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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조선상고사_제2장_역사의 3대 원소와 옛 조선사 결점

by noksan2023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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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역사의 3대 원소와 옛 조선사 결점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역사를 만드는 것이지, 역사 이외에 무슨 다른 목적을 위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는 사회의 유동 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지, 지은이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덧붙이거나 달리 고칠 것이 아니다. 화가가 사람 모습을 그릴 때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그리자면 재주와 슬기, 풍채와 빼어난 연개소문을 그려야 하고, 강감찬(姜邯贊)을 그리자면 몸집이 작고 초라 한 강감찬을 그려야 한다. 만약 이것을 생략하고 저것을 드높일 마음으로 털끝만큼이라도 서로 바꾸어 그리면, 화가의 본분에 어긋날 뿐 아니라 본인 면목도 서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사실 그대로 영국 역사를 쓰면 영국사가 되고, 러시아 역사를 쓰면 러시아사가 되며, 조선 역사를 쓰면 조선사가 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조선에 조선사라 부를 수 있는 조선사가 있었는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렵다.

 

안정복(安鼎福)이 《동사강목(東史綱目)》을 짓다가 잦은 내란과 외적 출몰이 동국(東國 : 우리나라)의 옛 역사를 흔적도 없게 하였음을 슬퍼하였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조선사는 내란이나 외침보다는 바로 조선사를 저술하던 그 사람들 손에 의해 더 없어졌다고 본다. 왜 그런가 하면, 역사란 앞에 쓴 것과 같이, 시간적 계속과 공간적 발전으로 이루어진 사회 활동 상태의 기록이므로 때(時) 곳(地) 사람(人) 세 가지는 역사를 구성하는 세 가지 큰 원소가 되는데, 이 원소들이 올바르게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자면 신라가 신라됨은 박(朴) 석(昔) 김(金) 세 성과,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등 육부(六部) 사람(人)으로서뿐 아니라, 또한 경상도인 그 곳(地)과 고구려 백제와 한 시대인 때(時)로써 신라가 된 것이니, 만일 그보다 더 올라가 2천 년 전 왕검과 같은 연대거나 더 내려와서 2천 년 뒤인 오늘 같은 시국이라면, 비록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성지(聖智)와 육부 사람들의 질직(質直)과 계림(鷄林 : 慶州)의 땅을 가졌다 해도 당시 신라와 똑같은 신라가 될 수 없으며, 또 신라가 유럽이나 아프리카에 있었다면 그 또한 다른 면목의 나라는 되었을지언정 당시 신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이치인데, 여태까지 조선 역사가들은 늘 역사를 자기 목적의 희생으로 만들어서 도깨비도 떠옮기지 못한다는 땅을 떠옮기는 재주를 부려 졸본(卒本 : 고구려가 처음 개국한 압록강 북쪽)을 떠다가 성천(成川) 또는 영변에 갖다 놓으며, 안시성(安市城 : 요동에 있는 고구려의 성)을 떠다가 용강(龍岡) 또는 안주(安州)에 갖다 놓으며, 아사산(阿斯山 : 단군이 국토를 옮긴 곳)을 떠다가 황해도 구월산을 만들며, 가슬라(迦瑟羅)를 떠다가 강원도 강릉군을 만들었다. 이처럼 허다한 땅을 들어 근거 없는 역사를 지었다.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는 더 크지도 작지도 말라는 듯이 (不大不小 克符帝心 :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아 하느님 마음에 들어맞을 수 있었다라고 나옴) 압록강 이내 이상적 강역을 획정하려 한다. 또한 무극(無亟) 일연(一然) 등 스님이 지은 역사책 《삼국유사》에는 불법이 단 한 글자도 들어오지 않은 왕검 (王儉) 시대부터 인도 범어로 만든 지명 인명이 가득하다. 김부식 등 유학자가 적은 책 《삼국사기》에는 공자 맹자의 인의를 무시하는 삼국 무사의 입에서 경전 문구가 관용어처럼 외어진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있는 수백 년 동안 조선 전역의 인심을 지배하던 영랑(永郞) 술랑(述郞) 안상(安祥) 남석행(南石行) 등 네 대성(大聖)의 논설은 볼 수 없고, 중국을 유학한 학생인 최치원(崔致遠)만 세세히 서술하였다. 《여사제강(麗史提綱)》에서는 원효 의상 등 여러 철인(哲人)들의 불학(佛學)에 영향을 미친 고려 일대의 사상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고, 태조 왕건 통일 이전에 죽은 최응(崔凝)이 통일 이후에 그가 올렸다는 <간불소(諫佛疏)>만 적혀 있다. 이런 여러 시대(時)의 구속을 받지 않고 역사를 지어 자기의 편벽된 신앙의 주관적 심리에 부합시키려 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人)까지 속인다. 신라 김왕(金王)을 인도 찰제리종(刹帝利種 : 왕족)이라 하며 (삼국사기), 고구려 추모왕(鄒牟王)을 고신씨(高辛氏 : 오제의 한 사람) 후손이라 한다(삼국사기). 게다가 조선 전민족을 중국 진(秦) 한(漢) 유민(동국통감, 삼국사기)이라 하며, 한인(韓人) 이동으로 온 것이다(동사강목)라고까지 하였다. 조선 태종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이런 맹목파(盲目派)들이 급선봉이 되어 조선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 : 관상대) 책들을 공자 도(道)에 어긋난다 하여 불태워 버렸다.

 

이두형 (李斗馨 : 조선 정조 때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요즈음 어느 행장과 묘지명을 보든지, 그 주인공이 반드시 용모는 단엄하고 덕성은 충후하며 학문은 정주(程朱 : 중국의 정자와 주자, 또 그들의 성리학)를 조종으로 삼고 문장은 한유(韓柳 : 중국 문장가 한유와 유종원)를 숭상한다고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적혀 있다.  이는 그 사람을 속일 뿐 아니라 그 글도 가치가 없다"

 

이것은 개인 전기의 실상을 잃은 데 대한 개탄일 뿐이지만, 이제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천대하는 춘추(春秋) 부월(斧鉞) 아래에서 자라난 후세 사람들이 그런 마음과 습속으로 삼국 풍속을 이야기하며 문약(文弱) 편소(偏小)에 스스로 만족한 조선 당대 사람들이 그런 주관으로 상고 지리 (上古地理)를 그리니, 이에 조선(단군)이나 부여나 삼국이나 동북국(東北國 : 발해)이나 고려나 조선에 이르는 5천 년 이래 모든 조선이 거의 한 도가니로 부어 낸 것 같다. 땅이 늘고 줄어듦에 따라 민족 활동의 활발하고 약해진 점이나 시대 고금을 좇아 국민 사상이 갈린 경계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크롬웰이 화가가 자기의 상을 그릴 때 왼쪽 눈 위 혹을 빼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그리려면 본얼굴로 그리라고 하였다. 이 말은 화가의 아첨을 물리칠 뿐 아니라 곧 자기의 참된 상을 잃을까 우려해서 나온 말이다. 조선사를 지은 과거 조선 사가들은 늘 조선의 혹을 베어 내고 조선사를 지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쓴 안경이 너무 볼록해서,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 버리고, 어디서 수많은 진짜 혹을 가져다가 붙여 놓았다.

 

혹을 붙인 조선사도 예전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서로 크게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때때로 조선인을 만나 조선사를 묻는데,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아는 까닭에 부끄러운 끝에 돌아와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 붙은 조선사요,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과거 기록이 그처럼 다 틀린 것이라면 무엇에 따라 바른 조선사를 만들겠는가? 사금을 이는 사람이 모래 한 말을 일면 좁쌀알만 한 금을 하나 얻거나 하나도 얻지 못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문적(文籍)에서 사료를 구하기가 이같이 어려워, 어떤 사람은 조선사를 연구하자면 먼저 조선과 만주 등지의 땅 속을 파서 발견한 것이 많아야 하고 금석학(金石學) 고전학(古錢學) 지리학 미술학 계보(系譜) 등의 학자가 쏟아져 나와야 한다고 하는 이가 많다. 그도 그렇지만 지금은 먼저 급한 대로 있는 역사책을 가지고 득실을 평하며, 진위를 비교하여 조선사의 앞길을 개척함이 시급한 일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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