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역사서 : 사 동 해 유 제 본 사
사 : 삼국사기 1145 김부식 유교적 합리사관
동 : 동명왕편 1193 이규보 고구려 중심
해 : 해동고승전 1193
유 : 삼국유사 1281 일연 기사본말체
제 : 제왕운기 1287 이승휴
본 : 본조편년강목 민지
사 : 사략 이제현
1. 삼국사기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 23년(1145) 경 김부식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이 만들어진 12세기 전반의 상황은 고려 건국 후 200여 년이 흘렀고 문벌귀족문화가 절정기에 이르렀으며, 유교와 불교가 서로 어우러져 고려 왕조가 안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 역사의 확인 작업으로 전 시대의 역사정리가 필요하였다. 조정에서는 거란을 물리친 후 자신감에 차 있었고 여진의 위협에 대한 강렬한 국가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또 한편 문벌귀족 간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했는데, 분열과 갈등을 국가가 망할 수 있는 원인으로 강조함으로써 현실비판의 뜻과 역사의 교훈을 후세에 알리려 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이 책은 옥산서원 청분각에 보관되어 있는데 전 9 책 50권이며, 종이의 질은 한지이다. 가로 22.4㎝, 세로 31.5㎝ 크기로 장마다 9행 18자로 짜여 있다.
이 책은 자체와 판식이 완연히 다른 3종의 판이 혼합되어 있다. 고려시대부터『삼국유사』와 함께 경주부에 전해오던 것을 조선 태조 3년(1394)에 마멸된 것만을 골라 다시 새겼고, 중종 7년(1512)에 와서는 고판 가운데에서 전혀 볼 수 없는 것만을 보완해서 새겼다.
『삼국사기』는 사료가 가장 미약한 부분인 삼국시대를 다루었으며, 현재까지 남아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이다. 우리나라 기전체의 효시작이다. 또한 후대에 편찬된 역사서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 책은 통일신라시대를 포함한 한국고대사를 연구함에 있어 일연의『삼국유사』와 더불어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2. 동명왕편 1193 이규보 고구려 중심
동명왕편은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 주몽(朱蒙, 재위 서기전 58~19)에 대해 쓴 장편 서사시이다.
「동명왕편」은 이규보가 26세이던 1193년(명종 23) 고구려 시조 주몽에 대해 오언고율(五言古律) 형식으로 쓴 서사시이다. 1400여 자의 시(詩)에 2200여 자의 주석이 달려 있으며, 내용상 서장(序章), 본장(本章), 종장(終章)의 총 3장으로 되어 있다. 서장에서는 동명왕 탄생 이전의 계보를 다루고, 본장에서는 동명왕의 출생에서부터 건국까지, 종장에서는 후계자인 유리왕(瑠璃王, 재위 서기전 19~서기 18)의 사적과 작가의 감상을 적고 있다.
이규보는 서문에서 「동명왕편」을 저술한 이유에 대해, 처음에는 이 설화가 귀신[鬼]과 환상[幻]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오래 음미해 본 결과 환상이 아니고 성(聖)이며, 귀신이 아니라 신(神)이라는 점을 깨닫고, 이것을 시로 써서 우리나라가 원래 성인의 나라였음을 천하에 알리려 한다고 그 의도를 밝혔다.
「동명왕편」은 『구삼국사(舊三國史)』에서 소재를 취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제외된 고구려의 신이한 건국 사적을 서술함으로써, 고려가 성스러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자부심을 전하려는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다.
이규보의 학문관과 역사관, 천하관 등이 잘 드러나 있으며, 민족에 대한 자부심, 외적에 대한 항거 정신이 잘 표현된 무신 집권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3. 해동고승전 1193 각훈
해동고승전은 고려시대 승려 각훈(覺訓, ?~?)이 편찬한 우리나라 고승(高僧)들의 전기를 말한다. 각훈은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기까지 개경의 흥왕사(興王寺)⋅영통사(靈通寺) 등에서 활동한 화엄종 승려이다. 그는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시와 글에 뛰어나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임춘(林椿) 등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들과 친하게 지냈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은 1215년(고종 2년) 무렵 각훈이 왕의 명령을 받아 편찬한 우리나라 옛 승려들의 전기이다. 현재는 「유통편(流通篇)」 1⋅2권만 남아있으며, 전체 권수나 편명 등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전해지는 「유통편」에는 승려 총 35인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데,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수용 과정에서 활약한 승려들의 이야기, 중국이나 인도로 가서 불교 사상을 배우고 불교 경전을 가져 온 승려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해동고승전』은 비록 일부만 전해지기는 하지만 한국 고대 불교사에 대한 귀중한 사실들을 전해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지금은 전혀 남아있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는 여러 역사서와 금석문을 인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어 한국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4. 삼국유사 1281 일연 기사본말체
고려말의 승려 일연(一然)이 1281년(고려 충렬왕 7)에 지은 삼국시대의 역사서이다. 체재는 5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은「왕력(王歷)」, 「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왕력」은 삼국과 가락국·후고구려·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고, 「기이」는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첫머리에 이 편을 설정하게 된 이유를 밝힌 서문이 있다. 또 「흥법」에는 삼국 불교의 수용 과정과 융성에 관한 내용, 「탑상」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하여 신라 고승들의 전기, 「신주」에는 신라 밀교(密敎) 승려들의 신비한 행적, 「감통」에는 불교 신앙의 신비한 감응(感應)에 관한 내용, 「피은」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효선」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불교 설화에 관한 서적이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 등 현재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고, 향가를 비롯한 고대 언어 관련 자료들과 고대 불교미술 관련 내용들이 많이 실려 있으며, 또 화랑도와 관련된 기사들이 풍부하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고대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자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역사서이다.
규장각 소장본 『삼국유사』는 1512년(중종 7) 경주부윤(慶州府尹) 이계복(李繼福)이 중간(重刊)한 목판본으로,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또는 ‘정덕본(正德本)’이라고 부른다. 현전 하는 완질본 중에서는 간행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동일한 완질본이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일본 천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규장각 소장본은 결장(落張)이 없는 유일(唯一)한 책인 동시에 같은 판본 중에서도 인출시기(印出時期)가 가장 빠른 판본으로 평가된다.
5. 제왕운기 1287 이승휴
제왕운기는 1287년(충렬왕 13)에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지은 장편 서사시이다. 5언, 7언 형식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룬 장편 서사시이며, 상⋅하 2권 1 책으로 되어 있다. 상권은 중국 역사를 서(序)에 이어 신화시대부터 원(元)의 등장까지 다루고 있다. 하권은 우리나라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동국군왕개국연대(東國君王開國年代)'와 ‘본조군왕세계연대(本朝君王世系年代)'의 2부로 나누어져 있다. 동국군왕개국연대에는 서(序)에 이어 지리기(地理記),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후조선(後朝鮮), 위만(衛滿), 삼한(三韓), 신라⋅백제⋅고구려의 3국과 후삼국 및 발해(渤海)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까지 다루었고, 본조군왕세계연대에는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세계 설화(世系說話)에서부터 당대인 충렬왕(忠烈王, 재위 1274~1308) 대까지 읊었다.
이승휴는 몽골의 침입과 고려 조정의 강화도 천도, 삼별초의 난 등을 직접 겪었다. 100여 년간 지속되던 무신 정권이 종식되고 원과의 화친이 이루어졌지만, 원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고려 사회 내부에는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그는 당시 사회의 여러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충렬왕의 실정과 권세가들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어 은둔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이 책도 이때 저술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승휴는 이 서사시에서 원의 강대함을 인정하면서도 고려의 독자성과 역사적 유구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리기에서 요동을 중국과 구별되는 별천지라고 서술한 내용이나, 중국의 신화 시대에 비견되는 우리 역사로 단군 조선을 읊은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국가 질서의 회복을 기원하며, 역사적으로는 정치를 잘못한 군주와 신하들을 거론하고 군신이 각각 갖추어야 할 유교적 정치 이념을 제시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리적⋅문화적 차이를 강조하고 단군 조선을 한국사의 기원으로 설정하였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상통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인정하고 고려 태조에게 귀순한 사실 등을 서술하여 발해를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이승휴의 역사 서술은 대몽 항쟁과 원의 정치적 간섭 속에서 고려의 독자성과 유구성을 강조하는 역사의식이 성장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사학사적 측면에서는 우리 역사의 기원을 삼국 시기 이전의 상고사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6. 본조편년강목 민지
본조편년강목이라 함은 고려후기 문신 민지가 1317년(충숙왕 4) 고려왕조에 관하여 저술한 역사서를 말한다. 일명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줄여서 ‘편년강목(編年綱目)’이라고도 한다. 모두 42권으로 구성되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편찬동기는 정가신의 <천추금경록>을 증수하라는 충렬왕의 명으로 <세대편년절요>에 이어 저술된 것으로 보아 『세대편년절요』를 보완하기 위해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내용상 궐루(闕漏)한 점이 많아, 1346년(충목왕 2)에 다시 왕명에 의해 이제현 · 안축 · 이곡 · 안진 · 이인복 등이 증수하였다고 하는데, 역시 현전 하지 않는다.
한편 이전의 많은 사서(史書)가 참고되었을 것이나 확인할 수 없고, 다만 김관의의 <편년통록>과 『벽암록(碧巖錄)』 등의 선록(禪錄)이 참조되었음은 <고려사>를 통해 확인된다. 체재는 서명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편년체(編年體)와 강목체(綱目體)를 결합한 형식으로 여겨진다. 즉 조선조의 <동사회강> · <여사제강> 등과 같이 여러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술하되, 그중 중요한 것과 정통(正統) · 의(義)에 합당하는 것들의 요체를 강(綱)으로 설정하고, 부차적인 내용 또는 구체적인 사실 등을 목(目)으로 설정해 기술했다고 보인다.
내용은 국조인 문덕대왕(文德大王 : 태조 왕건의 증조부로 일반적으로는 元德大王이라고 함.)으로부터 고종 때까지의 사실들을 기록했다고 한다. 『고려사』의 고려세계(高麗世系)에 태조의 선대를 기술한 단편적인 기록이 인용되어 있다.
한편 민지가 설정했던 소목론(昭穆論)은 다른 저작인 『세대편년절요』와 다를 뿐 아니라, 주자(朱子)의 소목론과도 차이를 보여 후대의 유학자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이것으로 볼 때 비록 형식은 주자가 창시한 강목체를 따르고 있었으나 저자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독특하게 서술한 점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책은 현재 문헌기록을 통해 그 실재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서 가운데 최초의 강목체 사서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7. 사략 이제현
이제현의 사략은 1357년 고려에서 시중 이제현이 제15대 숙종 때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를 말한다. 정총(鄭摠)이 쓴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에 “퇴임한 시중(侍中) 이제현(李齊賢)이 『사략(史略)』을 지었으나 숙왕(肅王)에 그쳤다.”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제15대 숙종(肅宗) 때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20년 3 월조에도 “고려의 이제현이 국사(國史)를 편찬하고 『사략(史略)』이라고 이름 붙여,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흥하고 쇠퇴하는 대개(大槪)를 약술했으니, 당시의 귀감을 삼고자 함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한편,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태조(太祖)에서 숙종까지를 다룬 이제현의 논찬(論讚)이 남아 있는데, 그의 『사략(史略)』을 자료로 이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이제현이 국사가 갖추어져 있지 않음을 걱정해 백문보(白文寶) · 이달충(李達衷)과 함께 기년(紀年) · 전(傳) · 지(志)를 지었다. 이제현은 태조에서 숙종까지, 백문보와 이달충은 이후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백문보는 겨우 예종(睿宗) · 인종(仁宗) 두 조(朝)를 초했고, 이달충은 아직 마치지 못했던 것을 남천(南遷 : 홍건적의 침입으로 인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한 일) 때 모두 잃어버렸다. 이로써 다만 이제현의 태조기년(太祖紀年)만 남았다.”
그러나 「익재선생연보(益齋先生年譜)」에 따르면 “지정(至正) 17년(1357)에 이제현이 기년 · 전 · 지를 편찬했으나, 그 뒤 홍건적(紅巾賊)의 난으로 없어지고 다만 태조에서부터 숙종 대까지의 기년만 남았다.”라고 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략(史略)』과 여기 보이는 기년 · 전 · 지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아마 동일한 책을 후대에 다르게 기록한 듯하다.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태조에서 숙종에 이르는 이제현의 논찬을 이용한 것을 보면, 『사략(史略)』에 논찬들이 실렸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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