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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조선건국과정 두문자 : 명 철 요 위 폐 급 과 정 선

by noksan2023 2023.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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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과정 : 명 철 요 위 폐 급 과 정 선

명 : 사신 살해(1374)

철 : 령위 통보(1387)

요 : 동정벌군 편성

위 : 화도 회군(1388)

폐 : 가입진(1388)

급 : 전도감설치(1389)

과 : 전법 공포(1391)

정 : 몽주 암살(1392)

선 : 왕위 위(1392)

 

 

1. 명사신 살해 사건(1374)

 

명사살해사건

 

 

명사신 살해 사건이라 함은 1374년(공민왕 23)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을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명나라는 고려에 사신 채빈을 파견하였으나 친원파 이인임(재상)은 채빈이 공민왕의 살해사건을 본국에 보고 할 것을 우려 1374년 돌아가는 그를 김의로 하여금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다.

 

명나라가 북원(北元)을 치려고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을 보내서 제주의 말 2,000필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문하 평리 한방언(韓邦彦)을 제주에 보내 말을 모으게 하였다. 그러나 제주의 목호(牧胡)들이

 

“원나라의 적인 명나라에 말을 보낼 수 없다.”

 

라고 하며 말의 공출을 거부하고 300필만 내놓았다. 명나라 사신들은 한방언을 처벌하라고 요구하면서

 

“제주의 말이 2,000필에 차지 않으면 황제가 우리들을 죽일 것이므로 돌아갈 수 없다.”

 

라고 주장하였다. 왕은 최영(崔瑩) 등에게 군사 2만 5,000여 명으로 제주를 토벌하게 하자, 임밀과 채빈은 할수없이 말 300필만 끌고 돌아갔다. 명나라 사신을 호송하던 김의는 개주참(開州站 : 鳳凰城)에 이르자, 채빈과 그 아들을 죽이고 임밀을 붙잡아 갑사(甲士) 300명과 공마(貢馬) 200필을 이끌고 홍복원의 장수 나하추(納哈出)에게로 달아났다.

 

이 명나라 사신의 살해사건은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복잡한 외교관계를 자아내게 하였다. 명나라는 고려의 사신을 잡아가두기도 하고, 공민왕이 살해된 사건을 들어 고려를 책망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고려가 북원과 통하는 사실에 대해 크게 시기하고 의심하여, 1379년(우왕 5)에는

 

“죄가 없는 사신을 죽인데 대해 집정대신(執政大臣)이 내조(來朝)할 것”

“금년에 공마(貢馬) 1,000필을 보내고 내년부터는 해마다 금 100근, 은 1만 냥, 양마(良馬) 100필, 세포(細布) 1만 필을 보낼 것”

 

을 요구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전함 수천과 정병 수십만으로 치겠다고 위협해왔다. 이러한 명나라의 고압적 태도는 그 뒤에도 오래 계속되어 사신의 살해에 대한 감정과 고려가 북원과 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2. 령위 통보(1387)

고려 말기 명(明)에서 철령 이북의 고려 동북방 변경 지역을 직접 다스리기 위해 설치하려 했던 군사적 행정 관부가 철령위이고 이를 설치하겠다고 명나라가 조선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사건이 바로 철령위 통보이다. 명은 철령 이북의 고려 동북방 지역이 원래 원(元)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철령 이북 지역에 철령위(鐵嶺威)를 설치하여 직접 다스리려고 하였다. 철령위를 설치해 명이 다스리고자 했던 영역은 원이 100여 년간 통치했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지역을 지칭한다. 명에서는 1387년(우왕 13) 12월에 철령위 설치를 결정하였으며, 당시 명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설장수(偰長壽)가 그 사실을 이듬해 고려 조정에 전달하였다.

 

고려에서는 철령 북쪽으로 멀리 공험진(公嶮鎭)까지 모두 고려의 이전 영토였음을 주장하며 철령위 설치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명은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철령위 설치를 정식으로 통보하며 고려를 압박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최영(崔瑩) 등 강경 세력이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遼東) 정벌을 단행하였다. 최영을 중심으로 조민수(曺敏修), 이성계(李成桂) 등을 각 군의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위화도(威化島)에서 이성계가 회군하면서 요동 정벌은 중단되었다. 이성계 등은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요동 정벌을 주도했던 우왕(禑王, 재위 1374∼1388)과 최영 등을 제거하고 고려의 내정을 장악하면서, 조선 건국 과정을 본격적으로 밟아 나갔다.

 

이후 명에서는 더 이상 철령위 설치를 고려에 거론하지 않았다. 당초 명은 철령위 설치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기보다는, 철령위 설치 문제를 제기하여 고려의 만주 방면 진출을 사전에 저지하고 요동 일대를 확실히 장악하고자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3. 동정벌군 편성

요동 정벌은 고려가 명의 철령위 설치 시도에 반발하여 1388년(우왕 14년)에 요동을 공격하고자 시도한 사건이다. 요동 정벌은 위화도회군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는 고려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14세기 중반, 중국 대륙을 지배하던 원은 황제 자리를 둘러싼 내분과 남방에서 일어난 한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쇠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은 초기부터 강력한 반원정책을 표방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원과 결탁하여 행패를 부리던 자들을 쫓아내고 대외적으로는 군사를 파견하여 몽골의 고려침입 중에 원에 상실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였다. 또한 1368년에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명이 원을 북쪽으로 쫓아내고 중국을 지배하게 된 후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자, 이듬해 명과 새로이 사대관계를 맺었다. 이는 북쪽으로 쫓겨간 원의 잔존세력인 북원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힘입어 고려는 세 차례에 걸쳐 지금의 요양(遼陽)인 동녕부(東寧府)의 북원세력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명이 북원을 격파하고 직접 요동에 세력을 뻗치게 되자 고려와 명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다. 명은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며 고려 사신의 요동 입국을 막는 등 고려의 요동 진출을 견제하였으며, 고려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면서 고려가 북원과 연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악화되어 가던 고려-명 관계는 친명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공민왕이 시해되고, 고려에 파견된 명의 사신이 살해된 데다가, 우왕(禑王)이 등극한 이후 새로 집권한 권신 이인임(李仁任)이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원과 통교하는 이중적인 외교를 펴면서 더욱 험악해졌다. 당시 이색은 시를 지어 명과는 관계가 소원해지고 북원과는 자주 통교하는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였다. 명은 공민왕의 암살 이후 고려를 더욱 의심하며 고려에 무거운 세공(歲貢)을 요구하는 등 압박을 가했다.

 

고려의 외교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국간의 관계는 잠시 정상화되었다가 다시 악화되는 등 안정적이지 못한 상태를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명이 1387년(우왕 13년)에 요동에 있던 북원의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고 요동을 직접 장악하게 되자, 고려의 불안감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이때 명이 고려를 침공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표류한 명의 배를 고려를 침공하러 온 배라고 오인할 정도였다. 우왕은 요동에서 명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몸소 갑옷을 입고 숨기까지 하였다.

 

명과 사대관계를 맺은 상황에서 북원의 사신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정도전(鄭道傳) 등 신진사대부들은 옳지 않은 처사라고 비판하였다. 반면 명의 지나친 물자요구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홍건적과 왜구를 격파한 명장으로서 이름이 높았던 최영(崔瑩)이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었다. 최영은 우왕 6년(1380) 명에서 많은 양의 물자를 요구하자 “징발하는 데 염치가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어서 1387년(우왕 13년)에도 명에서 무리한 요구를 해오자 “이와 같다면 병사를 일으켜 명을 치는 것이 낫다.”고 하기까지 했다.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에 대해서 현상을 유지하는 데 골몰하며 많은 부정을 저지른 이인임 정권은 결국 1388년(우왕 14)에 최영과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에 의해 무너지고, 최영은 재상인 문하시중에, 이성계는 부재상인 수문하시중에 임명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최영은 자신의 딸이 우왕의 왕비가 되면서 절대적인 입지를 확보하였다. 명의 압력에 비판적인 최영이 고려의 실권을 쥐게 되면서, 명에 대한 고려의 태도는 언제든지 변화할 가능성이 생기게 되었다.

 

명은 북원의 잔존세력을 요동에서 몰아낸 이후, 1387년(우왕 13) 12월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관할 하에 둘 것을 결정하였다. 이 사실은 고려에서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있던 설장수를 통해 고려에 정식으로 통보되었다.

 

철령 이북의 땅은 원에 의해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가 공민왕대 무력으로 수복한 지역으로서, 고려로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명의 철령위 설치 소식을 접한 고려에서는 각 지역에 성을 수축하고 여러 장수들을 서북 지역에 파견하여 전쟁에 대비하는 한편, 박의중을 명에 사신으로 보내어 철령 이북이 원래 고려의 땅임을 밝혀 명을 설득하고자 했다. 한편 우왕과 최영은 몰래 요동 정벌을 모의하였다. 당시 실권자였던 최영은 대신들을 모아 명의 정요위(定遼衛, 현재의 요양)을 칠 것과 화의를 청할 것에 대해 의견을 물었고, 대신들은 화의를 택하였다. 이어 최영은 다시 철령 이북의 땅을 명에 넘겨주어야 할 것인지 여부를 물었고, 신료들은 모두 불가하다고 답하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1388년(우왕 14) 3월에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명에서 철령위를 설치하기 위해 관리와 군사를 압록강 이남으로 보냈다는 보고를 올리고, 명에서도 정식으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해 왔다. 이에 우왕과 최영은 8도의 군사를 징집하여 우왕이 직접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 요동정벌을 준비하였다. 또한 세자와 여러 비(妃)를 한양산성에 옮기고, 문하찬성사 우현보(禹玄寶)에게 명하여 개경을 지키게 하였다.

 

4월 1일에 우왕은 봉주(鳳州, 현재의 봉산)에 이르러 12일에 최영을 전군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로,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조민수가 이끄는 좌군에는 서경도원수 심덕부(沈德符), 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王安德), 부원수 이승원, 경상도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 경의(慶儀), 안동원수 최단,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안경(安慶)·왕보 등을, 이성계가 지휘하는 우군에는 안주도도원수 정지(鄭地), 상원수 지용기(池湧奇), 부원수 황보림(皇甫林), 동북면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배극렴(裵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이지란(李之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이을진(李乙珍)·김천장 등을 소속시켰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좌우군이 총 38,830명, 겸군(傔軍) 11,634명, 말 21,682필이었는데,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했다. 4월 18일에는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이 평양을 출발하였으며, 5월 7일에는 고려와 명의 국경인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5월 11일에는 이성원수 홍인계(洪仁桂)와 강계원수 이의가 앞장서서 요동을 공격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요동정벌 계획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고려는 밖으로는 오랜 기간에 걸친 원의 수탈, 안으로는 권세가들의 토지겸병 등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피폐해져 있었다. 게다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많은 지역이 황폐화되었고, 우왕의 사치는 상황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또한 정벌군이 출발한 음력 4~5월은 한창 농사철이자 장마철이었고, 많은 군대가 북쪽으로 출진하면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기 어려웠다. 실제로 원정군이 북쪽으로 출발한 틈에 왜구가 서해도, 전라도와 양광도에 출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병사를 징집하자 8도가 시끄러워졌으며, 농사를 못 짓게 된 백성들이 이인임 정권 때보다도 심하다며 크게 원망하였다.

 

전쟁에 대한 반대론도 만만치 않아, 우왕과 최영은 반대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전쟁을 반대하던 공산부원군 이자송(李子松)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그 중에서도 요동정벌을 가장 강경하게 반대한 것은 우군도통사 이성계였다. 그러나 그의 사불가론(四不可論)이 당시의 상황을 근거로 원정이 어려움을 주장했음에도, 우왕과 최영은 원정을 강행하였다. 이성계는 우왕에게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웠는데, 그 내용은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러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며, 셋째로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이고,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반대가 우왕과 최영에 의해 거부되자, 이성계는 정 요동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우왕은 이 역시 듣지 않았다.

 

위화도의 고려군 내부에서는 탈영하는 병사들이 끊이지 않았고, 아무리 처벌을 해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 실행에 옮기지 못했으며, 장맛비에 병장기가 손상되고 군사들이 지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군대를 철수시켜주기를 청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5월 22일, 이성계와 조민수는 다시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어 회군을 허가해주기를 요청했지만, 최영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런 와중에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휘하의 직속부대만을 거느리고 고향인 동북면을 향하여 가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이를 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회군할 것을 결정하였고, 마침내 군사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되돌아왔다. 이것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이다. 사료에 따르면 군대가 압록강을 다시 건너오자 장마로 인해 불어난 강물에 섬이 잠겨버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군대를 거느리고 최영의 군대를 물리친 뒤 요동정벌을 주장한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제거하였으며,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요동정벌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요동정벌 자체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역사적으로는 큰 발자취를 남겼다. 대외적으로는 명이 고려가 철령위 설치에 반발하여 요동정벌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아 철령 이북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였으며, 이후 다시는 이 지역에 대해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 대내적으로는 우왕과 당시의 실권자 최영이 제거되고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건국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우왕대의 요동정벌은 당시의 국력 및 국제정세를 감안했을 때 매우 위험한 정치적, 군사적 시도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는 고려의 마지막 북벌정책이자 외세의 영토침탈에 대한 저항의식의 발로라는 점에서는 평가할 만하다.

 

한편, 이때의 요동정벌에 대한 기억은 조선 초 정도전이 주도한 또 한 차례의 요동정벌 시도로 이어졌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명과 조선의 관계는 매끄럽지 않아서 명 태조 홍무제는 조선에서 명에 첩자를 보내고 여진족을 유인하는 등 말썽을 일으키고 있으며, 명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조선이 명에 보낸 외교문서가 불손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을 압박하였다. 아울러 외교문서를 잘못 지은 책임자인 정도전을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자 정도전과 남은 등은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여 요동정벌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요동정벌을 위한 실질적인 조치로서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정도전과 함께 재상이었던 조준(趙浚)이 이를 크게 우려하여 태조에게 간언하기까지 하였다.

 

반면 명에서도 조선의 요동정벌 계획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조선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였으며, 조선의 공격에 대비한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조선에서는 1398년(태조 7)에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요동정벌 계획을 추진하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살해되고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명에서는 조선을 의심하던 명 태조 홍무제가 사망하고 건문제가 즉위하면서 해소되었다. 이에 요동정벌 시도는 또다시 좌절되었다.

 

4. 화도 회군(1388)

위화도회군은 1388년(우왕 14년)에 우왕의 명을 받아 요동을 공격하기 위해 진군했던 이성계 등이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14세기 중엽 원이 점점 쇠퇴하자 동아시아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당시 즉위한 공민왕(恭愍王)은 이 기회를 틈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여 몽골의 고려침입 이후 원에 빼앗긴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회복하고, 원과 결탁하여 행패를 부리던 기철(奇轍) 등의 무리들을 쫓아냈다. 또한 원을 몽골 고원으로 쫓아내고 중국 본토를 새로이 장악한 주원장의 명과 새로이 외교관계를 맺었다.

 

명과 고려의 관계는 처음에는 유화적이었으나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친명적이었던 공민왕이 시해된 이후 더욱 얼어붙었다. 공민왕 사후 집권한 이인임(李仁任) 정권은 명과 사대관계에 있으면서 북원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등거리 외교를 시도하였고, 이는 명의 의심을 샀다. 또한 공민왕은 세 차례 군대를 보내어 북원이 지배하고 있었던 요동 지방을 공격하였다. 아울러 요동 지방에 사는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고려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명의 세력이 요동에 뻗어가면서 명과 고려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외에도 고려는 중대한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원말에 중국 남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인 홍건적의 일파가 고려에 침입하여 개경을 함락시키는 등 큰 피해를 주었으며, 왜구는 고려의 연해지방을 거의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다. 또한 권세가들은 남의 토지를 빼앗고 양민을 노비로 삼아 농장을 만들었고, 일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유망하거나 권세가의 농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권근(權近)은 당시 끊이지 않는 왜구의 침입과 자연재해, 권세가들의 토지겸병과 가혹한 수탈로 인해 많은 백성들이 죽어가는데도 조정에서는 이에 마땅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고 통탄하였다.

 

고려 사회의 내우외환 속에서 새로운 세력들이 성장했다. 잦은 외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무장들이 영웅으로 떠올랐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존재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최영(崔瑩)이었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의 유력자였던 환조[이자춘](桓祖)의 아들로서,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원으로부터 회복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귀순했다. 이후 장군으로서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승승장구하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실력으로 출세한 지방 세력가의 아들로서, 떠오르는 신세력의 대표자였다. 반면 최영은 30년 동안 왜구를 토벌하여 홍산에서 왜구를 대파하는 등 명성이 드높은 백전노장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부친의 유훈을 종신토록 지킬 만큼 청렴 강직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권문세족 출신으로서 구세력의 대표자였다.

 

고려 사회의 내부적 문제를 개혁할 주체로서는 신진사대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은 대체로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인물들로서,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이 많았고, 새로운 사상으로서 원에서 건너온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고려사회를 개혁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나, 우왕 대에 이인임 정권이 북원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는 시련을 겪었다. 이에 신진사대부들 중 급진파는 신흥 무장 세력으로 떠오르던 이성계와 결탁하여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였다. 특히 정도전(鄭道傳)은 이성계의 군영에 직접 찾아가 그를 만났으며, 이성계의 군대가 질서정연함을 보고 자신의 기대를 시로써 표명하기도 하였다.

 

1387년(우왕 13년)에 최영과 이성계는 협력하여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고 최영이 재상인 문하시중, 이성계가 부재상인 수문하시중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국정을 책임져야 할 우왕은 사치에 빠져 있었고, 최영과 이성계 사이에는 향후 정국의 방향을 둘러싼 의견대립이 있었다. 최영은 이인임 정권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처형시켰으나, 이성계는 주모자 이외에는 처형을 피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정도전, 조준(趙浚)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들과 연결된 이성계와는 달리 최영은 신진사대부들의 등용에 부정적이었다. 이는 이인임 정권과 연결되어 있던 사대부들의 처우에 대한 이견을 낳았다. 또한 최영은 정권의 최고책임자였던 이인임에 대해서는 귀양을 보내는 비교적 약한 처벌을 내렸는데, 당시 사람들은 정직한 최영이 사사로운 정을 두었다고 비판하였다.

 

요약하자면 고려는 요동 문제를 놓고 명과 외교적으로 대립하고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전란과 권세가들의 토지겸병으로 인해 피폐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구세력을 대표하는 최영과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의 지지를 받는 이성계는 향후의 국정방향을 놓고 미묘한 의견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1388년(우왕 14년)에 명이 철령위를 설치하고 철령(鐵嶺) 이북의 땅을 자신들의 관할로 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해 왔다. 철령위 설치 소식은 명에 사신으로 가 있던 설장수(偰長壽)를 통해 2월에 고려에 전해졌는데, 명은 이 칙서에서 고압적인 태도로 고려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으며 철령위의 설치를 일방적으로 전달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명에 박의중(朴宜中)을 사신으로 보내어 철령위 설치 중지를 요청하는 한편, 성을 수리하고 장수들을 서북 변경에 파견하는 등 명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또한 우왕과 최영은 몰래 요동정벌을 모의하였다. 3월에 명에서 정식으로 철령위 설치를 통고해 오자, 우왕은 요동을 정벌할 것을 결심하고 전국의 군사를 징집하였으며 자신은 최영과 함께 스스로 서해도로 나가서 요동정벌을 준비하였다. 4월 1일에 우왕은 봉주에 이르러 최영과 이성계에게 요동정벌을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반대하여 요동정벌이 불가한 4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성계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슬러 공격하는 것은 불가하고,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며, 셋째로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이고, 넷째,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 요동을 공격하고자 한다면 추수가 끝난 가을철에 군사를 움직여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이성계의 반대론이 대체로 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왕은 요동정벌을 밀어붙여 12일에는 최영을 전군의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로,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았다. 조민수가 이끄는 좌군에는 서경도원수 심덕부(沈德符), 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王安德), 부원수 이승원, 경상도상원수 박위(朴葳), 전라도부원수 최운해(崔雲海), 계림원수 경의(慶儀), 안동원수 최단, 조전원수 최공철(崔公哲),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조희고(趙希古)·안경(安慶)·왕보 등을, 이성계가 지휘하는 우군에는 안주도도원수 정지(鄭地), 상원수 지용기(池湧奇), 부원수 황보림(皇甫林), 동북면부원수 이빈(李彬), 강원도부원수 구성로(具成老), 조전원수 윤호(尹虎)·배극렴(裵克廉)·박영충(朴永忠)·이화(李和)·이지란(李之蘭)·김상(金賞)·윤사덕(尹師德)·경보(慶補), 팔도도통사조전원수 이원계(李元桂)·이을진(李乙珍)·김천장 등을 소속시켰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좌우군이 총 38,830명, 겸군(傔軍) 11,634명, 말 21,682필이었는데, 대외적으로는 10만 대군이라고 했다.

 

5월 7일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원정군은 압록강 가운데에 있는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탈영병이 속출한데다가 장마로 인해 병장비가 손상되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압록강 물이 불어 건너갈 수 없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장마 등 현실적인 문제로 원정을 지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우왕과 최영은 이를 거부하였다. 고려군은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진 것이다.

 

위화도에 있던 원정군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5월 22일에는 우군도통사 이성계가 휘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향인 동북면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달려와 “공이 떠나면 우리들은 어디로 가란 말인가.”라고 말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설득하여 전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로 건너왔다. 이것이 위화도회군이다. 이성계는 회군하면서 명에 대한 사대와 백성의 안위를 천명하고 무리한 원정을 시도함으로써 상황을 그르친 최영의 처벌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부터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자신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애초부터 무모한 원정에 반대하여 몇 차례나 군대를 철수시켜 줄 것을 우왕에게 요청하였던 바 있었다. 더 이상의 원정이 어려운 상황이 어떻게든 결단을 내리도록 이성계를 몰아가고 있었다. 또한 주위 사람들도 회군을 재촉했으며, 나아가서는 이를 기회로 권력을 장악하자고 권하였다. 실제로 남은(南誾)과 조인옥(趙仁沃) 등은 회군을 건의하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기까지 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성주(成州)에 있던 우왕은 원정군의 회군 소식을 듣고 급히 개경으로 돌아와서 사태에 대처하려 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이성계를 막을 방법이 여의치 않았다. 당시 우왕을 따르는 자가 5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최영이 백관에게 무기를 들고 호위하도록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반면 이성계 측에는 요동 정벌에 참여하지 않았던 동북면의 여진족들까지 참여하여 기세가 더욱 드높았다.

 

6월 1일에 개경에 도착한 원정군은 최영의 군사와 싸워 이를 격파하였다. 이때 최영의 군대는 분전하여 원정군의 선봉을 격파하였으나, 이성계의 본대가 공격해 오자 중과부적으로 무너졌다. 결국 승리한 원정군은 최영을 사로잡아 고봉군으로 귀양 보내고, 이후 처형하였다. 또한 우왕도 폐위하여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 이로써 원정군은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성계는 좌시중, 조민수는 우시중이 되어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회군에 성공한 이후, 회군을 주도한 이성계와 조민수 사이에 다시 분열이 생겨났다. 이성계 일파는 폐위한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辛旽)의 자손으로 간주하고, 그를 대신하여 종실에서 새로운 인물을 찾아서 왕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이때 윤소종, 조인옥 등 일부 신진사대부들 역시 이성계에게 왕씨를 다시 세우도록 할 것을 청하였다.

 

반면 조민수는 이색(李穡)과 의논하여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을 세울 것을 주장하였고, 결국 그의 뜻대로 창왕이 왕위에 올랐다. 즉 조민수, 이색 등의 구세력은 회군 이후에도 최영을 제거한 것을 제외하면 큰 변화를 주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이에 이성계 일파는 전제개혁을 주장하여 개혁에 반대하는 조민수를 유배시켜 경쟁자를 제거했으며, 다시금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여 폐위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즉위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를 통해 이성계와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이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세력이 구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위화도회군의 뒷수습이 끝나게 된다.

 

5. 가입진(1388)

폐가입진이라 함은 가왕(假王)을 몰아내고 진왕(眞王)을 세운다는 말로, 고려 말 이성계(李成桂) 등이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창왕과 그 아버지 우왕(禑王)이 왕족이 아니라는 의심은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恭愍王) 최만생(崔萬生) · 홍륜(洪倫) 등에 의해 시해된 뒤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제기되었다. 이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辛旽)과 그의 비첩(婢妾) 반야(般若)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태후와 시중 경복흥(慶復興) 등은 종친으로써 왕위를 잇게 할 것을 주장했으나, 이인임(李仁任) 등이 이미 대군에 봉해져 있던 우왕의 옹립을 고집해 결국 우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직후에 이성계측의 윤소종(尹紹宗) · 조인옥(趙仁沃) 등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우왕이 폐위되고 강화로 유배되자, 같은 회군공신인 조민수(曺敏修)가 중신 이색(李穡) 및 외척 이림(李琳) 등과 결탁,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옹립함으로써 관철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성계측은 대사헌 조준(趙浚), 간관 이행(李行), 판도판서(版圖判書) 황순상(黃順常),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 등의 전제개혁(田制改革)을 계기로 조민수를 탄핵, 창녕에 유배하고, 이성계가 수문하시중에 올라 실권을 잡으면서 창왕 폐위의 가능성을 고조시켜갔다.

 

이듬해 9월에 마침 명나라에서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들어 우왕 즉위의 부당함을 비난하는 계문(啓文)을 고려에 전해왔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최영(崔瑩)의 족당인 전 대호군 김저(金佇)와 전 부령 정득후(鄭得厚)가 황려(黃驪)에 옮겨져 있던 우왕의 밀지를 받아 이성계를 살해하려던 계획이 누설됨으로써 창왕 폐위의 직접적인 단서가 마련되었다.

 

이때 이성계와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 · 찬성사(贊成事) 지용기(池湧奇) · 정몽주(鄭夢周) · 정당문학(政堂文學) 설장수(律長壽) · 평리(評理) 성석린(成石璘) ·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조준 ·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박위(朴威) · 밀직부사(密直副使) 정도전(鄭道傳) 등 9명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 창왕을 폐위하고, 신종의 7대손인 정창부원군 요(定昌府院君瑤)의 옹립을 결정하였다.

 

이에 창왕은 폐위되어 강화에 유배되고, 공양왕이 즉위하였다. 이어 창왕의 외척인 이림 · 이귀생(李貴生) 부자가 유배되었다. 그리고 다음달에는 우왕과 창왕이 유배지인 강릉과 강화에서 각각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창왕 옹립을 주장했던 이색 · 이종학(李種學) 부자와 이숭인(李崇仁) · 하륜(河崙) · 이분(李芬) · 문달한(文達漢) · 권근(權近) 등이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파직, 유배되었다. 한편 흥국사에 모여 창왕 폐위를 논의했던 이성계 · 심덕부 등 9명은 모두 공신에 책봉되어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이듬해에는 변안열(邊安烈) · 홍영통(洪永通) · 우현보(禹玄寶) · 왕안덕(王安德) · 우인렬(禹仁烈) · 정희계(鄭熙啓) 등을 김저의 옥사에 연루시켜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는 등 반대파 구신들의 숙청에 박차를 가하였다. 결국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은 이성계 일파가 반대파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한 구신들의 반발이 1390년(공양왕 2) 5월에 일어난 윤이(尹彛) · 이초(李初) 옥사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이성계 등의 세력확대가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이어져 우왕 · 창왕의 비왕설(非王說)은 더욱 굳어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서는 우왕 · 창왕을 신우(辛禑) · 신창(辛昌)으로 이름하고, 세가(世家)에서 탈락시켜 열전(列傳)의 반역전(叛逆傳)에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이성계 일파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편, 여말 선초에 생존했던 원천석(元天錫)은 우왕이 공민왕과 신돈의 비첩 반야 사이의 소생이라는 주장을 했으나, 이 역시 뚜렷한 근거가 없어 진위를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6. 전도감설치(1389)

급전도감이라 함은 고려시대 토지분급의 사무를 관장하던 임시관서를 말한다. 문종 때 처음 설치되어 병과(丙科)·권무(權務) 2인을 녹사로 하고, 이속으로는 기사(記事) 4인, 기관(記官) 1인을 두었다. 설치 목적은 각 품계에 따른 관리의 전시과(田柴科) 절급을 위한 것이었으나, 무신란 이후 권신의 발호와 지방세력의 대두로 과전이 붕괴되고, 대토지소유가 진행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그러나 점차 국가에 조세를 바쳐야 할 공전이 사전화되어 가고, 더욱이 몽고의 침입으로 국고가 고갈되어 백관에 지급할 녹봉의 지급마저 불가능하게 되자, 강도시대(江都時代)인 1257년(고종 44) 다시 설치해 관리에게 줄 녹봉을 해결하였다. 즉, 전토를 분급해 녹봉미에 대신하도록 하며, 강화도 내의 전토 가운데 공전에 속한 2천결(結)과 권신 최의(崔竩)에게 속한 3천결을 제외한 나머지를 제왕(諸王), 재상 이하 백관에게 녹과전으로 분급하였다. 그러나 당시 비옥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던 권문세가의 반대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실제로 환도 이후 녹과전은 경기팔현(京畿八縣)으로 충당되었다.

 

이처럼 관할하는 토지의 영역이 기현전(畿縣田)으로 축소되자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의 개혁 때, 경기의 지방행정을 관할하고 있던 개성부에 병합되었다. 그 뒤 1388년(창왕 즉위년) 10월 다시 복구되고, 1390년(공양왕 2)에는 처음으로 각 품의 전적(田籍)을 반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관원(外官員)·향역리(鄕驛吏)·진척(津尺)·원주(院主)의 전수(田數) 및 풍저창(豐儲倉)·광흥창(廣興倉)의 납세의 수를 정할 것을 상계(上啓)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능이 활발하여지기도 전인 1392년 조선 건국의 준비단계로 실시된 관제개혁 때 호조에 병합됨으로써 소멸되었다.

 

7. 전법 공포(1391)

과전법 이라 함은, 조선 초기 양반사회의 경제 기반을 이루고 있던 토지제도를 말한다. 과전법은 좁은 의미로는 문무관료에게 나누어 준 분급수조지를 뜻하나 넓은 의미로는 조선 전기 토지제도의 모든 체제를 내포하고 있다.

 

고려 말 전시과 체제가 무너지고 권문세가들이 겸병(兼倂)·점탈(占奪)·사패(賜牌: 왕으로부터 노비나 토지를 하사받음.) 등으로 농장(農莊)을 확대하였다. 고려 말의 농장은 중세 유럽의 장원(莊園)과 같이 조세 면제의 특권이 공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농장주는 불법으로 불수조(不輸租) 특권을 누리며 농장에 얽매여 있던 전호(佃戶)를 가혹하게 부리는 대신, 그들의 국가에 대한 역역(力役)을 불법으로 면제시켰다. 고려 말의 농장이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리게 되자, 국가 재정은 바닥나고 관료의 녹봉은 제대로 지급되지 못하였다. 농장의 발달에 따른 여러 사회적 모순이 쌓이게 되자, 대토지 겸병과 농장을 소유한 권문세가에 대한 불만과 원성이 높아갔다.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이를 개혁하려 했으나, 권문세족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위화도회군 이래 정치적 기반을 다진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 운동은 권문세가의 대토지 겸병과 농장의 확대에 대한 가난한 신진관료의 불평과 도탄에 빠진 농민의 원성을 대변한 것이었다. 전제개혁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신진관료의 녹봉을 비롯한 국가 재정과 휘하 군병의 군량을 비롯한 군자(軍資)의 확보라는 재정 정책적인 면에 있었다.

 

전제개혁 운동은 조준(趙浚)의 사전개혁(私田改革) 상소에서 시작, 이행(李行)·황순상(黃順常)·조인옥(趙仁沃)·허응(許應) 등의 잇따른 상소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로 1391년(공양왕 3) 5월 과전법이 공포되었다. 과전법에는 토지분급 규정, 조세 규정, 전주(田主), 전객(佃客)에 관한 규정, 토지관리 규정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전개혁의 대상은 주로 권력에 의존한 권문세가의 농장이었다. 사전개혁으로 사전에서의 개별수조권(個別收租權)은 국가에 귀속되었다. 그러므로 사전 가운데 본래의 소유지는 존속되고 수조지(收租地)는 국가에 귀속되어, 탈세지(脫稅地)는 모두 국고수조지(國庫收租地)로 재편성되었다. 그리고 국가 재정의 확보를 위해 공전(公田)을 확대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사전의 분급(分給)은 일정한 제한을 가하였다. 과전법에서 토지 분급은 수조권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사전으로서 관료에게 준 과전(科田)·공신전(功臣田)·외관직전(外官職田), 한량관(閑良官) 등에게 준 군전(軍田), 향(鄕)·진(津)·역(驛)의 이(吏)에게 준 외역전(外役田)과 군장(軍匠)·잡색(雜色)의 위전(位田) 등을 두었다. 그리고 수조권이 공공 기관에 귀속되는 공전으로서 군자시(軍資寺) 소속의 군자전, 왕실 소속의 능침전(陵寢田)·창고전(倉庫田)·궁사전(宮司田), 공공 기관 소속인 사사전(寺社田)·신사전(神祠田) 등을 두었다. 그러나 토지 재분배의 중심이 된 것은 과전이었다. 과전은 문무관료에게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기 위해 시관(時官) 즉 현직자, 산관(散官) 즉 퇴직자 및 대기발령자를 막론하고 18과로 나누어 15∼150결의 전지를 분급하였다.

 

과전은 일대에 한해 분급되었으나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으로 세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전기내(私田畿內)의 원칙에 따라 경기도 내에만 분급되었다. 과전법에서 분급수조지는 전시과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채 존속되었다. 경기도 내에는 과전과 공신전 등의 사전이 분급되었다. 외방에는 지방의 유력자인 한량관 등에게 본전(本田)의 다소에 따라 군전이 5결 혹은 10결로 분급되었다.

 

과전법은 농민도 배려하였다. 즉, 농민은 토지 분급의 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농민의 경작지에 대한 소유권은 토지를 황폐화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보장되었다. 그리고 고려 말 사전의 문란으로 농민 소경전의 소유권마저 침탈되었던 것을 농민의 소경전으로 환원시켰다. 또한, 농민에 대한 배려는 공전·사전을 막론하고 10분의 1조(租)로 한정, 병작반수(並作半收)를 금하였다. 그것은 공전에서 국가에 대한 농민의 조세 부담을 줄이며, 사전에서 전객(佃客)이나 차경자(借耕者)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과전법의 조세 규정에 따르면, 공전·사전을 막론하고 수조권자에게 바치는 조는 매 1결당 10분의 1조인 30두(斗)였다. 그리고 전주(田主)가 국가에 바치는 세는 매 1결당 2두였다. 조의 부과는 경차관(敬差官)이나 사전의 전주가 매년 농사의 작황을 실제로 답사해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이었다. 과전법으로 분급수조지(分給收租地)를 축소하고 국고수조지를 확대했으므로 국가 재정의 기반이 확충되었다. 그리고 토지지배 관계에서 고려 말의 사전에 의한 수조권적(收租權的)인 지배가 배제되고, 소유권 위주의 토지지배 관계로 전환되었다. 그것은 당시에 민전(民田) 자체에서 사유관념이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전으로 신진관료의 경제적 기반이 이룩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배층인 양반관료의 토지 소유도 소수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지양하게 되었다. 또한, 고려 말 사적인 지배 하에 있던 농민이 과전법으로 국가적인 파악 대상이 되었다.

때문에 농민의 소경전(所耕田)은 조세·요역·군역·공부 등의 부과 기준이 되었다. 농민이 그 의무 부담을 지는 대신 농민 소경전의 소유권이 보장된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의 소경전인 민전은 공전의 틀 속에서 안정적인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 초기 농민의 토지소유 규모는 1, 2결 정도로 영세해 자립도가 낮았다. 그러나 과전법 시행 이후 토지소유 농민이 70%에 이르고 있어 그 어느 시기보다도 토지를 균점한 상태였다. 이에 따라 요역(徭役)의 부담은 계전법(計田法)에 따라 종래의 인정(人丁) 기준에서 전지 기준으로 바뀌었다. 과전법 이래 사전에 대한 억압 시책은 지속되었다. 태종과 세종 연간에는 기내(畿內) 사전의 3분의 1을 하삼도(下三道)에 이급했다가 환급하더니, 마침내 1466년(세조 12) 직전법(職田法)으로 개혁되었다.

 

1417년(태종 17) 사전억압 시책으로 사전 3분의 1을 충청·전라·경상의 하삼도에 이급하였다. 그러나 1431년(세종 13) 하삼도에 이급된 사전을 다시 경기도에 환급시키면서 신급전법(新給田法)을 제정하였다. 이 신급전법은 과전 지급에 대한 국왕의 강력한 간섭과 통제를 주요 골자로 한 토지분급 규정이었다. 신급전법 실시 이후 과전의 총결수는 감소되었다.

 

사전의 하삼도 이급과 신급전법은 사전억압 시책의 일환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과전법은 조선건국 후 70여 년이 지난 1466년 직전법으로 바뀌었다. 직전법은 사전억압책으로서 직전이 현직자에게만 분급되었다. 직전법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토지분급 대상에서 체아직과 산직자(散職者)가 제외되고, 관료의 미망인이나 유자녀에게 준 수신전·휼양전의 제도도 없어졌다. 그리고 토지 분급량도 과전법의 최고 150결이 직전법에서는 최고 110결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직전법에서 관료들이 퇴직 후, 사망 후의 생활 보장이 없어지자 직전세를 함부로 거두었다. 국가는 이에 대처해 1470년(성종 1) 직전세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 관수관급제는 국가에서 전주를 대신하여 전객으로부터 직전세를 거두어 전주에게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직전 내의 전주에 의한 지배 관계는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가장 대표적 사전이라 할 직전마저도 공전과 수조 관계가 같게 되었다. 그리고 명종 때에는 직전제마저도 사실상 폐지되었다.

 

이후 과전법 하에 휴한법이 극복되고 연작법이 보급,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어 농촌에 장시가 발생, 발달하였다. 그리고 지주·전호관계도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인식되어 갔다. 농민의 소경전은 민전(民田)이며, 민전은 모든 사회 계층의 민유지였다. 즉, 매매·상속 등의 처분을 할 수 있는 토지로서, 그 속에는 토지 사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전의 경영 형태로는 자영형(自營型)·농장형·병작형 등으로 분류되었다. 자영형은 자영농민의 경영 형태이며, 농장형은 노비와 전호에 의해, 병작형은 전호에 의해 경영, 경작되었다. 과전법 체제는 16세기 직전법의 소멸과 함께 수조권에 입각한 전주·전객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소유권에 입각한 지주전호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8.  몽주 암살(1392)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로 시작하는 단심가(丹心歌)의 저자 정몽주(鄭夢周). 명운이 다해가는 고려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충신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정몽주가 활약하던 시기 고려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직면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해오던 원(元)이 쇠락하고 신흥 왕조 명(明)이 대두함에 따라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고려 내부에서는 국정을 쇄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사회적으로는 개혁정치를 갈망하던 신진세력들이 대거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기득권층과 충돌하였으며, 이들이 근간으로 삼던 성리학(性理學)이 새로운 시대사조로 자리매김한 결과 문화적 차원의 변화 또한 수반되었다. 이처럼 한 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에 선 정몽주는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節義)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안타까운 생애를 마감하였다.

 

충숙왕(忠肅王) 복위 후 6년째가 되던 해인 1337년, 정몽주는 정운관(鄭云瓘)과 영천(永川)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사(高麗史)』에 수록된 정몽주 열전에서는 그의 세계(世系)와 관련하여 고려중기 명신(名臣)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을 기록할 뿐,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와 같은 가까운 선조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전해주지 않는다. 아버지 정운관의 행적이나 관력(官歷) 또한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없다. 이로부터 미루어볼 때 정몽주는 오랜 기간 중앙의 고관(高官)을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초명은 몽란(夢蘭)이었으나 두 차례나 이름을 바꾸어 몽주가 되었다. 그를 낳기 직전 어머니 이씨는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깨뜨리는 꿈을 꾸고 아들의 이름을 ‘꿈속의 난’이라는 뜻의 몽란으로 하였다. 당시 그는 비상한 용모를 갖고 태어나 어깨 위에 북두칠성과 같은 일곱 개의 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9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이씨는 다시 한 차례 신이한 꿈을 꾼다. 검은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를 올라가는 꿈이었는데, 이날 이후 몽란은 몽룡(夢龍)이 되었으며 관례(冠禮)를 마친 뒤에는 몽주로 개명하였다.

 

정몽주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모습을 보였다. 학문적으로 성숙했던 그는 공민왕(恭愍王) 6년인 1357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고, 이로부터 3년 뒤인 1360년(공민왕 9)에는 문과에서 장원급제를 하였다. 당시 과거를 주관한 사람은 김득배(金得培)와 한방신(韓方信)이었으며, 정몽주의 동기 가운데 대표적 인물로는 임박(林樸)·문익점(文益漸)·이존오(李存吾)·곽추(郭樞)가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고려의 국정을 바로잡겠다는 지향 속에 정몽주와 뜻을 함께 하면서 정치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였다. 임박은 고려가 명을 배반하고 원에 귀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쳤고, 이존오는 공민왕의 폐신(嬖臣) 신돈(辛旽)을 비판하다 불우한 삶을 살았다. 곽추는 정몽주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조선왕조에서의 출사(出仕)를 거부한 채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

 

과거를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정몽주는 1362년(공민왕 11)에 예문검열(藝文檢閱)에 임명되었다. 1364년(공민왕 13)에는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함께 화주(和州)에서 여진족 장수 삼선(三善)·삼개(三介)를 격파해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서 부각되었으며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다. 한미한 가문에서 출생한 정몽주는 이와 같이 철저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고려의 핵심인물로 거듭나고 있었다.

 

신진세력 육성을 위해 교육제도를 개편한 공민왕은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을 재건하고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직하게 하였다. 이에 이색은 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들에게 교관(敎官)을 겸직시켰는데,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내던 정몽주 또한 발탁되어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었다. 이로써 정몽주는 고려말 유학계의 핵심인물로 거듭난다. 당시 고려에 전래된 경서(經書)는 『주자집주(朱子集註)』가 유일했기 때문에 중국의 선진학문인 성리학(性理學)을 국내에서 연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많은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의 교설을 강론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내용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능가하는 것이었기에 듣는 사람들로부터 자못 의심을 받았다. 이후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고려에 들어오자 유학자들은 비로소 그의 우수성을 알고 감탄하게 된다. 정몽주가 성리학 기본경전인 사서를 이해하는 수준은 『사서통』과 비교하였을 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유학의 대가라 평가받던 이색마저 그를 ‘동방이학의 조종(祖宗)’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정몽주가 살던 시기 성리학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가치관을 뒤바꾸는 거대담론으로서 새로운 행동양식을 요구하였다. 정몽주는 몸소 성리학적 가치를 실천에 옮겼다. 성리학은 돌아가신 부모에 대한 효(孝) 또한 생전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유교적인 삼년상을 강조하는데, 그는 부모의 상을 당하자 홀로 여막을 짓고 제사를 극진히 모셨다. 불교문화와 토속문화가 강하게 작용하던 고려는 전통적으로 백일 만에 장례를 마치는 문화였다. 부모상을 당한 관료가 관직을 그만두고 삼년상에만 전념해야 하는 중국과 달리 고려는 국가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백일의 휴가를 줬으며, 삼년상 중인 관원을 불러들이기 위한 예식인 기복제(起復制) 또한 변종된 형태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정몽주가 보여준 행동은 실로 이례적인 것이었다. 고려 정부는 그의 효행을 표창하기 위해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주었다.

 

동시에 정몽주는 혼자만의 실천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교화하기 위해 열의를 다하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고려의 상장례(喪葬禮)와 제례는 유독 불교나 토속신앙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는데, 정몽주는 처음으로 지배층과 서민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거해 가묘(家廟)를 세우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나아가 국왕이 불교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 그 파급력을 염려하여 극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는 공양왕(恭讓王)이 옛 제도를 따라 승려 찬영(粲英)을 왕사(王師)로 받아들이려 하자 성석린(成石璘)·윤소종(尹紹宗)과 같은 이성계 세력의 유신(儒臣)들이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정몽주 또한 경연(經筵)을 활용하여 국왕에게 불교가 인륜을 저버리는 그릇된 도(道)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성균박사(成均博士) 김초(金貂)가 불교를 비방하는 글을 올려 엄벌을 받게 되었을 때 여타 유신들을 이끌고 국왕을 저지한 사람 또한 정몽주였다.

 

『고려사』는 “명이 건국되자 정몽주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고려가 가장 먼저 귀부하였다”는 기사를 수록하여 고려와 명의 관계가 시작되는 데에 정몽주의 공이 컸음을 전해주고 있다. 실제로 정몽주는 고려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위해 원과의 관계를 끊고 명과 통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대명외교(對明外交)를 개시하는 단계뿐 아니라 양자의 관계를 지속하는 과정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 사신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정몽주는 명에 들어가 촉(蜀) 지역이 평정된 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374년(공민왕 23)에는 공민왕이 시해당하고 우왕(禑王)이 즉위하였는데, 명의 문책을 두려워한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그 다음해에 명의 사신을 죽이고 원과의 관계를 회복하려하자 임박·박상충·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몽주는 지윤과 이인임에 대한 처벌을 강도 높게 주장하였다.

 

외교문제를 계기로 이인임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을 중앙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원에 보내는 글에 서명하지 않거나 원사(元使) 영접을 반대한 인물들 모두 국문을 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이숭인·김구용·임박·정도전·권근(權近)·이첨(李詹) 등 공민왕대를 거치며 고려 중앙정치 전면에 대두하게 된 신흥유신 세력 대부분이 여기에 연루되었다. 정몽주 또한 언양(彦陽)으로 쫓겨났다가 2년 뒤에야 가까스로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정몽주가 구비하고 있는 외교능력이 워낙 탁월하였기에 이윽고 고려 조정은 그를 필요로 하게 된다. 1377년(우왕 3)에 왜구(倭寇) 문제로 고심하던 우왕은 정몽주를 정치 일선에 복귀시키기로 결심하였다. 이로써 일본에 파견된 정몽주는 고려와 일본의 이해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일본의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왜구 방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었다. 또한 탁월한 문예 감각을 활용하여 일본 승려들을 탄복시켰으며 포로가 된 고려인들 수백 명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정몽주는 일본에 끌려간 고려인들을 환국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1380년대에 들어서며 원의 패색이 짙어지자 고려는 명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에 대한 고려조정의 의존도는 점차 높아진다. 당시 고려는 명과의 잦은 분쟁으로 사이가 틀어져 명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세공(歲貢)을 요구받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몽주가 직접 황제를 대면해 고려의 상황을 명쾌히 설명하니 상당한 양을 감면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고려 말 외교 분야에서 정몽주는 실로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애초 이성계와 정몽주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1364년(공민왕 13)에 정몽주와 함께 삼선(三善)·삼개(三介) 세력을 제압한 이후 이성계는 그를 신임하여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그를 데리고 갔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를 천거하였다. 정몽주 또한 이성계 세력이 갖는 문제의식에 동조하였다. 온갖 폐단의 온상이었던 불교를 비판하거나 명과의 통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윤소종·정도전 등 이성계 세력의 핵심인물들과 뜻을 같이 하였다. 또한 정몽주는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창왕(昌王)에게 이성계에 대한 특혜를 요청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일에도 가담한 행적이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비록 토지제도를 개혁하는 문제에서는 이성계와 이색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모호한 입장을 취하였으나, 분명 공양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과 공조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공양왕의 즉위 이후 이성계와 정몽주는 점차 다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야욕이 국왕을 교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고 그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였다. 우선 이초(彛初)의 옥(獄)을 빌미로 이성계 세력이 정적(政敵) 이색을 맹렬히 공격하자 정몽주는 이색·권근을 사면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죄상이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 다시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다음으로 창왕을 옹립한 죄로 공격받고 있는 이색을 구명하기 위해 공양왕이 조민수(曺敏修)의 협박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동정론을 펴자, 정몽주 또한 그 견해에 동조하였다. 당시 정몽주는 공양왕을 설득하여, 또 다시 이색의 죄를 묻는다면 무고죄로 다스린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1392년(공양왕 4)에 정몽주는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거동이 불편한 상황을 틈타 이성계 세력을 숙청하려 한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김진양(金震陽)·이확(李擴)·이래(李來)·권홍(權弘)·유기(柳沂)를 이용해 조준(趙浚)·정도전·윤소종 등을 탄핵하였다. 이어 이들에 대한 극형을 요구함과 동시에 이성계를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

 

정몽주의 시도는 이성계의 아들 태종[조선](太宗)이 개입함에 따라 실패로 끝났다. 일찍이 이방원은 이색보다도 정몽주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예견하였다. 이에 이성계의 동생 이화(李和) 및 사위 이제(李濟)와 모의하여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정몽주가 이성계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조영규(趙英珪)·고여(高呂) 등을 보내 그를 암살하였다.

 

그의 나이 쉰여섯이 되는 해였다. 일설에는 이방원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이성계가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는 사실에 분개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조선 건국 이후 하륜(河崙)이 정종[조선](定宗)에게 이방원이 없었다면 정몽주의 난을 다스리지 못하였을 것이라 이야기한 사실을 근거로 정몽주 암살의 주모자가 분명 이방원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이로써 고려는 왕조의 마지막 수호자를 잃었다. 정몽주가 죽은 직후 그를 지지하던 인물들은 모두 국문을 당한 뒤 유배되었으며 이미 정계에서 축출된 이색 세력들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탄압이 가해졌다. 이윽고 같은 해 7월, 이성계 세력의 압력을 견딜 수 없게 된 공양왕이 왕위를 내려놓음으로써 고려왕조는 5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장대한 역사를 끝맺게 된다.

 

태종(太宗)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몽주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하였다. 이는 권근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조치였으나, 정몽주 암살의 주범인 이방원이 친히 정몽주를 추증하였다는 것은 분명 현대인의 상식 속에서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사실 정몽주 추증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는 태종 즉위기의 시대적 분위기를 종합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해명할 수 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던 시점에 신흥왕조 조선은 어느 정도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권근과 같이 고려 말에 이성계와 반대 노선을 걸었던 인물들이 조선에 출사하였고 왕실의 정통성 또한 전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제 조선은 개혁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상은 절개를 지키며 체제를 수호하는 인물이었다. 정몽주와 길재(吉再)에 대한 평가는 이때부터 달라졌다. 일찍이 이방원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진정한 절개라고 말하며 길재를 충신으로 평가한 바 있다. 고려의 부활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제 그는 충성의 대상이 고려든 조선이든 절개 그 자체를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이다.

 

정몽주에 대한 현창은 세종대(世宗代)에 들어서면서 본격화되었다. 사실상 태종이 정몽주를 추증하였음에도 조정의 신하들은 공공연하게 정몽주를 거론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1430년(세종 12)에 세종이 정몽주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자 시강원(侍講院) 관원이었던 설순(偰循)은 그가 충신이라는 것은 말은 들었으나 국왕으로부터 명령이 없었기 때문에 감히 언급하지 못하였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세종은 선대에 이미 추증하였으니 마땅히 충신의 반열에 넣어야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길재와 정몽주를 충신도(忠臣圖)에 넣어 신하들을 권면하였다.

 

이후 조선의 지배층에게 정몽주는 길재와 함께 충신의 대명사로 간주되었다. 특히 성종대(成宗代)에는 정몽주·길재의 학통을 계승했다고 자임하는 사림(士林) 세력이 등장하면서 그들의 위상이 더욱 높아진다. 조선후기까지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을 비롯한 13개의 서원에서 정몽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동방이학을 전수하고 동시에 그를 제향하였다. 정몽주의 삶은 그의 죽음 이후 더욱 찬란한 꽃을 피웠던 것이다.

 

9. 왕위 위(1392)

공양왕으로부터 선위 받음. 도평의사사를 거쳐 형식상 합법적 절차로 인준(권지 고려국사 > 국호변경(1393) > 한양천도(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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