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문화유산 : 오일(팔에) 난새(영웅)
조조(가) 승훈(이)
해직(에) 동의(하였다)
오 :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일 : 일성록
난 : 난중일기
새 : 새마을운동
조 : 조선왕조실록
조 : 조선왕조의궤
승 : 승정원일기
훈 : 훈민정음
해 : 해인사 대장경판 및 제경판
직 : 직지심체요절
동 : 동의보감
한일조직의 팔광동일 난새유생
한 : 한글(훈민정음)
일 : 승정원일기
조 : 조선왕조실록
직 : 직지심체요절
의 : 조선왕조의궤
팔 : 팔만대장경
광 :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동 : 동의보감
일 : 일성록
난 : 난중일기
새 : 새마을운동
유 : 유교책판
생 : KBS 생방송 이산가족 찾기
1.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네스코는 2011년 5월 영국 맨체스터에서 제10차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등재심사소위원회(RSC/Register Sub-Committee)가 각 국이 신청한 84건을 두 차례에 걸쳐 심의하여 권고한 59건(권고 55건, 예비 권고 4건)의 기록물을 최종 심의하여 등재를 권고했으며, 24일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서명을 거쳐 2011년 5월 25일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최종 발표했다.
5·18민주화운동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의한 국가권력에 저항했던 광주시민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이를 국제사회가 공인한 것이며, 5·18 민주화 운동에서 나타난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민주, 평화의 정신을 지구촌 모든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2. 일성록
조선 영조 36년(1760) 1월부터 융희 4년(1910) 8월에 걸쳐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해 기록한 일기. 임금의 일기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이다. 정조의 세손 시절에 시작되어 즉위 후 규장각 존속 기간에는 각신(閣臣)에게 편찬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 국보이다. 2,329권의 인본(印本).
등재시기는 2011년 5월에 등재되었다.
국왕 개인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정의 공식화된 업무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후대에 와서는 국왕의 생활을 반성한다는 목적보다 국정에의 참고 자료와 역사 기록이다. 신하들도 업무를 처리하는데 이 책을 많이 이용하였으며 실록을 편찬할 때는 사초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내용과 형식의 독창성 진정성 그리고 세계사적 중요성을 세계가 인정하였다. 세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1997년 등재) 승정원일기(2001년 등재)와 함께 동일한 시대에 작성된 연대기가 형식과 내용의 차별성을 인정받아 모드 등재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크다.
3. 난중일기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1592년 1월 1일부터 1598년 11월 17일까지 7년간의 군중 생활을 직접 기록한 친필일기이다. 『난중일기』는 원래 임진일기(1592년), 계사일기(1593년), 갑오일기(1594년), 을미일기(1595년), 병신일기(1596년), 정유일기(1597년), 속정유일기(1597년), 무술일기(1598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1595년의 을미일기를 뺀 총 7 책이 보존되어 전해오고 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1545~1598) 해군사령관이 임진왜란(1592~1598) 기간 중 군중(軍中)에서 직접 쓴 친필 일기이다. 모두 8권의 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발발(1592년 1월) 이후부터 이순신이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직전까지 7년의 기간을 망라하여 기록하고 있다.
난중일기
일기의 역사적 배경이었던 임진왜란은 외형적으로는 조선과 일본 사이에 치러진 전쟁이었지만 일본의 동아시아 세력확보를 위해 일으킨 전쟁이었다는 세계사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특히 일본과 명(중국)은 모두 서양에서 전래된 각종 총포 등의 무기를 대량생산하여 이 전쟁에서 사용하였으며, 조선은 세계최초로 알려진 장갑선을 개발하여 전장에 투입하였다. 또한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와 유럽의 용병이 참전한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난중일기』는 개인의 일기 형식의 기록이지만, 전쟁 기간 중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 직접 매일매일의 전투 상황과 개인적 소회를 현장감 있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나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록물이다. 또한 전투상황에 대한 상세한 기록뿐 아니라 당시의 기후나 지형, 일반 서민들의 삶에 대한 기록도 전하고 있어 과거의 자연지형 및 환경, 서민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유려하며,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국민이 애송하는 시(詩)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문학사적 가치도 매우 높다.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6.18-21, 대한민국 광주)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4. 새마을운동
새마을운동은 1970년부터 시작된 범국민적 지역사회 개발운동으로, 근면·자조·협동을 내세워 주민들을 동원한 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의 성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던 농촌지역 개발정책으로 보는 견해, 도시지역까지 포함하는 사회개발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 총체적인 국가발전을 지향하는 범국민운동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분명한 것은 새마을운동은 몇십 년간 지속되면서 수차례 변화를 겪었기 때문에, 그 실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의 지원 아래 농촌개발사업으로 시작했지만 공장·도시·직장 등 점차 한국사회 전체의 근대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가 80년대 이후 정부 지원이 감소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5.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조의 시조인 태조로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총 1,893권 888 책으로 되어 있는 오래되고 방대한 양의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군사, 제도, 법률, 경제, 산업, 교통, 통신, 사회, 풍속, 미술, 공예,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귀중한 역사 기록물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그 역사기술에 있어 매우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역사기록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초자료 작성에서 실제 편술까지의 편수 간행작업을 직접 하였던 사관은 관직으로서의 독립성과 기술에 대한 비밀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실록의 편찬은 다음 국왕 즉위한 후 실록청을 개설하고 관계관을 배치하여 편찬하였으며 사초는 군주라 해도 함부로 열람할 수 없도록 비밀을 보장함으로써 이 실록의 진실성과 신빙성을 확보하였다. 실록이 완성된 후에는 특별히 설치한 사고(史庫)에 각각 1부씩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고의 실록들이 병화에 소실되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재출간하거나 보수하여 20세기초까지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의 4사고에 각각 1부씩 전하여 내려왔다.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1910년 일제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하였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대로 소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일본으로 반출하여 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재 27책만 남아 있다. 적상산본은 구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198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함께 보관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 및 태백산본을 분리하여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족산본 1,181책, 태백산본 848책, 오대산본 27책, 기타 산엽본 21책을 포함해서 총 2,077책이 일괄적으로 국보 제 15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실록편찬시 이용되는 자료는 정부 기관에서의 보고 문서 등을 정리해 둔 춘추관시정기, 전왕 재위시의 사관들이 작성해 둔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의정부등재, 일성록 등 정부 주요기관의 기록과 개인의 문집 등이었다.
특히 사초는 사관들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 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는 동시에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 그리고 기밀사무 등을 직필(直筆)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법(史法)이 매우 엄하여 사관 이외에는 아무도 볼 수가 없었으며, 기록의 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왕까지도 보지 못하게 하였다.
6. 조선왕조의궤
의궤는 조선왕조에서 유교적 원리에 입각한 국가 의례를 중심으로 국가의 중요 행사를 행사 진행 시점에서 당시 사용된 문서를 정해진 격식에 의해 정리하여 작성한 기록물이다. 같은 유교문화군에 속하는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는 의궤의 체계적인 편찬이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600여 년에 걸쳐 (1392-1910) 왕실의 주요 행사, 즉 결혼식, 장례식, 연회, 사신영접 등뿐 아니라, 건축물·왕릉의 조성과 왕실문화활동 등에 대한 기록이 그림으로 남아져 있어 600여 년의 생활상을 시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희소성을 가지고 있다.
총 3,895 여권의 방대한 분량에 이르는 의궤는 왕실의 주요한 의식이 시기별,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어서, 조선왕조 의식의 변화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역의 문화를 비교연구, 이해하는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반차도, 도설 등 행사모습을 묘사한 시각 콘텐츠는 오늘날의 영상자료처럼 당시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예컨대 정조의 능행도(陵幸圖)는 전 여정을 15.4m에 걸쳐 표현하고 있다. 이런 형태(시각중심 visual-oriented)의 기록유산은 뛰어난 미술장인과 사관의 공동작업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의궤는 장기간에 걸쳐 조선왕조의 주요 의식을 방대한 양의 그림과 글로 체계적으로 담고 있으며 이러한 유형은 동서양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기록유산의 가치(outstanding value of documentary heritage)를 지니고 있다.
세계사 맥락에서 유교의 중요성이 저평가되고 있는 면이 없지 않다. 유교는 세계의 조그만 한쪽 구석에 존재했던 문화가 아니다. 유교가 지배했던 영토는 그 면적으로 볼 때 서유럽보다도 몇 배나 컸으며 인구수에 있어서도 유럽, 서남아시아 및 중동을 초과하는 큰 규모였다. 유교권은 최소 14세기까지 전 세계를 2~3개 권역으로 분할하던 주요 문화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수차례에 걸친 야만족의 침입과 이들에 의한 점령으로 인해 시간이 경과하며 전통 의식은 원형을 점차 잃어갔다. 특히 몽골 침입 기간 동안 유교 의식을 수록한 문헌 상당수가 소멸됐다. 이에 반해 한국은 그러한 침입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전통 유산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며 천 년 동안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고 유교 의식을 봉행하는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의궤는 대부분의 유교사회에서 잊혀진 과거 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기록이다. 또한, 의궤는 조그마한 군주국가의 기록이 아니라, 한때 세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유교 전통의 핵심을 대표하는 기록이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6월 제8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6.13∼15, 남아공 프레토리아)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7.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 최대의 기밀 기록인 동시에 사료적 가치에 있어서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비변사등록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자료이며, 또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할 때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실록보다 오히려 가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음은 물론, 원본 1부밖에 없는 귀중한 자료로 국보 제303호(1999.4.9)로 지정되어 있다. 이는 세계 최대 및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내용을 보면 국정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사실의 기록으로 계품(啓稟), 전지(傳旨), 청패(請牌), 청추(請推), 정사(呈辭), 상소(上疏), 선유(宣諭), 전교(傳敎) 등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의 기재 방식을 보면 한 달을 기준으로 책머리에 월간 경연상황, 내전(內殿)의 동향을 기록하고 다음으로 승정원의 관리 및 당직자의 표시와 출근실태를 표시하고 마지막에 승정원의 업무현황, 왕 및 내전의 문안, 승정원의 인사관계(人事關係) 등의 내용을 실었다.
「승정원일기」는 일기식으로 한 달에 1책씩 작성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후기로 올수록 내용이 많아져 한 달에 2책 이상이 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조선 건국 초부터 정리되었으나 조선전기분(朝鮮前期分)은 임진왜란 등의 병화(兵火)로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재는 3,243책만이 남아 있으며, 국사(國史)연구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문화, 군사 등 모든 학문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이다.
그 사료적 가치는 중국의 「중국 25사」(3,386책, 약 4,000만자) 및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888책, 5,400만자)보다 더 방대한 세계 최대의 연대 기록물(총 3,243책, 글자수 2억4천250만자)이며, 「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 사관들에 의해 편집된 2차 자료라면「승정원 일기」는 당시의 정치·경제·국방·사회·문화등에 대한 생생한 역사를 그대로 기록한 조선시대 1차 사료인 것이다. 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의 일기 내용은 일제에 의한 내정 간섭기 궁중기록이므로 조선왕(황제)의 결제를 요하는 사건과 기타 궁중의 비화를 기록한 것이므로 근대사 연구의 1차 기본 사료가 된다.
또한 17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일기로 300년간의 국문학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국문학적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288년간 매일의 날짜 정보를 기록한 것으로서 특히「조선왕조실록」의 날짜는 60갑자로만 표기되어 있어 오늘날 우리가 쓰는 태양력으로 환산하는 데 많은 혼란을 겪고 있으나 「승정원일기」는 60 갑자와 수시력 역법의 일자를 동시에 표기하고 있어 역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전통적인 유교사회 내부로부터 자생적인 천주교 수용이 민중들 사이에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정치권의 대응 등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8. 훈민정음
조선을 건국한 이후 세종 때에 와서는 국가의 기틀이 확고하게 안정되면서 여러 분야에 걸쳐 우리 것을 존중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기운이 충만하였다. 이러한 기운이 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일 즉,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자기 언어를 표현하기 위한 새 글자를 제정한 일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문자를 만든 창제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있는 경우는 없다. 더구나 새로 만든 문자의 창제 원리와 그 음가와 운용법을 밝히고 그것을 해설한 책을 간행한 일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훈민정음(즉, 한글)은 매우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이다. 바로 이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을 다루고 있는 『훈민정음』(해례본)도 그에 못지않게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저작물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학술사적으로나 문화사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가치와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9. 해인사 대장경판 : 팔만대장경
고려대장경판(팔만대장경)의 제작은 한국이 13세기에 일구어낸 위대한 문화적 업적으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81,258 목판에 새긴 대장경판으로 아시아 전역에서는 유일하게 완벽한 형태로 현존하는 판본자료다.
고려대장경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정확하고 가장 완벽한 불교 대장경판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한역된 불교대장경의 원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대장경판은 인도 및 중앙아시아 언어로 된 경전, 계율, 논서, 교리 및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기록물을 집대성하여 한역한 내용과 더불어 중국어가 원문인 일부 문헌을 선정하여 수록하고 있다. 그 엄청난 규모로 볼 때 이러한 대장경판의 제작은 상당한 국고 및 인력의 투입을 필요로 했을 것으로 보인다.
해인사에 소장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과 제 경판 87,000여 장의 목판은 1098년부터 1958년까지의 오래 시간에 걸쳐 완성된 경판들로써 국가제작판과 사찰제작판으로 나뉜다. 국가제작판은 고려대장경으로 81,258판 5,200여 만자에 달하고, 사찰제작판은 5,987판이다.
고려대장경판은 이미 사라진 초기 목판제작술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한편, 고려시대의 정치, 문화, 사상의 흐름과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역사기록물이기도 하다. 경판 표면에는 옻칠을 하여 글자의 새김이 760년이 지나도록 생생한 상태로 남아 현재까지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이다.
10. 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불조직지심체요절이라 함)은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등의 사전부(史傳部)의 여러 불서(佛書)를 섭렵하고 역대의 여러 불조사(諸佛祖師)의 게(偈), 송(頌), 찬(讚), 가(歌), 명(銘), 서(書), 법어(法語), 문답(問答) 중에서 선(禪)의 요체(要諦)를 깨닫는데 필요한 것만을 초록(抄錄)하여 찬술(撰述)한 것이 그 주된 내용이다.
이 책은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인쇄하였는데, 인쇄술을 보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교정을 쉽게 하여 주었고 이 모든 것은 책의 신속한 생산에 공헌하였다. 또한 활자 인쇄술에 적합한 먹, 즉 기름 먹을 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이 혁신한 실용적인 활판 인쇄술은 동양 인쇄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유럽 등지로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1. 동의보감
『동의보감』은 선조 30년(1597) 임금의 병과 건강을 돌보는 어의 허준(1539∼1615) 선생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 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하여 광해군 2년(1610)에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에 간행한 의학 서적이다. 이는 총 25권 25 책으로 나무활자로 발행하였다.
허준은 선조 7년(1574) 의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내의원의 의관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으며, 그 공을 인정받아 공신으로 추대되었으나 중인신분에 과하다는 여론이 일자 취소되었다.
『동의보감』은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16년간의 연구 끝에 완성한 한의학의 백과사전 격인 책이며, 허준 선생은 이외에도 중국의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데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동의보감』은 모두 23편으로 내과학인 『내경편』, 『외형편』 4편, 유행병· 곽란·부인병·소아병 관계의 『자편』11편, 『탕액편』3편, 『침구편』1편과 이외에 목록 2편으로 되어 있고, 각 병마다 처방을 풀이한 체계가 정연한 서적이다. 우리 실정에 맞는 의서라 하여『동의보감』이라 이름 하였으며, 훈련도감자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은 중국과 일본에도 소개되었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최고의 한방의서로 인정받고 있다. 제9차 유네스코 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2009.7월 / 바베이도스)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09.7.31)
'한국사 두문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 화석(인골) 두문자 암기법 : 승 상 만 두 (0) | 2023.08.08 |
---|---|
구석기 후기 유적지 두문자 : 동 빌 수 만 두 창 (0) | 2023.08.08 |
구석기 중기 유적지 두문자 : 굴 양 승 상 (0) | 2023.08.08 |
구석기 전기 유적지 두문자 : 금 검 연 석 점 (0) | 2023.08.08 |
조선 궁궐 두문자 : 복덕(방에서) 경희(가) 운(다) (0) | 2023.08.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