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 크기의 자그마한 이 불상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다.
19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40분, 덕수궁 미술관 제3전시실 순찰을 돌던 경비원은 텅 비어 있는 진열장을 보고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한민국 국보인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불상을 훔쳐간 자리에는 푸른색 볼펜으로 휘갈겨 쓴 쪽지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문화채관리국(현재 문화재청) 국장님께 직접 알리시오. 오늘 24시간 안으로 돌려주겠다고...... 이따 11시경에 국장님께 알리겠음. 지문 감정 의뢰는 필요 없다."
불상은 도대체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일까?
오전 11시, 한 통의 전화가 문화채관리국 국장 집에 걸려 왔다.
"내가 훔쳤다. 들려 주겠다."
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는 두 차례나 더 걸려 왔다. 그리고 밤 11시 5분쯤, 다시 국장의 집으로 전화가 왔다.
"한강1철교 제3교각 16번과 17번 받침대 사이 모래 속에 묻었으니 찾아가시오."
범인의 말대로 그곳에 가니 사라졌던 불상이 온전히 있었다. 하지만 결국 범인은 잡지 못했다.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금동으로 만든 불상 뒤에 ‘연가 7년(延嘉七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불상의 머리에는 높은 육계(불상의 머리 위로 상루처럼 튀어나온 부분)가 있고, 온화한 얼굴에 입가의 표정은 매우 차분하다. 손은 체구에 비해 큰 편으로 왼손은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접어 올린 채 아래로 향하고, 오른손은 위로 향하고 있다(시무외 여원인이라고 한다). 부처의 머리 뒤에 보호막처럼 있는 광배에는 원에 가까운 곡선부터 직선에 이르기까지 불규칙하고 다양한 형태의 선이 장식되어 있다. 불상은 전체를 하나의 거푸집으로 주조하는 기법으로 제작되었다. 이후 도구로 광배의 문양 등 세부를 조각한 뒤에 도금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배는 충격 등의 이유로 앞으로 휘어져 있다.
광배 뒤에는 수평으로 파손된 채 고구려 연호로 추정되는
"연가 7년(539년)에 고구려 낙랑에 있는 동사에서 천 개의 불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29번째로 만든 불상이다."
라는 내용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천 개의 불상이라니! 당시 고구려에서 불교가 매우 융성했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999개의 불상도 어딘가에 묻혀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이 불상은 고구려와 관련이 없는 경상남도 의령에서 발견되었을까? 최초의 조사자는 발견된 곳이 절터도 아니며 불상을 봉안할 위치가 아니라는 점에 의문을 가졌다고 한다. 당시 신라 영토인 이곳에서 고구려 불상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이 불상이 어느 시기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파손된 후 이곳에 폐기된 것이 아니었을까?
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光背)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196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63년 7월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된 이 불상은 작은 금동불상 가운데서 꽤 당당하고 큼직한 불상이다. 이 점은 두터운 옷 속에 싸여 신체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하는 점이라든지 옆으로 힘차게 뻗친 새깃 같은 옷자락과 세찬 파도처럼 물결친 옷주름의 강렬성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손·발·얼굴 등이 신체에 비해서 유난히 크다.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동시에 짓고 있는 큼직한 손, 여기에 왼손의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구부린 힘차고 절도 있는 손짓을 취하고 있는 것도 이와 잘 조화되고 있는 점이다. 신체에서 묘사된 이러한 격렬함은 좁고 날카로운 대좌(臺座)의 연꽃무늬에서도 그리고 광배의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불꽃무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런 거칠고 격렬한 조각 수법은 중국 북방 양식과 직결되겠지만 고구려 역시 중국 북방민족, 특히 북위(北魏)를 세운 선비족(鮮卑族)과는 상당한 친연성이 있기 때문에 동일한 문화권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따라서 아마도 앞 시대의 인도적(印度的)인 양식이 크게 후퇴되고 새로운 북방적 특징이 대두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점은 불의(佛衣)에서도 나타난다. 인도 간다라식 불의는 사라지고 가슴이 U자로 벌어졌으며 여기에 비스듬히 승각기(僧脚岐)가 표현되고 띠와 띠 매듭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연가명불상은 북위 불상과는 달리 띠 매듭인, 이른바 신(紳)을 길게 내리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고구려적인 특징이 아닌가 한다.
이런 특징은 발목 위의 하의(下衣)와 대의(大衣) 자락이 장식적이 아니라 단순, 명쾌한 점에서도 보이며 특히 얼굴의 묘사에서는 보다 명료하게 나타난다. 이 얼굴은 기본적으로 중국 용문(龍門) 석굴의 불상 양식과 어느 정도 비교된다. 하지만 그처럼 귀족적 분위기는 없고 팽팽한 얼굴 근육은 긴장감이 넘치며 뚜렷한 코에 악센트를 주면서 눈과 입 주위로 고졸(古拙)한 미소를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심오한 정신성을 강렬하게 발산하면서 섣불리 근접할 수 없는 위엄 있는 미소를 얼굴 가득 표현한 것은 뚝섬 출토 금동불좌상과 비슷하게 청순하고 발랄한 당대의 불교적 내면세계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 걸작품이라 하겠다.
광배 뒤의 명문에 보이다시피 이 불상은 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千佛)을 조성하여 세상에 유포시키고자 만든 것으로, 연가(延嘉) 7년의 명(銘)을 가지고 있다. 명문(銘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弟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千劫佛流布第廾九回現歲 佛比丘擣穎所供養(연가7년 기미년에 고려국 낙랑 동사의 주지 경(敬)과 그 제자승 연(演)을 비롯한 사도(師徒) 40명이 함께 현겁의 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하기로 하였으니 그 제29번째의 불상은 비구 도영(擣穎)이 공양하는 바이다)”.
천불 가운데 29번째인 이 불상이 당시 신라 혹은 가야 지방이던 경상남도 의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은 동시에 만들어진 다른 불상들이 주위 여러 나라에 흩어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국력과 불력(佛力)의 유포 그리고 통일의 의지를 주위 모든 나라에 천명한 의의가 있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강인하고 격렬한 불상 양식은 고구려적인 새로운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불상이라 하겠다.
1963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출토된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539년에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천불상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동불상으로, 광배의 뒷면에는 4행 47자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이를 통해 불상의 주조 시기와 천불상의 하나로 주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만들어질 당시 고구려에서는 금동불상을 조성하여 유포하는 거대한 불교 사업이 진행 중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경남 의령군에서 출토된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은 1963년에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출토되었다. 이 불상은 539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동불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불상은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표현한 광배(光背)와 부처가 딛고 있는 연꽃 모양의 자리를 표현한 연화대좌(蓮華臺座), 신체가 한 몸으로 주조되어 있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출토된 6세기 고구려 불상 중에서 하나의 광배에 삼존불(三尊佛)을 세운 형식이 아니라 하나의 불상만 세운 형식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광배의 뒷면에는 4행 47자의 글자가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천불상(千佛像)의 하나로 주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의 전체 높이(總高)는 16.2cm, 상의 높이는 9.1cm, 광배의 높이는 12.1cm, 대좌의 높이는 4.1cm이다. 1964년 3월 30일에 국보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539년에 만든 천 개의 불상 중 29번째 불상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의 광배 표면에는 일정한 패턴을 찾기 어려운 역동적인 불꽃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다. 이는 부처의 신성한 기운을 불꽃무늬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4행 4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발원문을 읽는 방식과 해석에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연가 7년인 기미년에 고구려 낙랑(평양)에 있는 동사(東寺)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인 승연(僧演)을 비롯한 제자 40인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유포한 제29번째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을 비구인 ○○이 공양하다.
광배에 새겨진 내용을 대략적으로 해독하면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539년에 만든 천 개의 불상 중 29번째 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만들어질 당시 고구려에서는 금동불상을 조성하여 유포하는 거대한 불교 사업이 진행 중이었다.
고구려에 유행한 천불신앙
불교에서 말하는 천불(千佛)은 삼천 명, 백천 명의 부처의 줄임말이지만 반드시 그만큼의 부처의 수를 이르는 것은 아니다. 천(千)이라는 단어는 ‘매우 많다’는 의미로도 쓰이기 때문에 천불은 매우 많은 부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 명의 부처가 아니라 여러 명의 부처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믿음에서 생겨난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이 반영된 신앙을 ‘천불신앙(千佛神仰)’ 또는 ‘다불신앙(多佛神仰)’이라 부른다. 천불은 삼천불 혹은 백천불이라는 구체적인 숫자로 이야기 되다가 천불로 정착되었다. 그 후 천불이라는 이름은 『현겁경(賢劫經)』과 같은 경전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 광배에 새겨진 ‘현겁천불’은 『현겁경』에서 이르는 천불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도 『현겁경』이 고구려에 전해져 평양 불교도들 사이에서 천불신앙이 성행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영토까지 전파된 고구려 불상
경상남도 의령군은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삼국시대에는 가야 또는 신라의 영토였다. 천불 가운데 29번째인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은 고구려에서 주조되었으나 신라의 영토에서 발견이 되었다. 이는 나머지 불상들도 주위 여러 국가나 지역으로 흩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대국이었다. 그리고 중국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빠르게 수용하고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을 신라의 영토까지 퍼트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국력과 불교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사 두문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의 미소_서산 용현리 마애 여래 삼존상 (0) | 2024.02.19 |
---|---|
장고형 고분_한일 고대사의 연결 고리 (0) | 2024.01.22 |
조선상고사_제2장_역사의 3대 원소와 옛 조선사 결점 (1) | 2023.12.26 |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_신채호) 제1편 총론 제1장 (1) | 2023.12.17 |
조선건국과정 두문자 : 명 철 요 위 폐 급 과 정 선 (3) | 2023.11.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