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부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자화상自畵像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
소년少年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람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少年은 황홀히 눈을 감어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1939)
눈오는 지도地圖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든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꼬 나려 덮여 따라 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사이로 발자국을 찾어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1941)
돌아와 보는 밤
세상으로부터 돌아오듯이
이제 내 좁은 방에 돌아와 불을 끄옵니다.
불을 켜두는 것은 너무나 피로롭은 일이옵니다.
그것은 낮의 연장延長이옵기에 -
이제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어 들여야 할 텐데
밖을 가만히 내다 보아야
방 안과 같이 어두어 꼭 세상 같은데
비를 맞고 오든 길이
그대로 비 속에 젖어 있사옵니다.
하로의 울분을 씻을 바 없어
가만히 눈을 감으면
마음 속으로 흐르는 소리
이제 사상思想이
능금처럼 저절로 익어 가옵니다.
(1941)
병원病院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어,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어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는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試鍊, 이 지나친 피로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回復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었든 자리에 누어본다.
(1940)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문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
간판看板없는 거리
정거장 플랫폼에
나렸을 때 아무도 없어,
다들 손님들뿐,
손님 같은 사람들뿐,
집집마다 간판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빨갛게
파랗게
불붙는 문자도 없이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瓦斯燈
불을 혀놓고,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사람들
다들, 어진 사람들
봄, 여름, 가을, 겨울,
순서로 돌아들고
(1941)
태초太初의 아침
봄날 아침도 아니고
여름,가을,겨울,
그런 날 아침도 아닌 아침에
빨 - 간 꽃이 피어났네,
햇빛이 푸른데,
그 전날 밤에
그 전날 밤에
모든 것이 마련되었네,
사랑은 뱀과 함께
독毒은 어린 꽃과 함께.
또 태초의 아침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罪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
새벽이 올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요.
다들살어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요.
그리고 한 침대에
가즈런히 잠을 재우시요.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요.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무서운 시간時間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잎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
한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화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텐데...
나를 부르지 마오.
십자가十字架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슬픈 족속族屬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또 다른 고향故鄕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었다.
어둔 방은 우주宇宙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서 곱게 풍화작용風化作用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짓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어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어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굳게 닫어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은 더듬어 눈물 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어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은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靑春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겸, 옥 이런 이국異國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 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詩人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버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사람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눈감고 간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었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 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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