

조선상고사_신채호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마음의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세계사는 세계 인류가 그렇게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요, 조선사는 조선 민족이 그렇게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다.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는가? 간단히 말하자면, 주관적 위치에 서 있는 자를 아라 하고, 그 밖의 것은 비아라 한다.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을 아라 하고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을 비아라고 한다. 하지만,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은 저마다 자기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고 한다. 무산(無産) 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를 비아라고 한다. 하지만, 지주나 자본가는 저마다 자기들을 아라 하고, 무산 계급을 비아라 한다. 이뿐 아니라, 학문과 기술, 직업과 의견, 그 밖의 어디에서든 반드시 자기가 위치한 아가 있으면 이와 대치되는 비아가 있고, 아 가운데 아와 비아가 있으며 비아 가운데에도 아와 비아가 있다. 그리하여 아와 비아의 접촉이 잦을수록 비아와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해져 인류 사회의 활동이 끊임없이 계속 되며, 역사의 전도(前途)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다.

 

아와 이에 맞서는 비아의 아가 역사적 아가 되려면, 반드시 두 개 속성이 있어야 한다.

 

첫째, 상속성으로, 시간 속에서 생명의 끊어지지 아니함이요,

둘째, 보편성으로, 공간 속에서 영향의 파급이다.

 

그러므로 인류 아닌 다른 생물의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만, 그 아의 의식이 너무 미약하거나 아예 없어서 상속적 보편적이 되지 못하므로 마침내 역사는 인류만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사회를 떠나 개인적인 아와 비아의 투쟁도 없지 않지만 그 아의 범위가 너무도 약소하여 역시 상속적 보편적이 못 된다. 인류에게도 사회적 행동이라야 역사가 되는데, 한 사건에서도 상속성과 보편성이라는 두 속성의 강약(强弱)에 따라 역사의 재료가 될 한 분량의 크고 작음을 정하게 된다.

 

이를테면 김석문(金錫文)은 3백 년 전에 지전설(地轉說)을 창도한 조선의 학자이지만 이 설에 브루노의 지원설(地圓說)과 똑같은 역사적 가치를 매길 수 없음은, 브루노의 지원설 덕분에 유럽 각국의 탐험열이 크게 왕성해졌고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지만 김석문의 지전설은 그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여립(鄭汝立)은 400년 전 군신강상설(君臣綱常說)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지만 그를 민약론(民約論)을 지은 루소와 동등한 역사적 인물이라 할 수 없음은, 당시에 정여립의 설에 영향을 입은 무력 폭동 단체인 도계(釗楔)나 양반살육계 (兩班殺戮楔) 등의 번갯불이 한때 번쩍하는 것 같은 행동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 루소 이후 파란만장한 프랑스 혁명에는 비길 수 없기 때문이다.

 

비아를 정복하여 아를 드러내면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의 생명을 잇고, 아를 없애어 비아에 바치는 자는 투쟁의 패망자가 되어 과거 역사의 묵은 흔적만 남긴다. 이는 고금역사에 불변하는 원칙이다. 그래서 승리자가 되려 하고 실패자가 되지 않으려 함은 인류 통성(通‘陛)인데, 매번 예기(豫期)와 어긋나서 승리자가 안 되고 실패자가 됨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선천적 실질부터 말하면 아가 생긴 뒤에 비아가 생기지만, 후천적 형식부터 말하면 비아가 있은 뒤에 아가 있다. 말하자면 조선 민족, 즉 아가 출현한 뒤에 조선 민족과 상대되는 묘족(苗族 : 중국 황주성 등지에 사는 소수민족)과 한족(漢族) 등 비아가 있었을 것이니, 이는 선천적이다. 그러나 만일 묘족과 한족 등 비아의 상대자가 없었다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우고, 삼경(三京)을 만들고, 오군(五軍 : 전후좌우중의 다섯 군단)을 두는 등 아의 작용이 생기지 못했을 것이니, 이는 후천적이다. 정신 확립으로 선천적인 것을 호위하며, 환경 순응으로 후천적인 것을 유지 하되, 두 가치 가운데 하나가 모자라면 패망의 구렁에 빠진다. 종교가 흥했던 유대 민족과 무력을 갖추었던 돌궐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후천적인 것이 모자랐기 때문이고, 공화제를 선택했던 남미와 학문이 크게 일어났던 이집트가 몰락의 구렁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선천적인 것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이제 조선사를 서술함에 조선 민족을 아(우리)의 단위로 잡되

 

(가) 우리의 생장 발달 상태를 서술의 첫째 요건으로 하고, 그리하여

1) 첫 문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2) 역대 강역 (疆域)은 어떻게 늘어 나고 줄어들었는가,

3) 시대별 시상은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

4) 민족의식이 어느 때에 가장 왕성했고 어느 때에 가장 쇠퇴했는가,

5) 여진.선비.몽골.흉노 등이 본래 우리 동족으로 어느 때에 분리되였으며, 분리된 뒤 그 영향이 어떠했는가,

6) 우리의 현재 지위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등을 서술하며

 

(나) 우리의 상대자인 주위 각 민족과의 관계를 서술의 둘째 요건으로 하고, 그래서

1) 우리와 분리된 흉노 선비 몽골과, 우리 문화의 포대기 속에서 자라온 일본이 본디 과거에는 우리와 하나였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는 사실과

2) 우리가 인도에서는 한 손 거쳐서, 중국에서는 곧바로 문화를 수입했는데, 수입 분량이 많아지면서 민족의 활기가 시들고 강역 범위가 줄어든 까닭,

3) 오늘 이후는 서구 문화와 북유럽 사상이 세계사의 중심이 되고 있는데 우리 조선은 그 문화 사상의 노예가 되어 없어지고 말 것인가, 또는 그를 잘 씹고 소화해서 새 문화를 건설할 것인가.

 

등을 서술해서 위의 (가) (나) 두 가지를 본 역사의 기초로 삼고 (다) 말과 글 등 우리 사상을 표현하는 연장이 날카로운지 둔한지, 어떻게 바뀌었으며, (라) 종교가 오늘 이후에는 거의 가치 없는 폐물이 되었지만, 고대에는 실히 한 민족의 흥망성쇠의 관건이었는데, 우리의 신앙에 관한 추세가 어떠 했으며, (마) 학술 기예 등 우리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 부분은 어떠했으며 (바) 의 .식 .주 형편과 농.상.공 발달, 토지분배와 화폐제도, 그 밖의 경제 조직 등이 어떠했으며, (사) 인민의 이동과 번식, 또 강토의 늘고 줄어듦에 따라 인구는 어떻게 늘어나고 줄어들었으며, (아) 정치제도 변천, (자) 북벌 진취의 사상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나아가고 물러섰는지, (차) 귀하고 천하고, 가난하고 부유한 각 계급간 압제와 서로 대항한 사실, 그 성해지고 쇠해진 대세, (카) 지방 자치제가 태곳적부터 발생했는데, 근세에 와서는 형식만 남기고 정신이 사라진 원인과 결과, (타) 외세 침입에서 받은 거대한 손실과, 그 반대로 끼친 다소의 이익, (파) 흉노.여진 등이 한번 우리와 분리된 뒤에 다시 합쳐지지 못한 까닭, (하) 옛날부터 우리에게 문화 창작이 적지 않았지만 매양 동떨어지거나 별개의 것이 되고 계속 이어지지 못한 괴이한 원인 등을 힘써 참고하면서 논술함으로써 위의 (다) . (라) 이하 여러 문제를 본 역사의 요목(要目)으로 삼아 일반 역사를 읽는 이가 조선의 면목을 만의 하나라도 알게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