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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장고형 고분_한일 고대사의 연결 고리

by noksan2023 2024.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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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월계동 1호 장고분

 

 

 

광주광역시 월계동 장고분이 있는 곳의 옛 이름은 장구촌이다. 전통 악기인 장구(장고) 모양을 한 언덕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생김새가 장구와 닮은 월계동 장고분은 1990년대 이곳에 첨단 과학 산업 단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었다.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모양의 무덤이 있다. 전방후원분이라 불리는 일본 고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앞은 네모(전방)지고 뒤는 둥근(후원) 형태여서 전방후원분이라 이름 붙여진 무덤 양식이다. 전방후원분은 당시 최고 권력자나 지역 유력자의 것으로 추정하는데, 일본 전역에 걸쳐 5,000기 넘게 분포한다. 대부분 원형 부분에 무덤 주인이 묻혀 있고, 주위에 무덤의 경계를 표시하는 엷은 붉은색의 원통형 토기, 즉 ‘하니와' 를 둘러 세웠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14기의 장고분이 광주, 함평, 영광, 고창, 담양, 영암 등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었다. 만들어진 시기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로, 그 이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월계동 장고분에서는 무덤을 둘러싼 도랑에서 일본의 하니와와 비슷한 원통형토 기도 출토되었다.

 

한국에서 일본식 전방후원분과 함께 원통형 토기까지 출토되자, 일본 학계와 언론은 몹시 흥분했다. 고대 일본이 한반도에 문화를 전해 주었다는 증거로 보는 학자도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4~6세기에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삼으려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려면 전방후원분 양식으로 성한 무덤이 한반도 남부를 대표하는 무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무덤 양식은 영산강 유역에서만 14기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영산강 유역의 중심인 나주가 아니라 주변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면 일본 학자들의 주장과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영산강 유역의 장고형 무덤을 만든 세력은 누구일까?

 

영산강 유역은 일찍부터 한반도와 일본 남부의 규슈를 잇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삼국사기」 등 역사적 자료에는 이 지역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지만, 백제식 무덤과는 다른 형태의 고분들인 독무덤이나 전방후원분 등이 등장한다. 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이 가운데 하나가 마한의 역사를 재조명하자는 주장이다. 마한은 백제에 통합되었지만, 일부 소국들은 백제의 간접 지배를 받으며 여전히 영산강 유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세력이 일본과 계속해서 다양한 교류를 이어가 이러한 무덤 양식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는 시기(475)를 전후해 수십 년간 잠깐 등장했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한일 고대사에 있어서 장고분의 비밀은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겨져 있다.

 

 

다이센 고분

 

 

 

전방후원분은 원형의 분구에 방형 혹은 삼각형의 단상부가 합쳐진 모양의 큰 무덤이다. 형태가 장고와 유사해서 장고분·장고형 고분이라고도 한다. 이 무덤양식은 일본열도 고유의 무덤 형식으로 전방후원분이라는 용어도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방후원분은 일본열도의 그것을 수용한 것이며, 한반도의 서남부 전라남도에서 주로 확인된다. 매장시설은 후원부에 설치된 앞트기식 돌방·굴식 돌방이며, 축조 시기는 5세기 후엽부터 6세기 전엽까지의 시기에 국한된다. 이 지역은 한반도 문물이 일본에 전파되는 경로로서 일본 고분 문화의 일부가 자연스럽게 유입된 것이다.

 

그 형태가 우리나라의 전통 타악기인 ‘장고’와 비슷하다고 하여 장고분(長鼓墳)이라고도 한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용어는 앞이 모가 지고 뒤가 둥글다고 본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산릉지(山陵志)’에서 유래하지만, 사실상 전후의 방위 개념과는 무관하다.

 

우리나라의 전방후원분은 종래 대형 독널무덤〔甕棺墳〕의 분포권과 비슷한 전라남도에서 다수가 발견되었다. 입지는 주로 해안 또는 해안과 가까운 강안지역에서 전망이 좋은 구릉이나 평지이고, 자체의 하위 고분들이 없이 1기 혹은 2기가 독립적으로 분포한다. 매장시설은 후원부(後圓部)에 설치된 앞트기식 돌방〔橫口式石室〕 · 굴식 돌방〔橫穴式石室〕이며, 축조 시기는 5세기 후엽부터 6세기 전엽까지로 한정적 시기에 국한된다.

 

이 무덤 양식은 과거 일본열도의 고유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전방후원분’이라는 용어도 일본에서 유래하는 연유가 거기에 있다. 일본 각지에서 보이는 전방후원분은 동일 고분군 안에서도 원형분이나 방형분보다 규모가 더 크다는 점 자체가 상대적으로 위상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3세기부터 7세기까지 비교적 오랜 세월 동안 축조되었고, 분포 수량이나 규모가 장대한 것이 많은 긴끼〔近畿〕지방이 그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그 지방의 최대형분인 ‘인덕릉(仁德陵)’부터 중형급에 이르기까지 홋카이도〔北海道〕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한다. 이를 통해 당시 일본의 국가체제를 ‘전방후원분 체제’라고 하는 정치 ·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고분의 연원은 일본열도의 재래 분구묘(墳丘墓) 중에서 기원한다는 자생설과 중국 동남부의 전국시대 토돈묘(土墩墓)의 영향설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전방후원분은 당시 일본열도의 그것을 답습한 것이며, 한반도 서남부인 전라남도에서 주로 확인된다. 외형이 분명한 전방후원분은 영광 월계고분, 함평 장고봉고분 · 신덕1호분 · 표산1호분, 광주 명화동고분 · 월계동1호분 · 월계동2호분, 영암 자라봉고분, 해남 장고산고분 · 용두리고분 등으로 모두 10여 기에 이른다. 이 고분들의 규모는 위치한 단위지역에서 최대급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전라북도와 영남의 고분 중에도 전방후원분이 존재할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그러한 의견을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가능성이 제기된 고분들 중에는 이후의 발굴조사를 통해 그렇지 않았음이 밝혀졌는데, 그 대표적인 고분이 남해안의 고성 송학동1호분으로 원분 3기가 연접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전방후원분으로 확인된 10기는 전방부의 형태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방형에 가깝고 후원부보다 전방부의 높이가 낮은 신덕1호분 · 자라봉고분 · 용두리고분이며 다른 하나는 삼각형에 가깝게 전단면(前端面)이 넓고 후원부와 비슷한 높이인 표산1호분 · 명화동고분 · 장고산고분 · (영광)월계1호분 · (광주)월계동1 · 2호분이다. 장고봉고분만 양자의 중간 형태에 가깝다. 그 중에 영광 월계고분과 함평 표산1호분을 제외하면, 나머지 8기는 발굴 혹은 시굴조사되었는데, 외형과 내부구조로 보아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하는 시기적인 추이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의 전방후원분에서는 분정부(墳頂部)의 평탄면이나 부석(敷石)주2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구의 측면부에 단면(段面)이 조성된 이른바 단축식(段築式)과 사면(斜面)에 돌들을 입힌 이른바 즙석(葺石)은 신덕고분에서 확인되었고, 용두리고분에서는 단축 여부가 파악되지 않으나 즙석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위의 두 고분의 분구 주변을 따라 구덩이를 판 주구(周溝: 혹은 물이 고인상태인 경우는 주호(周濠)라고도 함)는 군데군데 연결되지 않은 단절형인데 비해서 명화동고분과 월계동1 · 2호분에는 방패모양〔楯形〕의 너른 주구가 확인된다. 한편 장고봉고분 · 명화동고분 · 월계동1 · 2호분의 분구 상부 혹은 분주(墳周)에서는 원통형 토기가 출토되었다.

 

매장시설의 위치는 지표 아래를 굴광한 묘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토한 분구의 상부에 있다. 굴식 돌방을 갖춘 고분은 장고봉고분 1기뿐이고 나머지 고분들은 모두 묘도에 석벽을 갖춘 앞트기식 돌방이다. 한편 자라봉고분은 구덩식으로 발굴보고되었으나 평면 형태와 벽체 등 구조 부위별 상태를 통해 앞트기식일 가능성이 고려되고 있다. 입구부 혹은 연도(羨道: 복도와 같이 측벽과 천정이 있는 통로)는 모두 전벽(前壁)의 중앙으로 되어 있는 공통점을 보인다.

 

돌방 내부의 구조 부위에서 관찰된 뚜렷한 특색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문틀구조는 없으나 판석을 전벽 양측에 마주 세워 축조한 것〔門柱狀板石〕이 신덕고분 · 용두리고분 · 월계동1호분이다. 둘째, 전벽이 후벽보다 좁고 높이가 낮은공간형태〔羽子板形〕를 지닌 고분은 신덕고분 · 장고봉고분 · 용두리고분이다. 셋째, 신덕고분 · 장고분고분 · 용두리고분은 벽체 하위에 판석을 세워 축조한 이른바 요석(要石)을 구비하였다. 넷째, 신덕고분은 석실의 길이 방향에 맞추어 네 면에 판석을 세워 받친 널받침〔棺臺〕이 있고, 월계동1호분은 아예 가옥모양의 돌널〔石屋形石棺〕을 횡으로 둔 이례적인 안치시설을 갖추었다. 다섯째, 신덕고분과 장고봉고분은 돌방 천정면과 벽면에 붉은 안료가 도포되어 있으며, 특히 후자에는 백회로 미장한 다음에 붉은 안료가 도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확인되거나 발굴조사된 전방후원분의 외형과 내부구조, 특히 방패형 주구는 당시 일본열도 전방후원분에서 유행하던 것과 유사하며, 원통형토기도 하니와〔埴輪〕로 불리는 일본 고유의 토기형태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이른바 왜계(倭系)고분의 요소가 다분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돌방의 경우 북큐슈〔北九州〕에서 서일본은 물론 나중에는 동일본까지 파급되었던 소위 북큐슈형〔北九州型〕의 축조 요소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라남도지역의 전방후원분은 북큐슈 고분양식을 자체적으로 답습한 묘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집단을 의미하는 하위 고분군을 형성하지 않은 전방후원분의 출토유물은 대다수가 전라남도 지역의 산물이다. 삼국시대 고분군에서 보이는 현상과 판이한 이런 점들은 피장자가 그 지역에 살았던 토착 유력자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국제적인 새로운 묘제의 파급시기에 전라남도 해안지역의 일부 토착 유력자들은 이미 그 이전에 한반도의 중부지방에서 연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큐슈 돌방의 발전형과 일본 고유의 전방후원형 봉분을 도입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전라남도 해안지역은 지리적으로도 극동아시아 물류의 중요 거점지대로 보인다. 즉, 중국대륙의 연안지역에서 한반도 서 · 남해안을 거쳐 일본 북큐슈 연안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일본열도 각지로 통한다. 따라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물류와 거기에 수반된 문화 흐름의 가장 중요한 거점지역 중의 하나가 서 · 남해안을 가르는 영산강 하구 중심의 전라남도의 해안지역이고, 다른 하나가 남해안에서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입구인 북큐슈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 일대와 유사한 지리적 환경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주로 이 해로를 통해 한반도의 문물이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문화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토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국제적 문물 교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일본의 고분문화도 어느 정도 한반도로 유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겠다. 남해안지역에서 간헐적으로 보이는 일본 야요이〔彌生〕유적도 그 중의 하나이다. 전방후원분은 당시 한반도 남부와 일본 북큐슈 사이의 고분문화 교류 차원과 더불어 종래 독특하게 독널 고총을 축조했던 것처럼 전라남도지역의 국제적인 개방성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국제적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 생생한 도굴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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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생한 도굴 흔적

 

그야말로 ‘따끈따끈한’ 도굴 흔적이었다. 당시 이어령 문화부장관이 직접 검찰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검찰 수사를 의뢰했다. 강도높은 검찰 수사가 계속되던 어느 날이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관람객이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동문에 포장상자를 잠시 맡겨놓고는 사라졌다. 맡긴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도 이상해서 그 포장상자를 뜯어보니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철기류’ 였다. 도굴범들은 2년 6개월 뒤인 1993년 9월 검거됐다. 그러나 이미 도굴품 중 상태가 좋은 65점은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팔아넘긴 뒤였다. 당시 신문은 ‘신덕고분은 1971년 발굴된 무령왕릉을 방불케하는 엄청난 규모이며, 도굴범이 팔아치운 유물 중 5~6점은 국보급’이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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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조사된 일본식 고분

 

검찰수사와는 별도로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4월부터 40여일간 본격 발굴을 펼쳤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발굴이 마무리되면 학술자료 축적을 위해 발굴조사보고서를 펴내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국립광주박물관은 고심 끝에 신덕고분의 발굴보고서를 내지 않기로 한다. 다만 보고용 행정보고서만 만들었을 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공식 조사된 이른바 장고분(전방후원분)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 한다. ‘앞은 네모나고’(前方) ‘뒤는 둥근’(後圓) 형태라 해서 이름붙은 무덤(墳)이다. 한국에서는 ‘장고’와 닮았다고 해서 ‘장고분(長鼓墳)’이라 한다. 서기 3세기 중엽∼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다. 일본 고대국가 형성기의 일왕 무덤은 모두 이 형태이다. 가장 유명한 장고분은 399년 사망한 닌토쿠(仁德) 일왕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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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부시된 장고분 논쟁

 

신덕고분이 처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 일부가 전남 나주 덕산리와 신촌리 등의 고분 중에 장고분(전방후원분)과 유사한 고분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인 장고분이 한반도에 존재한다? 국내학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1972년 윤세영 고려대 박물관 주임과 황용훈 경희대 교수 등이 “충남 부여에 장고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고고학계는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들끓었다. 긴급 문화재위원회가 소집되어 윤세영·황용훈 두 사람의 발표를 청취했다. 하지만 문화재위원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허황된 이야기니만큼 발굴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로부터 12년 뒤인 1983년 6월 강인구 영남대 교수가 한발 더 나간다.  “경남 고성 등과, 전남 나주·영암·무안·함평 등 여러 곳에서 장고분이 보인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내학계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강교수의 주장은 오히려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강교수가 거론한 고분 중 가야 지역에 존재한 고성 송학동 1호분이 관심의 초점이었다. 물론 강교수는 “‘전방후원분’(장고분)은 일본의 고유묘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건너가 발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내학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학계는 두 갈래로 나뉘어졌다. 주로 원로학자들은 일왕 가계의 것으로 신성시되는 무덤형태가 한반도에 존재할 리가 없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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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반도 장고분’을 임나일본부와 연결짓는 이들이 생겼다. 일부 소장파는 장고분이 특히 고성 등 가야 지역에서 확인된다는 강교수의 주장에 흥분했다. 이거야말로 임나일본부의 결정적인 증거가 아닌가. 이후 전남 해남의 장고산 고분과 용두마을의 말무덤고분 등 장고형 고분의 존재가 계속 알려졌다. 반전의 과정도 있었다. 1970년대 ‘장고분’ 논쟁의 출발점이 된 충남 부여의 ‘추정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졌다. 1980년대 일본에서 임나일본부 논쟁을 촉발시킨 경남 고성 송학동 1호분도 1999년 ‘장고분’이 아닌 ‘쌍분’으로 최종 판명됐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 영산강 유역에서 속속 알려진 장고분은 학계로서는 다루기 힘든 ‘뜨거운 감자’였다. 자칫 임나일본부의 소용돌이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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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색 고분의 충격

 

그런 상황에서 또하나의 장고분으로 알려진 신덕고분이 처음으로 정식 발굴된 것이다. 과연 일본의 고분형식이라는 장고분이 맞았다. 무덤 내부에서도 일본색이 보였다. 천정과 4벽, 문의 안쪽에 모두 주칠(朱漆)이 되어 있었다. 빨갛게 칠했다는 얘기다. 출토된 대형 칼의 경우 손잡이 구멍이 일본 후나야마(구마모토현·熊本縣) 고분의 유물과 유사한 형태이다.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쓰인 금송제 관의 흔적이 보였다. 금동관과 금동신발의 파편도 여러점 출토됐다. 국내에서 처음 내부구조가 밝혀진 일본식 장고분인 것도 모자라 대단한 위상까지 갖췄다니…. 아니 그런 무덤이 왜 영산강 유역에 존재했다는 것인가. 이런 판국이었으니 발굴조사를 맡은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쉬쉬하며 발굴조사보고서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뭐 시쳇말로 두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국내에는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 연구자가 전무한 형편이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덜컥 보고서를 냈다가 일본 학계에 이용만 당할 수 있지 않은가.

 

 

 

 

 

 

단적인 예가 있다. 1994년 5월 20일 일본 아사히 신문 1면 주요기사가 눈에 띄었다. “한국 광주의 명화동 고분에서 전방후원분과 흡사한 고분이 발굴되었다. … 봉분 주위에 일본 전방후원분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하니와(埴輪·원통형 토기)와 유사한 토기가 줄지어 세워졌다.” 기사는 “6세기 당시 고대 일본은 백제와 가야로부터 상당한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활발한 인적교류를 통해 일본 문화 또한 한반도에 유입됐다는 걸 입증한다”고 덧붙였다. 무슨 말인가. 장고분인 명화동 고분의 주위에 50㎝ 간격으로 원통형 토기가 세워져 있다는 것에 주목한 기사다. 원통형 토기(하니와)는 고분 주위에 세운 토기로 일본식으로 알려진 무덤조성방식이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가 보도 된 다음날(21일) 명화동 고분을 발굴한 국립광주박물관은 큰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전화를 걸어 “그러면 우리가 저쪽(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얘기냐”면서 “뭔가 대응책이 필요한 게 아니냐”고 주문한 것이다. 당시는 일본의 근·현대사 왜곡 때문에 죽을 노릇이었던 때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거리가 생겼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 언론이 주요 기사로 다뤘으니 예민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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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속 확인되는 장고분의 존재

 

이후 신덕 및 명화동 고분 뿐이 아니라 전남 영암 자라봉, 함평 장고산, 영광 월산리, 광주 월계동 등 영산강 유역에서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됐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였던 것이다. 그것도 5세기말~6세기초까지 딱 50여년간….

장고분 발굴이 이어져 자료가 축적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됐다.

이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 또한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백제인(혹은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일본학계는 “네모 지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 자생설을 주장했다.

일본에서는 이 주구묘가 기나이(畿內)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한국과 가까운 규슈(九州)에서는 고훈(古墳) 시대(3세기 중반~7세기) 초기에 축조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기원 전후에 조성된 주구묘(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한반도 전라도 지방에서도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 만약 주구묘가 장고분의 전신이라면 외려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는 지금까지 14기만 확인됐지만 일본 전역에는 2,000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반짝(5세기말~6세기초)했지만 일본에서 300년 넘게 대유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왼쪽은 1972년 7월18일 동아일보에 실린 전방후원분 관련 기사. 부여에서 전방후원형 구릉이 발견됐다는 내용이다. 오른쪽은 1983년 7월11일 경향신문 기사.&nbsp; 강인구 영남대 교수가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 등 영산강과 낙동강 유역에서 전방후원분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 무덤 주인공은 한국인, 일본인?

 

무덤의 주인공을 둘러싸고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5세기말 6세기초 마한 출신의 토착세력 수장이 왜(일본 규슈 지방)와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묘제(장고분)를 썼다는 주장도 있다. 5세기 말이라면 475년(개로왕 21년) 고구려의 침공에 백제 한성이 함락되면서 백제의 국세가 약화되었던 시기와 맞물린다. 혹은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마한 출신 토착세력이 왜의 묘제를 썼다는 견해도 있다.

무덤 주인공이 아예 일본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또는 영산강 유역에 살고 있다가 백제 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 관료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도 있다. 일본 열도로 이주해간 한반도계 사람들 중 가야인들이 왜와 야마토 정권을 세우자 격변기에 북규슈에 살고있던 마한 출신 이주민이 망명객의 신분이 되어 본향(전남)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무덤 주인공이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임나일본부와는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인(백제인이든 마한 출신이든)이라면 원천적으로 임나일본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일본인이라도 마찬가지다. 임나일본부는 4세기말~6세기초까지 2세기 가량 한반도 남부에 경영했다는 식민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장고분은 50년여간 반짝 유행했다. 그것도 겨우 14기 정도만 확인된다. 이 정도로는 왜가 장기간 지배한 흔적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주무대인 영남 지방에서 장고분은 보이지 않는다. 또 백제가 외국인 채용 방침에 따라 조정에 출사시킨 왜인의 무덤이라 해도 임나일본부와는 관계가 없다.

 

 

 

 

■ 촌스러워진 국적논쟁

 

최근 흥미로운 소식이 들렸다. 1991년 기껏 조사해놓고도 ‘쉬쉬’하며 보고용 행정보고서로 만족해야 했던 신덕고분 발굴보고서가 30년만에 발간됐다. 이에 발맞춰 10월24일까지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 비밀의 공간, 숨겨진 열쇠’라는 제목으로 특별전까지 열리고 있다. 필자는 2000년대 중반에 장고분을 다룬바 있다. 당시 몇몇 연구자가 복사본으로 갖고있던 행정보고서를 입수해서 그걸 토대로 학계의 입장을 취재한 바 있다. 그런 인연 때문에 ‘신덕고분 발굴 조사 보고서’의 발간 소식이 매우 반가웠다. 필자는 보고서에 실릴 한·일 연구자들의 논문을 미리 받아보고 20년 남짓만에 장고분 공부를 다시 해봤다. 그런데 기원 및 국적논쟁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딴은 그렇다. 무령왕릉처럼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나온다면 또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국적 논쟁은 영영 평행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장고분 주인공의 국적을 따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요즘 학계의 분위기도 달라진 것도 같다.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하고 국적을 딱 잘라 주장하는 것을 약간 촌스럽게 느끼는 듯하다.

 

 

 

일본의 대표적인 장고분(전방후원분)인 닌도쿠(仁德)왕릉. 서기 3세기 중엽&sim;6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에서 유행한 무덤형식이다. 일본 전역에 2000기 넘게 분포하고 있다.

 

 

 

보고서 논고 가운데 김낙중 전북대 교수의 글(‘신덕고분의 분구와 석실’)은 “신덕고분은 일단 왜의 규슈(九州) 세력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서술했다. 고분 형태나 매장시설로 보아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덤 주위를 두른 도랑(주구)과 돌뚜껑을 덮은 무덤길 항아리, 띠모양으로 얇게 깐 돌(즙석), 원통형 토기(하니와)를 두르지 않은 점 등은 또 전형적인 일본식이 아니다. 관대나 관고리가 부착된 목관 등은 백제 중앙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출토유물은 어떤가. 다카타 간타(高田貫太)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신덕고분의 유구와 출토 유물을 왜계와 백제계, 왜+백제계, 재지계(마한 출신 토착세력) 등으로 도식화했다. 다카타에 따르면 왜계는 장고형 분구와 규슈계 돌방, 그리고 꼰 모양의 둥근고리큰칼(환두대도) 등이다. 백제계는 장식 목관과 말갖춤새 세트, 구슬류와 신발 등의 장신구, 그리고 목관의 안치방식 등을 꼽을 수 있다. 또 ‘왜+백제’는 금동관과 은제장식, 삼각형 철모(긴 나무 자루 끝에 날을 물려 찌르거나 던지는 무기) 등이다. 이밖에 무덤길 제사에 사용된 토기류는 마한 출신 토착세력의 요소가 보인다. 그러나 다카타의 견해 중 금동관의 경우는 전형적인 일본식이라는 견해(이한상 대전대 교수)도 있다. 게다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도굴범이 팔아넘긴 유물 중에는 중국제 자기와 초두(조리기구·솥)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중·일 3국의 요소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1980년대 임나일본부 논쟁을 촉발시킨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 장고분, 즉 전방후원분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일본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임나일본부와 관련된 논쟁이 일었다. 그러나 이 고분은 1999년 장고분이 아닌 쌍분으로 판명되었다.

 

 

 

■ 아직 회수되지 않은 신덕고분 유물들

 

비단 신덕고분만이 아니다. 고분을 구성하는 이런 복잡한 속성이야말로 영산강유역 ‘장고분’ 뿐 아니라 나주 복암리 3호분과 정촌고분 등 토착세력의 고분에서도 그대로 보이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 신덕고분 출토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분석한 다카다 교수는 “영산강 유역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이 특정 정치체의 정치·경제적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안된다”고 마무리했다. 당시 영산강 유역 사회의 다각적인 대외교섭과 적극적인 외래 묘제 수용의 움직임을 읽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30년 만에 펴내는 보고서 내용이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 한국인이라는 거냐, 일본인이라는 거냐 분명하게 언급하라고 채근한다면 할 말은 없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이 정답일 수 있다. 

 

5세기 말~6세기 전반 영산강 일원은 상상보다 훨씬 개방적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을 방문한 백제인이 거대한 일본의 장고분(전방후원분)을 보고 돌아와 그와 비슷한 무덤을 조성했을 수도 있다. 또한 ‘외국인 우대정책’을 편 백제의 조정에 출사해서 백제 관료 혹은 귀족이 된 왜인의 무덤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경우든 지금 이 순간의 민족 감정으로 1400년 전을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일인가. 또하나, 검거된 신덕고분의 도굴범들은 도굴품 중 최상품 65점을 팔아넘겼다고 진술했다. 수사과정에서 국보급 유물도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점 당 600만~2000만원을 받고 판 유물들은 30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도굴품인줄 알고도 사들였다면 그것은 장물이 분명하다. 물론 몇단계를 거쳐 유통되었다면 지금 소장자는 도굴품인지도 모르고 샀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선의취득’을 주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도굴품은 이제 유통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불안에 떨면서 그와같은 도굴품을 소장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 신덕고분 도굴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1991년 도굴범이 국립중앙박물관 정문에 갖다놓았던 전례를 따라주기를 바란다. 1400년전의 수수께끼 같은 영산강 유역의 역사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이 기사 작성을 위해 박경도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성낙준 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장, 조현종 전 국립광주박물관장, 권오영 서울대·이한상 대전대·김낙중 전북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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